담마의 거울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십이연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16. 12:47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십이연기

 

 

 

종범스님의 안심법문(安心法門)

 

모바일로 종범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다. 2009년 이전  법문 수십개가 올려져 있는데 처음부터 듣고 있다. 스님의 법문은 한마디로 들을 만 하다. 부드러운 목소리, 청중을 배려하는 태도 등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한하게 해주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다만, 때로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하는 경우 불편하다. 

 

스님의 법문 중에 경봉스님과 대화한 내용이 있다. 스님이 어렸을 적(법문에서 이렇게 표현함)에 통도사에서 공부하였는데, 어느 날 궁금한 것이 있어서 경봉스님의 처소에 올라갔다고 한다. 스님은 경봉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선요에 안심입명에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안심입명이 무엇입니까? 좀 가르쳐 주세요.’여쭈어 보았단 말에요. 그러나 떡 쳐다 보고 하시는 말씀이 ‘지금 나한테 안심입명이 뭡니까 묻는 그놈, 그놈이 무어냐’ 이렇게 질문을 하세요.

 

(종범스님, 종범스님의 향기있는 법문(2009년 이전), 제29회 본성과 업력, 불교TV 2008-02-18)

 

 

논어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선요에도 안심입명이라는 말이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어 본 것이다. 그랬더니 질문에 대한 답 대신에 “지금 나한테 ‘안심입명이 뭡니까?’ 묻는 그놈, 그놈이 무어냐”라고 되묻더라는 것이다. 마치 동문서답식이다. 이를 두고 전형적인 선문답이라 볼 수 있다.

 

, 그때 어긋나가지고 30년 고생을 했구나

 

이와 같은 동문서답식 노스님의 말을 회상하며 종범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질문을 받았으면 전생에서부터 많이 닦고 선근종자가 아주 깊은 그런 업을 가졌으면 당장 깨닫습니다. 이게 선지식 법문이에요. 당장 깨달아요. 거기서 못깨달으면, 조금 더 전생에 더 닦았으면 여기서 꽉~ 막히는 거에요. 이걸 은산철벽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30년 후에 보니까 ‘아, 그때 어긋나가지고 30년 고생을 했구나’ 그때 탁 걸려 들었으면 일주일이면 해결합니다.

 

(종범스님, 종범스님의 향기있는 법문(2009년 이전), 제29회 본성과 업력, 불교TV 2008-02-18)

 

 

스님은 노스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30년 고생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30년 후에 노스님이 한 말을 이해하여 깨쳤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노스님이 동문서답식 말을 할 때 그 즉시 의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음을 후회 한다. 만일 노스님이 한 말에 걸려서 의문을 품었다면 단 일주일이면 끝났을 문제라 한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이란?

 

안심입명이라 무엇일까?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인터넷불교사전에 “모든 의혹과 번뇌를 떨쳐버려 생사와 이해를 초월하여 모든것을 천명에 맡길수 있는 안정된 마음상태”라고 되어 있다. 네이트 지식에서는 “안심(安心)은 불교용어이고, 입명(立命)은 《맹자(孟子)》의 진심장(盡心章)에서 온 말인데, 후세에 선종에서 이 말을 받아들여 선수행을 통하여 견성의 경지에 다다른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중국문화와 불교사상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안심이다. 이는 달마와 혜가의 안심법문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마음, 불편한 마음을 가져 오라고 하였을 때 아무리 찾아 보아도 가져 올 수 없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내용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안한 마음, 괴로운 마음 등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다. 그런데 경봉스님은 묻는 그놈, 그놈이 무어냐?”라고 하였다여기서 그놈이라는 것은 본래불불성, 참나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선종에서 깨달음이란?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거의 대부분 본래불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본래 부처이었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그리고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 수행이라 한다. 그래서 본래불을 알려면 개념화 하지 말라고 한다. 묻는 그놈이 무엇인가 라고 하였을 때 실제로 묻는 그놈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머리(화두)를 이용하여 개념화를 방지하였을 때 본성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성품을 알게 되었을 때 견성성불이라고 설명한다. 그 본성품에 대하여 무아라 설명하는가 하면, 상락아정이라 한다. 그래서 청정정하고 여여한 불생불멸의 본마음, 한마음, 본체가 분명히 있다고 강조한다. 또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문구를 곁들여 본마음에 대하여 설명한다.

 

선사들이 말하는 법문은 대부분 이와 같은 본마음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본마음, 참나라 한다.

 

소립자 힉스와 반야심경

 

그런데 또 다른 주장을 하는 스님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중도라 한다. 고우스님이다. 고우스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선사로 알려져 있고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있다. 그런데 스님은 과학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현대물리학과 공사상을 대비하여 법문을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 힉스라는 소립자는 그냥 공이 아니고 이 공은 다른 에너지를 만난다든지 하면은 물질화 되는 공이에요. 이런 공은 여태 이야기 안했어요. 불교말고는 안했어요. 그래서 소위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화 될 수 있는 그런 요소가 있는 이것을 우리 불교에서는 자성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하고 거기 언젠가는 발견이 되겠지요.

 

(고우스님, 백년의 가르침 성철스님 백일법문<법사 고우스님>, 제2회 1.불교의 본질-깨달음의 종교2, 불교TV 2013-02-25)

 

 

고우스님은 힉스라는 소립자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입자가속기에서 생성된 힉스가 반야심경에 표현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가르침을 증명해 줄 것이라 한다.

 

성철스님의 중도사상 전도사

 

이와 같이 과학적 성과에 기대를 걸고 있는 고우스님은 불교TV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수 많은 법문이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스님의 법문 중에 최근 중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주로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근거로 한 것이다.

 

고우스님은 성철스님의 중도사상에 대하여 주로 법문한다. 그러다 보니 중도사상 전도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중도사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연기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 당시 부처님은 여기 백일법문에도 나옵니다. 사리불이 연기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보며는 연기에 대하여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인도도 벼, 벼농사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집단을 한 개 세워 놓은면 안서요. 밑에 면적이 적으니까. 툭 넘어져요. 그래서 사리불이 그걸 비교를 한 겁니다.

 

연기설은 혼자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두개 세개가 인연이 되었을 때 존재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짚단을 두 개, 세 개 서로 의지해서 세워 놓으면, 우리도 논에 그렇게 하잖습니까?

 

(고우스님, 백년의 가르침 성철스님 백일법문<법사 고우스님>, 2 1.불교의 본질-깨달음의 종교2, 불교TV 2013-02-25)

 

 

고우스님은 철저하게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근거로 하여 법문하고 있다. 볏단은 두 개 또는 세 개가 의지해 있어여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는 상호의존하는 것이라 한다.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십이연기

 

이 부분에 대하여 백일법문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의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남전대장경과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에 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잇는 것과 같아 하나는 주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객체가 된다는 것보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십이연기의 재해석)

 

 

성철스님은 상호의존적 연기로 보았다. 마치 볏단 두개가 서로 의지해 서 았듯이 상호 의존하여 연기라 본 것이다. 그래서 연기라는 것이 시간적으로 인과적으로 발전 되어 가는 것이 아님을 말하였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십이연기에 대하여 ‘나름대로’ 재해석하였다. 시간적 인과 관계로 보는 전통적인 십이연기 대신 ‘존재의 원리’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 존재의 원리가 바로 ‘상호의존 연기’인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소승의 유부적(有部的)인 생멸(生滅)의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연기, 중도(中道)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백일법문)”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설한 연기를 부정하고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중도연기론이다. 이와 같은 중도연기에 대한 설명이 갈대 묶음, 또는 볏단 묶음이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한 연기의 정형구

 

그렇다면 부처님은 연기에 대하여 어떻게 설하였을까? 빠알리 니까야에서 연기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diagram_paticcasamuppada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연기의 정형구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로 시작 되는 상호의존 연기에 대하여 설하고, 이어서 연기의 순관과 연기의 역관을 반드시 설하였다.

 

그런데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보면 가장 중요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시작되는 연기의 순관과 역관은 떼어 내 버렸다.  오로지 앞 부분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로 시작 되는 상호의존적 연기만 채택하였다.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내용

 

그 결과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의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십이연기의 재해석)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6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백일법문에서 부처님의 연기사상이 난도질당한 느낌이다.

 

성철스님은 일본의 남전대장경경과 한역대장경을 근거로 하여 법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연기에 대해서 인과론이 아닌 존재론적 방식으로 재해석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중도사상을 정립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다 보니 경을 스님의 입맛대로재해석한 것이다. 그 중에 놀라운 것이 무명과 행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고 되어 있어서 이는 조건발생적연기의 전형이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라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매우 놀라운 내용이다. 부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부처님은 역관에서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라고 하였지,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진다는 성철스님식의 놀라운 이야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빠알리 니까야에 언급된 갈대 묶음의 비유

 

그렇다면 고우스님이 언급하고 성철스님이 근거로 삼은 사리뿟따의 갈대묶음에 대한 법문은 어떤 것일까? 빠알리 니까야를 찾아 보았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싸리뿟따]

“벗이여, 그렇다면 비유를 들겠습니다. 아는 자는 비유로 말하는 그 뜻을 이해합니다.

 

벗이여, 예를 들어 두 갈대묶음이 서로 의존하여 서 있는 것처럼 벗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나며, 명색을 의존하여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을 의존하여 접촉이 생겨나며, 접촉을 의존하여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의존하여 갈애가 생겨나며, 갈애를 의존하여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의존하여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의존하여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납니다.

 

벗이여, 만약 그 갈대묶음 가운데 하나를 떼어내면 다른 하나도 쓰러질 것입니다. 또한 다른 하나를 떼어내면 본래의 하나도 쓰러질 것입니다. 벗이여, 이와 같이 명색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며,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며,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며,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며,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합니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합니다.”

 

(날라깔라빠경-Nalakalāpasutta-갈대묶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7(7-7),전재성님역)

 

 

빠알리 니까야에도 갈대묶음을 비유하여 연기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철스님이 말한 것과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무명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식과 명색에 대하여 상호의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과 고우스님의 볏단론이 일치 한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상호의존적 연기에 대하여 무명과 행에도 적용한 것이다. 이는 상호의존적, 존재론적 연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무리수를 둔 것이라 보여진다.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식(名色緣識)

 

경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에 대하여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나며라고 설명하였다. 마치 갈대묶음이 서로 의지히듯이 식과 명색은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식연명색(識緣名色) 또는 명색연식(名色緣識)으로 설명된다. 이와 같은 식과 명색의 관계는 십이연기에서 매우 독특하다. 오로지 식과 명색의 고리에서만 보이는 것이다. 이는 식에 대하여 재생연결식으로 해석해야 설명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의 경전적근거

 

십이연기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면 식은 재생연결식이 된다. 한존재가 임종할 때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마음이 죽음의 마음(사몰심)이다. 이 최후의 마음에서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에 대한 것이다. 이를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라 한다.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마지막 죽음이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이 다음생의 첫 마음이 되기 때문에 이를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재생연결식에 대한 경전적근거가 있을까? 방대한 빠알리 니까야에서 이 재생연결식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찾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ñca bhikkhave, ceteti, yañca pakappeti, yañca anuseti, ārammaameta hoti viññāassa hitiyā. Ārammae sati patiṭṭhā viññāassa hoti. Tasmi patiṭṭhite viññāe virūhe nāmarūpassa avakkanti h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무엇인가에 경향을 갖는다면, 이것이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바탕이 있으므로 의식이 지속되게 된다. 그 의식이 지속되고 성장하면 명색이 전개된다.

 

(두띠야쩨따나경-Dutiya cetanā sutta-의도의 경2, 상윳따니까야 S12:39(4-9),전재성님역)

 

 

식과 명색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식(viññāa)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의도 (cetayati), 도모(pakappeti), 경향 (anuseti)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도모하고, 잠재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적 세계를 통해서 향성, 즉 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업식(業識, kamma viññāa)이라 한다. 이 업식이 바로 재생연결식(結生識, patisandhiviññāa)이다.

 

이 업식은 죽음을 넘어 새로운 존재의 다발(오온)을 통해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따라서 업식이 남아 있는 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윤회라 한다.

 

경에 따르면 의식이 성장하면 “명색이 전개된다(nāmarūpassa avakkanti hoti).” 라고 하였다. 바로 이부분이 식연명색 또는 명색연식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십이연기 고리에서 오로지 이 고리에서만 마치 갈대묶음이 서로 의지 하여 서 있듯이 상호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생의 의식과 현세의 새로운 존재로서의 명색사이에 연결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 대하여 재생연결식과 삼세양중인과의 근거가 되는 경이라 볼 수 있다.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이와 같이 상호의존적 연기는 오로지 식과 명색의 고리에서만 성립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이를 확대 하여 무명과 행에서도 성립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경전에 없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은 것이어서 성철스님의 자의적 경전해석이라 보여진다

 

성철스님에 따르면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라고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성립할 수 있을까? 빠알리 니까야를 통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부처님은 무명을 조건의 행이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그 역도 성립한다니! 성철스님은 왜 그런 말을 하였을까? 아마도 성철스님이 확립한 중도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보여 진다. 하지만 성철스님에 의하여 재해석된 연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부 채용한 것이고, 다르게 해석한 것이고, 왜곡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직도 불교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라 무엇인가?”인가?

 

우리나라는 대승불교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불교의 전통이다. 그러다 보니 선사들의 법문에 항상 본래불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신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본래 부처인 것을 확인해 가는 것이 수행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바로 본래불이라 한다. 이것이 불교라고 한다. 그런 한편 중도가 불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실려 있는 중도사상을 근거로 한 법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기독교에서 목사나 신부들이 기독교란 무엇인가?” 또는 신이라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들이나 학자들은  불교란 무엇인가?” 또는 깨달음이라 무엇인가?”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직도 불교와 깨달음에 대하여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불교란 무엇인가?” 또는 “깨달음이라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나올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명확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불교와 깨달음에 대하여 ‘물음표’를 붙여 가며 나름대로 견해를 이야기 한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불교와 깨달음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루 빨리 선사들이 빠알리 니까야를 접해야 한다. 경전에 근거한 법문을 했을 때 불자들은 햇갈려 하지 않을 것이다.

 

 

 

2013-03-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