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공부가 안 된다면 그곳을 떠나라”홈리스 빅쿠와 템플리스(Templeless) 스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13. 16:50

 

공부가 안 된다면 그곳을 떠나라홈리스 빅쿠와 템플리스(Templeless) 스님

 

 

끼리끼리 모인다

 

우리속담에 끼리끼리 모인다라는 말이 있다. 여럿이 무리를 지어 제각기 따로 모인다는 뜻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끼리 끼리 모여 노는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끼리 끼리 모이는 것에 대하여 한자어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한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귀는 것을 말한다.

 

빠알리 니까야에도 유유상종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히나디무띡까경-Hīnādhimuttikasutta-저열한 경향을 가진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14(2-4), 전재성님역)

 

 

뭇삶들, 즉 중생들은 자신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세상과 관계를 맺는 다고 하였다. 그래서 잘난 자들은 잘난 자들과 어울리고, 못난 자들은 못난 자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끼리 끼리 모이는 유유상종을 말한다. 이런 경향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 한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도 마찬가지이다.

 

어리석은 자와 길을 가느니

 

빠일리 니까야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이다. 그래서 맛지마 니까야에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 sutta)이 있는데, 이는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이라는 뜻이다. 한역으로 우현경(愚賢經)’이라 한다.

 

어리석은 자를 뜻하는 발라(bāla)와 현명한 자를 뜻하는 빤디따(paṇḍita)로 표현되는 발라빤디따에 대한 이야기는 빠알리니까야 도처에 등장한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를 대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숫따니빠따 망갈라경(행복경, Sn2.4)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에 가까이 지내고(Asevanā ca bālāna paṇḍitānañca sevanā)라 하였다. 어리석은 자를 멀리 하고 현명한 자를 사귀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품(Bālavagga)이 별도로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열여섯 가지의 게송으로 표현 하였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Carañ-ce nādhigaccheyya        짜란쩨 나디갓체이야

seyya sadisam-attano,         세이양 사디사맛따노
Ekacariya
daha kayirā,      에까짜리양 달항 까이라

natthi bāle sahāyatā           낫티 발레 사하야타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 61,전재성님역)

 

 

게송에서는 자신 보다 더 나은 자와 함께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자신보다 못한 자를 만나면 단호하게 홀로 가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란 계행-삼매-지혜의 세 가지 배움에서 자신 보다 낫거나 같은 자를 말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 홀로 가라고 하였다. 자신 보다 못한 자와 함께 가면 계행-삼매-지혜가 퇴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은 단지 연민과 애민의 대상으로 삼을 지언정, 사귀지 말고, 가까이 하지 말고 섬기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단호히 홀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와 함께 길을 가지 말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자와 길을 함께 가다 보면 어리석은 자와 같은 급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와 길을 함께 가다 보면, 어리석은 자에 의해서 집에 침입하여 도둑질 하자는 등의 강요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와 함께 걷는 자는 오랜 세월 비탄에 젖는다.(Dhp 207)”라고 하였다. 이는 수행처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수행하기 좋은 곳

 

맛지마니까야에 수행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머물기 좋은 수행처의 조건에 대한 것이다. 가장 좋은 수행처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한 수행승이 어떤 숲속에 의지해서 지낸다. 그 숲속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그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고, 아직 도달하치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했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쉬웠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이 숲속에 의지해서 지낸다. 이 숲속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했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숲속에서 머무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와나빳타경-Vanapatthasutta-우거진 숲속의 경, 맛지마니까야 M17,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수행하기 좋은 환경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요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수행에 대한 향상이고, 또 하나는 필수품 확보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충족 되었을 때 머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것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한다.

 

떠나야 할 수행처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이 만족 되지 않은 수행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숲속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지 못하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하지 못하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밤이건 낮이건 그 숲속에서 떠나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와나빳타경-Vanapatthasutta-우거진 숲속의 경, 맛지마니까야 M17,  전재성님역)

 

 

수행에 대한 향상이 없는 수행처는 떠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또 동네 인심이 사나워 탁발하기도 좋지 않은 경우 떠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어떻게 떠나야 할까

 

어떻게 떠나야 할까. 그곳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rattibhāga vā divasa bhāga vā: Pps.II. 72에 따르면, 그가 이 모든 것을 밤에 숙고하여 안다면, 바로 그날 밤에 떠나야 한다. 밤에 사나운 짐승등의 위험이 있으면 일출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숙고하여 안다면, 바로 그 날 밤에 떠나야 한다. 밤에 사나운 짐승 등의 위험이 있으면 일출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가 이 모든 것을 낮에 숙고하여 안다면, 바로 그 날 낮에 떠나야 한다. 낮에 위험이 있으면 일몰까지 기다려야 한다.

 

(각주, 전재성박사)

 

 

떠나려면 즉각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안되는 것을 밤중에 알았을지라도 그 다음 날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즉시 떠나야 된다는 것이다.

 

즉각 떠 날 수 있는 것은 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탁발에 의지하는 수행자가 가사와 바루만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곳은 비단 숲속의 거처 뿐만 어니라 제법 큰 마을, 부락, 도시, 지방도 해당된다. 심지어 한 나라도 해당 될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조건이 맞지 않은 거처와 지역에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쫓겨날지라도

 

이는 반드시 거처에 해당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경우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떠나서는 안될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한 수행승이 어떤 사람에 의지해서 지낸다. 그 사람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그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했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쉬웠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이 사람에 의지해서 지낸다. 이 사람에 의치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했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좋으며, 쫓겨날지라도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 된다.

 

(와나빳타경-Vanapatthasutta-우거진 숲속의 경, 맛지마니까야 M17,  전재성님역)

 

 

이번의 경우 사람에 대한 것이다. 현명한 자 또는 훌륭한 스승에 의지하여 살 경우 탁발에 따른 필수품 조달도 쉬울 경우 최상의 수행조건이라 볼 수 있다. 이럴경우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더구나 쫒겨 날지라도 그곳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한다.

 

여기는 우리집인데..”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스님이 중국에 여행을 갔었는데, 유명한 전통사찰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전통사찰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이를 본 스님은 여기는 우리집인데..”라며 농담삼아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출가수행자들은 부처님이 모셔진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 어느 절이건 간에 모두 머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템플리스(Templeless) 스님이야기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 같지 않다.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총무원이 직영하는 도심 사찰의 소임을 맡았던 명법 스님은, 소임을 그만두는 날 당장 짐을 옮기라는 재촉을 듣고 갈 곳이 없어 망연자실하다가 가까스로 아는 비구니 스님이 쓰던 종로의 한 작은 방에서 추운 겨울을 났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출가 후 미국 유학시절 잠시 기숙사 생활을 한 것 외에는 절을 떠나 살아보지 않았던 스님에게 생활의 곤궁보다도 절 밖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낯설고 이상한,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명법 스님은 현재, 스님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몇몇 교수님들의 소개로 만해마을에 안착해 있다. 스님이 기고 말미에 적은 독백 같은 술회가 오래 동안 독자의 눈길을 붙잡는다.

 

“이제야 세상 물정을 알게 된 나도 어쩌면 제 토굴을 만들겠다고 주접을 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뿐만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홈리스가 되기를 선택했던(출가를 비유한 표현)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 비구니 스님들이 템플리스(거처할 절이 없는 경우를 비유한 표현)가 되기를 강요받고 있다. 하긴 원효 스님도 템플리스였다. 진정 법으로 법을 구하는 자라면 차라리 천가(千家)에 밥을 빌어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 자발적인 템플리스의 길을 갈 것을! 세상 어딘들 절 아닌 곳 없으므로.

(재가에 승가복지 기금 내라? 스님이 스님 돌보는 모습부터”, 미디어붓다 2013-03-11)

 

 

불교평론 복간호에 실린 글이라 한다. 도심사찰에서 소임을 맡고 있던 스님이 하루아침에 템플리스(Templeless)가 된 사연이다. 그래서 절이 아닌 도심의 작은 방에서 겨울 한철을 나게 되었다고 한다. 오갈데가 없어서 임시 거처에서 생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사실을 두고 홈리스와 템플리스를 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같은 홈리스라도 테라와다불교국가의 빅쿠들과 비교된다.

 

홈리스(Homeless) 빅쿠이야기

 

불교평론에 실린 조준호 교수의 글 미얀마의 탁발(托鉢) 문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빠옥 선원에서만 7년 이상 수행하고 있는 한국 스님은 “어린이들의 고사리 손으로부터 보시를 받게 될 때마다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져요. 허튼 생각을 일으킬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또한 어느 스님은 미얀마 선원에 오랫동안 머물지만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300~400명, 많게는 700~800명 이상의 대중이 모여 수행하는데도 어디에서도 큰 소리가 나오지 않고 언제나 온화한 분위기가 유지된다 한다. 그야말로 화합중(和合衆)이란다. 그러한 이유로는 탁발문화로 인해 스님들이 ‘얻어먹으며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 저절로 겸허한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 한다.

 

(조준호 교수, 미얀마의 탁발(托鉢) 문화, 불교평론 2012-09-01)

 

 

 

 

Pa Auk Sayadaw at Tusita

 

 

 

테라와다 불교국가의 탁발문화의 장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재가자에게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 가는 빅쿠들에게 공부가 더 잘 되는 요인이 바로 탁발에 있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오로지 탁발에 의해서만 살아 가기 때문에 탐욕에서 벗어 날 수 있고, 그날 그날 탁발함에 따라 보시의 고마움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홈리스 빅쿠가 템플리스 스님보다 더 행복하게 보인다.

 

왜 미얀마인가?

 

우리나라에서 한해 약 이천명의 사람들이 미얀마로 수행하러 떠난다고 한다. 그 중에는 출가자도 있고 재가자도 있다. 이렇게 미얀마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보다 수행하기 위한 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 부처님의 제자들에게는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더욱더 중요한 사실은 스승이 있다는 사실이다. 가능한 부처님 방식대로 살아 갈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성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수행자들이 몰려 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미얀마의 수행환경은 맛지마니까야 와나빳타경(M17)에 표현된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마을 가까이 수행처가 있어서 탁발하기 좋고, 좋은 스승이 있어서 의지 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그런 수행처라면 경에 표현 된 것과 같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곳에 머무는 것이 좋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쫓겨날지라도 그 스승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일어 날 것이다. 이 모두가 탁발문화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홈리스와 템플리스가 되는 경우

 

우리나라에 탁발문화는 없다. 그나마 있었던 탁발전통도 승가의 위의를 손상시킨다고 하여 조계종에서는 지난 60년대에 금지 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출가자들은 재가자에 음식 등 필수품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사유재산을 축적하게 되고 스스로 노후대책을 마련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토굴이나 사설사암이 크게 늘어 나게 되었다.

 

사설사암의 증가로 인하여 출가자라고 하여 모두 받아 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산중에 있는 스님이 도시의 사설사암에 머물지 못하고 여관에 머무는 현상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도시에 있는 사찰이 모두 출가자의 집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한국의 출가자는 홈리스인 동시에 템플리스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탁발문화를

 

이 모두가 탁발정신이 실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조준호 교수는 한국적 상황에 맞는 탁발문화를 제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후 내내 생각해 본다. 이제 우리나라도 금지했던 탁발 행사를 복원하거나 부활해 보는 방안을 말이다. 매일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달에 초하루나 보름 또는 육재일에 집단적으로 하되, 큰 절은 사하촌 가게들을 시작으로 점차 주변 마을별로 확대해 나가는 방법을, 그리고 도회지에서는 지역 사암연합회에서 아파트 단지별로 또는 동()이나 구()별로 시행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때 사적인 개인 탁발은 기존처럼 엄격하게 금지하고 집단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인 탁발 방식이면 괜찮을 것 같다. 축적 가능한 물건이나 현금은 받지 않고 그날그날 소비할 수 있는 생필품과 조리된 음식만을 받는 율 조항 정신을 이행한다면……. 이를 통해 일반사회와 불교의 유기적인 관계를 좀 더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출가를 경험하게 하고 나아가 사부대중이 모두 신앙공동체 또는 수행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장이 될 것이다!

 

서울의 경우 한 달에 몇 번이라도 그날 모인 음식물(, , , 과자, 사탕 등)을 서울역 광장이나 시청 앞 등의 광장에서 장엄한 대중공양의 장을 연다면 어떨까. 한쪽에서는 스님들이 줄 맞추어 발우공양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루 한 끼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노숙자나 거지 등 누구라도 함께 밥을 나눌 수 있다면! 이렇게 대중공양의 밥회(?)가 법회로 나아가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조준호 교수, 미얀마의 탁발(托鉢) 문화, 불교평론 2012-09-01)

 

 

지난 겨울 미얀마에서 약 82일간 머물다 왔다는 조준호 교수는 한국의 실정에 맞는 탁발문화을 제시하고 있다. 적어도 한달에 한번 만이라도 탁발행사를 가져 보자는 것이다. 산에 있는 큰절의 경우 사하촌을 돌고, 도시에 있는 절의 경우 아파트 촌을 돌자는 것이다. 단 사적이고 개인적인 탁발은 금지하자고 한다. 요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나홀로 탁발 같은 것이다. 그대신 집단으로 탁발하여 재가불자와 신앙공동체임을 확인 하는 장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청광장 등에서 대규모 탁발행사를 함으로 인하여 걸인, 노숙인들을 포함하여 대중공양의 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한다.

 

공부가 안 된다면 그곳을 떠나라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와나빳타경(M17)에서 자신의 공부에 향상이 없고 탁발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면 밤이건 낮이건 그곳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 미련없이 떠나라고 하였다.

 

또 사람에 의지해서 지낼 때 공부의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역시 밤이건 낮이건 물어 보고 떠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때 물어 본다는 의미는 아무 말 없이 슬며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호의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떠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의지할 만한 스승이 있고 탁발하기 좋은 곳에 가급적 오래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스승이 있는 곳,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가진 사원에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더 발전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부가 안된다면 그곳을 떠나라고 하였다.

 

 

 

2013-03-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