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궁극의 경지를 맛 본 수다원이 되면, 라따나경(보배경)7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12. 15:31

 

 

궁극의 경지를 맛 본 수다원이 되면,  라따나경(보배경)7

 

 

 

 

라따나경에서 열 번째 게송은 수다원에 대한 것이다. 수다원이 되기 위한 조건이 열거 되어 있고, 그에 따른 이득이 또한 설명 되어 있다. 수다원이 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라따나경 게송10

빠알리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Tayassu dhammā jahitā bhavanti,
Sakkāyadi
ṭṭhi vicikicchitañca
Sīlabbata
vāpi yadatthi kiñci,
Catūhapāyehi ca vippamutto
Cha cābhi
hānāni abhabbo kātu
Idampi sa
g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짜뚜-하빠-예히 짜 윕빠뭇또

차 짜-비타--니 아밥보 까-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법정스님역

자신을 실재(實在)라고 보는 견해와 의혹, 표면적인 계율, 맹세, 이 세가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지견(知見)을 성취하는 동시에 그것들은 버려진다. 그는 네 가지 악한 곳을 떠나, 다시 여섯가지 큰 죄를 범하지는 않는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中村元

自身とみなす見解と〔iiいと〔iii外面的戒律いというつのことがらがしでも存在するならば、かれが知見成就するとともに、それらはてられてしまう。かれはつの場所かられ、またつの重罪をつくるものとはなりない。このすぐれたが〈つどい〉のうちにある。このによってせであれ。

영역

Together with his coming to right view, instantly three things are dispelled

The view about a self, doubts and the fact that there is nothing to cling as virtues,

Released from falling to any of the four losses, it is not possible that he would do six things

This is precious in the jewel of the Community,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Saha: prep. 함께, 수반된, 즉시의 Sahavasā: ~함께 사는, 결합한

dassana: [nt.] sight; intuition; insight. :n. [Sk. darśana] , るこ

sampadāna: 성취, 달성

Tayo: 3, 세 가지

assu: [nt.] tears. (ind.), a particle used in emphatic sense. (3rd. plu. Potential:) may be.

jahita : [pp. of jahati] left; abandoned.

jahati : [hā + a; hā is duplicated and the first hā is changed to ja] leaves; abandons; gives up; forsakes.

bhavanta : [pr.p. of bhavati] becoming; existing. (adj.), prosperous; a polite word often used in the place of "you".

Sakkāyadiṭṭhi: 유신견

vicikicchita: [pp. of vikicchati] doubted; hesitated.

Sīlabbata; 의례와 의식

vapi : [aor. of vapati] sowed; shaved.

yadā : [adv.] whenever; when.

kiñci : [ind.] something. :pron. [kin-cid] ものか, でも [その ki] . kiñcāpi hi…pana たとい…であっても しかも.

Catū; 사방의

hāpana: [nt.] lessening; reduction.

vippamutta :a. [vi-pamutta] せる, 自由となれる.

Cha:6, 여섯

abhabba : [adj.] unable; not proficient. :a. [a-bhabba] 不可能なる, 不能.

kātu : [inf. of karoti] to do.

 

 

 

 

 

 

 

게송에서 수다원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유신견과 법에 대한 의심과 계금취라는 세 가지 장애가 소멸 되었을 때 흐름에 든 자, 수다원이 되는 것이라 한다. 이 세가지 장애가 소멸된 상태를 닷사나삼빠다야 (dassanasampadāya)’ 라 하였다. ‘통찰을 성취함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닷사나(dassana)가 통찰(insight)로 번역 되었는데, 이는 위빠사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Prj.I.188에 따르면, 첫 세가지의 장애, 즉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이 소멸 되었을 때 흐름에 든 경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장애. 또는 족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유신견(有身見), 사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

 

첫째, 유신견(有身見)으로 번역되는 사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의 경우 존재의 다발에 실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몸,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변치 않는 자아 또는 영혼이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아뜨만(atman)이 대표적이다.

 

아뜨만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 즉 범아일여(梵我一如)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불변하는 아뜨만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서 윤회의 주체이다. 그래서 윤회의 과정에서 매생에 대하여 몸만 바꾸는 것으로서 재육화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를 부정하였다. 부처님이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뜨만의 윤회에 대하여 몸에서 몸을 바꾸는 전변으로 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 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재생, rebirth)을 말하기 때문이다.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

 

윤회를 빠알리어로 삼사라(sasāra)라 한다. 이 말 뜻은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round of rebirth라고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따르면 윤회는 주석서에 따르면 5(五蘊), 12(十二處), 18(十八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이 윤회라고 정의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윤회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지금 여기에서 매 번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를 윤회로 보는 생멸윤회가 있다. 둘째, 생사의 입장에서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沒心, 사몰심)이 생겨났다가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윤회, ‘생사윤회가 있다.

 

생사윤회와 관련 된 두 가지

 

이와 같은 생멸윤회와 생사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빠알리 니까야에 수 없이 등장한다. 생사윤회와 관련 된 내용을 두 가지 든 다면 다음과 같다.

 

 

Anamataggoya bhikkhave, sasāro.     아나마딱가용 빅카웨 삼사로

Pubbā koi na paññāyati                 뿝바 꼬띠 나 빤냐야띠

avijjānīvaraāna                      아윗자니와라나낭

sattāna tahāsayojanāna           삿따낭 딴하삼요자나낭

sandhāvata sasarata.               산다와땅 삼사라땅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둑가따경-Duggatasutta-불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1(2-1),전재성님역)

 

 

 

Anekajātisasāra               아네까자띠삼사랑

sandhāvissa anibbisa          산다윗상 아닙비상
Gahak
āraka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         둑카 자띠 뿌납뿌낭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법구경, Dhp 153, 전재성님역)

 

 

Gahakāraka diṭṭhosi!              가하까라까 딧토시

Puna geha na kāhasi:           뿌나 게항 나 까하시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삽바 떼 빠수까 박가

gahakūa visakhita,          가하꾸땅 위상키땅
Visa
khāragata citta,         위산카라가땅 찟땅

tahāna khayam-ajjhagā.        딴하낭 카야맛자가.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법구경, Dhp 15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윤회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무명과 갈애에 따라 유전하고 윤회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 윤회는 갈애가 주요한 원인이기 때문에 법구경에서 집짓는 자로 보았다. 그래서 갈애를 소멸하였을 때 다시 태어남은 없기 때문에 윤회가 종식된 소감을 게송으로 밝히고 있다.

 

매사에 의심하는 것, 위찌끽치딴짜(vicikicchitañca)

 

수다원이 되는 두 번째의 조건은 의심의 소멸이다. 매사에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위찌끽찌딴짜(vicikicchitañca)’로 표현되었다. 이 때의 의심은 일반적으로 법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회의적 의심이라 한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

 

재가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을 불자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불자란 무엇일까. 불자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마하나마]

세존이시여, 재가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존]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됩니다.”

 

(Mahanamasutta-마하나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55;37(4-7),전재성님역)

 

 

재가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부처님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를 믿으면 된다고 한다. 불법승 삼보를 믿으면 재가신자가 되는 것이다. 이어서 마하나마가 재가신자가 계행을 갖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 본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살아 있는 것을 해치지 말고로 시작되는 오계에 대하여 설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불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먼저 삼보를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 됨을 알 수 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을 때 재가신자, 불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믿는 자들

 

그런데 불자가 삼보에 대하여 믿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믿되 가르침은 부분적으로 믿는다면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실제로 일부스님들이나 불자들은 가르침에 대하여 선택해서 믿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감각적 인지능력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윤회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를 기준으로 이전이면 전생이고, 이후가 되면 내생으로 받아 들인다. 그러다 보니 수다원이 되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라고 되어 있는 경전상의 가르침에 대하여 결정론으로 보거나 힌두교라고 주장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옥이나 천상, 하늘사람, 신통 같은 내용이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 되어 있지만 누구도 본 사람이 없기에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방대한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 되어 있는 내용이 부처님의 진실한 원음이 아니라 후대에 삽입되거나 편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설령 지옥,윤회, 천신,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재가신자,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바탕을 둔다고 하였다. 그런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일까? 빠알리 니까야에 써 있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일까?

 

불자들의 믿음은 맹목적이라기 보다 합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삿다(saddha)라 한다. 사성제의 고성제를 보면 괴로움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여 이해하면 확고한 믿음이 된다. 이런 믿음의 바탕이 있다면 설령 지옥, 천상, 윤회, 천신,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빠알리 니까야에 대한 믿음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초월적인 표현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게송에 따르면 가르침에 대한 믿음에 확신이 없는 자들은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다고 하였다.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 실라바땅(Sīlabbataṃ)

 

수다원이 되는 세 번째 조건은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Sīlabbataṃ)’이다. 이를 계율과 금계에 대한 집착이라고도 하는데,  줄여서 계금취견이라 한다. 이는 한마디로 잘못된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다.

 

Prj.I.189에 따르면, ‘규범에 의해서 청정해지거나 맹세에 의해서 청정해진다.’는 것은 미신과 관계된 것으로, 소의 행위나 개의 행위 등에 의한 규범과 소의 관행이나 개의 관행 등을 실천 하는 맹세를 말한다. 이 것은 인도의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 잘못 수행되고 있는 고행을 비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수행방법으로는 결코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에 올라 갈 수 없음을 말한다.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목적지 결코 도달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길을 잃고 헤메이기 쉽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까. 이는 팔정도에서 정견(正見)으로 설명된다. 이때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바른 견해를 가져야 길을 잃고 헤메이지 않고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경부고속도로에서 부산을 목표로 출발하였을 때 단지 핸들만 잡고 있으면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잃어 버린 아름다운 고대도시

 

이때 경부고속도로와 같이 잘 닦여 있고 너른 길이고 목적지까지 최단거리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나가라경(도시의 경(S12:65)’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다면, 그때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왕이나 왕의 대신들에게 왕이시여,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저는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도시를 다시 세우십시오.’라고 권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들이 그 도시를 다시 세웠다면, 그 도시가 나중에 번영하고 부유해지고 사람들이 몰리고 인구가 많아져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옛 성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승들이여, 전생에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이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7-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법에 대하여 고대 잃어 버린 도시로 비유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고대도시는 마가다의 수도인 라자가하 근처에 있는 날란다(Nalanda)’를 묘사한 것이라 한다.

 

 

 

 

 

Nalanda

 

 

과거불이 발견하였던 것

 

잃어 버린 고대 도시는 각주에 따르면 연기법의 객관성을 증명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따마 붓다를 비롯한 과거의 부처님들이 모두 연기법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과거칠불이라 불리우는 위빠시붓다, 시키붓다, 웻사부붓다, 까꾸산다붓다, 꼬나가마나붓다, 깟사빠붓다, 고따마붓다 모두가 발견한 고대도시는 연기법이다. 그런 연기법은 부처님이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하고 안정적이고 불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한다.(S12:20)  

 

과거불이 발견하였던 아름다운 고대도시를 고따마부처님이 또 발견하였다. 이를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길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옛 사람들이 살았던 정원과 원림, 연못 등이 아름다운 잃어 버린 고대도시이다.

 

이렇게 길을 부처님은 고대도시로 들어 가는 길을 발견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른 길로 갈 필요 없이 부처님이 발견한 길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길은 다름 아닌 팔정도라 한다. 마치 서울에서 부산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갈 때 핸들만 잡으면 되듯이, 팔정도를 닦으면 옛 사람들이 살았던 아름다운 고대도시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게송에서 성자의 흐름에 든 자, 즉 수다원이 되는 조건으로서 유신견, 의심, 계금취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랬을 경우 네 가지 악한 운명을 벗어 날 수 있다고 하였다.

 

네 악한 운명이란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지옥, 축생, 아귀계, 아수라계 이렇게 사악도를 말한다. 세 가지 장애가 소멸된 수다원에게 있어서 악처에 떨어질 일이 없고 그대신 인간 또는 천상에 태어나게 됨을 말한다. 수다원이 되면 선처에 태어나는 것이 보장 되는 것이다. 이는 수다원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번뇌가 소멸되고 남아 있는 번뇌는 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악처에 떨어질 짓을 결코 하지 않는 것이다.

 

게송에서는 이를 여섯 가지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섯 가지 큰 죄악이란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어머니를 살해는 것(1), 아버지를 살해 하는 것(2), 아라한을 살해 하는 것(3),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4),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5), 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6) 이렇게 여섯 가지이다. 이 중 1번부터 5번 까지 죄악을 저지르면 무간지옥에 태어나는 업보를 받을 것이라 한다. 부처님을 살해 하려 하고 교단을 분열시키려 하였던 데와닷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여섯 번째 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이 있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궁극의 경지를 맛 본 수다원에게

 

라따나경 게송 9에 따르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자는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죽어 다음 생에 태어 났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는 국토에 태어났을 경우 어떻게 될까.

 

다음 생에 이교의 가르침만 있을 때 이교를 믿을 수 있다. 그 경우 무간지옥에 떨어질 조건은 아니다. 이교도의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악처에 떨어지게 하는 가르침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궁극의 경지를 맛 본 수다원에게 있어서 비록 이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으로 들 것이라 한다.

 

 

 

2013-03-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