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초전법륜경과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9. 15:41

 

초전법륜경과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반야심경 대신 초전법륜경을

 

상윳따니까야에 초전법륜경이 있다. 56번째의 삿짜상윳따(Saccasayutta, S56)에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개정판 해제에 따르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감추어져 있다라고 표현 하였다. 수 천개에 달하는 경이 총 56개의 모음(상윳따)이 있는데, 가장 마지막 모음에 진리상윳따(Saccasayutta, S56)라는 이름으로 마치 숨겨 있듯이 실려 있는 것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마치 숨겨진 보석처럼 실려 있는 초전법륜경은 불자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유명한 경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압축적으로 표현 된 것이 마치 대승경전의 정수라 불리우는 반야심경과 같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앞으로 한국불교가 각종 법회 모임에서 반야심경 대신 초전법륜경을 독송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구고(九苦)로 언급된 고성제

 

상윳따니까야 진리모음(S56)에 실려 있는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Bo Tree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고성제와 다름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질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대상, 또는 싫어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만나고, 접촉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자체가 괴로움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전재성 박사의 번역을 보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라는 문구가 추가 되어 있다.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왜 다른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를 달아 놓았다.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일반적으로 사성제 가운데 첫 번째 괴로움의 진리에는 이 팔고가 포함 되어 있지 않지만 이 경전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질병까지 포함해서 구고가 언급되고 있다.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각주, 전재성박사)

 

 

각주에 따르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복합어서 빠일리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라는 긴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소까(Soka)는 슬픔으로, 빠리데와(parideva)는 비탄, 둑카(dukkha)는 고통, 도마낫사(domanassa)는 근심, 우빠야사(upāyāsā)는 절망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 번역에 대하여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둑카(dukkha)에 대하여 육체적 고통’, 도마낫사(domanassa)에 대하여 정신적 고통이라고 구체적으로 번역하였다.  주석적 번역이라 보여진다.

 

가슴이 찢어 지는 듯한 괴로움, 빠리데와(parideva)

 

이와 같이 빠알리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는 뭇삶들이 삶의 과정에서 겪는 온 갖 고통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압축하여 표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비탄을 표현 하는 빠리데와(parideva)에 대하여 영문번역을 보면 lamentation 이라 하였는데, 이는 ‘애가, 비탄의 소리’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비읍(悲泣)’이라 하였는데, 이는 ‘음~’하고 신음을 한다든가, 너무 슬퍼서 흐느껴 우는 것을 말한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질 때 가슴이 찢어 지는 듯한 괴로움의 표현이라 보여진다.

 

태어남은 운명적 파탄으로

 

고통의 진수를 뜻하는 복합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는 십이연기에서 정형구로 사용된다. 그래서 십이연기 순관의 말미에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1)”라고 정형화 되어 있다. 태어남은 결국 운명적 파탄을 초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고성제이다.

 

이와 같이 운명적 파탄으로 귀결되는 괴로움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1-2),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 열두 번째 모음에 있는 분별경이다. 여기서 분별이라는 말은 부처님이 일찍이 분별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교단에 대하여 분별의 교단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선불교에서 분별하지 말라는 말과는 반대 되는 말이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석하고 분별하여 진리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십이연기 역시 열 두 가지 방식으로 분별하여 설한 것이다.

 

분별의 경(S12:2)에서는 십이연기 각각의 고리에 대하여 정의 되어 있다. 예를 늙음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집착, 갈애, 느낌, 접촉 등 십이연기의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가장 마지막 과정에서 부처님은 무명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선사들이 법문할 때 흔히 말하기를 “무명이 대죄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알고 짓는 죄 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는 식의 법문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위 분별경에서와 같이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라는 말을 듣기 힘들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 하였다. 사성제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태어남으로 인한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사성제를 모르면 윤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불교에 이상한 풍조가

 

최근 한국불교에 이상한 풍조가 유행하고 있다. 소위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는 사람들이 윤회를 부정하는 듯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윤회를 믿는 사람들이 점차로 증가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불교에 대하여 잘 안다는 스님들이 윤회를 부정하고 오로지 현세의 행복에 대해서만 논하는 듯한 법문을 하는 것이다.

 

이유를 들어 보면 내생과 윤회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식의 법문이다. 이는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 만 믿고, 자신의 귀로 들어야만 믿는 감각적 인지주의산물이라 본다.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오로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는 과학적 실증주의산물이라 본다.

 

이와 같이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 검증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의 불교관에 따르면 윤회는 허황된 이야기나 다름 없다. 그래서 내생의 세계와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지금이나 부처님 당시나 있었던 것 같다. 부처님 당시에도 유물론적 허무주의자들이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에서도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말하는 부류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불교관을 엿 볼 수 있다.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이란?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떠 벌리고 다니는 자들은 한결 같이 내생과 윤회를 부정한다. 그래서 현세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단멸론으로 빠지기 쉽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즐거움을 열반으로 여기는 현법열반론으로 빠지기 쉽다.

 

현법열번론이란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도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감각적 쾌락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쾌락은 지금 이 생에서 향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생의 지복을 기다리며 즐거움을 누릴 귀중한 현재의 순간을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으로서, 디가 니까야, <계온품(戒蘊品)〉의「범망경(梵網經 Brahmājala Sutta)(D1)에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61가지 사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세속 사람들이 열중하는 문제이지 수행자와 비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비구에게 있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난했던 세속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비구가 세속의 번잡스러움이나 이성(異性)의 유혹에 교란 받지 않고 출세간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매우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필요한 것까지도 희생해가면서 수행자들에게 제일 좋은 음식과 가사를 바칩니다. 비구가 사람들의 보시로 생활하면서 재가자와 똑같이 세속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매우 부적절 합니다.

 

더구나 비구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세상을 버립니다. 만약 비구가 재가자처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고귀한 이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자는 즐거운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마하시시야도, 초전법륜경)

 

 

이와 같이 현법열반론은 이 몸이 살아 있을 때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이비 열반, 가짜 열반이라 한다. 이런 현법열반론의 범주는 넓은 의미로 본다면 현세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해당된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 따르면 윤회에 대하여 수 없이 언급이 되어 있다. 과연 이들이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 보고 현세행복론을 주장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현세행복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또 하나 공통적인 특징은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깜냥으로만 판단하는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믿지 못하는 과학적 실증주의자들은 오로지 현세의 행복만 논할 뿐 과거생과 미래생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 따르면 그런 주장은 깨진다.

 

십이연기의 정통적 해석

 

상윳따니까야 열두 번째 모음이 니다나상윳따(Nidana Sayutta, S12)라 하여 인연의 모음이라 한다. 이 모음은 연기의 가르침이 설해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십이연기를 들 수 있다.

 

니다나상윳따 해제글에 따르면 십이연기의 정통적 해석이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무명(1, 아윗자) 때문에, 즉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바른 앎의 결여로, 사람들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형성(2, 상카라)을 이루어 착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형성에 종사하며, 이러한 형성이 의식(3, 윈냐나)을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성숙하게 만들고 다시 태어나는 곳을 규정한다.

 

이와 같이 형성이 의식을 조건지우고 의식을 따라서 잉태의 순간이 시작되고, 살아 있는 정신-신체적 유기체인 명색(4, 나마루빠)으로 전개 된다. 이 살아 있는 유기체가 다섯 감각능력과 여섯 번째의 인식능력을 갖춘 여섯 가지 감역(5, 살라야따나)의 존재로 발전하여, 의식과 대상 사이에서 접촉(6, 팟사)을 발생시키고, 접촉은 느낌(7, 웨다나)를 낳고, 느낌은 불쾌를 버리고 쾌를 추구하는 갈애(8, 딴하)를 일으키고, 갈애가 강력해지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집착(9, 우빠다나)을 낳게 되고, 집착이 촉진되어 정신적 언어적 신체적인 형성을 이루어 새로운 존재(10, 바와)로 잉태되어 새로운 태어남(11, 자띠)을 얻게 되어 새로운 삶을 살다가 늙고 죽음(12, 자라마라나)으로 끝나게 된다.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2권 해제, 전재성박사)

 

 

이것이 삼세양중인과에 따른 십이연기의 정통해석이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번뇌의 소용돌이, 업력의 소용돌이, 과보의 소용돌이에 따라 존재가 윤회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무명을 근원으로 하고, 갈애를 뿌리로 하여 존재가 윤회 하는 것으로 본다.

 

삼세양중인과의 근거가 되는 경

 

이와 같이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십이연기는 삼세에 걸쳐서 두 번 인과를 받는 삼세양중인과를 특징으로 한다. 이와 같은 삼세해석을 강력하게 뒷받침 하는 경이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현세의 이 몸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러한 몸이 생겨나고 외부에 명색이 주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 쌍이 성립하고 한 쌍의 성립에 의한 접촉, 즉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생겨나고 어리석은 자는 그들 또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접촉을 통해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발라빠디따경-Bālapaṇḍitasutta-바보와 현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9(2-9),전재성님역)

 

 

경의 이름이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sutta)’이다. 이를 바보와 현자의 경이라 번역하였는데, 발라빤디따라는 말은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 나온다. 주로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로 번역된다. 발라(bāla)가 어리석은 자 또는 바보로 번역되고, 빤디따(paṇḍita)가 현명한 자 또는 현자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을 대비 시켜 놓은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발라라 불리우는 어리석은 자는 사성제를 모르는 자이다. 그래서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있는 자라 하였다. 그 결과 이 현세의 이 몸이 생겨난다 (evamaya kāyo samudāgato).”라고 하였다. 여기서 몸은 빠알리로 카야(kāya)를 말한다. 카야는 의식을 갖춘 몸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경에서는 의식을 갖춘 몸 다음에 외부에 명색이 주어진다 (bahiddhā ca nāmarūpa)’라고 하였다. 이는 재생연결식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연결고리인 명색에 대한 설명이다. 이와 같이 경에서는 전생과 현생에 대한 연기적 인과의 고리에 대하여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는 어떤 차이가?

 

경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모두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태어남을 알 수 있다. 또 공통적으로 접촉에 의하여 즐겁거나 괴로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경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무명이 파기되지 않고 갈애가 극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청정행을 닦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 다른 몸을 받는다. 만약 그가 다시 몸을 받으면 그는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현명한 이에게도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그러나 현명한 이에게는 이 무명이 파기되고 갈애가 극복된다.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현명한 이는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청정행을 닦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이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 다른 몸을 받지 않는다. 그는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난다. 그는 괴로움에서 해탈된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현명한 이와 어리석은 자에게 이 점이 차이점이고 이 점이 차별점이며 이 점이 다른 점이다.”

 

(발라빠디따경-Bālapaṇḍitasutta-바보와 현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9(2-9),전재성님역)

 

 

 

부처님 말씀 하시고자 요지는 괴로움에서 벗어 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또 다른 새 몸을 받기 때문에 고통에서 헤어 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고통의 진수를 정형화 한 정형구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가 사용되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있어서 태어남이란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 날 수 없는데, 결국 운명적 파탄으로 귀결 되고 말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운명적 파탄을 벗어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괴로움의 종식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종식이다. 그래서 경에서 현명한 자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청정행을 닦는다고 하였다. 청정에 이른 자, 즉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운명적 파탄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런 점이 현명한 자(paṇḍita)와 어리석은 자(bāla)의 차이라 한다.

 

괴로움의 종식과 윤회의 종식

 

이와 같이 괴로움의 종식이 바로 윤회의 종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괴로움과 윤회를 따로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다.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면서 현세의 괴로움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왜곡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의 종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윤회의 종식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할 수 있을까. 이는 초전법륜경에 설명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경에서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三轉十二行相)라는 말이 나온다. 초전법륜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라 볼 수 있다. 해제 글을 참조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1

2

3

고성제

궁극적으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과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알려져야 한다. (pariññeyya)

그것은 나에게 완전히 알려졌다.

집성제

갈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제거 되어야 한다. (pahātabba)

그것은 나에게서 제거 되었다.

멸성제

열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실현되어야 한다. (sacchikātabba)

그것은 나에게 실현되었다.

도성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닦여져야 한다. (bhāvetabba)

그것은 나에게 닦여졌다.

도의 단계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이렇게 거룩한 진리, 사성제는 이다’ ‘되어야 한다’ ‘되었다로 세번 굴려진다. 이를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라 한다.

 

 

당당한 사자후

 

이와 같이 진리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고, 실행하고, 마침내 이루어 내었을 때 청정하게 되어 다음과 같은 당당한 사자후를  할 수가 있다.

 

 

Khīā jāti,                   키나 자띠

vusita brahmacariya,      우시땅 브라흐마짜리양

kata karaīya,            까땅 까라니양

nāpara itthattāyā           나빠랑 잇탓따야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라한 선언이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도의 단계이다. 이와 같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괴로움이 무엇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일곱조각난 머리카락 꿰뚫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 무엇일까? 문제가 무엇인지 가장 먼저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어느 정도 확실하게 알아야 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존]

아난다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활쏘기를 하는데 멀리서 작은 열쇠구멍으로 화살을 재빠르게 갈아 매우면서 놓치지 않고 화살을 쏘는 것과 화살촉으로 일곱조각으로 쪼개진 머리카락의 한 올의 그 끝을 쏘아 꿰뚫는 것을 비교하면 무엇이 더욱 하기 어렵고 이루기 어려운 것인가?”

 

(딸라찍갈라경-talacciggalasutta-열쇠 구멍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45(5-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화살을 던지고 다른 화살이 꽤뚫는 것과 머리카락을 일곱으로 가른 것을 비교 하고 있다.

 

꿰뚫어 안다는 것

 

60미터 거리에서 과녁에 맞은 화살 자리에 연달아 맞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머리카락을 일곱으로 낸 한 올을 맞추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이는 사성제에 있어서 고성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든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을 위하여 알아야 할 사성제는 어떻게 알아야 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존]

아난다여, 이와 같이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는다면, 그것은 꿰뚫기 어려운 것을 꿰뚫는 것이다.

 

(딸라찍갈라경-talacciggalasutta-열쇠 구멍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45(5-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 일곱조각난 머리카락 한 올을 60미터 거리에서 꿰뚫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였다. 이는 진리에 대한 꿰뚫음은 긴급하고 절박하다는 것을 말한다. 꿰뚫음 없이는 괴로움과 윤회를 끝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꿰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꿰뚫음이 위 초전법륜경에서 언급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에 대한 것이다.

 

일반범부들에게 닥치는 무서운 과보

 

대부분 사람들은 서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은 고사하고 괴로움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끊임 없이 고통받으며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윤회 할 수밖에 없는데, 결과는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서  마지막으로 실려 진리상윳따(S56)에 따르면, 사성제를 모르는 일반범부들에게 닥치는 무서운 과보가 묘사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크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는 아주 작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를 큰 대지와 비교한다면 수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비교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인간과는 다르게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2)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안냐뜨라경-Aññatrasutta-다른 곳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61(7-1),전잭성님역)

 

 

HD화면으로 제공되는 자연 다큐 프로를 보면 물속에서 물고기가 알을 낳는 장면이 나온다. 한 번에 수백, 수천, 수만개의 알을 낳는다. 그라나 알에서 부화하자 마자 대부분 상위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 알에서 부화하자 마자 거의 대부분 죽는 것이다. 이렇게 대량으로 태어 나고, 또 대량으로 죽는 것이 생태계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태어남이란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맹구우목의 비유와 같이 매우 희유한 일이라하였다.

 

이렇게 뭇삶들의 태어남과 인간의 태어남은 다른 것인데, 이는 사성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인간 중에서도 사성제를 아는 사람이 드믈고 더구나 꿰뚫어 아는 사람은 더욱 더 드믈것이라는 말이다. 

 

거의 대부분 지옥행이다!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사성제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죽어서 어디에서 태어날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무서운 과보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인간에서 죽어서 인간 가운데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인간에서 죽어서 지옥 가운데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2)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안냐뜨라경-Aññatrasutta-다른 곳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61(7-1),전잭성님역)

 

 

부처님은 사성제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 지옥에 날 것이라 한다. 이를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의 비유를 들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손톱끝에 집어든 흙먼지 처럼 적고대지의 커다란 흙처럼 거의 대부분 지옥행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성제를 모르는 무명으로 인하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과보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이런 비유는 지옥 뿐만 아니라 축생, 아귀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 나는 것은 지극히 희유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것이라고 집착해서

 

흔히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즐거움 반, 괴로움 반이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삶이라는 것 자체는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일체개고라 하였다.

 

그런 괴로움은 모두 신구의 삼업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 저지른 행위로 인하여 후회와 회환으로 괴로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지나간 일이다. 그 때 그 자리에서 조건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이다. 그 때의 조건과 지금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 후회하거나 회환에 젖어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 (appiyehi)’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piyehi)’에 따른 괴로움 역시 모두 지난 일이다. 지금의 조건과 맞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

 

만일 과거의 일로 괴로워 한다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일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건에 따라 발생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붙잡고 있다면, 이는 몸, 느낌, 지각, 형성, 정신 이렇게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온에 집착하는 것, 오취온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태어남으로 인한 운명적 파탄으로 설명되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즉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ā)역시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지각, 나의 형성, 나의 정신이라고 집착해서 일 것이다.

 

 

 

2013-03-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