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부처님의 병실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5. 16:24

 

부처님의 병실법문

 

 

 

봄은 왔건만

 

3월이다. 3월이 되면 봄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봄 같지 않은 날씨이다. 그렇게 고대하고 기다리던 봄이 되었건만 도시에서 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삭막하기 그지 없다. 보이는 것은 온통 선() 뿐이다. 그래서 도시는 선이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도시는 각지고 모서리가 있는 선 뿐이다. 곡선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래서 더 삭막한지 모른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더 삭막하게 하는 것은 빛깔이다. 온통 회색빛 일색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까지 회색빛으로 되는 것 같다.

 

도시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의 삶이다. 도시를 떠나서 살 수 없게 만들어진 구조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아 가듯 일터와 집을 왕래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런 와중에 어느 덧 3월이라 하니 봄이 오긴 온 것 같다. 비록 회색빛의 선과 각으로 이루어진 스카이라인이긴 하지만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에 대해서 안심한다.

 

감기에 걸렸어도

 

봄을 앞두고 심하게 앓았다. 감기가 걸린 것이다. 치과를 가는 것 외에 십년 이상 병원에 가본적이 없지만 감기가 걸릴 때 마다 한 번씩 가 보는 곳이 병원이다. 일년에 한 두차례 가보는 병원에서 약을 타지만 주사를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감기의 경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오한이 심하여 주사를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주사의 효과는 컷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불과 두 세시간만에 완전히 상황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글도 쓸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 감기로 인하여 고통받으면서도 매일 글을 썼다. 조금 낳아 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 몇 시간을 활용하여 글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 없이 글을 쓰게 되었다. 왜 이렇게 글에 집착 하는 것일까?

 

누가 원고료를 주는 것도 아닌데

 

글을 쓴다고 하여 누가 원고료를 주는 것도 아니다. 글을 쓴다고 하여 누가 후원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글을 쓰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다.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이 단 하루도 하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오듯이, 단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허전 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여백을 대하고 본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써 내려 간다. 대부분 정리된 구상대로, 미리 생각해 놓은 시나리오 대로 담담하게 자판을 두드리지만 어떤 경우는 일단 쓰고 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상황이 전개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때 그때 생각이 반영되어서 쓰고, 또 그글로 인한 연쇄 반응에 따라 그야말로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 간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글이나 쓰지 않는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드시 경전에 근거한 글을 쓰는 것이다. 빠알리 니까야에 근거한 글을 쓰지 않으면 개인의 넉두리에 지나지 않고 개인의 한풀이 성격의 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시적 현상인줄 알고

 

일주일간 감기에 걸려 고생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오한으로 엄습하여 올 때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한이 물러가고 난 다음 머리가 찡하고 동통이 시작 되었을 때 이 또한 영원히 계속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감기라는 것이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지금 이 순간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지고야 말 괴로움인 것이다!

 

범부들은 감기만 걸려도 괴로워 한다. 기분 나쁜 고통이 시작 될 때 이를 참아 내지 못하고 온 갖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마는데, 감기나 다친 것 등 일시적으로 괴로움을 당했을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부처님도 아팠다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도 고통을 받았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맛다꿋치 숲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세존께서 돌조각 때문에 발에 상처를 입으셨다. 세존께서는 몸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 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큰 옷을 네 겹으로 깔고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 누우셨다.

 

(사까리까경-Sakalikasutta-돌 조각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8(4-8),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도 고통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돌조각에 맞이서 고통을 느낀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이 발을 다친 이유가 데와닷따때문이라 한다. 부처님을 살해 하기 위하여 맛다꿋치 숲 가까운 깃자꾸따 산에서 돌을 굴려 떨어 뜨렸기 때문이다.

 

새김을 확립하고(sato) 올바로 알아차리며(sampajāno)”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와 똑 같은 모습을 한 인간 부처님의 모습이다. 그런데 경을 보면 부처님이 고통을 참아 내는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 되어 있다. 사람들은 조금만 아파도 마치 어린 아이가 고통을 참아 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듯이 괴로워 하는데, 부처님은 참아 내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문장이 새김을 확립하고(sato) 올바로 알아차리며(sampajāno)”라는 문구이다.

 

부처님은 사띠와 삼빠잔냐를 함으로써 고통을 참아 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띠는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다친 곳이 아프다면 그 아픈 것을 대상으로 지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 아픔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모든 현상은 생겨 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아픔으로 인한 고통 역시 생겨 났다가 사라질 것이다. 고통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아프다고 하여 안달복달 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일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이 ‘사띠’라 본다.

 

분명한 앎(pajāna)과 올바른 알아차림(sampajāna)

 

다음으로 언급된 내용이 삼빠잔나(sampajāna)이다.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마하사띠빳타나경(D22, 대념처경)의 각주에 따르면 삼빠잔나는 ‘올바른 알아차림’이라 한다. 빠잔나(pajāna)에 삼(sam)이 붙어서 그렇게 번역된 것이다. 이때 삼(sam)은 ‘올바른’ 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빠잔나와 삼빠잔나를 구별해야 하는데, 빠잔나는 분명한 앎이라고 번역되고, 삼빠잔나는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한 앎(pajāna)’과 ‘올바른 알아차림(sampajāna)’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대념처경 각주에 따르면, ‘분명한 앎(pajāna)’의 경우 호흡관찰에서 사용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6가지 호흡관찰을 할 때 빠잔나 (분명한 앎) 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이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뿐만 아니라 호흡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빠잔나의 동사형이 빠잔나띠(pajānati)인데, 이는 빤냐(paññā)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하여, 빠잔나는 지혜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빠잔나는 이와 다르다는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삼빠잔나는 대소변 등과 같이 몸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라리는 것을 말한다. 경에서 “대변 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우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올바른 알아차림이 삼빠잔나인 것이다.

 

그래서 빠잔나와 삼빠잔나가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데, 빠잔나의 경우 호흡관찰을 통한 지혜의 증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분명한 앎이라 번역되고, 삼빠잔나의 경우 호흡이외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라 볼 수 있다.

 

지켜 보기만 해도 통증이 가라 앉는다

 

부처님이 돌조각으로 인하여 다리의 아픔을 느꼈을 때 빠잔나(분명한 앎)이라 하지 않고 삼빠잔나(올바른 알아차림)라 한 것은 몸에 대한 통증에 대한 알아차림이라 볼 수 있다. 이는 고통에 대한 생성과 소멸을 관찰함으로서 아픔을 극복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올바로 알아차림으로 극복 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위빠사나를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단지 지켜 보기만 해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병이 치유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되는 것

 

이와 같은 부처님의 사띠와 삼빠잔나에 따른 고통의 극복에 대하여 하늘 사람은 다음과 같이 찬탄 하였다.

 

 

[하늘사람]

 “세존이시여, 수행자 고따마는 참으로 코끼리입니다.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이미 생겨난 몸의 고통을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코끼리처럼 상처받지 않으며 참아냅니다.”

 

(사까리까경-Sakalikasutta-돌 조각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8(4-8),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고통이 있다. 주로 감기나 외상 같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에 안달복달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에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런 고통이 부처님 말씀 하신 고성제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

 

부처님은 담마짝깝빠왓따나경(초전법륜경, S56:11)에서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라고 하였다. 감기나 외상과는 다른 근본적인 고통이다. 이런 괴로움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억만겁을 살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으로 해결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부처님은 탁월한 의사라고 볼 수 있다.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대부분의 범부중생들은 조그만 외상이나 감기 등으로 인한 고통, 괴로움에 대하여 어쩔 줄 몰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말 고통에 대해서조차 안절 부절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커다란 바다에는 심연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있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은 것을 두고 커다란 바다에는 심연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심연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괴로움의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육체적인 괴로움의 느낌을 경험하여 우울해하고 피로해하고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심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견고한 지반을 얻지 못한다.

 

(빠딸라경-Pātālasutta-심연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4(1-4), 전재성님역)

 

 

육체적 고통에 대하여 참을성 없는 범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육체적으로 괴롭다고 하여 마치 바닷속 깊은 곳에 마치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괴로운 느낌 그 자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단지 느낌일 뿐이다. 느낌이 생겨나고 사라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느낌 자체가 마치 영원한 것처럼 심연에 사는 괴물처럼 여긴다.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과 잘 배운 고귀한 제자의 태도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생겨난 괴로운 느낌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자는

목숨을 해치는 그 신체적인 느낌과

접촉하면 전율하네.

탄식하고 울부짖어도

허약하고 힘이 없어

심연에서 솟아 나오지 못하고

견고한 지반을 얻지 못하네.

 

생겨난 괴로운 느낌을

잘 참아내는 자는

목숨을 해치는 그 신체적인 느낌과

접촉해도 전율하지 않네.

그는 심연에서 솟아 나오고

견고한 지반에 도달하네.”

 

(빠딸라경-Pātālasutta-심연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4(1-4),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을 때 사람들은 신음하고 심지어 울부짓기 까지 하며 어쩔 줄 모른다. 단지 시간이 지나면 다 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느끼는 고통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잘 참아 낼 뿐만 아니라 지혜를 얻어 견고한 지반, 즉 열반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두 방의 화살을 맞는

 

그런데 느낌에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도 있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느낌이 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이 느끼는 것과 잘 배운 고귀한 제자가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유명한 화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면 우울해하고 피로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진다. 그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가지 종류의 고통을 느낀다.

 

(살라경-Sallasutta-화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6(1-6), 전재성님역)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두 방의 화살을 맞는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화살은 번뇌를 뜻한다. 첫 번째 화살은 육체적 고통에 따른 직접적 화살을 말하고, 두 번째 화살은 육체적 고통에 따른 간접적 화살을 말한다. 이를 “아파!” 와 “아파 죽겠네!”라고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칼을 잘 못 다루어 외상을 입었다면 상처부위가 육체적으로 아픈 것이다. 그래서 아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나 아라한도 예외는 아니다.

 

일반범부와 깨달은 자가 다른 점이 있다. 육체적 아픔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범부들은 육체적 아픔이 일어나면 아파 죽겠네!”라고 하여 죽겠네가 따라 붙는다. 죽겠네!”가 정신적 괴로움으로서 번뇌를 말한다. 이런 경우 두 번째 화살을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나 아라한, 깨달은 자들은 절대 죽겠네!”와 같은 느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적 아픔은 단지 육체적 아픔에서 그칠 뿐 정신적 번뇌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단지 육체적 고통뿐만이 아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좋네!”라고 그치지 않고 좋아 죽겠네!”로 발전 되기 때문이다.

 

세 방을 맞는 경우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육체적 화살과 정신적 화살 두 방을 맞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한 방 더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한 방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사람을 화살로 찌르고 또한 그를 두 번째의 화살로 찔렀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그는 두 개의 화살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면 우울해하고 피로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진다. 그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 가지 종류의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그에게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여 분노가 생겨난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대한 분노를 느끼며 괴로운 느낌에 대한 분노의 경향을 잠재시킨다. 또한 즐거운 느낌과 접촉하여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환락을 찾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감각적 쾌락 이외에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거워하며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경향을 잠재시킨다. 그는 그들 느낌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가 그들 느낌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 그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경향을 잠재시킨다.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껴도 속박으로 그것을 느낀다.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껴도 속박으로 그것을 느낀다. 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껴도 속박으로 그것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속박된 자, 괴로움에 속박된 자라고 나는 부른다.

 

(살라경-Sallasutta-화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6(1-6), 전재성님역)

 

 

누구나 첫 번째 화살을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화살을 한 번 더 맞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좋고 싫어함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에 빠지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즐거움에 빠지면 즐거움을 끝까지 누리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이나 즐거움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경에서 느낌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보라고 하였다. 괴로움 느낌과 즐거운 느낌은 그 것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란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줄 모르기 때문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부들은 화살을 한 방 더 맞는다. 무명의 화살이다.

 

그래서 범부들은 육체적 고통이라는 첫 번째의 화살을 맞고, 정신적 고통이라는 두 번째의 화살을 맞고, 생멸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무명이라는 세 번째의 화살을 맞는다. 그래서 도합 세 방의 화살을 맞는다. 이렇게 무지하다 보니 삶의 과정에서 수 없는 화살을 맞는 것이다. 그런 화살이 다름 아닌 번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화살을 맞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처방을 내 놓았다.

 

인간적인 부처님

 

부처님이 마치 의사와 같이 보일 때가 있다.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이 병실을 방문하여 법문하는 장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베쌀리 시의 마하 숲에 있는 꾸따가라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홀로 고요히 명상하다가 저녁 무렵에 일어나 병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가셨다. 그리고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아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때를 맞이 해야한다. 이것이 그대들에 대한 나의 가르침이다.

 

(겔란냐경-Gelaññasutta-병실의 경1, 상윳따니까야 S36:7(1-7),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부처님의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대승경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인간적인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병실을 방문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가벼운 질병이라면 경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무거운 병, 중병에 걸린 제자들에게 위로의 가르침을 전해 주기 위해서 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해제 글에 따르면 “~중병이 든 환자들을 방문하여 설한다,(36:7-8)”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를 뒷바침하는 문구가 때를 맞이 해야한다 (kāla āgameyya)”라는 말이다. 각주에 따르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또는 시간이 지나가야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치 외상을 입은 환자가 시간이 지나면 낫는 듯이 보인다. 그러너 초판본에 따르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루 미로어 보아 중병 또는 죽을 병에 걸린 말기 환자들을 위한 법문처럼 보인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마치 정신과 전문의 같은 부처님이 환자들을 위하여 설한 법문은 사념처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느낌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어떻게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때를 맞이해야 되는가에 대한 법문이다. 이중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방일하지 않고 성실하게 정진할 때에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라고 분명히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것인가?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한 분노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

 

(겔란냐경-Gelaññasutta-병실의 경1, 상윳따니까야 S36:7(1-7),전재성님역)

 

 

사념처 중에 수념처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분명히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때 ‘분명한 앎’은 빠잔나(pajāna)이다. 호흡관찰 수행에서의 분명한 앎과 같다. 삼빠잔나(sampajāna)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수념처에서 빠잔나(pajāna)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지혜의 증득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소변을 보는 등의 몸에 대한 알아차림(sampajāna)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느낌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분명하게 알라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 하였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조건 발생적임을 강조 하고 있다. ‘아프다’ ‘괴롭다라는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육체가 아프기 때문이다. 육체의 아픔으로 인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다.

 

중병이 걸렸을 때 단 5분도 같은 자세를 유지 하지 못한다면 괴로운 일일 것이다. 이때 괴로운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괴로운 느낌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괴로움을 유발시킨 그 육체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느낌이든 육체이든 모두 조건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말이다.

 

조건 발생되었다면 조건이 바뀌면 소멸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MBSR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

 

느낌상윳따(S36)에서 화살의 경(S36:6)과 병실의 경(S36:7)  등 일련의 경을 보면 마치 요즘 유행하는  MBSR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다. 존 카밧진 박사가 1979년에 창안하였다는 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념처, 그 중에서도 수념처와 현대 서양의학을 접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성통증, 우울, 공황장애, 각종 스트레스, 심지어 자살, 정신분열증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명상기법만 가져 갔을 뿐 부처님의 가르침은 배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성을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것이 MBSR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MBSR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

 

종교성이 배제된 MBSR과 달리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수념처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는 사띠라는 말로 잘 표현된다.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 차려 (sato bhikkhave bhikkhu sampajāno)”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서 새김이라는 말이 사띠(sati)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고 있어야 올바로 알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병에 걸린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경에서 중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기름과 심지를 조건으로 등불이 켜지면 그 기름과 심지가 소모되어 연료가 떨어지면 불이 꺼지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수행승은 그가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끼면, ‘나는 몸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가 목숨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끼면,  ‘나는 목숨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그는 ‘몸이 파괴되고 목숨이 다한 뒤에는 세상에 느껴진 모든 것이 향수되지 않고 식어버릴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겔란냐경-Gelaññasutta-병실의 경1, 상윳따니까야 S36:7(1-7),전재성님역)

 

 

 

 

a sick monk and Buddha

 

 

 

빠알리 니까야에서 열반은 꺼진 등불로 종종 표현된다. 중병에 걸린 부처님의 제자가 임종을 앞두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어떻게 임종을 맞이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마지막 임종 순간까지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집착하지 않고 단지 그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 하듯이 몸의 한계, 목숨의 한계에 대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라고 하였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여 의식이 소멸하면 더 이상 명색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심지가 다하여 꺼진 불꽃 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열반에 들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열반에 대하여 표현되어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사념처에서 수념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중병에 걸린 환자가 어떻게 열반에 드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종교성이 배제된 MBSR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실천한다는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괴로움이 있다. 그 중에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있다. 외상이나 감기 같은 것이다. 지금 외상으로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거나, 감기로 인하여 불쾌를 느끼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깨끗이 낫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성제에서 고성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생로병사를 비롯하여 사랑하는 것과 해어져야 하는 괴로움, 사랑하지 않은 것과 만나는 괴로움 등 팔고라 불리우는 괴로움이다. 마치 낫지 않는 고질병처럼, 치유가 불가능한 불치병처럼 평생 따라 다니는 괴로움이다.

 

이런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부처님은 방법을 제시 하였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팔만사천법문이나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대로만 실행한다면 그 어떤 괴로움도 사라질 것이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괴로움처럼,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괴로움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예를 초전법륜경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한 콘단냐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진리의 눈이 열렸을 때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괴로움이든,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괴로움이든  공통적으로 생겨난 것은 소멸되고 말 것이라는 진리를 알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2013-03-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