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신출가(身出家)와 심출가(心出家), 라따나경(보배경)5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6. 18:11

 

 

신출가(身出家)와 심출가(心出家), 라따나경(보배경)5

 

 

 

죽는 건 모르고 자꾸 낳으려고만 해요

 

법문을 잘 하는 스님이 있다. 불교tv사이트에 수 많은 스님들의 법문이 올려져 있는데, 그 중 종범스님의 법문은 들을 만 하다. 비록 대승불교에 대한 법문이 주요 테마이지만 비교적 경전에 바탕을 둔 법문이라 볼 수 있다. 종범스님의 법문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중생들은 생사의 고통을 몰라요. 나면 죽는데, 죽는 건 모르고 자꾸 낳으려고만 해요. 또 만나면 해어지는데, 헤어지는 건 모르고 만날려고만 해요. 어떤 사람을 보니까 과거에 만났던 사람과 싸움을 하며 헤어 졌는데, 또 딴사람하고는 열심히 사귀고 있다고. 새로. , 그것 참. ~ 하더라구요.

 

(종범스님, 종범스님의 향기있는 법문, 제6 찬불, 예불의 서원, 불교TV 2011-06-27)

 

 

이 세상을 살아 가는 사람들을 보면 반복성이 있다는 것이다. 태어남으로 인하여 죽는 괴로움을 보면서도 자꾸 낳는다는 것이다. 낳는 것만 생각했지 죽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또 자꾸 만날려고 한다는 것이다. 부부가 싸움 끝에 갈라서면서도 그 와중에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밥먹듯이 한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헤어질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만나는 것에만 열중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종범스님은 법문에서 사람들이 어리석기 때문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태어 나면 누구나 정해신 코스를 밟는다.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면 취업 하고,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코스이다. 이렇게 인습과 관습과 제도에 묶여 일생을 살아 가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코스를 따라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출가자들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만나면 헤에지고, 태어 나면 죽는데, 왜 사람들은 자꾸 새로 만나려 하고, 왜 사람들은 자꾸 태어남을 만들게 하느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으로 출가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급자족한 수행자의 말로

 

출가절을 앞두고 마성스님의 글을 읽었다. 대승불교권에서 음력으로 2월 초파일(8)이 부처님이 출가한 날인데, 이날을 앞두고 마성스님은 출가절의 현대적 의미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글에서 인상깊은 장면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문이 있었다. 그는 한적한 곳에 가서 열심히 정진하여 출가한 본래의 목적인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히말라야 산록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들어가 그곳에 정착했다. 그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급자족하면서 수행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농기구가 필요했다. 그는 농기구를 마련했다. 그런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가축도 필요했다. 가축의 배설물이 있어야 퇴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 , 돼지, 닭 등 많은 가축을 길렀다. 그러다 보니 일손이 모자랐다. 하루 종일 바삐 움직여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가난한 여인이 찾아왔다. 그는 부족한 일손을 도와달라고 그녀에게 요청했다. 그렇게 같이 살면서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길렀다. 그러는 사이 자녀도 열두 명이나 생겼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정진하여 출가한 목적을 이루려고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그는 이미 늙어 더 이상 정진할 수도 없는 촌로(村老)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성스님, 출가절의 현대적 의미)

 

 

마성스님이 언급한 이야기는 백유경에 실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볼 수 없지만 출가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데 있어서 매우 좋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비유로 든 이야기를 보면, 출가자가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출가자가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출가자는 오로지 재가자의 보시에 의하여 생계를 꾸려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하려 했을 때 재가자와 다름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은 소유와 축적에 대한 것이다.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

 

부처님 당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들은 걸식에 의존하였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얻어 먹는 것이다. 그래서 와좌구, 음식, , 의약품과 같은 사대필수품 외에 별도의 보시가 없었다. 이와 같이 무소유를 실현 하고 청정범행을 닦는 수행자는 재가자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3)

 

그들은 동전이나 금과 은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4)

 

(로히니경, 테리가타 271~289, 로히니 비구니)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어린 소녀 로히니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 여러 가지 사문을 좋아 하는 이유를 말하였다. 그 중에 조리된 음식만을 탁발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축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저장 하지 않는 다면 금과 은이 필요 없다. 그리고 마을 가까이 살아야 한다. 그런데 좀 더 깊은 수행을 목적으로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 갔을 때 필연적으로 먹을 것을 준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재가자의 보시에 의존하며 살아 가야 할 출가자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 하는 삶을 살았을 때 재가자의 삶과 조금도 다름 없을 것이다. 그런 출가자는 몸만 출가 하였을 뿐 출가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재가자들은 존경하지도 않고 좋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재가자들이 존경하는 복밭은

 

재가자가 존경하고 복밭으로 생각하는 수행자는 성스런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은 부처님의 제자들의 모임, 즉 성스런 상가(성승가)가 승보로서 찬탄의 대상이다. 라따나경에서 성승가에 대한 찬탄은 게송6에서 11까지 내리 여섯 개이다. 이 중 일곱 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라따나경 게송7

빠알리

Ye suppayuttā manasā dahena
Nikkāmino gotama sāsanamhi
Te pattipattā amata
vigayha
Laddhā mudhā nibbuti
bhuñjamānā
Idampi sa
g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예 숩빠윳따- 마나사- 다헤나

닉까-미노 고따마 사-사나미

떼 빳띠빳따- 아마땅 위개하

랏다- 무다- 닙부띵 분자마--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확고한 마음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이, 고따마의 가르침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불사에 뛰어들어 목표를 성취해서 희열을 얻어 적멸을 즐깁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법정스님역

굳은 결심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고오타마의 가르침에 따라 욕심이 없으며, 죽음이 없는 데에 들어가고, 도달해야 할 경지에 이르며, 보상 없이 얻어 평안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中村元

タマ(ブッダ)のえにもとづいて、堅固をもってよく努力し、欲望がなく、不死して、すべき境地し、代償なくしてて、平安しみを(う)けている。このれたは〈つどい〉のうちにある。このによってせであれ。

영역

They that come to the dispensation of Gotama with well yoked minds,

Attain deathlessness and enjoy its results gratis.

This is precious of the jewel of a Community,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suppa : [m.; nt.] a winnowing basket. Winnow: 키질하다

manasā :mano の instr. -asoceyya 意不行. -soceyya行.

daha : [adj.] firm; strong; steady.

ayutta: [adj.] inappropriate. (nt.), injustice. :a. [a-yutta] 不適當の, 不當の.

Nikkāmin: adj.m. 1) 감각적 욕망을 떠난, 2)이욕자

gotama : [adj.] belonging to the Gotama clan.

sāsana: [nt.] teaching; order; message; doctrine; a letter. :n. [Sk. śāsana<śās] , 教説; 信書, 使書, 通牒. -kara, -kāra, -kārin え, 命令, 書信をなす. :m. [Sk. BSk. Gautama] 瞿曇, 喬答摩 [釋迦族的姓, 多指釋尊].

patti : [m.] a foot-soldier; an infantry. (f.) arrival; attainment; merit; profit; share.

patta: [m.] an alms bowl. (nt.) a leaf; a feather; the wing of a bird. (pp. of pāpuāti) reached; attained; obtained.

amata: [nt.] ambrosia; the deathless state.

vigayha : [abs. of vigāhati] having entered or plunged into.

Laddha: adj. labbati labh의 p.p  1)받은, 얻어진  2)성취된

mudhā : [ind.] gratis (무료로); for nothing.

nibbuti : [f.] peace; happiness; allayment; the final bliss.

bhuñjamāna : [pr.p. of bhuñjati] eating; enjoying.

 

 

 

 

 

일곱 번째 게송에서는 부처님의 성스런 제자들의 열반의 성취에 대한 기쁨을 찬탄하고 있다. 이는 출가의 목적이 바로 열반의 실현에 있음을 말한다.

 

이교도들이 낮추어 부르는 말 고따마(gotama)’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해야 하는데, 게송에서는고따마의 가르침(gotama sāsana)’이라 하였다. 여기서 고따마는 부처님을 칭한다. 그런데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고따마라는 말은 이교도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고따마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세존, 천인사 등 부처님의 열가지 칭호 중의 하나를 주로 사용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 하다. 불자들이 고따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부처님과 구분하기 위하여고따마붓다라고 표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빠알리 니까야에서 이교도들이 고따마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 적합한 용어라 볼 수 없다. 그냥 부처님, 또는 붓다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본다.

 

부처님의 명령(sāsana)

 

게송에서는 부처님이 스스로 고따마의 가르침(gotama sāsana)이라 하였다. 여기서 사사나는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가르침(teaching)외에명령(order)’ 등의 뜻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담마는 실천해야 될 것을 말한다. 사사나는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명령과도 같은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성취한 경지와 같은 경지를 맛볼 것이라 한다. 이것이불사(不死, amata)’적멸등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이 출가의 목적일 것이다.

 

랏다 무다(Laddhā mudhā)

 

그런데 적멸과 관련하여  랏다 무다 닙부띵 분자마나(Laddhā mudhā nibbuti bhuñjamānā)’문구에 대한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번역이 다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희열을 얻어 적멸을 즐깁니다라고 하였고, 나까무라 하지메는 代償なくして得て、平安のしみを享(う)けている(대가 없이 얻어서 평안의 즐거움을 누린다)”라 하였기 때문이다.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중역한 법정스님은보상 없이 얻어 평안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보상 없이 얻은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Laddhā mudhā’의 번역어라 보여진다. Laddhā얻어진이라는 뜻이고, mudhā공짜로(gratis)’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공짜로 얻어진또는보상없이 얻어진뜻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열반과 동의어로 표현되는 불사의 경지 아마따가 과연 공짜로 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 질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랏다 무다(Laddhā mudhā)’에 대하여 적멸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열반과 동의어인 적멸은 공짜로 또는 대가 없이 얻어진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명령을 실천 하여 얻어 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랏다(Laddhā) 성취한뜻으로 해석되고, 무다(mudhā)아무것도 없는(for nothing)’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랏다 무다(Laddhā mudhā)’아무것도 없는 것을 얻은이라는 뜻이 되어적멸이라고 번역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랏다 무다(Laddhā mudhā)에 대한 번역어 적멸이라는 용어는  보상 없이 얻은이라는 말 보다 자연스럽다.

 

양가의 자제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 ‘고따마 사사나(gotama sāsana)’로 표현 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가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열반의 실현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또한 출가의 목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출가라는 것이 단지 세상과 인연을 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출가를 하게 되면 세상과 등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 가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에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고 심지어 농사까지 지어 가며 살아 간다. 이와 같은 은둔형 출가는 부처님의 바라는 출가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마을 가까이 살면서 탁발에 의존하고 보시자에게 공덕을 지을 수 있는 복밭으로서 출가가 진정한 출가일 것이다. 그래서 몸만 출가 하는 신출가(身出家)’가 아닌 아라한과를 증득하기 위한 심출가(心出家)’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출가에 대한 정형구를 접할 수 있다. 수 없이 볼 수 있는 정형구의 예는 다음과 같다.

 

 

그는 오래지 않아, 그러기 위해 양가의 자제들이 당연히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그 위없는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곧바로 알았다.(S6:3)

 

 

 

2013-03-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