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그 많던 비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라따나경(보배경)4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2. 13:56

 

 

“그 많던 비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라따나경(보배경)4

 

 

 

얼마나 많은 비구들이

 

글을 잘 쓰는 스님이 있다. 마성스님이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성스님의 글을 읽게 되었다. 지금은 다음 블로그에 글이 실려 있지만 블로그를 처음 시작한 2005년에는 팔리문헌연구소라는 별도의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을 통하여 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경험과 체험과 느낌이 녹아들어간 글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마성스님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얼마나 많은 비구들이 그처럼 혼자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아무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모두 다 죽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든 간에, 그들이 최후에는 후회없이 죽었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어쨌든 출가자의 길이고 목표니까.

 

(마성스님, 어느 스님의 죽음을 접하고)

 

 

이 글은 마성스님이 쓴 글이 아니다. 범진스님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룸비니 대승석가사에 있는 범진스님이 쓴 ‘마두삔디까숫따’ 서문에 있는 글을 인용한 것이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비구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형성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듯이 출가자들 역시 모두 죽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비구들 중에 출가의 목적을 이룬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은 자라면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 그만 둔 자도 있고 허송세월만 하며 무위 도식으로 보낸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출가하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라 한다. 차라리 세속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사는 삶이 더 낳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야

 

부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야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의 흐름이란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오욕락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왜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까. 이는 부처님이 처음 깨닫고 난 다음 사함빠띠의 청원에서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Paisotagāmi nipua gambhīra duddasa au , S6;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게송에서 빠띠소따가미(Paisotagāmi)’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역류도(逆流道)라 한다.

 

사쌍팔배의 성자에 대한 찬탄

 

이와 같이 역류도를 실현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오염원을 소멸하였을 때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분들을 성자라 한다.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 여섯 번째 게송이 사쌍팔배의 성자에 대한 찬탄이다.

 

 

 

라따나경 게송6

  

빠알리

Ye puggalā aṭṭhasata pasatthā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
Te dakkhi
eyyā sugatassa sāvakā
Etesu dinnāni mahapphalāni,
Idampi sa
g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예 뿍갈라- 앗타사땅 빠삿타-

짯따-리 에따-니 유가-니 혼띠

떼 닥키네이야- 수가땃사 사-와까-

에떼수 딘나-니 마합팔라-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길로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 참모임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법정스님역

착한 사람들이 칭찬하는 여덟 가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네쌍의 사람이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 (부처님)의 신도이며 보시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베푼 사람은 커다란 과보를 얻는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승단)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中村元

善人のほめたたえる八輩はこれらのである。かれらはせな(ブッダ)の弟子であり、けるべきである。かれらにしたならば、いなる果報をもたらす。このれたは〈つどい〉のうちにある。このによってせであれ

 

영역

There are four doublets of the eight persons constantly praised, gifts given to those disciples of the

Well Gone one are fruitful.

This is precious of the jewel of a Community,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puggala : [m.] an individual; a person.

aṭṭha, (adj.) eight.

sata:=santāna [santa の pl. gen.] の.

santa: [pp. of sammati] 1. calmed; peaceful; 2. tired; wearied. (adj.), existing. (m.), a virtuous man.

pasaṭṭha : [pp. of pasasati] praised; commended; extolled. :, pasattha a. [pasasati の pp.] された, ほめられた.

Cattāri: 네 가지

eta: [demons. pron.] that; this. (mas. sing.); takes this form in some cases.

yuga : [nt.] a yoke; a pair; a couple; an age or generation.

honta : [pr.p. of hoti] existing.

dakkhieyya : [adj.] worthy of an offering.

sugata: [adj.] faring well; happy. (m.), the Buddha.

Savaka : [m.] a hearer; a disciple.

dinna: [pp. of deti] given; granted. (pp. of dadāti), given; offered; allowed; granted; handed over. :a. [〃dadāti dā の pp.] えられたる, , 所施. -ādāyin えられたるをる. -dāyin する, 施者.

phala: [nt.] fruit; nut; result; consequence; fruition; the blade of a weapon.

 

 

 

 

 

 

 

게송에서 사쌍으로 된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 여덟의 성자 (aṭṭhasata)에 대하여 찬탄하고 있다. 그들에게 공양(dakkhieyya)하고, 보시하면(dinna)  커다란 열매(mahapphalā)를 얻을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보통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성자인지 알 수 있는 방법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가서 도(magga)를 이루어 열매(phala)를 맺은 자들을 사쌍팔배의 성자라 한다. 그렇다면 사쌍팔배의 성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구분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언행이 일치하는가이다.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다면 언행일치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사기꾼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스승으로 삼고자 한다면 언행일치가 되어 있는지 가장 먼저 보라고 한다.

 

부처님의 제자중에 성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어느 단계에 들어 와 있는지 아는 방법이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리의 흐름에 든 경지를 향하는자(預流向, sotapattimagga)와 흐름의 경지에 도달한 자(預流果, sotapattiphala )를 첫째 흐름에 든 자(預流者. 수다원)라고 한다.

 

이들은 열 가지 장애 또는 결박 가운데

 

1)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有身見, sakkayaditthi),

2) 모든 일에 대한 의심(, vicikicca),

3)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戒禁取, silabhataparamasa)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천상에 갔다가 한번 돌아오는 경지를 향하는자(一來向, sakadagamimagga)와 한번 돌아오는 경지에 도달한 자(一來果, sakadagamiphala)는 한번 돌아오는 자(一來者. sakadagami)로서 열 가지 장애 가운데 위의 세 가지와 더불어

 

4)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欲貪, kamalaga)

5) 마음의 분노(有對, patigha)를 거의 끊어야 한다.

 

셋째, 천상에 가서 거기서 해탈되므로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향하는 자(不還向, anagamimagga)와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不還果, anagamiphala)는 돌아오지 않는 자(不還者. anagami)라고 불린다.

 

그들은 위의 다섯 가지 장애를 완전히 끊은 자이다.

 

넷째, 거룩한 이의 경지를 향하는 자(阿羅漢向, arahattamagga)와 거룩한 이의 경지에 도달한 자(阿羅漢果, arahattaphala)는 거룩한 이(阿羅漢, arahat)이라고 불린다.

 

위의 다섯 가지 장애는 물론

 

6) 형상에 대한 욕망(色貪, rupalaga)

7) 무형상에 대한 욕망(無色貪, aruparaga)

8) 자만하는 마음( : mana)

9) 흥분과 회한(掉擧惡作, uddhaccakukkucca)

10) 진리를 모르는 것(無明, avijja)을 벗어나기 시작했거나 완전히 벗어난 자를 말한다.

 

(전재성박사, 라따나경 각주)

 

 

이와 같이 열 가지 방법으로 어느 단계의 성자인지 알 수 있다.

 

참사람과 참모임

 

게송에서 참사람참모임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참사람에 대한 빠알리어는 삽뿌리사(sappurisa)이다. 라따나경 게송 8에 등장한다. 이 삽뿌리사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참사람이라고 번역하였다.

 

삽뿌리사에 대하여 한역경전에서는 선남자(善男子)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어근에 따른 번역이다. Sappurisa는   sat 와 purisa의 합성어인데. Sat가 존재하는, 진실한, 착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이라 하였고, purisa가 사람을 지칭하기 때문에 남자로 번역하여, 삽뿌리사에 대하여 선남자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5세기 스리랑카의 붓다고사는 삽뿌리사에 대하여 진리를 따르는 진실한 사람, 즉 선한 사람(kalyanapurisa) 로 정의 하였다고 한다. 이외 삽뿌리사에 대하여 덕인, 정인 등 여러가지로 번역되어 있지만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참사람에는 고귀한 제자들이 모두 포함되며, 네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의 무리를 지칭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루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사실은 참사람(삽뿌리사, sappurisa)은 사쌍팔배의 성자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참사람들의 모임이 참모임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참모임은 사쌍팔배의 성자의 모임, 즉 성스런 상가(聖僧伽)를 의미한다.

 

한국불교에서 스님은 승보

 

대승불교의 전통을 간직 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스님은 승보로서 간주 된다. 그래서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은 스님이면 불-법-승 삼보 중의 하나인 승보로서 예를 갖추는데 대표적으로 삼배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삼배를 올리는 것은 부처님에게 일 배 하고, 가르침에 일 배하고, 상가에 일배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처음 보는 스님일지라도 삼배를 올리는 것은 스님을 승보와 동격으로 여겨 스님을 승보로서 간주하여 절을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한국불교에서의 예법이다.

 

성승가(聖僧伽)가 승보인 이유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스님이라고 하여 모두 승보로 간주 되는 것은 아니다. 라따나경 게송에서와 같이 사쌍팔배의 성자가 승보로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사쌍팔배의 성자가 승보로서 간주 되는 것은 경전적 근거로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그는 어떠한 네 가지 흐름에 듦의 고리를 갖추고 있습니까? 장자여, 고귀한  제자는

 

1) 부처님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 존귀하신 님이다.’ 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고 있습니다.

 

2) 가르침에 대하여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치침이다 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고 있습니다.

 

3) 참모임에 대하여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은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고 있습니다.

 

4) 그리고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고 현명한 님들이 칭찬하는 파괴되지 않고, 균열되지 않고, 흠이 없고, 오점이 없고, 자유로 이끌고,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삼매로 이끄는 계행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네 가지 흐름에 듦의 고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빤짜바야웨라경-Pañcabhayaverasutta-The Five Fears –다섯 가지 두려운 원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41, S12.5.1, 전재성님역)

 

 

빤짜바야웨라경에 따르면, 세 번째가 승보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 니까야에서 정형화 되어 있는 승보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사쌍팔배의 성자가 공양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스런 상가의 모임에 공양하면 커다란 과보(mahapphalāni)를 받는다고 하였고, 사쌍팔배의 성자는 공덕을 짓는 복밭(puññakkhetta)이라 하였다.

 

밤 하늘의 영롱하게 빛나는 한 별

 

직장을 잃고 막막하던 시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인터넷 밖에 없었을 때 열심히 남의 글을 블로그에 담아 놓았다. 그 때 옮겨 놓은 것 중의 하나가 수타사의 여름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타사의 여름

 

대학시절의 이야기이다. 중간에 군대를 갔다와서 복학을 하고 어수선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돌아가는 모양은 아침부터 답답했다. 먹고 살아갈 걱정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을 열심히 찾던 시절이었다. 3년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서울에서 맞는 첫 여름은 하지만 초장부터 견디기 힘들었다. 기승을 더해가는 무더위는 낮은 골목 한 귀퉁이의 손바닥만한 자취방을 사방에서 옥죄고 있었다.

7
월이 거의 지나가던 어느 날, 책 몇 권 싸들고 고향 근처의 산사를 찾았다. 강원도 홍천의 공작산 산자락의 계곡에 자리잡은 수타사였다.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방향을 돌리면 백일홍과 봉선화가 핀 길 사이로 대웅전이 보이고, 그 뒤로는 참나무 숲이 감싸고 있는 적막하기만 한 산사였다.

수타사에 머무는 동안 가장 평화로왔던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절 뒤로는 긴 계곡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언제나 물에 발을 잠근 채 바위에 걸터앉아 시집을 읽곤 했다. 가지고 간 시집은 두 권이었다. 하나는 김현승의 시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경림의 시집이었다. 하루에 한 편 아니면 두 편 정도 읽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 거기에 새들이 지저귀고 매미들의 울음이 어우러지면, 바람이 옷깃을 파고 들어와 세상을 멀리 데리고 갔다. 시 한 편에 두어 시간 자신을 놓아버린 적도 많았다.

 

밤이 되면 언제나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앞산 중턱에서 오는 쉬임없는 목탁소리였다.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 소리는 낮에도 쉬지 않고 들려왔다. 숲에 가려 그 소리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소리를 내는 주인공이 궁금해졌다. 어느 날 그 소리의 주인공을 보게 되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의 스님이었다. 먹을 것을 가지러 잠시 산밑의 절로 내려온 터였다. 바랑을 짊어지고 산 위로 사라진 후, 이내 목탁소리가 또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안거였다. 스님들에게 있어선 자기 수련의 기간인 것이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밤낮으로 두드리는 저 목탁소리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라도 내리는 밤에 들으면 잠 못이룰 정도로 슬픔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산 속에서 왜 그 스님은 밤낮으로 목탁을 두드려야만 하는 것일까. 의문은 언제나 며칠을 가지 못했지만, 그 목탁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다. 산사의 밤과 낮은 흘러가기만 했다.

어느 날 목탁소리가 그쳤다. 스님이 내려오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하안거가 끝난 날이란다. 절에서는 초두부를 치고, 찹쌀밥을 했다. 말없이 돌아 앉아 음식을 들었지만 그 목탁 스님은 끝내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 잠시 후 간단한 짐을 싸든 그 스님은 코스모스길을 뒤로 한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해서 끝난 한 여름이었다.

깊은 산속 암자에서 모든 인연을 끊고 자기 수련에 매진하는 스님들, 그들은 세상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돌아오는 버스의 라디오에서는 현재의 경제가 어떻다고 전하고 있었다. 한 달만에 다시 보는 서울의 거리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저 아득히 먼 동굴 속에서 좌선에 매진하고, 불경을 공부하고, 목탁을 치는 그들은 이러한 세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에 젖을수록 무언가 시원하고 맑아지는 느낌이 밀려왔다. 그렇다. 밤 하늘의 빛나는 별이다. 여름 밤,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별들이 늘 있었다. 별들은 하늘에 있을 뿐으로 하늘 아래 인간들의 가슴을 쓸어주고, 지치고 외로운 영혼들에게 희망을 준다. 수타사 앞 산에서 여름 내내 목탁을 치던 무언의 그 스님은 밤 하늘의 영롱하게 빛나는 한 별이었던 것이다. 별은 그냥 있음으로 인해 그 소명을 다한다. 지금쯤 산사의 밤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을까.

종교신문, 1350
/
허 남 린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대학 교수.종교학>
( 2003/02/27  15:04  )

 

 

 

강원도 홍천 수타사

 

 

글을 쓴 이에 따르면, 수타사에서 목탁을 치던 스님에 대하여 별로 비유하였다. 누가 알아 주건 말건 깊은 산속에서 자신의 할 바를 다하는 이름 모를 스님의 모습을 밤하늘에 떠 있는 영롱한 별로 묘사 한 것이다.

 

그 많던 비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마성스님의 글에서 그 많던 비구들은 다 어디갔을까?”라는 취지의 글을 읽었다.  부처님이래 깨달음을 찾아 수 없이 많은 비구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는데, 과연 그들은 목적을 이루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글이다. 깨닫기 위해서 출가 하였으나 깨달음과 정 반대의 길을 간다거나, 심지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언지 모르는 스님이 있을 수 있다는 안타까움이 베어 있다.

 

스님은 어느 노비구니스님의 니까야가 뭐꼬?”라는 말을 예로 들었다. 깨닫기 위하여 출가하였으나 부처님의 원래의 말씀이 무언지도 모르고 한 평생 살다갈 것 같은 노비구니스님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몸은 출가하여 절에 살지만 정법을 만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죽으면 얼마나 허무하겟는가?”라고 안쓰러워 한다.

 

정법을 모르고, 부처님 말씀을 모르고 한 평생 절에서 살다간 수 많은 스님들이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고 살다간 수 없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서 오욕락을 추구 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가 있을까?

 

 

2013-03-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