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현세열반론(ditthadhamma)과 단멸론자들의 낭패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3. 14:31

 

 

현세열반론(ditthadhamma)과 단멸론자들의 낭패

 

 

 

“줬잖아!”

 

오래 전의 일이다. 직장 초년 시절에 동료가 있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몇 만원을 빌려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줄 때가 되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여러 번 망설이다 빌려 준 돈을 돌려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며 눈을 크게 부라리며 “줬잖아!”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멍~’하였다. 내가 진짜 돈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큰돈도 아니고 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일로 하여 그 친구만 생각하면 “줬잖아!”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고, 지금까지 그때 당시 그 친구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가 떠 오른다.

 

빌려 준 돈 몇 만원은 큰 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돈에 대한 집착이고, 또 하나는 미결된 문제라는 것이다.

 

돈에 대한 집착

 

집착 중에 가장 큰 집착이 아마도 일 것이다. 그런 돈에 대한 집착에 대한 좋은 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도 나와 있다. 언젠가 읽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말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잊을 수 있어도 빌려 준 돈에 대한 사람은 잊을 수 없다라는 취지의 글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잊혀 질 수 있지만, 나의 돈을 떼먹은 자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돈에 대한 집착은 늙어 병들어 임종의 그 순간까지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의 이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손해 본 것에 대하여 결코 잊을 수 없고, 손해 본 것이 해소 되어야만 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국민정서법(國民情緖法)

 

최근 공무원연금에 대한 글로 인하여 여러가지 댓글을 많이 받는다. 크게 공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공감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게 현직 공무원들이 대부분이다. 실상을 제대로 모른다거나 공무원연금개혁은 이미 끝난사항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과도하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불편하게생각한다. 이런 경향은 국가에서 녹을 받아 먹고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다. 그래서 공무원연금이 고갈 되었을 때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아전인수격 주장이다. 설령 법적으로 문제가 없을지라도 국민정서상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적게 내고 많이 타가는 구조, 국민연금 보다 2.5배 높은 구조, 유산처럼 상속 되는 구조에 대하여 국민이 이를 안다면 틀림 없이 마음속으로 도둑놈들!”하고 내 뱉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정서법(國民情緖法)’에 따르면 현재 공무원연금수령자들은 모두 투도죄(偸盜罪)를 짓고 있는 것이다.

 

모든 법중에 가장 무서운 법이 국민정서법이라 한다. 비록 성문화 되어 있지 않지만 한 나라의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정적인 기질이나 성향이 반영된 법이다. 예를 들어 상속 재산 70억원 이상인 부자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는 법이 있다고 하면 이는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국민들이 마음으로부터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였다.

 

김지하의 오적(五賊)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도둑질이라 한다. 비록 직접적으로 훔치지 않았지만 법적 또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고 합법적으로 가져 간다고 해도 도둑놈으로 보는 것이다. 대게 힘 있는 자들이 써 먹는 수법이다. 그래서 70년대 저항시인 김지하는 이를 오적(五賊)’이라 하였다. 오적은 어떤 부류의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오적시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쬭

남북간에 오종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 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소굴이렷다.

 

(김지하, 五賊)

 

 

 

 

 

 

오적(五賊)

 

 

김지하 시인이 말하는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임을 알 수 있다. 시를 보면 이들 오적들은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라고 표현 하였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힘있는 자들은  법과 제도로 합법적으로 챙겨 가는 것 뿐만 아니라, 각종 청탁 등에 의한 봉투, 이권 개입에 따른 불로소득 등으로 인하여 부자가 되었다. 불법과 탈법, 부정과 부패로 부를 축적한 부류에 대하여 도적들과 같다고 하였다.

 

오적의 수혜자들

 

김지하 시인이 언급한 오적을 보면 대부분 공무원들이다. 국가에서 녹을 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탐욕이 끝이 없어서 자신들의 노후대책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신분보장, 정년보장, 연금보장, 유족연금으로 대표 되는 완벽한 복지시스템을 구현해 놓은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에 따라 하위직 또한 혜택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의 시험 통과로 인하여 평생 먹고 살 걱정하지 않게 되고, 노후까지 보장 되고, 게다가 유산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교사, 군인, 경찰 등 수 많은 공무원들이 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의 수혜자가 된 것이다.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도둑질 하는 것은 오계를 범하는 일이다. 비록 오계를 준수 하는 것이 강제성은 없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지켜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행위, 사랑을 나눔에 있어서 잘못을 범하는 행위, 거짓말을 하는 행위, 곡주나 과일주등 취하는 것을 마시는 행위가 다섯가지 잘못을 범하는 것인데. 이런 잘못을 범하면 반드시 악처에 떨어진다고 경전에 표현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계를 범하면 어떤 고통을 받게 될까.

 

맛지마니까야에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 sutta,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M129)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 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 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29, 전재성님역)

 

 

다른 것은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 완전범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그 범죄행위는 자신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라고 표현 하였다. 이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라는 표현이 빠알리어로 “olambanti, ajjholambanti, abhippalambanti”이다.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각주에 따르면 ‘죄의식’을 가장 구상적으로 보여 주는 탁월한 방식이라 한다.

 

잘못을 범하면 죄의식에 시달린다. 완전범죄자일지라도 이런 심리는 피해 갈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걸리고(olambanti), 매달리고(ajjholambanti),  드리워진다(abhippalambanti)”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극적인 표현이 ‘산그늘의 비유’라 볼 수 있다.

 

늘 엄습하는 죄의식

 

갈 길이 먼 나그네가 있다. 그런데 해가 지려 한다. 해가 넘어 가려 할 때 길게 산그림자가 질 것이다. 이때 나그네의 마음은 어떨까. 산그림자가 진다는 것은 머지 않아 천지가 어둠으로 덥힌 다는 것을 말한다. 갈 길이 먼 나그네에 있어서 결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악행을 많이 저질러 왔다.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등의 악행을 많이 저질러 온 그의 마음 한켠에는 늘 악행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다. 그래서 종종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자리에 누우려 할 때도, 의자에 앉으려 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생각이 나는 것이다. 이는 죄의식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죄의식이 늘 엄습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져서 비록 호의호식 하고 있을지라도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도둑질에 대한 죄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자는 주지 않은 것을 빼앗음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S12:4)”라 하였다. 죄의식으로 인하여 현생에서도 고통받고, 더구나 내생에서도 고통받을 것이라 한다. 도둑질 함으로 인하여 이 세상과 저 세상, 양쪽 세상에서 모두 고통받는 것이다.

 

임종직전에 보는 것

 

이와 같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면 악처에 태어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에 대한 좀 더 극적인 이야기가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paticcasamuppada)’ 법문집에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임종 때 가지는 이러한 생각의 대상을 태어날 곳(gati-nimitta)의 표상이라고 하고, 업과 관련된 대상의 표상을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라고 합니다.

임종할 때의 현상들에 대한 언급은 주석서뿐만 아니라 빨리성전에서도 발견됩니다.  ‘중부’ ‘우현경(愚賢經 Balapandita Sutta)’ (M129)과 그 밖의 다른 경들에서 부처님께서는 임종 때의 선행이나 악행에 대한 기억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저녁때 들판에 드리워진 산의 그림자로 비유하셨습니다. 그것은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마하시사야도, 십이연기(paticcasamuppada) 법문집)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를 접한 것은 지난 2009년도의 일이다. 약 1년간 매주 토요일 저녁 50회에 걸쳐 접하였다. 이 법문집으로 인하여 불교의 진수를 알게 되었다. 모든 테라와다 법사들이 그렇듯이 빠알리 니까야와 청정도론, 아비담마에 근거한 법문을 하는데, 빠띳짜사뭅빠다 역시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근거한 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문집에서 임종의 순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누구나 맞게 되는 마지막 순간 죽음의 마음이 일어 나는데, 그 때 세 가지 마음이 일어난 다고 하였다. 업의 표상태어날 곳의 표상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나 다음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음생이 시작 되는 첫 마음이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그래서 죽음의 마음에 이어 곧바로 일어나는 것이 재생의 마음인데, 이와 같은 연기적 작용에 따라 중음신은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죽자 마자 곧바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 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이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다. 핵심은 이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늘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자라면 그 죄의식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 까지도 자신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라 한다. 그 것이 업이고, 그 업에 대한 표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여 완전범죄를 저지를 자라고 할지라도 경에서와 같이,  앉으나 서나 저녁 무렵 산그늘 처럼 늘 걸리고(olambanti), 매달리고(ajjholambanti),  드리워(abhippalambanti)질 것이기 때문에, 다음 생을 결정할 살인 업에 대한 표상이 그를 엄습할 것이라는 말이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끔찍하고 잔인한 살인의 장면이 그를 엄습한다면, 그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이 일어 날 것이기 때문에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 한다.

 

죽어서 돌아 온 자가 업기에

 

어떤 이는 말한다. 죽어 보지도 않은 자가 죽음이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 온 자가 업기에 죽음 이후에 말을 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 이후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부분의 종교가 죽음 이후에 대하여 말한다. 죽어서 천당이나 극락과 같은 세상이다. 마치 가 본 것 처럼 이야기 하는 성직자들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실감나게 이야기 하는지 모른다. 그런 천국과 천상, 극락 또는 지옥과 같은 세상은 실재하는 것일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내생을 믿는 자들이고, 또 한 부류는 믿지 않는 자들이다. 전자를 영원주의자라 볼 수 있고, 후자를 단멸론자라 볼 수 있다. 이 경우 죽었을 경우 어느 쪽이 유리할까?

 

만일 천상도 지옥도 없다고 믿는 자들이 죽었다고 하자. 진짜 그의 말대로 내생이 없다면 그의 믿음은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런데 천상과 지옥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는 죽어서 낭패 볼 것임에 틀림 없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내생을 믿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래서 영원론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교회 목사들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종종 사용한다고 한다. 일요일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것 처럼, 벌 받을 것처럼 심적 부담을 주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

 

나중에 우연히 검색을 통하여 안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를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라 한다. 파스칼의 내기란 무엇일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파스칼의 내기란 볼레즈 파스칼이 주장한 ‘기독교 변증론’이라 한다.

 

기독교의 변증론이란 기독교 사상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을 말한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보면 1세기 바울의 변증법, 가정법등을 말하는데 고대 그리스 문학을 활용하여 기독교사상을 해명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파스칼의 내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위키백과의 내용을 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이 있을 경우

신이 없을 경우

신을 믿을 경우

천국

이득 없음

신을 믿지 않을 경우

지옥

이득 없음

결론

신을 믿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이득이다

(출처: 위키백과, 파스칼의 내기)

 

 

 

표를 보면 결론적으로 신을 믿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이득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기독교 변증법적 논리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위키백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첫째,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경우의 수를 언급하며 각 상황에 따른 득실을 말하는 것일 뿐, 신이 존재한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고로 파스칼의 내기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신을 믿는 사람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신의 속성을 하나로 단정하고 있다.

 

파스칼의 내기에서는 '자신을 믿는 자를 천국에 보내는 신'만을 가정하고 있다. 흔히 신을 인간의 시선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즉,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신이 자신을 믿는 자를 천국에 보낸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자신을 믿는 자를 천국에 보내는 신'을 가정한다면, 동시에 '자신을 믿는 자를 지옥에 보내는 신'과 '자신을 믿든 말든 관여하지 않는 신' 등을 함께 가정해야한다. '자신을 믿는 자를 천국에 보내는 신'만을 가정하는 것은, 상황을 유리하게 보고자 하는 생각일 뿐이다.

 

셋째, 신이 있을 확률을 제시하지 못한다.

 

신이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므로, 당연히 신이 있을 확률 역시 제시할 수 없다. 고로 파스칼의 내기에 따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만, 지극히 미약한 가능성에 매달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믿는 자를 지옥에 보내는 신'을 함께 가정한다면, 신을 믿는 것이 그렇게 유리한 것도 아니라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넷째, 신앙을 수단화한다.

 

신이 있고 신이 인간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세의 행복을 위해서 신을 따르는 것이 된다. 신은, 특히 기독교의 신은 단지 자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천국에 보내주지는 않는다. 천국에 가기 위해 신을 믿는다 하더라도, 신이 천국에 보내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다섯째, 신이 없을 경우 단순히 이득이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십일조를 요구하지 않는 종파도 있지만, 요구하는 종파도 있다. 요구하지 않는 종파라 하더라도 각종 헌금을 요구한다. 기독교 이외에도 여러 종교집단에서 현세와 내세에서의 행복을 보장한다며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신을 믿음으로 인해 금전적인 손해를 보는 것이다. 종교집회에 참여하는 등으로 인해 시간의 손해를 보게되기도 한다. 병에 걸렸을 때 병원에서의 치료를 받지 않고 기도만을 하거나, 교리에 따라 수혈을 하지 않도록 하여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경우는 신을 믿을 경우 발생하는 손해를 보여주는 강렬한 예시다. 이렇게 신을 믿는 사람들이 손해를 볼 때,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위키백과, 파스칼의 내기)

 

 

파스칼의 내기를 보면 목사들이 교회에 더 자주 나오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파스칼의 내기와 유사한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에 있다는 사실이다. 2500년전 부처님 당시 부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에서

 

맛지마니까야에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M60)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이라도 있습니까?”

 

[장자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도 없습니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들이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꼬살라국을 유행하다가 ‘살라’라고 하는 바라문 마을에서 장자들과 나눈 대화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기존 바라문 사상 뿐만 아니라 육사외도라 불리우는 각종 사상이 난무하였다. 이처럼 각종 사상이 난무하자 사람들은 어느 가르침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바라문 장자들이 어떠한 스승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믿고 따를 수 없는 스승이 없다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라고 말한다. 그 가르침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수 많은 가르침이 있다.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대부분 자신들의 이야기 뿐이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깨달은 자가 아닌듯이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그러다 보니 신도한테 들은 이야기가 법문이 되고 자신의 신변 이야기 역시 법문이 된다. 그런 이야기에 대하여 신도들은 인내를 가지고 듣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모두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설령 조사스님이 말한 선어록일지라도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에 근거하지 않으면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불자들은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승이 없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가르침 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아빤나경에서도 역시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부처님의 가르침이 스승이라 하였다. 그런 가르침을 실천하면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펼치신 것일까?

 

유물론적 단멸주의자들의 견해

 

먼저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적 허무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세존]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사유를 한다면, 그는 잘못된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언어를 말한다면, 그는 잘못된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세계를 아는 거룩한 이들에게 적대하는 것이 됩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면서 스스로를 칭찬하고 남을 비난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악한 계행을 실천하며 앞서 있었던 선한 계행을 버립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거룩한 이에 대한 적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줌,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이러한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잘못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허무주의자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내생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업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였다. 그래서 항상 그들은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설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고 하였다. 한 세상 즐겁게 살다고 죽으면 그만 이라는 단멸론적 견해이다.

 

이런 단멸견은 모든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고, 오로지 현세의 쾌락만을 추구하므로 최악의 견해로 간주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저 세상, 즉 내생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믿는 단멸견에 대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 하였다.

 

단멸론자들의 낭패

 

그리고 잘못된 견해에서 생겨난 것이라 하였다. 이런 삿된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그 어떤 논리로도 깨뜨릴 수 없는 가르침을 설한다.

 

 

[세존]

장자들이여, 이것에 대하여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마치 파스칼의 내기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파스칼의 내기와 다른 것이 있다면 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단멸론을 논파 하기 위하여 내생과 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부처님은 두 가지를 가정하고 있다. 저 세상, 즉 내생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대한 것이다. 만일 내생이 없다면 단멸론자들에게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내생이 있을 경우 단멸론자는 낭패를 당할 것이다. 내생을 부정하고 오로지 현생에서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산 결과 계행이 지켜 지지 않음에 따라 악행에 따른 과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세열반론(ditthadhamma)

 

단멸론적 허무주의는 최악의 삿된 견해이다. 이와 못지 않은 삿된 견해가 또 있다. 현세열반론자들이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 따르면 부처님은 62가지 사견 중에 현세열반론(ditthadhamma)’에 대하여 다섯가지를 지목하였다. 그 중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a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범망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딧따담마(ditthadhamma)라 불리우는 용어는 현세열반(現世涅槃)’ 또는 현법열반(現法涅槃)’으로 번역된다. 이 몸을 가진 현세에서,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에 따른 열반의 실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 하신 열반과는 다른 열반, 유사열반, 삿된열반인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오욕락의 추구이다.

 

현세열반론자들이 주장하는 삿된 견해 중의 하나가 지금 여기에서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열반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을 추구하는 오욕락(五慾樂)’을 추구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나랏돈을 도둑질하는

 

누구나 맛있는 음식, 보드라운 잠자리, 이를 충족할 재물을 원한다. 비록 직접적으로 훔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힘 있는 자들이 법과 제도를 이용하여 나랏돈을  마치 제돈 쓰듯이 가져 가는 것도 식욕, 성욕, 물욕과 같은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늙어 죽을 때 까지 호의호식하며 풍족한 노후를 즐길 수 있도록, 천상과 같은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공무원연금이 대표적이다.

 

이것도 모자라 마치 유산처럼 상속할 수 있도록 ‘유족연금 제도’도 만들어 놓았다. 공무원연금 월 평균 수령액이 273만원이라면, 이에 60%를 유족이 타갈 수 있게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273만에 60%라면 164만원이다. 600만 비정규직 평균임금 124만원 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다. 이를 연 3%대의 이율로 계산한다면 무려 6억원을 유산으로 남겨 주는 효과와 같다. 바로 이런 점이 나랏돈을 ‘도둑질’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 편승하여 단지 국가에서 녹을 먹었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모두 불로소득의 혜택을 받기에 이르렀다. 과거 권위 주의 정권 시절 오적이라 불리우던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동급’이 되어 버렸다.

 

지금 여기서 오욕락을 마음껏 즐기는 자들

 

도둑질한 죄는 피할 수 없다. 아무리 법과 제도에 따른 정당한 것일지라도 국민정서법상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계를 어기면 항상 걸리고(olambanti), 매달리고(ajjholambanti),  드리워진다(abhippalambanti)”라는 죄의식을 피해 갈 수 없듯이, 오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비록 현세에서 천상과 같은 삶을 살지라도 내생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오계를 어기며 내세를 부정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다음 세상에서도 고통받는 다고 하였다.

 

지금 여기서 오욕락을 마음껏 즐기는 자 중에 내세가 없다고 주장할는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M60)”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더 불행하게도 내생이 있다면 설상가상이 되기 쉽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법과 탈법과 불로소득에 따라 온갖 악행을 저지른자 들은 내생이 없다면 현자들에게 비난받고, 내생이 있다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를 그 어떤 논리로도 부술 수 없기 때문에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 하였다.

 

 

 

2013-03-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