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적정의 맛, 법구경판 행복경 수카왁가(Sukhavagga)3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27. 18:22

 

적정의 맛, 법구경판 행복경 수카왁가(Sukhavagga)3

 

 

 

당신 뜻대로

 

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수 많은 고통을 받는다. 그런 고통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있지만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고통이라 하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사람들은 무엇에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에게 의지하기도 한다. 의지한다기보다 떠 넘긴다는 것이 적합한 표현인지 모른다. 그래서 신의 뜻대로” “인샬라” “당신 뜻대로라는 표현이 나왔을 것이다. 불자들 역시 말끝 마다 관세음보살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밍크코트 입은 사람만 상대한다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진다. 그래서 절을 찾거나 교회, 성당을 찾는다. 스님에게, 목사에게, 신부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해답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본다.

 

어느 불자는 여기 스님은 모두 밍크코트 입은 사람만 상대 하는데 난 능력이 없고 보시도 못하니 조용히 법당에 앉았다 그냥 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물질위주의 사회에서 성직자를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 가도 부처님만 보고 가지 스님은 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심지어 부담 없는 점집에 가서 해법을 찾는 것이 더 나을 지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초기경전을 떠 들어 보는 것 만큼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경전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법구경의 게송만 읽어 보아도 이미 마음의 평정을 이룬 것이나 다름 없다.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리는 탐욕의 불길

 

법구경 안락의 품(Sukhavagga)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여섯 번째 게송이다.

 

 

Natthi rāgasamo aggi                  낫티 라가사모 악기

natthi dosasamo kali,                 낫티 도사사모 깔리

Natthi khandhasamā dukkhā             낫티 칸다사마 둑카

natthi santipara sukha            낫티 산띠빠랑 수캉

 

탐욕에 비길 불은 없고

성냄에 비길 죄악은 없다.

존재의 다발에 비길 고통은 없고

적정보다 나은 안락은 없다.(Dhp 202, 전재성님역)

 

 

 

calm_water

 

 

 

왜 탐욕(rāga)에 비길 불이 없다고 하였을까. 각주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불이 붙으면 불은 보이지 않지만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연료도 없고 불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스스로 일어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태워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의 불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

 

성냄(dosa)에 대해서는 죄악(kali)으로 비유 하였다. 깔리(kali)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패배(defeat), 불운(bad luck), 죄(sin)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또 사악하다는 의미도 있는데 온갖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사실은 화를 낸다든가 증오한다든가 적대감을 품는 것은 ‘파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화를 내면 이제까지 쌓은 공덕이 한 순간에 파괴 된다고 한다.

 

게송에서는 탐욕에 대하여 불로 비유하고, 성냄에 대해서 죄악으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욕심부리고 화를 내는 자는 스스로 망하는 길로, 고통의 길로 갈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 바탕에는 오온에 대하여 내것으로 여기는 바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고통을 여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반을 얻는 것이라 하였다. 게송에서는 이를 적정(santi)으로 표현하였다. 적정, 적멸은 열반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고요함에 이르렀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황제 같은 식사를 즐겼더라도

 

안락의 품, 일곱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Jighacchāparamā rogā           지갓차빠라마 로가

sakhāraparamā dukhā           상카라빠라마 둑카

Eta ñatvā yathābhūta        에땅 냐뜨와 야타부땅

nibbāaparama sukha         닙바나빠라망 수캉

 

굶주림은 가장 심각한 질병이고

형성된 것들은 극심한 고통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면,

열반 곧, 위없는 지복을 얻는다. (Dhp 203, 전재성님역)

 

 

배고픔에 대하여 왜 가장 심각한 병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른 질병은 의학적으로 치료하여 증상을 감소 시키거나 퇴치 할 수 있지만 굶주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끊임 없이 치유 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어떤 다른 질병 보다 심각한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배불리 양껏 먹지만 불과 대여섯시간 되면 허기가 진다. 조금만 더 지나만 배가 고파 못살 지경이 된다. 아무리 황제 같은 식사를 즐겼더라도 한 끼만 굶으면 못 살 것 같이 고통스러워 한다. 이는 우리의 몸이 그렇게 형성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성된 것(sakhāra) 자체가 극심한 고통이고 질병이라고 본다.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알았을 때 (ñatvā) 열반(nibbāa)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열반 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nibbāaparama sukha)’ 고 하였다.

 

건강이 왜 최상의 이익일까

 

안락의 품, 여덟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Ārogyaparamā lābhā                    아로기야빠라마 라바

santuṭṭhiparama dhana              산뜻티빠라망 다낭

Vissāsaparamā ñātī                    윗사사빠라마 냐띠

nibbāaparama sukha                닙바나빠라망 수캉

 

건강이 최상의 이익이고

만족이 최상의 재보이고

신뢰가 최상의 친구이고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Dhp 204, 전재성님역)

 

 

건강이 왜 최상의 이익일까. 각주에 따르면 병든 사람에게는 현존 하는 이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이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병이 들어 있을 때 백만금, 천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결코 이익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건강한 자는 한 푼도 가지지 못한 자일지라도 천하를 가진 것과 같음을 말한다.

 

만족(santuṭṭhi)이 왜 최상의 재보(dhana)라 하였을까. 각주에 따르면, 재가자나 출가자나 자신이 소유한 것에 흡족해 하면 그것이 만족이라 하였다. 소욕지족을 말한다. 현재 있는 조건에 만족한 삶이다. 그래서 더 이상 바라지 않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다. 이는 소유하기 보다 욕구를 낮추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욕구를 낮추면 낮출수록 행복지수는 더욱 더 높아져서 만족한 삶을 살게 됨을 말한다.

 

신뢰가 최상의 친구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각주에 따르면, 아버지나 어머니일지라도 신뢰가 없는 사람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그래서 친척이 아니더라도 신뢰가 있는 사람이 최상의 친척이라 한다. 이와 같이 건강과 만족과 신뢰를 동원한 것은 열반이 최상의 행복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세 가지의 맛이 있는데

 

안락의 품, 아홉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Pavivekarasa pītvā                  빠위웨까라상 삐뜨와

rasa upasamassa ca                  라상 우빠사맛사 짜

Niddaro hoti nippāpo                  닛다로 호띠 닙빠뽀

dhammapītirasa piba                담마빠띠라상 삐방

 

멀리 여읨의 맛을 보고

적정의 맛을 보고

진리의 기쁨의 맛을 본 사람은

악을 여의고 고뇌를 여읜다. (Dhp 205, 전재성님역)

 

 

 세 가지 맛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멀리 여읨의 맛, 적정의 맛, 진리의 기쁨의 맛이다. 각주에 따르면, 멀리 여읨의 맛은 행복의 맛이고, 적정의 맛은 번뇌가 소멸한 열반의 맛이라 하였다. 진리의 기쁨의 맛(dhammapītirasa)은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의 성취에서 생겨난 기쁨을 말한다. 한마디로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정형구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sabbasakhāresu nibbinditu, ala virajjitu, ala vimuccitunti)”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왜 싫어 하여 떠나기를 바라는 것일까. 둑가따경(S15:11)에서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켜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모든 것들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서 멀리 여읨과 열반의 맛을 보았을 때, 그 공덕으로 인한 번뇌를 부수었기 때문에 수행승은 모든 악(pāpa)과 고뇌(dara)를 여윌 것이라 한다.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이 생길 때

 

절에 가면 법당에서 열심히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말을 들어 보면 마음이 답답해서 절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스님들은 절을 하라고 말한다. 108배가 대표적이다. 그냥 절하면 굴신운동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참회 하며 절하라고 한다. 그렇게 한바탕 절을 하고 나면 후련해진다고 한다.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답답할 때 절하는 것도 좋지만 경전을 열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경전의 문구를 통하여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법구경이 그렇다. 법구경의 어느 게송을 보아도 지금 상황에 대한 답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의 한마디 한마디에 공감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 간다.

 

그런 문구 중에 여읨이라는 말이 있다. 부정 접두어 a ni가 들어간 빠알리어이다. 그래서 모두 놓아 버렸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적정(santi) 또는 열반(nibbāa)이라고 표현하였다. 고요하여 적멸에 이른 상태, 이 상태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런 행복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감고 오감을 차단한다. 단지 일어나는 생각을 차단할 수 없기 때문에 호흡이나 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리고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지켜 본다. 단지 그것 뿐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다른 생각이 일어 나지 않기 때문에 괴롭지 않은 것이다. 그 상태가 고요한 상태, 적정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때 마치 잠을 잔 것 같다. 깊은 잠을 자고 깨었을 때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듯이, 고요함은 마음의 고향이고 생명의 원천과 같음을 알 수 있다.

 

 

 

2013-02-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