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자” 법구경판 행복경 수카왁가(Sukhavagga)4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28. 14:59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자 법구경판 행복경 수카왁가(Sukhavagga)4

 

 

 

수행처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미얀마에서 어느 수행자가 유명한 사야도를 친견할 자리를 가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물어 볼 내용을 준비 해 간 것이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질문하려 하였으나 단 한 마디도 물어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굳이 물어 보지 않아도 사야도와 함께 있는 것 만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라 한다.

 

함께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 이러 저러한 말이 필요 없이 한 공간에서 호흡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만일 그 자리에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만일 그 자리에 아라한이 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같이 있는 것 만으로도 일시적으로 마음의 청정이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반면 싫어 하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악한 자와 함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한 마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불편할 것임에 틀림 없다. 더구나 적과 함께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지 모른다.

 

바라만 보기도 해도 좋은 사람

 

법구경 안락의 품(Sukhavagga)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āhu dassanam-ariyāna         사후 닷사나마리야낭

sannivāso sadā sukho            산니와소 사다 수코

Adassanena bālāna             아닷사네나 발라낭

niccam-eva sukhī siyā.          닛짜메와 수키 시야

 

고귀한 사람은 만나면 좋고

함께 지내면 언제나 행복하다.

어리석은 자들을 멀리 여의면,

언제나 행복을 얻으리. (Dhp 206, 전재성님역)

 

 

고귀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고, 함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고귀한 사람은 빠알리어로 아리야(ariya)’이다. 아리야는 일반적으로 성자를 뜻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고귀한 분이다. 수다원 이상의 성자로서, 승보로서 귀의의 대상이다.

 

이런 성자는 현자를 뜻하는 빤디따(paṇḍita)’와 다르다.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로 구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빤디따는 이치에 밝은 사람(a wise man)이라는 뜻이 강하지만 아리야의 경우 도(, magga)를 이루어 열매(, phala)를 맺은 성자를 뜻한다.  따라서 고귀한 자라고 번역된 아리야는 승보로서 뭇삶들의 의지처가 된다. 그런 성자를 친견한다는 것은 굳이 물어 보지 않아도, 질문 하지 않아도, 쳐다 보는 것(dassana)만 으로도 좋기(Sāhu) 때문에 이미 희열과 행복과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마냥 바라만 보고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상사병(相思病) 난 듯이

 

부처님의 제자중에 왁깔리( Vakkali)존자가 있었다. 왁깔리는 바라문 가문 출신으로서 부처님의 모습 보기를 좋아 하였다. 부처님의 아름다운 용모를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부처님이 설법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기 보다 32 80종호로 대표되는 부처님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하여 쳐다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식사도 목욕도 잊은 채 부처님의 모습을 표상으로 취하여 명상하였다. 그런 왁깔리에게 부처님이 물었다.

 

 

[세존]

“박깔리여, 어떠한 가책이 될 만한 일이라도 한적이 있는가? 어떠한 후회가 될 만한 일이라도 한적이 있지 않는가?”

 

[박깔리]

“세존이시여, 실로 가책이 될 만한 일이 적지 않고 후회가 될 만한 일이 적지 않습니다.”

 

[세존]

“박깔리여,

그대가 계행을 실천함에 스스로를 욕되게 한 적이 없는가?”

 

[박깔리]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을 실천하는데 스스로를 욕되게 한 적이 없습니다.”

 

[세존]

“박깔리여,

그대가 계행을 실천함에 스스로를 욕되게 한 적이 없다면, 그대에게 어떠한 가책이 있고 어떠한 후회가 있단 말인가?”

 

[박깔리]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길 바랬으나 세존을 친견할 만큼 몸에 기력조차 없습니다.”

 

[세존]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 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왁깔리경-Vakkali sutta-박깔리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7, 전재성님역)

 

 

왁깔리가 드러 누운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상사병(相思病)이 난 듯 하다. 상사병이란 남녀간에 몹시 그리워하여 생기는 병을 말한다. 상사병이 나면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하는데, 왁깔리는 부처님의 상호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루 종일 상호에 대한 표상을 취한 결과 병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문병온 것이다. 꿈에 그리던 부처님을 직접 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 왁깔리에게 부처님은 양심에 가책되고 후회할 만한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이에 대하여 왁깔리는 분명하게 오랫동안 부처님을 친견하기를 바랬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기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왁깔리는 부처님의 외모에 반하여 병이 걸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왁깔리에게 부처님은 외모로 부처님의 모습을 보지 말고 진리의 몸으로서 부처님을 보라고 말한다. 이것이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이다. ‘만약에 색()으로서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는 사도(邪道)를 행하는 사람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리는 뜻이다.

 

이처럼 금강경 사구게의 원형으로 보이는 이야기가 왁깔리경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진리의 몸, 즉 법신을 보는 자는 진리를 볼 수 있다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 고 하였다. 부서져 버리고 말 외모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몸 그 자체인 법신으로서 부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의 몸으로서 부처님의 법신은 후에 법신불(法身佛)’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와 함께 길을 가면

 

이와 같이 바라만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 불편한 사람도 있다. 왠지 거북하고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다.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고 느끼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의 사람이다. 더구나 원수 같은 자와 함께 함께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법구경 안락의 품(Sukhavagga)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Bālasagatacārī hi             발라상가따짜리 히

dīgham-addhāna socati          디가맛다나 소짜띠

Dukkho bālehi savāso          둑코 발레히 상와소

amitteneva sabbadā              아밋떼네와 삽바다

Dhīro ca sukhasavāso          디로 짜 수카상와소

ñātīna va samāgamo            냐띠낭 와 사마가모

 

어리석은 자와 함께 걷는 자는

오랜 세월 비탄에 젖는다.

어리석은 자와 같이 살면

적과 함께 하듯 언제나 괴롭다.

현명한 자와 같이 살면

친족과 함께 하듯 즐겁다. (Dhp 207, 전재성님역)

 

 

어리석은 자(Bāla)와 함께 길을 가면(sagata) 비탄에 젖는다(socati)’ 고 하였다. 왜 그럴까? 각주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와 함께 유행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에 의해서 집에 침입하여 도둑질 하자는 등의 강요를 받아 그와 동일한 자가 되어 악행을 저지르고 손발이 잘리는 등의 오랜 세월의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라 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도반을 잘 못 만났을 때 도둑놈, 강도,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더 고통스런 것은 어리석은 자와 항상 함께 하는 것(sabbadā), 또는 함께 사는 것이라 한다. 마치 원수(amitta)와 사는 것 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라 한다. 이런 예는 가족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걸망을 꾸린다’는 말이 있다. 이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법정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의자’에서 법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만 믿고 살라는 거에요. 중, 믿을 것 못 돼요. 누가 되었든 자기 집도 버리고 떠나온 놈을 어떻게 믿어?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법정스님, 법정스님 의자)

 

 

법정스님은 ‘스님을 믿지 말라’고 하였다. 부모와 형제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떠나 사람이기에 언제 든지 훌쩍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는 ‘나만 믿으라’고 말하는 출가자에 대하여 경계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출가자는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인연으로 얽히고 설켜 있는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다.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는 사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좌선이 끝나면 인터뷰시간이 있다. 대체로 수행과정에서 느낌에 대한 이야기 위주이나 때로 인생상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주로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서 역시 알아차림을 강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 현재의 고민이 가족간의 갈등이 가장 크다고 한다. 약 60-70%가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자식과의 갈등이라 한다. 이런 갈등을 보면 거의 원수와 사는 것과 다름 없다. 거의 매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미즈넷에 실려 있다. 인기 있는 글은 조회수가 간단히 10만을 넘어 가는데, 이렇게 관심을 많이 가지는 이유는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법은 매우 단순하다. 익명을 전제로 하는 댓글을 보면 거의 대부분 갈라서라고 한다. 마치 마음이 들지 않는 도반이 나타났을 때 언제 든지 걸망을 꾸리듯이 떠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똑 같은 가족간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일지라도 법륜스님이 제시하는 해법은 다르다. 무조건 갈라 서라고 하는 대신 역지사지를 강조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객 해 볼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정해진 법이 없음을 강조하는 무유정법식의 해법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인생은 상대방이 살아가기 때문에 내 뜻대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든다고 하여 바이 바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하며 살자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떠남에 있어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

 

친족이 좋은 이유

 

게송에서 어리석은 자와 함께 살면 괴롭지만, 현명한 자(Dhīra) 와 함께 살면 친족āti)이 모이는  것처럼 즐겁다고 하였다. 왜 친족과 모이면 즐거울까?

 

친족은 DNA의 일부를 공유하고 피를 나눈 사이 이기 때문에 언제 만나도 반갑다. 특히 같은 또래나 사촌의 경우 조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낀다. 그런 친족이 모이면 화기애애 하고 즐겁고 웃음꽃이 만발한다. 이는 피를 튀기는 듯한 고부, 부부, 자식간의 갈등과 대조 된다. 그래서 현자와 함께 하면 친족을 만나는 것처럼 행복한 것이라 한다.

 

참사람(sappurisa)을 따르라

 

그래서 법구경 수카왁가 마지막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Dhīrañ-ca paññañ-ca bahussutañ-ca,    디란짜 빤냔짜 바훗수딴짜

Dhorayhasīla vatavantam-āriya     도라이하실랑 와따완따마리양

Ta tādisa sappurisa sumedha    땅 따디상 삽뿌리상 수메당

Bhajetha nakkhattapatha va candimā  바제타 낙캇따빠탕 와 짠디마

 

견고하고 지혜롭고 많이 배우고

인내의 덕을 지니고 성실한 고귀한 님을 따르라.

마치 달이 뭇별의 길을 따르듯.

이와 같은 현명한 참사람을 따르라. (Dhp 208,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견고한 자(Dhīra), 지혜로운 자(pañña), 많이 배운 자 (bahussuta)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여기서 견고한 자는 확고한 자를 말하고, 지혜로운 자는 세간적-출세간적 지혜를 갖춘 자를 말하고, 많이 배운 자는 아홉가지 출세간적 원리를 갖춘 자라는 뜻이다.

 

이는 성자(āriya)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분들이다. 승보로서 귀의의 대상이고 공양의 대상이다. 그런 고귀한 님(āriya)을 따르라고 하였다.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candimā)이 뭇별(nakkhatta) 의 길을 따르듯이따르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주에 따르면, ‘달이 뭇별의 길인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을 가듯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별들의 길을 황도라 하는데, 열 두개의 별자리 이름이 있다. 그런 길은 맑아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창공에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인 참사람(sappurisa, 善人)’을 따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참사람(sappurisa) 과 고귀한 자(āriya)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자와 반대 되는 사람으로서 따라야 할 대상이 되기 떄문이다.

 

왜 미얀마로 몰려 가는가?

 

해마다 수 천명이 미얀마로 떠난다고 한다. 초기불교 수행법이 살아 있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법보신문(2009-10-19)에 따르면 매월 200명씩 수행센터를 찾고 있어서 연간 2000명 가량이 미얀마로 수행지도를 받기 위하여 떠난다고 한다. 그래서 마하시를 비롯해 참메, 빤디따라마, 쉐우민, 파욱 등 수행센터에서는 어느 수행센터 이든지 약 120명 정도의 한국인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수행자들의 편의를 돕기 위하여 통역이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를 찾는 것일까.

 

출재가를 막론하고 미얀마로 떠나는 이유는 수행하기 좋은 환경 때문이라 한다. 미얀마의 경우 출가와 환속이 자유롭다고 한다. 일시출가 제도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출가를 하여 수행할 수 있고 또 언제 든지 환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미얀마 국민들은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온 국민이 단기출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단기출가제도는 외국인도 받아 주기 때문에 누구나 출가하여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점은 단기출가자이든 비구이든 미얀마에서 수행하는 모든 출가자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수행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환영하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로 몰려 드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수행을 지도할 살아 있는 성자, ‘스승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얀마에 전세계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부처님당시의 수행방법이 살아 있기도 하지만 이를 지도할 스승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룬 성자, 스승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스승은 어떤 분들일까. 아마도 법구경 게송에서 표현된 고귀한 자(āriya)’ 또는 참사람(sappurisa)’  같은 스승일 것이다.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자

 

이와 같이 스승이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 든다. 그래서 눈 밝은 선지식이 나타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람들이 몰리고 시주가 들어 오고 사원이 번영한다고 한다. 한 사람의 도인이 출현 함으로 인하여 그 도의 향기가 널리 퍼져 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소설가 김정빈님은 향기와 벌나비이론으로 설명하였다.

 

 

 

 

Butterfly Flowers

 

 

 

꽃에서 향내가 나면 그 향내를 찾아 벌과 나비가 찾아 온다. 마찬가지로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은 자가 나타나면 그 향내가 날 것이다. 그 도의 향기를 따라 사람들이 몰려 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수 천명이 미얀마로 향하는 것도 도의 향기를 맡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각 수행처마다 우리나라 사람들로 넘처난다고 한다. 그런 도인 곁에 있으면 굳이 도가 무엇입니까?” 라든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지 않아도 될 것다. 스승의 얼굴과 행동에 모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이 있는 도량에 있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되는 것이고, 스승 옆에 있는 것 자체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정빈님은 다음과 같이 벌나비 이론을 설명하였다.

 

 

“나부터 닦자,

그럼으로써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자.

그러면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고,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도 이익이 미칠 것이다.(김정빈님)

 

 

 

 

2013-02-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