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의도(cetana)와 정신적 행위(意業), 우빨리의 경(M56)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14. 12:23

 

 

의도(cetana)와 정신적 행위(意業), 우빨리의 경(M56)

 

 

 

글을 쓰면서 종종 반론을 받는다. 쓴 글의 내용에 대하여 경전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반론할 때 관심있게 보고 숙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해당 경전을 떠들어 본다.

 

글을 쓰면서 근거 없는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경장이나 논장, 논장 또는 기사를 근거로 하여 쓴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글이다. 그래서 최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지 않는다. 설령 개인적인 견해를 제시한다고 한들 스님도 아닌 것이, 교수도 아닌 것이 쓴 글에 대하여 신뢰를 보낼 리 없기 때문이다.

 

반론을 받았는데

 

최근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글(박근혜대통령이 룰라가 되어)을 썼다. 신업은 몸의 의도가 표현 된 것으로서 확정된 업의 길이고, 의업은 오직 마음에서만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확정된 업의 길이라 볼 수 없어서 내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신업이 중대한 업으로 본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이와 같은 글에 대하여 댓글을 받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좋은 말씀 항상 즐거이 봅니다. 말씀하신 전체적인 맥락을 공감하면서
'....그러나 의업은 오직 마음에서만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확정된 업의 길이라 볼 수 없다.
그래서 신업을 내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업으로 보고 있다....' 에 대해서

M56 우빨리 경(대림스님 역 488쪽)이 참고되셨으면 합니다.
"따빳시여, 이렇게 분류하고 이렇게 구별한 세 가지 업 가운데서
마음[*
]의 업이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설한다.
몸의 업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말의 업도 그 정도는 아니다."

연꽃 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 _()_

 

(B법우님)

 

 

신구의 삼업 중에 의업이 가장 비난 받는 업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로서 맛지마니까야 우빨리경(M56)을 들고 있다. 이런 류의 댓글을 이전에도 어느 네티즌으로부터 받아 본적이 있다. 의업이 가장 중하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신구의 삼업 중에 ‘확정된 업의 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신업과 구업이 내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들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우빨리경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정신적 행위가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라고

 

우빨리경은 자이나교도와 교리 논쟁에 대한 것이다. 우빨리라는 자이나교도와 부처님이 업에 대한 교리논쟁이다. 결국 우빨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승복하여 개종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먼저 부처님과 자이나교도 따빠씬과의 대화에 대한 것을 보면 보면 다음과 같다.

 

 

[따빠씬]

“존자 고따마여, 이와 같이 구분되고 이와 같이 구별되는 세 가지 행위 가운데 존자 고따마는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신체적 행위이나 언어적 행위나 정신적 행위 가운데 어떠한 것이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까?”

 

[세존]

“따빠씬이여, 이와 같이 구분되고 이와 같이 구별되는 세 가지 행위 가운데 나는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신체적 행위이나 언어적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 행위가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빨리경-Upāli sutta, 맛지마니까야 M56, 전재성님역)

 

 

자이나교도 따빠씬이 신업과 구업과 의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비난 받을만한 것이냐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의업(정신적 행위)가 가장 비난 받을 만 하다고 말한다.

 

잘못된 견해, 사견(邪見) 이란 무엇일까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신구의 삼업 가운데 정신적 의도가 가장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내생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는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다.

 

 

PPs.III.54 에서 붓다고싸는 악한 행위에서 정신적 측면은 ‘잘못된 견해(mica ditthi)’를 언급한 것이라고 하면서 AN.I.33을 인용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잘못된 견해보다 비난할 만한 것을 보지 못했다. 잘못된 견해는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Mfb.1255에서 빅쿠 보디는 ‘부처님은 정신적인 의도를 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파악을 했고 비의도적인 신체적-언어적 행위는 업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각주, 전재성박사)

 

 

각주에 따르면 의업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붓다고사는 의업이 가장 비난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전의 근거 (AN.I.33)를 들어, 가장 비난 받는 의업이라는 것이 잘못된 견해(mica ditthi, 邪見)’에 대한 것이라 하였다.  

 

잘못된 견해, 사견이란 무엇일까. 아비담마 길라잡이에 따르면 허무주의 견해, 업과 과보를 부정하는 견해,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주장에 대한 것이다. 유물론과 운명론과 같은 삿된 견해를 말한다. 붓다고사는 이와 같은 삿된 견해가 가장 비난 받는 의업이라 한 것이다.

  

니간타 나따뿟따의 가장 뛰어난 제자 우빨리

 

자이나교도 따빠씬은 부처님과 대화한 내용에 대하여 자신의 교주인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전한다. 이 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나따뿟따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우빨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논파하겠다고 나선다. 네 가지 비유를 들어 논파하겠다고 하였는데, 세 번째 것을 보면 마치 힘센 양조업자가 큰 거르는 체를 깊은 물통에 넣어 그 끝을 잡아 이리로 끌어당기고 저리로 끌어당기고 이리 저리로 돌리듯, 나는 논쟁에서 수행자 고따마를 이리로 끌어당기고 저리로 끌어당기고 이리 저리로 돌릴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결전의 의지를 다진다.

 

찬물을 들이키지 않는 자이나교도

 

마침내 자이나교 니간타 나따뿟따의 오른 팔과 같은 존재로서 최고의 논사인 우빨리가 부처님의 의업중시에 대한 것을 논파하기 위하여 부처님과 대화를 갖는다.  먼저 찬물 논쟁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우빨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세존]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 니간타의 교도가 질병이 들었는데 중병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가 찬물을 거부하고 더운물만을 찾는다고 합시다. 그가 찬물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장자여, 그에 대하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어떠한 곳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합니까?”

 

(우빨리경-Upāli sutta, 맛지마니까야 M56, 전재성님역)

 

 

자이나교도들은 찬물을 들이키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각주에 따르면 찬물에는 살아 있는 생명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더운물만 찾는다고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이나교 논사 우빨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빨리]

“존자여, ‘정신이 오염된 신들’의 하늘이 있는데, 그는 그 곳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는 정신이 오염되어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빨리경-Upāli sutta, 맛지마니까야 M56, 전재성님역)

 

 

우빨리는 정신이 오염된 신들(manosatta deva)’을 언급하였다. 이들은 찬물을 들이켰기 때문이라 한다. 생명이 있는 찬물을 마셨기 때문에 오염된 신들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찬물을 거부하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청정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찬물을 원하면 정신적 행위가 오염된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우빨리의 주장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대가 앞에서 말한 것은 뒤와 맞지 않고 뒤에서 말한 것은 앞과 맞지 않습니다.”라고 부정해 버린다.

 

빗자루로 길바닥을 쓸며 다니는 자이나교도

 

살아 있는 생명을 중시하는 니간타교도들은 찬물도 들이키지 않는다. 그래서 니간타교도들은 네 가지 금계를 만들어 이를 수호하고, 지킨다. 그래서 금계를 지키면 금계에 의하여 정화되고 보상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니간타교도들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HD화면으로 제공되는 다큐프로를 보면 인도에서의 자이나교도들의 생활을 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빗자루로 길바닥을 쓸면서 다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이 다니는 길에서 작은 벌레 하나 죽이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Jainism sweeping

 

 

의도적인 행위의 중함을 인정하는 우빨리

 

그런데 이런 행위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우빨리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이 세상에서 니간타 교도는 네 가지 금계를 수호하는데, 모든 금계에 의하여 제재를 받고, 모든 금계에 의하여 재갈 물리고, 모든 금계에 의하여 정화되고, 모든 금계에 의하여 보상받는데, 그렇지만 그가 오고갈 때에 많은 생물들을 죽일 것입니다. 장자여, 이것에 대하여는 니간타 나따뿟따는 어떠한 과보를 말합니까?”

 

[우빨리]

“존자여,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니간타 나따뿟따는 크게 비난할 만한 것이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존]

“장자여, 만약 의도적인 것이라면, 어떠합니까?

 

[우빨리]

“존자여, 만약 의도적인 것이라면, 크게 비난할 만한 것입니다.

 

[세존]

“장자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어떤 경우에 의도적인 것을 말합니까?

 

[우빨리]

“존자여, 정신적 처벌의 경우입니다.

 

(우빨리경-Upāli sutta, 맛지마니까야 M5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길을 오갈 때 많은 생명을 죽일 것이라 한다. 맨발로 흙길을 다닐 때 본의 아니게 벌레를 비롯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기에 벌레들을 밝아 죽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우기에 멀리 유행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것이 우기안거 원인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질문에 대하여 우빨리는 니간타의 말을 빌어 모르고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하여 크게 비난 받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의도가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어떠합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우빨리는 정신적 처벌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서 사실상 자이나교의 찬물에 대한 금계는 논파 된 것이나 다름 없다. 각주에 따르면 자이나교도들은 실제의 수행에서는 신체적 행위나 언어적 행위 보다는 그 배후에 숨어 있는 의도적인 행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가공할 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빨리는 “존자여, 존자께서 어떤 것을 말하더라도, 언어적 처벌이나 정신적 처벌보다 신체적 처벌이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가장 비난할 만한 것입니다.”라고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부처님의 논리에 공감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교주의 가르침이 틀림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 가지 정신적인 의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준다.

 

먼저 부처님은 한사람의 가공할 의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세존]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와서 이와 같이 ‘이 날란다 시에 생명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한 찰나에 한 순간에 하나의 고깃덩어리, 하나의 고기뭉치로 만들어버릴 것이다.’고 말한다고 합시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이 날란다 시에 뭇 삶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한 찰나에 한 순간에 하나의 고깃덩어리, 하나의 고기뭉치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까?”

 

(우빨리경-Upāli sutta, 맛지마니까야 M56, 전재성님역)

 

 

어떤 사람이 마음 속으로 저 사람 죽여 버려야 겠어라고 말했을 때, 이 의도가 씨앗이 되어 어느 한사람이 죽을 수 있다. 그런데 한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저 나라를 빼앗야 겠다라고 하였을 때 어떻게 될까. 이는 전쟁을 의미한다.

 

전쟁이 나면 하나의 도시가 불바다고 되고 수 없는 사람이 죽고 도시는 초토화 될 것이다. 미국의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이미 이라크는 불바다로 변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기 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라고 하였는데, 이를 단순한 범부가 아니라 국왕이라고 하였을 때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통이라도 가졌으면 모를까

 

그런데 우빨리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우빨리]

“존자여, 열 사람이라도, 스무 사람이라도, 서른 사람이라도, 마흔 사람이라도, 쉰 사람이라도, 이 날란다 시에 뭇 삶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한 찰나에 한 순간에 하나의 고깃덩어리 하나의 고기뭉치로 만들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물며 미약한 한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빨리경-Upāli sutta, 맛지마니까야 M56, 전재성님역)

 

 

누구나 살인 의도를 가지면 언젠가는 실현 될 수 있다. 그래서 잠재적인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잠재적인 살인자는 개인이 될 수도 있고, 국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한순간 한찰라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우빨리는 범부가 한순간 한찰라에 많은 사람을 죽을 수 없을 것이라 한다. 비록 의도는 가지고 있지만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혹시 신통이라도 가졌으면 모를까.

 

신통을 가진 자라면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세존]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신통력이 있고 마음의 자재를 성취한 수행자나 성직자가 와서 이와 같이 ‘나는 이 날란다 시를 단 한 번의 정신적 저주로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고 말한다고 합시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신통력이 있고 마음의 자재를 성취한 수행자나 성직자가 와서 이 날란다 시를 단 한 번의 정신적 저주로 잿더미로 만들 수 있습니까?”

 

(우빨리경-Upāli sutta, 맛지마니까야 M5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범부가 아닌 신통을 가진 사람의 예를 들고 있다. 신통을 가진 사람이 한순간 한찰라에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고깃덩어리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대하여 우빨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빨리]

“존자여, 열 개의 날란다 시라도, 스무 개의 날란다 시라도, 서른 개의 날란다 시라도, 마흔 개의 날란다 시라도, 쉰 개의 날란다 시라도, 그 신통력이 있고 마음의 자재를 성취한 수행자나 성직자가 와서 이 날란다 시를 단 한 번의 정신적 저주로 잿더미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물며 단 한 개의 날란다 시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우빨리경-Upāli sutta, 맛지마니까야 M56, 전재성님역)

 

 

우빨리는 범부와 신통을 가진 자에 대하여 다르게 본다. 그래서 신통을 가진자는 한순간 한찰라에 하나의 도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도시도 한순간에 잿더미로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우빨리의 답변은 모순이다. 범부가 의도한 것에 대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고, 신통을 부리는 자나 선인 들의 저주행위에 따른 한순간의 파괴행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장자여, 장자여, 장자여, 숙고하여 대답하십시오. 그대가 앞에서 말한 것은 뒤와 맞지 않고 뒤에서 말한 것은 앞과 맞지 않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앞에서 ‘저는 진리에 입각해서 논파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거듭 말한다.

 

이에 우빨리는 니간타의 가르침이 논파 당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제 세존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재가신자로서 저를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개종하게 된다.

 

내생을 결정하는 무거운 업(重業)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범부나 신통을 가진 자나 정신적 의도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모든 신체적 또는 언어적 행위의 밑바탕에는 정신적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신체적 업이나 언어적 업이 아니라 정신적 업이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 행위, 즉 의업은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지 확정된 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사람이 저 사람 죽여 버려야 겠어라고 살의를 품더라도 아직 실행하지 않았다면 확정된 업은 아니다. 실제로 살인을 저질러야 확정된 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무거운 업은 신체적으로 지은 업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유익한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 무겁거나 가벼운 업중에서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의 업이나 혹은 고귀한 경지(즉 선의 증득)의 업이 무거운(garuka) 업이고, 이것이 먼저 과보를 준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대림스님역)

 

 

업에는 네 가지가 있다. 무거운 업(1), 습관적인 업(2),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3), 이미 지은 업(4)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 중 내생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중한 것이 무거운 업(重業)’인데, 이는 실제로 살인 등과 같인 신체적으로 저지른 행위가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오계 중에 가장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이 생명을 해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지 않는 빼았는 도둑질, 성폭행등과 같은 음행을 금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가 신체적으로 지은 행위로서 내생을 결정하는 확정된 업의 길로 본다.

 

의도와 확정된 업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의도와 확정된 업

No

구분

표 현

의 도

확정된 업의 길

비 고

1

신업(身業)

몸의 의도가 표현 된 것

살인 하려는

살생

무거운 업(重業)

2

훔치려는

투도

3

삿된음행을 하려는

사음

4

구업(口業)

말의 의도가 표현 된 것

거짓말 하려는

망어

 

5

중상모략하려는

양설

 

6

욕설하려는

악구

 

7

잡담하려는

기어

 

8

의업(意業)

오직 마음에서만 발생

간탐

탐욕

 

9

악의

성냄

 

10

사견

*어리석음

 

 

*어리석음: 1)허무주의의 견해,  2)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견해, 3) 원인을 부정 하는 견해(운명론)

 

 

 

표에서 언급된 신업, 구업, 의업은 해로운 업이다. 이 삼업은 공통적으로 의도(cetana)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도가 개입된 행위를 업(kamma)이라고 하였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의도하기 때문에 업을 짓는 것으로 본다.

 

의도(cetana)와 정신적 행위(意業)

 

이와 같이 의도 자체가 업이다. 이런 의도는 행위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예를 들면 저 사람 죽여 버려야 겠어라고 하였다면 이는 의도에 해당된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에 옮겨 살인을 저질렀다면 행위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확정된 업이라 한다. 이렇게 확정된 업의 길(niyata-kamma-patha)’은 임종을 맞을 때 중업으로서 작용한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의 대상이 됨으로서 악처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행위를 성취했든 성취하지 않았든 의도에 대하여 해로운 업으로 본다. 의도한 것 자체를 해로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신체적 업이나 언어적 업이 아니라 정신적 업이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라고 하였다. 행위의 성취 여부에 관계 없이 악한 의도를 가진 것 자체가 가장 비난 받는 다는 뜻이다. 따라서 의도(cetana)와 정신적 행위(意業)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2013-03-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