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 빠져, 라따나경(보배경)12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15. 12:56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 빠져, 라따나경(보배경)12

 

 

 

라따나경 15, 16, 17번 게송은 마무리 게송으로서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예경과 찬탄이다. 형식은 똑 같고 다만 단어만 다를 뿐이다.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라따나경 게송15

빠알리

Yānīdha bhūtāni samāgatāni
Bhummāni vā yāni va antajikkhe,
Tathāgata
devamanussapūjita
Buddha
namassāma suvatthi hotu.

 

--다 부따-니 사마-가따-

붐마-니 와 야-니 와 안딸릭케

따타-가땅 데와마눗사뿌-지땅

붓당 나맛사-마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신과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이렇게 오신님,

부처님께 예경하오니, 여기에 모인 존재들이여,

땅에 있는 존재이건 공중에 있는 존재이건,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법정스님역

여기 모인 귀신들은 지상의 것이건 공중의 것이건, 신과 인간이 섬기는 이같이 완성된 눈 뜬 사람을 예배하자 행복하라.

中村元

われら、ここにまったきものは、地上のものでも、空中のものでも、人間とのつかえるこのように完成した〈ざめた〉(ブッダ)を礼拝しよう。せであれ。

영역

Whoever beings assembled, on earth or in space, the Thus Gone one

Is worshipful to gods and men, We worship Enlightenment for mental happiness.

 

 

 

라따나경 게송16

빠알리

Yānīdha bhūtāni samāgatāni
Bhummāni vā yāni va antajikkhe,
Tathāgata
devamanussapūjita
Dhamma
namassāma suvatthi hotu.

 

--다 부--니 사마-가따-

붐마-니 와- -니 와 안딸릭케

따타-가땅 데와마눗사뿌-지땅

담망 나맛사-마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신과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이렇게 오신님,

가르침께 예경하오니, 여기에 모인 존재들이여,

땅에 있는 존재이건 공중에 있는 존재이건,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법정스님역

여기 모인 귀신들은 지상의 것이건 공중의 것이건, 신과 인간이 섬기는 이같이 완성된 진리를 예배하자 행복하라.

中村元

われら、ここにまったきものは、地上のものでも、空中のものでも、人間とのつかえるように完成した〈え〉を礼拝しよう。せであれ

영역

Whoever beings assembled, on earth or in space, the Thus Gone one,

Is worshipful to gods and men. We worship the Teaching for mental happiness.

 

 

 

라따나경 게송17

빠알리

Yānīdha bhūtāni samāgatāni
Bhummāni vā yāni va antajikkhe,
Tathāgata
devamanussapūjita
Sa
gha namassāma suvatthi hotu.

 

--다 부--니 사마-가따-

붐마-니 와- -니 와 안딸릭케

따타-가땅 데와마눗사뿌-지땅

상강 나맛사-마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신과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이렇게 오신님,

상가께 예경하오니, 여기에 모인 존재들이여,

땅에 있는 존재이건 공중에 있는 존재이건,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법정스님역

여기 모인 귀신들은 지상의 것이건 공중의 것이건, 신과 인간이 섬기는 이같이 완성된 모임(승가)을 예배하자 행복하라.

中村元

われら、ここにまったきものは、地上のものでも、空中のものでも、人間とのつかえるように完成した〈つどい〉を礼拝しよう。せであれ

영역

Whoever beings assembled, on earth or in space, the Thus Gone one

Is worshipful to gods and men. We worship the Community for mental happiness.

 

 

 

 

 

 

따타가따(Tathāgata)

 

따타가따(Tathāgata)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이렇게 오신님이라 번역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별다른 언급없이 신들과 인간이 섬기는 것처럼 (人間とのつかえるこのように)’이라 하여 따타가타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을 하지 않았다. 이런 해석방법은 이후 담마와 상가에서도 신과 인간이 섬기듯이(人間とのつかえるように)’라 하여 역시 언급하지 않았다. 영문에서는 the Thus Gone one’로 하여 이렇게 간 사람이라 표현 하였는데 이는 따타가따를 말한다.

 

이와 같이 이렇게 오신님또는 이렇게 간 사람(the Thus Gone one)’등으로 표현 되는 여래의 뜻은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실려 있는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여래

  

‘여래(如來)’라 번역한 따타가따(Tathāgata)는 부처님께서 스스로를 호칭하시는 말이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DA.i.59~60)에서는 여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세존께서는 여래이시다.  

(1) 여여하게(tathā) 오셨다(āgata)고 해서 여래이시다.

(2) 여여하게 가셨다(gata)고 해서 여래이시다.

(3) 사실대로의 특징으로(tathalakkhaa) 오셨다고 해서 여래이시다.

(4) 사실대로의 법을 확실하게(yāthāvato) 정등각(abhisambuddha)하셨기 때문에 여래이시다.

(5) 사실대로 보시기(tathadass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6) 사실대로 말씀하시기(tathavād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7) 여여하게 행하시기(tathākār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8) 지배(abhibhavana)의 뜻에서 여래이시다.

 

「청정도론」(Vis..2) 등에 나오는 여래십호(如來十號)는 다음과 같다.

 

① 아라한(應供, Arahan),

② 바르게 깨달으신 분(正等覺者, Sammā-sambuddha),

③ 명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明行足, Vijjā-caraa-sampanna),

④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Sugata),

⑤ 세상을 잘 아시는 분(世間解, Lokavidū),

⑥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 Anuttara),

⑦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⑧ 신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Satthā devamanussāna),

⑨ 부처님(, Buddha),

⑩ 세존(世尊, Bhagavā).

 

(여래,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 초전법륜경 주석)

 

 

주석서에 실려 있는 여래에 대한 여덟 가지 내용을 보면 첫 번째의 뜻이 여여하게(tathā) 오셨다(āgata)고 해서 여래이시다.”라고 하였는데, 전재성박사는 이 첫 번째 뜻을 이용하여 따타가따에 대하여 이렇게 오신님이라고 번역하였다. 다른 일곱가지 의미가 있지만 대표로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영문의 경우 ‘the Thus Gone one’라 하였는데, 두 번째 의미인 여여하게 가셨다(gata)고 해서 여래이시다.”를 뜻하지만 첫 번째 의미도 포함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따타가타의 의미는 있는 그대로의 님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리라 본다.

 

여래(Tathāgata)는 부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

 

여래(Tathāgata)라는 말은 부처님이 스스로 호칭하는 말이다. 왕이 짐은~”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별호를 보면 여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래십호를 보면 여래 응공 정변지…”라고 되어 있다. 이때 여래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불자들이 법회에서 여래십호를 낭송할 때 여래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왕이 짐은~”이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넌센스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에서는 부처님 자신을 칭하는 따타가타라는 말이 빠져서 불수념으로 활용된다.

 

두려움이 생길 때 부처님 명호(名號)

 

불수념으로 활용되는 근거가 되는 경은 다음과 같다.

 

 

sace tumhāka bhikkhave araññagatāna vā rukkhamūlagatāna vā suññāgāragatāna vā uppajjeyya bhaya vā chambhitatta vā lomahaso vā, mameva tasmi samaye anussareyyātha. “Itipi so

 

bhagavā araha

sammāsambuddho

vijjācara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

buddho

bhagavā

 

ti mama hi vo bhikkhave anussarata ya bhavissati bhaya vā chambhitatta vā lomahaso vā, so pahīyiss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숲속에 들어가 나무 아래서나 빈 집에서 머물 때,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생겨나면, 그때는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라고 나를 생각하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나를 생각하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다작가경-깃발경-Dhajaggasutta-깃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3,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부처님은 두려울 때, 공포나 전율과 소름이 끼칠 때 진실로 부처님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열 가지 부처님의 이름을 명호 하라고 하였는데 여래를 뜻하는 따타가따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따타가따는 부처님이 스스로 부처님 자신을 지칭하는 부처님 전용용어라 볼 수 있다.

 

삐야닷시 테라(Piyadassi Thera)의 영문번역

 

게송에서 따타가따(Tathāgata)와 관련하여 다른 영문번역을 더 찾아 보았다. 그것은 세 개의 게송에서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예경과 찬탄을 하고 있지만 세 게송에 공통적으로 공통으로 따타가따(Tathāgata)가 들어 가 있기 때문이다. 삐야닷시 테라의 영문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15. "Whatever beings (non-human) are assembled here, terrestrial or celestial, come let us salute the Buddha, the Tathagata (the perfect one), honored by gods and men. May there be happiness.[9]

 

16. "Whatever beings are assembled here, terrestrial or celestial, come let us salute the perfect Dhamma, honored by gods and men. May there be happiness.

 

17. "Whatever beings are assembled here, terrestrial or celestial, come let us salute the perfect Sangha, honored by gods and men. May there be happiness."

 

The last three stanzas were recited by Sakka, the chief of Devas (gods) (KhpA).

 

 (Piyadassi Thera)

 

 

게송 15, 16, 17번에 대한 삐야닷시 테라의 번역을 보면 게송 1번 붓다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서만 따타가따가 언급되어 있다. 나머지 담마와 상가에 대한 게송에서는 빠져 있다. 그리고 각주를 달아 놓았는데 마지막 세 개의 게송은 신들의 왕 삭까(Sakka)’에 의하여 낭송된 것이라 하였다. 다른 번역에서 보지 못하던 내용이다.

 

라따나경 독송은 누가?

 

신들의 왕 삭까가 왜 세 개의 게송을 낭송한 것일까? 이는 라따나경 인연담에서 부처님이 베쌀리에 도착하자 제석천이 권속을 거느리고 마중 나오자 악귀들도 물러서기 시작했다. “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이 라따나경을 설할 때 “베쌀리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제석천을 우두머리로 하는 천상계의 신들도 와 있었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라따나경을 설할 때 인간 뿐만 아니라 신들의 왕인 제석천도 참석한 것이다.

 

인연담에 따르면 부처님은 첫 다섯 시를 설했고 나머지는 아난다가 독송했다는 설도 있다.”라고 되어 있다. 게송 5번까지 부처님이 설하였다면 이는 붓다와 담마에 대한 것이다. 여섯번째부터 상가에 대한 것이므로 아난다가 설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부처님이 붓다와 담마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상가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삐야닷시 테라의 번역에 따르면 나머지 15, 16, 17번 세 개의 게송 모두 신들의 왕인 제석천 삭까가 독송하였다고 설명해 놓았다. 이런 설명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라따나경은 부따(야차)뿐만 아니라 신들과 인간 모두가 참석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삼보에 대한 찬탄을 하는 자리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 1번에서 5번까지는 부처님이 설법한 것이고, 주로 상가에 대한 내용이지만 6번에서 14번까지 아난다가 독송한 것이고, 나머지 15번에서 17번 까지 세 개는 삭까가 낭송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삐야닷시 테라의 번역을 보면 붓다에 대하여 신과 인간의 존경을 받는 (완전한 분) 따타가타, 붓다 (the Buddha, the Tathagata (the perfect one), honored by gods and men.)”라 하였다. 따타가타와 붓다를 동의어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담마와 상가에 대해서는 신과 인간의 존중되는 완전한 담마(the perfect Dhamma, honored by gods and men.)”신과 인간의 존중되는 완전한 상가 (the perfect Sangha, honored by gods and men.)”라 하여 따타가따가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타닛사로 빅쿠(Thanissaro Bhikkhu)의 번역

 

그런데 타닛사로 빅쿠의 번역은 이와 다르다. 빠알리 원문대로 따타가타를 모두 포함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Whatever spirits have gathered here,

       — on the earth, in the sky —

let us pay homage to the Buddha,

the Tathagata worshipped by beings

human & divine.

       May there be

       well-being.

 

Whatever spirits have gathered here,

       — on the earth, in the sky —

let us pay homage to the Dhamma

& the Tathagata worshipped by beings

human & divine.

       May there be

       well-being.

 

Whatever spirits have gathered here,

       — on the earth, in the sky —

let us pay homage to the Sangha

& the Tathagata worshipped by beings

human & divine.

       May there be

       well-being.

 

(Thanissaro Bhikkhu)

 

 

타닛사로 빅쿠의 번역을 보면 인간과 신의 숭배를 받는 따타가따 (the Tathagata worshipped by beings human & divine)” 라 하여 붓다, 담마, 상가에 이를 모두 포함 하였다. 그래서 붓다에 대하여 인간과 신의 숭배를 받는 붓다, 따타가따라 하였고, 담마에 대하여 인간과 신의 숭배를 받는 담마와 따타가따라 하였고, 상가에 대해서는 인간과 신의 숭배를 받는 상가와 따타가따라 하였다. 비교적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전재성 박사도 이와 같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 빠져

 

라따나경(보배경) 해설을 해 보았다. 경전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수행도 잘 모르는 보통불자가 해설한 것이다. 다만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하여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따나경 해설을 한 가장 큰 목적은 빠알리 원문의 내용을 알고자 함이었다. 라따나경 음악은 매일 듣기 때문에 매우 익숙하고 더구나 빠알리 원문을 통째로 외웠기 때문에 빠알리어 그 자체는 매우 익숙하지만 단어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늘 외국어 같았다. “라모라 다나다라~”로 시작 되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매일 독송하지만 그 뜻을 모른다면 주문외우기에 지나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라따나경 음악을 듣고 암송하지만 그 뜻을 모른다면 주문과 다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 사전을 이용하여 단어의 뜻을 확인 한 것이다. 내용을 알면서 들으면 더욱더 그 의미가 잘 다가 오기 때문이다.  

 

빠알리어에 대하여 모르지만 단어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게송이 다른 경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고구마 줄기를 당기면 다른 고구마들이 달려 나오듯이, 게송 하나에도 관련된 경들이 서로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연결된 가르침을 따라 가다 보면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빠지는 것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팔만사천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방대한 가르침이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다. 그런데 가르침의 양도 많지만 내용 또한 심오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접하면 접할수록 빠져 드는 것 같다. 가르침에 퐁당 빠지면서 남는 것은 글쓰기 밖에 없는 것 같다.

 

누구나 매일 먹고 마시지만 결국 대변과 소변으로 배출되어 남는 것이 없다. 또 누구나 돈을 애써 열심히 벌지만 역시 남는 것이 없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글쓰기를 하면 남는다. 다른 것들은 남는 것이 없어서 배신하는 듯이 보이지만 글쓰기 만큼은 결코 배신 하지 않는다. 비록 글쓰기가 구업(口業)에 해당되는 필업(筆業)을 짓는 것이라 하지만, 한번 써 놓은 글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글쓰기 밖에 없다. 그래서 일생 동안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 빠져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2013-04-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