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행복경은 길상경(吉祥經)으로 불러야, 망갈라숫따(Mangalasutta, Sn2.4)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20. 12:27

 

행복경은 길상경(吉祥)으로 불러야, 망갈라숫따(Mangalasutta, Sn2.4)

  

 

 

산스크리트어본 십지경 번역

 

최근 불교계 뉴스에 따르면 산스크리트어본 화엄경 십지경이 번역되었다고 한다. 빠알리 니까야 역경가로 유명한 전재성박사에 의해서이다.

 

전재성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빠알리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하고 사부니까야 뿐만 아니라 숫따니빠따, 법구경 등 쿳다까니까야(소부경전)의 일부 경전을 번역하여 부처님의 생생한 원음을 알려 주었다. 현재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서와 함께 한국불교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는 제2의 불교도래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승경전의 꽃이라 불리우는 화엄경 십지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 동안 빠알리니까야만 번역해 왔던 전재성박사가 산스크리트 번역을 하고 그것도 대승경전의 번역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경쟁적 관계에 있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 그 동안 산스원전에 따른 대승경전번역을 천명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소리소문없이 산스크리트어본 십지경을 세상에 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전연구원은 또 후발주자로서 또 번역에 착수하게 될까?

 

이와 같이 소리소문없이 한글로 완역한 십지경은 빠알리니까야번역이 그랬던 것처럼 대승불교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을 것이다. 이제까지 한역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원전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해석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운 한자를 익혀서 한문을 뜻 풀이하는 서당식 법문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기반으로 한 법문이 나올지 모른다.

 

말 이어가기 놀이를 보면

 

무엇이든지 전달하는 과정에서 왜곡되기 쉽다. 개그맨 허참이 사회를 본 TV프로에서 말 이어가기 놀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몇 단계를 거치면 원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말이 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산스크리트어를 한역하고, 한역된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뜻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지적을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전 회장은 특히 ‘발광지’에 나오는 사선정(四禪定)에 대한 번역상의 오류를 예로 “원 경전에서 ‘사유’와 ‘숙고’를 뜻하는 단어의 경우, 한역본에는 ‘심()’과 ‘사()’로 비교적 정확하게 번역됐지만 <팔십화엄>에는 ‘각()’과 ‘관()’으로 표현돼 곡해나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팔십화엄>을 최초로 한글 번역한 백용성 스님의 번역이나 백용성 스님의 구한말투 번역을 현대어로 바꾼 운허 스님의 번역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번역 왜곡-오해 바로잡아 원음 가까이” 전재성 박사 ‘십지경-오리지널 화엄경’ 발간 , 미디어붓다 2013-04-16)

 

 

원본 없이 한역 경전에만 의존하다 보니 한문의 뜻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된 것에 대한 내용이다. 대표적으로 사선정 용어인 사유와 숙고를 뜻하는 한자어 ‘심()’과 ‘사()’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각()’과 ‘관()’으로 오역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역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앞뒤로 뜻이 맞지 않고 한 줄이 빠진 것 같이 되기 때문에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게 된다. 그래서 난해하게 되고 난해 하면 심오하게 된다. 오역으로 인하여 경전의 내용이 심오해지고 신비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전을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너무나 쉽게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빠알리니까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법이 심오해지는 이유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금니로 사경한 법화경을 볼 수 있다. 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하나의 예술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은 과연 저 글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이다. 한자도 어렵고 한문자체도 어려운데 마치 한글 읽듯이 술술 읽어 내려 갈 수 있는 스님이 몇 분이나 될는지 강한 의문이 든 것이다.

 

한글로 번역된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말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때 당시 민중들이 사용하던 일상어로 설법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말이라도 한문으로 표현 되면 어려워 진다는 것이다. 더구나 오역되었거나 탈역 되었을 경우 앞두의 뜻이 맞지 않아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여 심오해진다. 그래서 부처님의 본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내용으로 되어 버린다. 이런 예를 한역 경전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모두 삼중역, 사중역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설법하였을까?

 

행복경이라 번역하였는데

 

빠알리니까야에 숫따니빠따가 있다. 부처님 재세시부터 유통되어 온 숫따니빠따는 가장 오래된 고층의 경전이라 한다. 특히 라따나경(보배경, Sn2.1)과 멧따경(자애경, Sn1.8)과 마하망갈라경(위대한 축복의 경, Sn2.4) 이렇게 세 개의 경 초심자 교육용으로 불자들의 독송용으로 그리고 수호경으로 옛날부터 널리 알려져 왔다. 그래서 이들 세 경은 현재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수경과 같은 생활경전이라 볼 수 있다.

 

세 개의 경중에 마하 망갈라경(Mahāmagalasutta, Sn2.4)이 있다. 그런데 망갈라경의 제목이 번역자 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전재성박사는 위대한 축복의 경으로 번역하였고, 경쟁관계에 있는 초불연에서는 공식적으로 번역된 것은 아니지만 카페에서는 큰행복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였다. 타번역자들은 대부분 행복경이라 번역하였고, 일반적으로 행복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빠알리어 망갈라(magala)’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일까?

 

망갈라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앞서 십지경 번역의 예와 같이 잘못 번역된 단어를 사용하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왜곡되기 쉽다. 행복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망갈라도 좋은 예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망갈라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망갈라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았다.

 

magala를 키워드로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빠알리 사전사이트 (http://www.palidictionary.appspot.com/#/  )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최근 구조가 변경되는 바람에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예전의 경우 단어만 집어 넣어도 여러가지 유사 단어가 뜨고 영문과 일문, 한문으로 된 내용을 보여 주었으나 지금은 전혀 서비스가 되고 있지 않다. 사이트 오류인지 아니면 사용방법을 몰라서 그런지 알 수 없다.

 

또 다른 빠알리 사전 사이트를 찾아 보았다. magala 대신 mangala를 입력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볼 수 있다.

 

 

Mangala (adj.) [cp. Vedic mangala. Expld by Dhtp 24 with root mang, i. e. lucky; see also mañju] auspicious, prosperous, lucky, festive Nd1 87, 88; KhA 118 sq.; SnA 273, 595; Sdhp 551. -- nt. mangalaŋ

 

( 이트)

 

 

 

빠알리어 망갈라 (Mangala)가 행운의 (lucky), 상서로운(auspicious), 번영하는(prosperous) 뜻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을 뜻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전재성박사의 빠일리-한글사전(개정판)을 찾아 보았다.

 

 

magala:

Adj.n 1) 길조의, 행운의 축제의  2)왕의  3) 좋은 징조. 행운, 길상  4)축제  mangala-uttama 최상의 행운,    mangala -gita 행운의 노래,  길상가

 

(빠일리-한글사전(개정판), 전재성박사)

 

 

길조, 행운이라는 말이 주류이다. 그 어디에도 행복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빠알리어 망갈라(magala)행운의또는 길조의’, ‘상서로운뜻을 가진 형용사임을 알 수 있다.

 

각번역을 대조해 보니

 

마하망갈라경에 대한 여러 번역이 있다. 빠알리 원어와 함께 각종 번역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두 번째 게송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2번 게송 내용

  

빠알리어

(Mahāmagalasutta)

Asevanā ca bālāna

paṇḍitānañca sevanā,     
P
ūjā ca pūjanīyāna

eta magalamuttama.

 

아세와나 짜 발라낭

빤디따난짜 세와나

뿌자 짜 뿌자니야낭

에땅 망갈라뭇따망

magala

전재성박사

(위대한 축복의 경)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에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축복

영문1

(The Great Auspices)

Not associating the foolish, associating the wise,

Revering those worthy of reverence, these are the auspices.

auspices

영문2

(Blessings,

Narada Thera

, Buddhanet)

"Not to associate with the foolish,[5] but to associate with the wise; and to honor those who are worthy of honor — this is the greatest blessing.

Blessing

 

영문3

(Protection , Dr. R.L. Soni)

With fools no company keeping.

With the wise ever consorting,

To the worthy homage paying:

This, the Highest Blessing.

Blessing

영문4

(Protection,

Thanissaro Bhikkhu)

Not consorting with fools,

consorting with the wise,

paying homage to those worthy of homage:

This is the highest protection.

protection

나까무라 하지메 (中村元)

愚者まないで賢者しみ尊敬すべき尊敬することーーーこれがこよなきせである

법정스님

(위 없는 행복)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어진이와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존경할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행복

각묵스님

(큰 행복 경)

 

어리석은 사람을 섬기지 않고 현명한 사람을 섬기며 예경할 만한 사람을 예경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행복

 

 

 

마하망갈라경에서 게송2번은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서 설명되고 있다.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60)” 거나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61)” 라 하였다. 어리석은 자와 길을 함께 가느니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고, 어리석은 자와 함께 있으면 고통만 있을 뿐이라 하였다. 그래서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서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지 말 것을 강조 하였다. 반면 슬기로운 자, 현명한 자와 늘 함께 할 것을 강조 하였다.

 

현자와 함께 해야 하는 이유

 

마하망갈라경에서는 슬기로운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축복을 받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상윳따니까야 띳사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띳싸여,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남자가 있는데 한 남자는 길을 잘 알지 못하고 한 남자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저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다면, 여보시오, 그 길에 대하여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총림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라고 말할 것이다.

 

띳싸여, 이 비유를 설한 것은 그 의미를 시설하기 위한 것이다. 띳싸여,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범부를 지칭하는 것이다. 띳싸여, 길을 잘 아는 사람은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Tissa sutta-띳싸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4,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부처님의 조카인 띳사에게 법문한 내용이다. 경에서 길을 잘 아는 사람은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면 풍요로운 평원으로 비유되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길을 잘 알지 못한 범부가 현명한 자와 가까이 지내고 슬기로운 자를 공경하면 축복이라는 것이다.

 

행운인가 행복인가?

 

비교표를 보면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망갈라(magala)에 대한 번역어가 영문그룹의 경우 대체적으로 행운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고, 나까무라 하지메의 일역을 따르는 그룹은 행복으로 번역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재성 박사는 경의 해제에서 망갈라란 상서로움, 길조, 행운, 길상, 축복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글번역에서는 축복으로 번역한다고 밝혀 놓았다.

 

영문번역의 경우 네 종류의 예를 보면 auspices(상서로운),  Blessing(축복),  protection(보호) 등으로 번역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어디에도 행복을 뜻하는 hapy라는 말을 볼 수 없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일역한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행복)’이라 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의 일역을 우리말로 중역한 법정스님 역시 행복이라 하였다.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은 초불연 카페에 올려놓은 글에서 큰 행복이라는 제목과 함께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이라 번역하였다. 그리고 각종 기고문과 각종 강연에서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이라 하였다. 그래서 망갈라경의 내용에 대하여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 이렇게 세 가지 행복에 대하여 불교TV강연이나 각종 강연, 기고문에서 강조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망갈라라는 말에 행복이라는 뜻은 보이지 않는다. 

 

길상(吉祥)으로 번역된 망갈라

 

경의 해제에 따르면 경의 제목은 원래 마하망갈라경(Mahāmagalasutta)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망갈라경으로 불린다. 이는 쿳다까니까야(소부)의 쿳다까빠타(소송경)에서 망갈라경(magalasutta)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망갈라경에 대하여 한역경전에 일치하는 경이 없다고 한다. 오로지 테라와다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경이다. 그러나 유사한 경도 있다고 한다. 그 경우 행복경이라고 이름 지었을까? 아니다. 경의 해제에 따르면 ‘법구경 권하 길상품(대정 4.575a)’와 같이 길상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길상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吉祥(길상)라 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으로 사전적으로 설명된다.

 

한자어 길상(吉祥)은 행복과 다른 말이다. 영어로 번역된 auspices(상서로운)   Blessing(축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망갈라에 대한 최상의 번역은 길상이라 볼 수 있다.

 

 

 

 

 

吉祥

 

 

 

왜 길상(吉祥)인가?

 

행운, 상서로운,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 등으로 풀이 되는 것이 빠알리리어 망갈라이다. 이는 경의 도입부인 1번 게송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1번 게송에 대한 번역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번 게송 내용

  

빠알리어

(Mahāmagalasutta)

Bahu devā manussā ca

magalāni acintayu,

Ākakhamānā sotthāna

brūhi magala muttama.

 

바후 데와 마눗사 짜

망갈라니 아찐따융

아깐카마나 솟타낭

부루히 망갈라 뭇따망

 

전재성박사

(위대한 축복의 경)

많은 하늘나라 사람과 사람들,

최상의 축복을 소망하면서 행복에 관해 생각하오니,

최상의 축복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소서.

축복을 소망하면서

영문1

(The Great Auspices)

Many gods and men do not know the auspicious

We desire well being, may the auspices be told.

desire well being

나까무라 하지메 (中村元)

くの人間とは、幸福み、せをっています。最上幸福いてください」

幸福

법정스님

(위 없는 행복)

 

많은 신과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면서 행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을 말씀해 주십시오.

행복을 바라면서

각묵스님

(큰 행복 경)

 

많은 천신들과 사람들은 안녕을 바라면서 행복에 대해 생각합니다.

무엇이 으뜸가는 행복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안녕을 바라면서

 

 

 

표를 보면 1번 게송에서 공통적으로 표현된 것은 바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최상의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래서 ‘소망하면서,  desire,  み, 바라면서’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경의 해제에 따르면

 

이는 경의 해제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해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Prj. I. 118-123 에 따르면 전 인도에서 도시의 성문이나 집회당에서 세속적으로 ‘어떠한 것이 축복인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 보는 것의 축복이라고 하는 자들은 상서로운 것이라고 인정된 형상이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독수리나, 빌와 나무의 싹이나, 임산부나, 잘 차려 입은 소년이나, 가득 찬 항아리나, 신선한 물고기나, 준마나, 준마가 끄는 수레나, 암소나, 갈색의 황소나, 다른 상서로운 것으로 인정된 것을 보는 것이 축복이다.

 

2) 듣는 것의 축복이라고 하는 자들은 상서로운 것이라고 인정된 소리가 곧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번영!'이나 ‘성장!’이나 ‘충만!'이나 '아름다움!’이나‘오늘 좋은 밤을!, 아름다운 순간을!, 좋은 날을!, 축복을!’과 같거나 어떤 상서로운 것으로 인정된 것을 듣는 것이 축복이다.

 

3) 인식된 것이 축복이라고 하는 자들은 상서로운 것으로 인정된 향기와 맛과 감촉이 곧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른 아침에 일어나 연꽃의 향기와 같은 꽃의 향기를 맡거나, 이빨을 청소하거나, 땅을 접촉하거나, 푸른 곡식이나, 신선한 쇠똥이나, 거북이나, 참깨수레나, 꽃이나, 열매를 만지거나, 신선한 진흙을 바르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거나 ,아름다운 터어반을 걸치는 것이나, 어떤 상서로운 것의 향기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감촉을 느끼는 것이 축복이다.

 

지상에서의 이러한 논쟁이 뜨거워지자 하늘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해서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인 도리천에까지 알려졌다. 제석천은 하늘아들을 파견하여 부처님에게 여쭈어 볼 것을 청했는데 이렇게 해서 이 경이 설해진 것이다.

 

(마하망갈라경 해제, 전재성박사)

 

 

마하망갈라경이 설해지게 된 배경을 보면 세 가지 논쟁으로 촉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는 것, 듣는 것, 인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침에 어떤 현상에 대한 조짐을 보면 그 날 일이 술술 잘 풀려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다.

 

푸른 신호등이 연속으로 걸렸을 때

 

아침에 무언가를 본다거나, 듣는다거나, 생각이 나면 그 날은 재수가 좋을 것 같다는 예감 같은 것이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교통신호등이다.

 

아침 출근길에 운전하다 보면 차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교통체증이 심하다. 거기에다 신호등 마저 자주 빨간 불이 들어 오면 더 초조해진다. 그런데 어떤 날 아침의 경우 달리는  내내 계속 녹색등만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하루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에 따르면 상서로운 일이나, 행운이나 좋은 일이 일어 날 조짐은 어떤 특별한 것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을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경에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는다든가, 분수에 맞게 산다든가, 많이 배우고 기술을 익힌다든가, 부모를 공양하고 일가를 돌보는 등 착하고 건전하게 살다 보면 상서로운 일이 생길 수 있고 그런 삶 자체가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으로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한다든가,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것 역시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조짐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각 게송마다 후렴구로 에땅 망갈라뭇따망 (eta magalamuttama라 하였다. 이는 영역에 따르면 “these are the auspices”또는 “this is the greatest blessing”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야말로 상서로운 일입니다또는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다보면 상서로운 일, 좋은 일이 생겨날 것이라는 말이다.  

 

망갈라(magala)와 수카(sukha)는 다르다

 

망갈라경에서 볼 수 있는 빠알리어 망갈라는 행운, 길상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으로 번역된 것은 나까무라 하지메역의 영향이라 보여진다. 일역을 중역하다 보니 답습한 것처럼 보여진다.

 

행복이라는 말은 빠알리에 별도로 있다. 수카(sukha)라는 말이다. 수카는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사선정에서 선정의 단계를 설명할 때 ‘심-사-희-락-정’이라 하는데, 이때 ‘락()’에 해당되는 것이 수카이다.

 

행복을 뜻하는 빠알리어 수카는 멧따경(자애경, Sn1.8)에서도 볼 수 있다. 멧따경에서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라는 문구가 있다.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라는 뜻이다. 이때  수카가 행복(sukha)으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망갈라와 수카는 쓰임새가 다른 것이다.

 

수카는 행복이라는 뜻과 함께 안락으로도 번역된다. 부처님이 전도선언에서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라고 하였을 때 이익과 안락이라는 말이 ‘hitāya sukhāya’인데, 수카가 안락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생의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떠나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망갈라와 수카가 서로 다른 의미로서 번역도 다름을 알 수 있다. 망갈라가 좋은 일어날 조짐으로 번역되는 한자어 ‘행운’ 또는 ‘길상’의 의미라면, 수카는 ‘행복’ 또는 ‘안락’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이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망갈라와 수카에 대하여 구별없이 모두 행복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망갈라경에서 “에땅 망갈라뭇따망(eta magalamuttama)” 에 대하여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라 하였고, 멧따경에서는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에 대하여 “모든 중생 즐겁고 안녕하여 부디 행복할지라”라고 번역하였다. 이처럼 망갈라와 수카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 구분없이 사용한 것은 번역에 임하는 태도가 사려깊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나까무라 하지메류의 번역을 답습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길상경(吉祥經)으로 불러야

 

망갈라경에서 망갈라는 행복이라는 말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빠알리 사전에도 행복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고 경에서도 행복이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망갈라는 행운의’, ‘상서로운’, ‘좋은 조짐이 일어 날 것 같은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가장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 다면 한자어 길상(吉祥)이라 본다. 행운과 행복, 축복, 상서로운 일, 좋은 조짐 등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 수호경으로 잘 애송되고 있는 자아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의 한자어 제목도 길상승리게(吉祥 勝利偈)’이다.

 

길상승리게는 부처님의 여덟가지 승리에 대한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승리가 나에게도 오기를 바라는 것이 길상승리게인데 후렴구를 보면  떼자사  바와뚜    자야  망갈라니 (Ta 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전재성박사의 해석을 보면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로 되어 있다. 후렴에서 magalā(망갈라)에 대하여 행운으로 번역한 것이다.

 

망갈라와 수카가 다르듯이 길상과 행복은 다른 말이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행복감을 말하고, 길상은 좋은 일이 일아날 조짐을 말한다. 아침 출근길에 푸른 신호등만 연속으로 되어서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고, 행운이 올 것 같고, 좋은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그것 자체가 상서로운 일이고 행운이고 길상이라 볼 수 있다. 

 

 

2013-04-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