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이, 감관(感官)과 육적(六賊)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5. 11:36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이, 감관(感官)과 육적(六賊)

 

 

매혹적인 꽃

 

살맛 나는 계절이다. 여기저기에서 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상큼한 공기, 일년중 이때가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래서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을 것이다.

 

꽃의 계절 오월초순에 피는 꽃들이 있다. 주변에서 해마다 늘 이맘때가 되면 보는 꽃이다. 그래서 꽃구경을 떠났다. 멀리도 아니고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이다.

 

사람들이 밀집하여 사는 단지에 매혹적인 꽃이 피었다. 마치 장미처럼 꽃잎이 겹겹이 있고 연분홍색깔이다. 크기는 어른 주먹만하다. 해마다 이맘 때 아파트 단지에 피는 이 꽃 이름은 무엇일까?

 

 

 

 

 

 

 

 

 

 

 

 

 

 

 

 

 

 

 

 

꽃도둑인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그래서 한참 쳐다 본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스마트폰으로 찍기에 열심이다. 이꽃 이름은 무엇일까?

 

 

 

 

 

 

 

 

 

 

 

 

 

 

 

 

해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에서 예쁘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꽃을 피워낸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게 만든다. 그래서 시선을 사로잡아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만든다. 이를 꽃도둑이라 볼 수 있을까?

 

순백의 하얀 꽃

 

거리의 가로를 걷다 보면 눈길을 사로 잡는 꽃들이 많다. 그런 꽃이 있으면 주머니의 디카에 손이 간다. 항상 왼쪽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찍을 수 있도록 충전된 상태이다. 마치 카우보이가 늘 총을 휴대하듯이 늘 작은 디카를 가지고 다닌다.

 

이번에는 하얀꽃을 보았다. 모두 순백의 빛깔이다. 더구나 활짝 피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순수해지는 것 같다.

 

 

 

 

 

 

 

 

 

 

 

 

 

 

 

이번에도 시선을 사로 잡아 버렸다. 그래서 디카를 꺼내지 않을 수 없도록 끌어 당겼다. 이렇게 거리를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꽃들이다.

 

하얀색과 붉은 색조화

 

가로를 벗어나 산에 진입하였다. 또 눈길을 끄는 꽃이 보였다. 백색과 붉은 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꽃이다. 오엽으로 된 꽃 역시 활짝 피어 절정을 맞이 하고 있다.

 

 

 

 

 

 

 

 

 

 

 

산에서 피는 꽃은

 

산에서 피는 꽃은 작고 소박하다. 거리에서 피는 꽃과 작은 꽃잎과 하얀색깔이 특징적이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는듯

 

산에서 피는 소박한 꽃과 달리 거리에서는 붉고 화려한 꽃 일색이다. 가장 많은 것이 철쭉과 영산홍이다.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조경용 꽃이다. 너무 흔하다 보니 카메라에 손이 가지 않는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거리와 공원에 조경용으로 심어진 영산홍은 마치 활짝 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한꺼번에 일제히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는 것 같다.

 

 

 

 

 

 

 

 

 

 

 

꽃이 피는 계절이 꽃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꽃을 보면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붉고 큰 매혹적인 꽃에 끌린다. 이런 끌림은 시각적으로 즐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시각적 즐거움에 이끌리는 것에 대하여 경계의 말씀을 하셨다. 형상에 대한 갈애를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접촉으로 인하여

 

여섯 감각능력과 여섯 감각대상이 접촉하면 세상이 발생한다. 창조주가 있어서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능력이 감각대상을 인식함에 따라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은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이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고 불교의 세계관이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나를 중심으로 하여 순간순간 발생되는 것이지, 내가 세상속에 있어서 그 세상 속에서 나고 죽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여섯감역에 대한 이야기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다. 35상윳따인 여섯가지 감역의 모음(Saāyatana Sayutta,S35)이다.

 

35상윳따 여섯가지 감역의 모음(Saāyatana Sayutta)

 

제35상윳따 여섯가지 감역의 모음은 매우 방대하다. 19품 248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려 618페이지에 달한다. 이렇게 방대한 35상윳따에서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일까?

 

해제글에 따르면 35상윳따의 빠알리 이름 살라야따나(Saāyatana)에서 아야따나(āyatana)는 ‘근원, 원천’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는 여섯 쌍의 토대로 여섯 감역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섯 가지 내적 감역과 여섯가지 외적인 감역이 접촉하여 생긴 것을 일체라 하는데, 이는 세상이 발생되는 원천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정신까지 감각능력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눈, 귀, 코와 같은 내적 감역에 정신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이는 정신영역까지 일체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일체라고 한다.(S35:23)”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체에 ‘정신(mano)과 사실(dhamma)’ 을 포함시킴으로서 정신을 눈과 귀 등과 같이 감각능력 중의 하나로 본 것이다. 그래서 정신대상의 감역에서는 미묘한 물질적 현상과 조건지어지지 않은 무위의 열반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섯 쌍의 감역을 통하여 부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일까? 부처님은 고통에서 해방시고자 법문을 하였다. 그런데 고통의 원천이 접촉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S35:106)”라고 하였다. 세상의 생겨남과 같은 원리이다. 모두 여섯 쌍의 접촉에 따른 것이다.

 

아름다운 형상을 취하였을 때

 

지금 예쁜 꽃을 보고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지금 매력적인 여인을 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세존]

“장자여,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는데, 어떤 뭇삶들은 그것들을 환희하고 환호 하고 탐착합니다. 그것들에 대한 환희가 있고 탐착이 있다면, 그들의 의식은 그것에 의존하며 그것들에 탐착합니다. 장자여, 집착이 있으면 그 뭇 삶들은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합니다.(S35:125)”

 

 

밧지의 경(S35:125)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욱가라고 하는 장자가 뭇삶들이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묻자 부처님이 답하신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집착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시각으로 보는 형상에 집착하였을 경우 괴로움이 발생하고 수행자라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십이연기에 따르면 집착은 갈애를 연유로 한다. 따라서 집착 이전에 형상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갈애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요인은 무명이다. 즉 현상에 대하여 이것은 영원하고 즐겁고 실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한 갈애가 일어 날 수 밖에 없고 고통을 야기 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윤회하게 만들것이라 한다. 따라서 모든 괴로움의 뿌리는 무명이고, 접촉에 따른 갈애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되는 것이다.

 

향기도둑

 

상윳따니까야 게송에 향기도둑이라는 말이 있다. 비구가 연꽃향기가 좋아 매일 향기를 취하자 하늘사람이 게송으로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 도둑이네. (S9:14)”라 하였다. 수행자의 허물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청정범행을 닦는 수행자는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이기 때문에, 향기를 취하는 것을 도둑질로 본 것이다.

 

오계에서 도둑질이란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향기를 맡으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향내를 취하는 행위를 경에서는 도둑질로 본 것이다. 왜 이처럼 엄격하게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향내 맡는 행위를 내버려 두면 갈애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듯이 갈애는 집착으로 발전되어 소유하려 할 한다. 게송에서 향기도둑이라고 한 것은 청정범행을 닦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탁구공만한 작은 허물도 보통사람의 눈에는 축구공만하게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둑질은 향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을 바라보고 집착한다면 꽃도둑, 형상도둑이 될 것이다. 음식을 보고 맛에 탐착한다면 음식도둑, 맛도둑이 된다. 그래서 여섯 감각능력에 대한 대상 모두가 도둑이 될 수 있다. 수행자에 있어서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 모두가 도둑질이 된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대하여 육적(六賊)이라 하였다.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육근을 도둑에 비유한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각기관의 문을 단속할 수 있을까?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Subhānupassi viharanta        수바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asavuta,            인드리예수 아상유땅
Bhojanamhi amattaññu
,           보자남히 짜맛딴늉

kusīta hīnavīriya,            꾸시땅 히나위리양
Ta
ve pasahati Māro             땅 웨 빠사하띠 마로

vāto rukkha va dubbala.       와또 룩캉와 둡발랑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법구경 Dhp7, 전재성님역)

 

 

신체의 특정부위를 명상주제로 삼았을 때

 

아름다움에 탐닉(Subhānupassi viharanta)하는 것은 “원하는 대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아름다운 손톱과 발가락, 손과 발, 다리와 허벅지, 엉덩이와 배, 가슴과 목, 입술과 치아, 입과 코, 눈썹과 이마, 머리카락과 몸털, 피부와 안색과 몸의 윤곽에서 오는 인상과 연상을 명상주제로 하는 것(Dhp.I.74)”라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연예인들의 특정 부위를 좋아하는 것 같은 내용이다. 인터넷에서 말하는 “김 태희 의 눈 , 이나영 의 입술 , 한채영 의 몸매” 같은 것이다.

 

이처럼 연예인의 신체에 대한 특정부위의 아름다움에 탐닉하였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게송에서는 이를 인상과 연상으로 설명하였다. 인상은 ‘여자다, 남자다’라고 인식하는 전체상(全體相)을 말하며 니밋따(nimitta)로 표현된다. 연상은 ‘코, 눈’ 등 신체의 일부분을 인식하는 세밀한 상(細相)을 말하며 아누비얀자나 (anuvyanjana)라 한다. 이렇게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것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의 문 이렇게 여섯 감각의 문을 말한다.

 

식사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런데 게송에서는 갑자기 식사이야기가 나온다. 감관을 수호하는 것, 즉 여섯 감각기관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음식을 구하고, 받고, 소비하는 적절한 수단을 알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이 음식은 올바른 생활을 위한 것이다. (Dhp.I.74, Dps.5)”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음식이야말로 여섯 가지 감각의 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 본다. 음식은 단지 후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등 여섯 감각능력이 총동원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S35:239)”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음식은 마치 수레에 기름을 치듯이 단지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라는 뜻이다.

 

식탐을 일으키면 여섯 감각능력을 수호 할 수 없음을 말한다. 또 음식에 대한 갈애는 성욕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라 본다. 식욕은 성욕과 함께 생리적 욕구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 행위 역시 먹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 감각능력이 총동원 되기 때문이다. 왜 게송에서 뜬금없는 듯이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Bhojanamhi amattaññu)”라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리라고 보여진다.

 

수행자가 감각의 문도 지키지 않고 음식도 절제하지 않는다면 게으른자라고 볼 수 있다. 게송에서 말하는 게으름(kusīta)감각적 쾌락에 메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Dhp.I.75)”를 말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정진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정진이 없다(hīnavīriya)는 것은 행주좌와와 관련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을 증가시키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감소시키는 정진력이 결여된 것을 말한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그 정진을 말한다.

 

악마(Māra)라는 이름

 

이처럼 특정신체 부위를 명상주제로 삼고, 음식먹는 것을 즐기고 게으른자의 말로는 어떤 것일까? 게송에서는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는 것 (vāto rukkha va dubbala)’과 같다고 표현 하였다. 강력한 폭풍이 허약한 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리듯이, 번뇌속의 악마는 그에게서 생겨나서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작은 가지 넘어 뜨리는 것처럼, 열 세가지 승잔죄(sanghadisesa:대중에게 참회하고 승단에 남아있을 수 있는 죄), 뿌리 뽑아 뿌리와 가지를 뒤집는 것처럼, 단두죄(parajika: 승단에서 추방하는 죄)를 어기도록 유도한다. 악마가 그를 잘 가르쳐진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해서 속퇴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vāto rukkha va dubbala 각주, Dhp.I.75-76)

 

 

여기서 말하는 악마는 사유과정에서 일어나는 약화된 번뇌를 뜻하는 것이라 한다. 악마는 탐욕과 증오 등을 통하여 덕성을 죽이기 때문에 번뇌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악마(Māra)는 다섯 가지로 묘사 된다. 즉 1) 개인을 구성하는 존재의 다발(오온), 2) 오염(kilesa), 3) 윤회의 지속으로 이끄는 경향(abhisankhara), 4) 죽음(maccu), 5) 하늘아들로서의 악마(devaputtamara)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Asubhānupassi viharanta       아수바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susavuta,           인드리예수 수상유땅
Bhojanamhi ca mattaññu
,         보자남히 짜 맛딴늉

saddha āraddhavīriya,         삿당 아랏다위리양
Ta
ve nappasahati Māro          땅 웨납빠사하띠 마로

vāto sela va pabbata.         와또 셀랑와 빱바땅

 

 

감관을 잘 수호하여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믿음을 지니고 힘써 정진하면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리.

 

(법구경 Dhp8, 전재성님역)

 

 

 

2013-05-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