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무아윤회 딜레마와 부처님의 무기(無記)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29. 14:34

무아윤회 딜레마와 부처님의 무기(無記)

 

 

 

사람들은 존재의 근원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든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의문을 한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선사들은 알 수 없는 의심을 하라고 한다. 이뭣꼬, 무자, 판치생모 등 화두 등을 들어 의심하라고 한다. 이 때 이치를 따진다거나 교리적으로 알려고 하면 안된다고 한다. 분별하기 때문이라 한다.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은 무엇인고?” 라든가 어째서 무라 했을 꼬?” 라든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라고 알 수 없는 의심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확철대오 할 것이라 한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의심과 같이 막막한 글을 종종 받는다.

 

다그치는 듯한

 

어느 법우님으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궁금해서 여쭈어 봅니다!
윤회는 저주이며 공포이고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자업자득의 윤회에 자기동일성이 없다면
지금의 <나>와 윤회가 무슨 연관이 있으며 ? 무슨 공포가 될까요?
재생연결식에 자기동일성이 없다면 지금의 나와 상관없는 일 이 아닐까요?

 

(C법우님)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다. 특히 윤회와 업과 관련하여 자기동일성, 즉 윤회의 주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 하였다. 제대로 답할 수 없는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이런 민감한 주제에 잘못 말려 들면 낭패 보기 쉽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면 자꾸 질문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끝 없이 질문과 답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난감하다.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이어지는 글에서 윤회에 자기동일성이 없다면 <누가> 일곱번 윤회한후에 열반에 든 것입니까?”라고 거듭 요청하며, 더구나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다그치는 듯한글을 받았을 때 깊이 숙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아윤회의 딜레마

 

문제는 윤회와 윤회의 주체에 대한 것이다. 윤회의 주체가 없다면 어떻게 윤회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하여 현 조계종 교육원장인 현응스님은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대다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종류나 형태의 실재성 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실재성이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실재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삶의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 무아, 공을 내세우는 불교가 대중을 설득하기 힘든 점이었다. 반야경 등의 대승경전의 편찬자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어려움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열리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불교평론 2010년 2월 18일)

 

 

부처님은 무아와 연기를 설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무아와 연기를 잘 이해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스님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 어떤 실재(예컨대 신, 브 라만, 선, 이성, 명예, 부, 쾌락 등)가 전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실재로부터 행위의 동기와 목적을 부여받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누군가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서 현응스님은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만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댄다라고 설명하였다.

 

존재론적 방편을 도입한 대승불교

 

무아윤회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승경전의 편찬자들은 실재론에 서 있는 다른 종교, 즉 브라만교에서 환골탈태된 힌두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연기론을 재해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공사상을 바탕으로 대승불교라 한다. 이에 대하여 현응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교는 보통 극단적인 상대주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대승은 이러한 상대주의적 입장에다가 의도적, 잠정적, 가상적인 실재론적인 입장을 접목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달마의 불교가 연기론을 공관사상으로 발전시켜 세상을 보는 관점을 공, 가, 중이라는 독특한 존재론으로 형성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전된 연기적 존재관에 의도적인 원과 방편이라는 역사적 실천을 접목하는 일,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회심의 역사관인 것이다.

 

(열리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불교평론 2010년 2월 18일)

 

 

현응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초기불교는 상대주의 세계관이라 한다. 상대주의는 무아사상이라 볼 수 있는데, 무아사상에 실재성을 접목한 것이 대승불교라고 한다. 그 이론적 근거는 용수의 공관사상이다.

 

용수는 공, , 중 삼제라는 독특한 공관에 의하여 존재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초기불교의 무아사상과 존재론적 방편을 조화시킨 것이 대승불교의 회심의 역사관이라 하였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계승하면서도 존재론적으로 설명가능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무아윤회를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스님은 대승의 용어인 공, 여래장, 진여와 연기, 무상, 무아로 설명되는 초기불교 용어를 구분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하였다. 결국 초기불교를 더욱 더 현실에 맞게, 시대에 맞게 발전시킨 것이 대승불교사상이라 하였다.

 

초기불교가 미완성이라고?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소승불교라고 폄하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근본 가르침이라 불리우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원시불교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덜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사람이 태어나서 유년기, 소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듯이 불교 역시 사람이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로 어떤 산중승의 댓글을 보면 선사들이 초기불교를 바라 보는 시각을 알 수 있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
佛敎]라는 宗敎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즉,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불교는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여여하게 있는 우주의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無常 것이고 一體唯心造'인 것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산중승)

 

 

인터넷 필명 산중승은 스님이다. 검색을 해보니 白髮 山中 老僧/ 대한불교 조계종 영축산 通道沙門라고 되어 있다. 또 히말라야에서 8년간 수행을 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모든 불교를 아우른 스님의 초기불교에 대한 시각은 현재 조사불교에서 초기불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는 완전하고 바른 깨달음

 

하지만 이런 시각에 대하여 테라와다에서는 부정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도 완전한 것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정등각(正等覺)을 의미하는 삼마삼보디(sammā-sambodhi)는 오직 부처님들만 얻을 수 있는 아라한 도의 지혜입니다. 부처님들은 이 아라한 도의 지혜를 어떠한 누구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과 직관력으로 얻으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무상정득각이라 하다.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란 뜻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른 깨달음 인 것 이다. 이처럼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것은 초전법륜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경에서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라는 말이 나온다. 부처님이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굴렸다고 하였다.

 

만일 처음 한 번만 굴렸다는 대승에서 말한대로 불완전한 깨달음이 될 것이다. 또 두 번만 굴렸다면 역시 덜 깨달은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듯이 부처님이 장년이나 노년에 다시 한 번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넘어 갔다면 후대 사람들이 깨달음을 보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처음 굴렸을 때 법을 설하지 않았고, 두 번째 굴렸을 때도 법을 설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생각하기에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경에서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서기 전까지 유보한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세 번째 굴렸을 때 확신이 선 것이다. 이를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이라 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는 완전하고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앏과 봄이 생겨났다.”라는 아라한 선언과 함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선포한 것이다.

 

정득각자(sammā-sambuddha) 일체지자(sabbaññu)

 

그래서 부처님을 정득각자(sammā-sambuddha)’라 한다. 이처럼 정득각자로서의 부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아는 자라는 뜻으로 일체지자(sabbaññu)’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와 조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는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고, 부처님은 이 세상의 원리에 대한 모든 지혜를 가지고 있는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이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어떤 사상이나 이론도 연기법으로 논파 하였다. 그런 기록이 니까야에 고스란히 기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는 것 같지 않다. 소승법이라든가 원시불교 같은 용어가 이를 말한다. 또 대승경전 곳곳에 소승이라 비하하는 내용이 부지기 수이다.

 

자신의 견해를 감추고 질문하는 외도

 

하지만 빠알리 니까야에서 보는 부처님 가르침 자체는 완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당시 외도들은 은근히 부처님의 깨달음을 시험해 보려 하였다. 그런 내용이 니까야에 실려 있다. 뽓따빠다경(D9)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뽓따빠다]

세존이시여, 지각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지각과 자아는 다른 것입니까?”

 

(Poṭṭhapāda Sutta- 뽓따빠다의 경, 디가니까야 D9, 전재성님역)

 

 

유행자이자 외도인 뽓따빠다가 부처님을 떠 보기 위해 넌지시 질문한 것이다. 이런식의 질문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Smv.376에 따르면, 지금 유행자는 마치 마을의 돼지가 향수로 목욕하고 향료를 바르고 꽃다발을 장식하고 왕좌에 올라도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서둘로 오물장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행복을 찾듯,부처님에 의해서 유연하고 미세한 세 가지 특징으로 조직된 가르침에 목욕하고 단장하고 장식하고 소멸론(nirodhakatha)이라는 왕좌에 앉아도 거기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물장과 같은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의 답변을 유도하여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궁지로 몰아 넣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상을 논파하면 명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기로 일관한 부처님

 

이런 의도를 눈치 챘음인지 부처님은 역으로 뽓따빠다여, 그대는 자아를 어떻게 추정합니까?”라고 물어 본다. 이에 대하여 뽓따빠다는 저는 자아가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지고, 물질적인 자양으로 거친 것이라고 추정합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그는 자아는 비물질적인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세존은 가르침이 교묘하여 처음부터 나의 견해를 부수려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견해를 감추고 이와 같이 말했다.( Smv.376)라고 설명되어 있다.

 

외도가 자신의 견해를 감추어 두고 답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여 실책을 유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외도의 질문에 부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을까?

 

외도 뽓따빠다는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까?”부터 시작하여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였다. 이때 마다 부처님은 무기로 일관하였다. ‘왜 설하지 않느냐는 뽓따빠다의 다그침에 부처님은 이러한 것들은 유익하지 않고…”로 시작 되는 말과 함께 사성제를 말씀 하신다.

 

이처럼 부처님은 나는 누군인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기로 일관하였는데, 이런 모습은 말룽끼야뿟따경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부처님의 제자 말룽끼야뿟따가 명상하다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의문이 일어나자 부처님에게 질문하였다. 그럴때 마다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자 말룽끼야뿟따는 이와 같은 사변적인 견해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고 제쳐 두고 배척하였다라고 생각하며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말룽끼야뿟따 마침내 부처님에게 답변을 듣지 않으면 속퇴할 결심을 하고 다시 물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어라 말씀 하셨을까? 경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여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세계는 영원하다든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설명한 적이 없음을 말하였다. 철저하게 무기로 일관한 것이다.

 

그대신 지금 여기서 괴로움의 해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말룽끼야뿟따에게 독화살의 비유를 설하였다. 지금 독화살을 맞았는데, 독화살을 맞은 이유를 알려고 하다가는 미처 알기도 죽을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그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들을 지금 여기서 파괴할 것을 가르친다.(M63)”라고 하였다. 뭇삶들이 삶의 과정에서 격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즉 소까(Soka, 슬픔), 빠리데와(parideva, 비탄), 둑카(dukkha, 고통), 도마낫사(domanassa, 근심), 우빠야사(upāyāsā, 절망)의 극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룽끼야 뿟따에게 사성제를 설하시고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은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새기고 내가 설명한 것은 설명한 것으로 새기라.(M63)”라고 당부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존재의 근원을 찾는 형이상학적 질문, 즉 희론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사성제와 같은 가르침을 잘 새겨 들으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답을 하지 않은 이유 두 가지

 

부처님이 외도 뽓따빠다와 제자 말룽끼야뿟따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철저하게 무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희론(戱論)이라 본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존재의 근원을 따져 가는 것 자체가 답이 없는 희론으로 본 것이다. 평생 의문을 가져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본 것이다.

 

또 하나 부처님이 철저하게 무기로 일관한 것은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본다. “나는 누구인가?” 라든가 세상은 무한한가?” 등의 질문은 희론이기 때문에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질문자체가 틀렸기 때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예를 상윳따니까야 몰리야팍구나경(S12:12)에서 본다.

 

누가아니라 무엇 때문에라고

 

부처님의 제자가 팍구나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때 부처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Moiyaphagguna1sutta-몰리야팍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전재성님역)

 

 

 

 

 

Buddha

 

 

 

팍구나는 부처님에게 이것저것 질문한다. 그때 마다 하는 말이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 “누가 느낍니까?” “누가 갈애합니까?”와 같이 항상 누가를 붙인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질문이 잘못되었으니 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존재합니까?”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고 충고한다.

 

누가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연기적으로 사고 하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바른 질문을 하였을 때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명백하다. C법우님이 윤회에 자기동일성이 없다면 <누가> 일곱번 윤회한후에 열반에 든 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은 질문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힌두교와 다름 없는 조사불교

 

불교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단연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무아사상이야말로 불교를 불교답게 하고 부처님의 근본사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무아사상이 탄생하게 된 것은 시대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주류종교이었던 브라만교의 아뜨만사상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 불교이다. 그러다 보니 브라만교와 반대되는 무아사상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무아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되어 대승불교가 성립할 당시는 무아사상이 실재론으로 변질되었다.

 

대승불교는 실재론적 종교인 힌두교와 경쟁을 하기 위하여 공--중 삼제에 따른 공사상으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그런 바탕에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것이라고 본 영향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변질된 무아사상은 현재 한국불교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매일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송담스님은 영원주의에 입각한 참나를 찾자고 하고, 영가천도 등 영혼을 사실상 인정하는 법문을 하고 있다. 그것도 3년 째 매일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는 송담스님 뿐만 아니라 조사불교를 신봉하는 우리나라 선사들의 법문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다. 조사불교는 사실상 힌두교와 다름 없다.

 

단순무식한 단멸론자들

 

또 한가지 무아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단멸론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단멸론을 인터넷시대에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단멸론자들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단순무식하기 때문이라 본다. 경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들의 깜냥으로 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에 상호의존적 연기와 무아가 있다.

 

단멸론자들은 부처님의 연기법이 조건발생에 바탕을 십이연기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육체와 정신을 바탕으로 둔 상호의존적 연기를 줄기차게 주장한다. 그래서 육체적 죽음과 함께 정신 또한 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다 무아이기 때문에육체와 정신의 죽음으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단순무식하고 초등학생 같은 발상이다. 특히 무아에 대하여 살아서도 무아이니까 죽어서도 무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하여 부처님을 단멸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질문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고 완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아윤회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은 빠알리니까야를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빠알리니까야를 읽어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견해중의 하나가 윤회의 주체를 세우는 것이다.

 

무아윤회에 대하여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자들은 반드시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대승불교와 같이 공가중 삼제에 따른 실재론을 도입하였고, 무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으로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가 누가 태어납니까?(S12:12)”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누가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라고 말해야 올바른 질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라고 올바로 질문하였을 때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임이 생겨난다.(S12:12)”라고 연기적으로 답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여기서 절망하는 삶인데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은 괴로움이다. 그렇다고 해서 괴로움만 말하면 염세주의자로 몰릴 수 있으므로 괴로움의 해결방법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다. 이렇게 괴로움을 소멸시켜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윤회는 종식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인가?”라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평생 산속에서 사는 사람이나, 무아인데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자들, 그리고 무아윤회에 대하여 밑도 끝도 없는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자들은 등따습고 배부른 자들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 가는 뭇삶들은 지금 여기에서 절망한다. 매일 절망하며 죽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등따습고 배부른 자들의 빠빤짜(papañca 戱論)에 관심도 없다. 설령 빠빤짜를 알았다고 한들 지금 여기서 절망하는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뭇삶들은 단 한시라도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를 벗어 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ā)을 극복 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라고 하셨다.

 

 

 

 

2013-04-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