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깨달음의 구성요소인가 깨달음의 고리인가, 삐띠(喜悅)와 칠각지(七覺支)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4. 15:09

 

 

깨달음의 구성요소인가 깨달음의 고리인가, 삐띠(喜悅)와 칠각지(七覺支)

 

 

 

놀라울 만큼 신기하고 진기함으로 번역되는 경이는 때로 희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초판본 해제에서 전재성 박사는 삐띠(piti)에 대하여 경이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경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pitisambojjhanga)’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삐띠(piti), 경이(驚異)인가 희열인가

 

불교에서 선정단계를 설명할 때 삐띠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희열로 번역한다. 그런데 전재성박사의 초판 해제글을 읽어 보면 한때에 필자는 이 단어를 경이(驚異)라고 번역하고는 만족했으나 아무래도 놀라움(wonder, miracle)을 뜻하는 경이와는 뜻이 현격히 차이가 나는 것 같아 희열로 바꾸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번역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그렇다면 희열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희열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지극한 기쁨’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PTS 사전에 따르면 희열을 뜻하는 빠알리어 ‘삐띠(piti)’는 ‘즐거움(joy), 환희(delight), 흥미(zest), 충만(exuberance), 황홀(rapture)’ 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희열을 뜻하는 삐띠는 오온에 있어서 느낌(수온)이 아니리 행온에 속한다. 그래서 대상에 의해 창조된 관심이나 흥미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52가지 마음부수에서 같아지는 마음부수(annasamana-cetasika)에 속한다.

 

마음의 조건에 따라

 

희열은 불선한 마음부수(akusala-cetasika)도 아니고 선한 마음부수도(sobhana-cetasika)도 아니다. 희열(pīti)은 사유(vitakkka), 숙고(vicāra), 결심(adhimokkha), 정진(vīriya), 열의(chanda)와 함께 ‘때때로 같아지는 마음부수’에 속한다.

 

‘때때로 같아지는 마음부수’가 있다면 ‘반드시 같아지는 마음부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감각접촉(phassa), 느낌(vedana), 인식(saññā), 의도(cetanā) 집중(ekaggatā),  명근(jīvitindriya), 작의(manasikāra)라 한다.

 

반드시 또는 때때로 같아지는 마음부수는 선한 마음(선심)에서는 유익한 것이 되고, 불선한 마음(불선심)에서는 불선한 것이 된다. 또 업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무기(無記)의 마음들에서는 무기가 된다. 이처럼 마음의 조건에 달라 짐을 알 수 있다.

 

훔쳐 먹은 사과가 맛있다

 

만일 수행자가 선정수행을 하여 ‘희열(piti)’을 었었다면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덕스러운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둑이 물건을 훔쳐서 얻는 희열‘희열(piti)’도 있을 수 있다. “훔쳐 먹은 사과가 맛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몰래 도모하여 얻는 쾌감을 말한다. 그 경우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된다.   이렇게 희열(piti)은 조건에 따라 선한 것도 되고 악한 것도 된다. 그래서 희열(piti)은 ‘때때로 같아지는 마음부수’에 속한다.

 

선정()사단계에서

 

희열로 번역되는 삐띠(piti)는 초선 (初禪)에서 일으킨 생각(, vitaka), 지속적 고찰(, vicāra), 행복(, sukha)과 함께  네 가지 요소에 포함된다.  네 가지 선정일 경우 삐띠는 이선 (二禪)까지 있게 된다. 삼선(三禪)은 행복(, sukha)만 있고 사선(四禪)은 행복(, sukha)도 사라지고 평온(, upekkhā)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희열의 네 가지 단계

 

이처럼 삐띠가 선정의 용어로도 사용되지만, 위빠사나에서도 삐띠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 쿤달라 비왐사’가 지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에 따르면,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에 이른 수행자는 다음의 다섯 가지 삐띠를 경험한다고 한다. 삐띠는 느낌(수온)에 속하지 않고 행온에 속하기 때문에 경험한다고 표현 하였다.

 

 

첫째, 가벼운 희열-가볍게 흔들리는 즐거움이다.

 

가슴 윗부분에서 움직이는 느낌, 등뼈가 으슬으슬한 느낌이 있으며, 이 느낌은 한 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둘째, 순간적인 희열-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즐거움으로 여러 번 일어난다.

 

수행자는 사야도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몸에서 여러 번 경련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합니까?”

이때 사야도는 ‘경련, 경련’ 하며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한마디로 무엇이 일어나건 일어나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일아차리는 힘(집중)이 좋은 수행자는 한 번의 경련이 다음 경련으로 이어지며, 또다시 그다음 경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행자는 희열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진동하는 희열-주요현상은 진동이며 기쁨이 넘쳐 흐르는 것이다.

 

생멸의 지혜에 이른 수행자는 이를 경험할 수 있다. 몸의 아래에서 위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거나 차가운 안개가 감싸는 느낌이 몸의 위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기도 한다. 이 느낌은 몸의 위쪽으로 올라오면 사라진다. 어떤 때는 따뜻한 느낌이나 차가운 느낌이 몸의 위쪽에서 시작 되어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사라지기도 한다.

 

수행자는 사야도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이런 따뜻한 느낌이나 차가운 느낌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느낌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느낌은 위쪽에서 와서 아래쪽으로 향하기를 반복한다.

 

넷째, 들어올리는 희열-황홀하고 짜릿한 느낌으로 위로 들려져서 날아오르는 희열이다.

 

부처님 시대에는 이런 희열이 일어나 하늘로 떠올라서 실제로 공중을 날아다닌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이 아주 잘 될 때, 수행자의 손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때는 양손이 저절로 천천히 올라와서 절을 할 때처럼 연꽃모양이 되기도 한다.

 

이곳 센터에 있는 한 수행자는 좌선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팔이 들어 올려진 채로 한 시간 내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팔이 아프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을 들어 올리는 희열이라 한다.

 

한 수행자는 좌선하는 동안 근처의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어떤 수행자는 수행하는 동안 개구리가 뛰는 것처럼 살짝 뛰어오르기도 한다. 만약 그가 경행을 하는 중에 들어올리는 희열이 일어났다면 여기저기로 뛰었을지도 모른다.

 

들어올리는 희열이 일어나면 수행자는 매우 가볍고 빠른 느낌을 갖는다. 수행자는 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다리의 움직임이 재빠르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뛰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사야도는 수행자에게 뛰려 하지 말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뛰면 알아차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들어올리는 희열이 일어났다는 것은 수행자가 생멸의 지혜를 얻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 쿤달라 비왐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

 

 

 

 

 

stream entry

 

 

 

우 쿤달라 비왐사는 네 가지 희열의 종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라 한다. 희열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현상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희열은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들어 올리는 희열이 일어나면 수행자의 마음이 유쾌해져서 수행을 아주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 올리는 희열에 대한 숙고도 아주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수행자가 용기를 잃었을 때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하고 숙고하여 ‘희열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도록 해야한다고 하였다. 이때 ‘희열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는 무엇일까?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七覺支)가 있는데

 

상윳따니까야에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가 있다. 이를 ‘칠각지(七覺支, satta Bojjhaga)’라 한다. 칠각지에 ‘희열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 그렇다면 칠각지는 어떤 것일까?  해제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먼저 명상대상인 신체, 느낌, 마음, 사실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한다. 이것이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satisambojjhaga, 念覺支)이다. 새김이 안정될 때 에 대상의 모습을 분명히 구별하고 아울러 명상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착하고 건전한 상태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이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dhammavicayasambojjhaga, 擇法覺支)이다.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향한 노력을 유발한다. 이것이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viriyasambojjhaga, 精進覺支)이다. 정진을 통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기쁨이 생긴다. 이것이 희열의 깨달음의 고리(pītisambojjhaga, 喜覺支)이다. 기쁨이 정밀하게 정화되면서 안온이 생긴다. 이것이 안온의 깨달음의 고리(passaddhisambojjhaga, 輕安覺支)이다. 안온의 상태를 통해서 집중이 생겨난다. 이것이 집중의 깨달음의 고리(samādhisambojjhaga, 定覺支)이다. 집중된 마음은 평정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평정의 깨달음의 고리(upekkhāsambojjhaga, 捨覺支)이다. 

 

(칠각지,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5권 해제, 전재성박사)

 

 

해제글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는 동시수반적이라 한다. 각각의 연속적인 고리들에서 이미 일어난 것들이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라 수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재성박사는 보장가(bojjhaga)’에 대하여 깨달음의 고리라고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동시적 수반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구성요소인가 깨달음의 고리인가

 

그러나 다른 번역서를 보면  깨달음의 구성요소로 번역 하였다. 하지만 이는 보장가(bojjhaga)의 원래 뜻과 맞지 않다.

 

보장가(bojjhaga)는 보디(bodhi)와 앙가(aga)의 복합어이다. 보디가 깨달음이라는 뜻이고, 앙가는 연결 부위, 고리, 요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대 번역가들은 앙가에 대하여 요소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재성 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부처님이 언어를 선택할 때 심사숙고하여 그 용어를 선택한 심오한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같은 요소라도 연기적인 관계성을 반영하는 연결고리라는 의미에서 고리라는 번역어를 택한다.”라고 하였다. 앙가의 원뜻을 살려 고리라고 번역한 것은 부처님이 심사숙고 하여 용어를 선택하였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칠각지는 십이연기처럼 하나를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 수반적으로 보아 깨달음의 고리라고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마음이 침체되었을 때, 마음이 들떠 있을 때

 

해제에 따르면 칠각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활성적인 것과 제어적인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것이 탐구, 정진, 희열이 먼저 일어난다. 후자에 속하는 안온, 집중, 평온은 뒤이어 일어난다. 그래서 활성적인 요소는 작은 불로 연료를 태우듯, 마음이 권태로울 때에 개발되어야 하고, 제어적인 요소는 물을 뿌려 산불을 끄듯, 마음이 들떳을 때에 개발되어여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새김(sati)은 활성적인 것과 제어적인 것의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지만 양자에 모두 유효한 것으로 그 균형을 유지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침체되었다면 그 때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고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고 희열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다. 그것은 어떠한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침체되었다면 그것을 조건으로 고양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악기경-Aggisutta-불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3, 전재성님역)

 

 

악기경에 따르면 마음이 침체 되었을 때 택법각지(擇法覺支), 정진각지( 精進覺支), 희각지(喜覺支)가 좋다고 하였다. 마음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이를 사람이 불씨를 살리려 하는데, 거기에다 마른 풀잎을 던지고 마른 쇠똥을 던지고 마른나무를 던지고 입우로 바람을 불고(S46:53”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경의 제목이 불의 경(Aggisutta)’이라 하였을 것이다. 반면 마음이 들떳을 때는 불을 꺼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경안각지(輕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삼매), 사각지(捨覺支, 평정)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소금과 대신의 역할을 하는 염각지(念覺支)

 

아무곳에도 속하지 않는 염각지(念覺支,sati)에 대해서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새김을 확립하는 한, 그것은 모든 경우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S46:53)”라고 하였다. 이는 오근과 오력에서 사띠의 역할과 같다. 그래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satisambojjhaga, 念覺支)’는 ‘소금의 맛이 모든 속성에 들어가듯이, 모든 일을 하는 대신은 전쟁도 하고 조언도 하고 예식에 참여하는 등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처럼’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리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이와 같은 칠각지의 역할에 대하여 정리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

(satisambojjhaga, 念覺支)

명상대상인 신체, 느낌, 마음, 사실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함.

-활성적인 것과 제어적인 것의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지만 양자에 모두 유효한 것으로 그 균형을 유지하는 데 특히 중요

 

-소금의 맛, 대신의 중재역할.

 

-새김을 확립하는 한, 그것은 모든 경우에 유익함.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

(dhammavicayasambojjhaga, 擇法覺支)

새김이 안정될 때 에 대상의 모습을 분명히 구별하고 아울러 명상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착하고 건전한 상태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구별함.

-활성적인 것

 

-마음이 침체 되었을 때

개발해야함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

(viriyasambojjhaga, 精進覺支)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향한 노력을 유발함.

희열의 깨달음의 고리

(pītisambojjhaga, 喜覺支)

정진을 통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기쁨이 생겨남.

안온의 깨달음의 고리

(passaddhisambojjhaga, 輕安覺支)

기쁨이 정밀하게 정화되면서 안온이 생겨남.

-제어적인 것

 

-마음이 들떠 있을 때 개발해야함.

집중의 깨달음의 고리

(samādhisambojjhaga, 定覺支)

안온의 상태를 통해서 집중이 생겨남.

평정의 깨달음의 고리

(upekkhāsambojjhaga, 捨覺支)

집중된 마음은 평정한 상태가 됨.

일곱 고리로 연결된 칠각지는 동시수반적임

 

 

 

 

삐띠(희열)는 알아차려야 할 대상

 

희열로 번역되는 삐띠는 칠각지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37조도품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정신적 요소이다. 37조도품에서 정진이 9번 등장하고, 사띠가 8번 이나 등장하는 것과 달리 단 한차례 등장하고 만다. 칠각지를 통해서이다.

 

삐띠는 사선정에서는 희열을 경험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알아차릴 대상이라 하였다. 그래서 희열이 일어나면 그것은 한량없다.”든가 그것이 잘 완성되어 있다.”든가 그것이 지속되고 있다.(S46:4)”라고 분명히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나에게 쇠퇴한다. .(S46:4)”라고 분명히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삐띠는 37조도품 중에 하나로서 칠각지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삐띠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정신적요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침체 되었을 때 개발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 삐띠 역시 하나의 생멸현상으로 관찰의 대상이라 한다.

 

 

 

2013-05-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