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빠알리니까야에서 본 선가(禪家)용어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13. 18:16

 

빠알리니까야에서 본 선가(禪家)용어

 

 

 

민중어로 설하신 부처님

 

부처님은 부처님당시 민중언어로 법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말씀 하셨다고 한다. 지배층의 언어라 불리는 산스크리트어 대신 민중어라 불리우는 마가다어로 법문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용이 구전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이 빠알리어이다. 그렇다고 하여 빠알리문자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구전으로 전승된 것을 알파벳으로 문자화 한 것이다. 

 

미즈노 고오겐의 빠알리 문법에 따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민중어 마가다어는 쁘라끄릿뜨어라 불리운다. 빠알리어도 이 쁘라끄릿뜨어의 일종으로 본다. 그런데 쁘라끄릿뜨어란 산스크리트어, 즉 고전 범어에 대비되는 말이라 한다.

 

고전 범어는 문전에 의해 인위적으로 규정되고, 완성된 완성어라 한다. 또 인공어이고, 아어(雅語)이고, 표준어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쁘라끄릿뜨어는 인위가 가해지지 않은 자연어, 속어, 민중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언어는 모두 그 원천이 고대 인도의 베다어 그 밖의 고대 일상용어에서 유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산스크리트어는 지배층에서 지배층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상류층언어라 볼 수 있고, 쁘라끄릿뜨어는 민중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민중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통용되는 상류층언어로 설한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설하셨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저잣거리에서나 통용되는 막말이나 비속어를 사용하였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부처님이 비록 민중어로 설법하였더라고 하더라도 품위와 격조를 갖춘 말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 번역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촌스럽다라는 말에 걸리고

 

최근 불교방송사이트에서 일묵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무명을 밝히고라는 프로에 출연한 일묵스님은 팔정도를 수행의 목표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초전법륜경의 일부를 낭송하였다. 낭송중에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라는 구절을 들었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초전법륜경이다. 그런데 촌스럽다라는 말에서 걸렸다.

 

촌스럽다라는 말은 일상어일까? 아니면 비속어일까? ‘촌스럽다에 대한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세련된 맛이 없어 엉성하고 어색한 데가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촌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촌스러운 것일까?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촌스런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시골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세련되고 빈틈없는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농촌에 산다고 하여 모두 무능력자무지랭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촌스럽다라는 말은 촌에 사는 사람들, 시골에 사는 사람들, 도회지에 살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하적인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Village

 

 

 

촌에 산다고 다 촌스러운가?

 

과연 촌스럽다라는 표현을 부처님이 하였을까? 그렇다면 빠알리 원문에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 초전법륜경에서 감각적쾌락의 욕망을 설하시는 부분은 보면 다음과 같다.

 

 

Yocayā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hito, yo cāya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hito,

 

요짜양 까메수 까마수칼리까누요고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요 짜양 앗따낄라마타누요고 둑코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S56:11)

 

 

이 부분에 대한 각묵스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S56:11)

(각묵스님번역)

 

 

저열하고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히나(hīna)’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촌스럽고해당되는 빠알리어가 가마(gamma)이다. 빠알리어 가마(gamma)마을의, 천한, 신앙없는이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빠알리어 뽀툿자니까(pothujjanika)’보통사람의, 범부의, 평범한의 뜻이다. 그래서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hīno gammo pothujjaniko)’에 대한 초불연의 번역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다른 빠알리어 번역자 전재성박사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똑 같은 빠알리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전재성박사번역)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hīno gammo pothujjaniko)’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라고 번역 하였다. 히나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촌스러운이라 하였으나 , 전재성박사는 비속한’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촌스럽다라는 말이나 비속하다라는 말은 거의 같은 뜻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사용되는 말이라면 용어선택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이 아무리 일상어로 설법하였다고 할지라도 촌스럽다라는 비속어를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경전의 품위를 떨어 뜨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격조 있는 용어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초불연의 생경한 용어들

 

촌스럽다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인하여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이 아마 농촌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농촌에 산다는 이유로 촌스럽다라고 한다면 시골에서 사는 사람, 도시가 아닌 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결례로 보인다.

 

불자들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경전이다. 부처님 말씀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경전에 낙서를 한다든가 심지어 접는 것 조차 불경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꼭 새겨야 할 부분이 있다면 노랑형광메모리펜을 이용한다. 또 포스트잇을 활용하여 페이지 사이에 끼워 둔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찾기가 쉽다.

 

소중히 다루는 경전에서 번역된 말은 부처님의 음성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비속어를 사용한다거나 생경한 용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을 사용한다면 경전의 의미는 반감된다.

 

초불연 번역의 경우 생경한 용어가 종종 눈에 띈다. 보통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도 보인다. 대표적으로 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잡도리하다라고 번역한 것을 들 수 있다. ‘주의기울임이라는 뜻인 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잡도리하다라고 번역한 것은 승가의 입장에서 번역한 것이라 본다. 선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사의 법문에서  이렇게 다구치고 잡도리를 해 나갈 때 모든 번뇌와 망상이 발 붙일 것이 없어.(송담스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6-03)”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공부짓다라는 용어

 

이처럼 선가에서나 사용됨직한 용어들이 초기불교용어에, 그것도 빠알리니까야 번역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공부짓다라는 용어이다.

 

어느 법우님이 댓글을 남겼다. 초불연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 공부짓다라는 말에 대하여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법에 맞는 말인지, 사전에 있는 말인지 의문스럽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부짓다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 사용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초불연의 번역을 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무엇이 하나의 법인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Ekadhammasutta- 하나의 법 경(S54:1), 각묵스님역)

 

 

번역에서 크게 세 가지 말에 주목한다. ‘하나의 법’과 ‘[공부]지으면’과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번역의 원칙은 있는가

 

 하나의 법’이라는 말은 에까담마(Ekadhamma)’에 대한 번역이다. 에까(Eka)하나의, 유일한, 같은, 일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라는 것은 숫자로서 하나일수도 있지만, 오로지 하나 밖에 없다고 할 때 유일’ 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하나유일두 가지 뜻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초불연의 경우 사띠빳타나경(염처경)에서 에까에 대하여 유일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에까야나(Ekāyana)에 대하여 유일한 길로 번역한 것이다. 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전재성박사는 에까야나(Ekāyana)에 대하여 하나의 길이라 번역하였다. 사념처 수행만이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 또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초기경에 따르면 열반에 이르는 길은 사념처 뿐만 아니라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 여러 길이 있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는 담마에 대해서는 원리라 번역하였다. 이는 담마에 대하여 초지일관 법()으로 번역한 초불연과 대조된다. 초불연의 경우 부처님이 담마라고 말씀 하신 것은 그만한 뜻이 있기 때문에 다른 여러 말로 번역하지 않고 한자어 ()’을 고수한다고 청정도론 해제에서 밝힌 바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경우라도 담마는 오로지 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전재성박사는 담마에 대하여 다양하게 번역한다. 담마에 대하여 진리원리, ,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에까담마경에서는 하나의 원리에 대한 경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하나의 법 경이라고 이름지은 초불연과 대조 된다.

 

공부짓다는 선가용어

 

 공부짓다라는 말이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공부짓다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렇다면 공부짓다라는 말은 사전에 있는 말일까?

 

공부짓다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나오지 않는다. 사전에 없는 말이다. 오로지 초불연 번역에서만 볼 수 있는 말이다. 인터넷으로 키워드로 검색하면 초불연에서 번역한 공부짓다라는 말만 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부짓다라는 말은 어느 경우에 사용될까?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송담스님의 법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 공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는 백에 하나, 만에 하나도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5-09일자)

 

 

현재 3년째 불교방송에서 법문하고 있는 송담스님에 따르면 화두를 드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화두 등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정을 키워 나가는 것에 대하여 송담스님은 공부짓는 것이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사항은 초불연에서 번역한  공부짓다라는 말은 선가에서 사용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공부짓다 vs 익히다

 

초불연 번역어 중에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이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bhaavito bahuliikato’이다.  이중 ‘[공부]지으면’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bahuliikato’이다.

 

Bahuliikato의 동사형은 ‘bahulikaroti’이다. 이는  진지하게 행하다,  자주행하다.  헌신하다, 증가시키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bahulikaroti의 과거분사형이 ‘Bahulikata’이다. 이는 자주실행된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bhaavito bahuliikato’의 뜻은 열심히 수행하였을 때라는 뜻이 된다. 그럴 때 큰 과보(mahapphala)’ 큰 결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라고  하였다. 열심히 수행하는 것, Bahulikata에 대하여 공부짓는것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는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커다란 결과와 커다란 공덕이 있다.”라고 번역하였다. Bahulikata에 대하여 익힌다라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공부짓는 것과 익히는 것은 같은 뜻일 수 있다. 그러나 공부짓는다는 것은 일반국민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말이다. 물건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공부를 짓는 것인지에 대하여 으아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선가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 말들이 빠알리니까야에 보이는 것이다. 

 

에까담마경(S54:1) 16단계 호흡

 

초불연의 번역에서 공부짓다라는 말은 에까담마경(S54:1)에서도 빈번하게 나온다. 이를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비교하여 보았다.  16단계 호흡에 대한 내용이다. 

 

 

 

1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Dīgha vā assasanto dīgha assasāmīti pajānātī. Dīgha vā passasanto dīgha passasāmīti pajānāti.

 

초불연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전재성박사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2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Rassa vā assasanto rassa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 vā passasanto rassa passasāmīti pajānāti.

pajānāti

초불연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꿰뚫어 안다.

전재성박사

짧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분명히 안다.

 

 

 

3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Sabbakāyapaisavedi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isavedi passasissāmīti sikkhati.

sikkhati.

초불연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신체의 전신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전념한다

 

 

 

4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Passambhaya kāyasakhāra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 kāyasakhāra passasissāmīti sikkhati.

kāyasakhāra

초불연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몸의 작용[身行]

전재성박사

신체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신체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신체의 형성

 

 

 

5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pītipaisa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Pītipaisa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6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Sukhapaisa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aisa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7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Cittasakhārapaisa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khārapaisa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khāra

초불연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마음의 작용[心行]

전재성박사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마음의 형성

 

 

 

8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Passambhaya cittasakhāra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 cittasakhāra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편안히 하면서

전재성박사

마음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그치면서

 

 

 

9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Cittapaisa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paisa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집중하면서

전재성박사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경험하면서

 

 

 

10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Abhippamodaya citta 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 citta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해탈하게 하면서

전재성박사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기쁘게 하면서

 

 

11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Samādaha citta assasissāmīti sikkhati.

Samādaha citta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2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Vimocaya citta 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 citta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3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Anicc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무상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4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Virā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

초불연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탐욕이 빛바램

전재성박사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사라짐

 

 

 

 

15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Nirodh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소멸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소멸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6단계 호흡 내용

 

빠알리

Pa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inissaggā

초불연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놓아버림

전재성박사

완전히 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완전히 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완전히 버림

 

 

 

위 16단계 호흡법은 맛지마니까야 마하라훌라와다경(M62)에서도 볼 수 있다.

 

들숨날숨인가, 날숨들숨인가

 

경에서 호흡에 대한 빠알리어는 아나빠나(ānāpāna)’이다. Ānā는 ‘호흡, 내쉬기, 들이쉬기’로 번역된다. 또 pāna는 ‘생명, 목숨, 생물’로 번역 된다.  아나빠나(ānāpāna)에 대하여 ‘날숨과 들숨’으로 번역된다. 이를 출입식(出入息), 안반(安般)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안반은 아나빠나의 음역이다. 후한시대 안세고(25-220)가 번역한 말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날숨이 아나이고, 들어 오는 것이 파나인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아나빠나에 대하여 들숨날숨이라 하였다. 원칙대로 한다면 날숨들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나빠나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호흡(呼吸)으로 번역하였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숨을 내쉬거나 들이쉼을 말한다. 따라서 호흡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날숨들숨이라 번역 할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아나빠나의 번역어는 날숨들숨의 의미가 있는 호흡이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는 거꾸로 들숨날숨이라 하였다.

 

마음챙김도 선가용어

 

빠알리어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길게 번역하였다. 전재성박사는 간단히 ‘호흡새김’이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사띠에 대한 번역어 마음챙김과 새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현재 틱낫한 스님이 방한 중에 있다. 불교계 신문사이트에서는 팃낙한 스님의 동정을 전하면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대세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사띠의 진정한 번역어라 볼 수 없다. 사띠의 원래 의미가 기억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에 기억이라는 의미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띠라는 말에 마음과 관련된 그 어떤 어원도 없다. 따라서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한 것은 올바른 번역이라 보여지지 않는다. 마음챙김 역시 화두챙김처럼 선가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본다. 이는 불교tv사이트에서 종범스님은  향기로운 법문시간에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사띠,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

 

초불연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달리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새김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 기억은 어떤 것일까?

 

 

에까담마경에서는  16단계 호흡을 소개 하고 있다. 이런 단계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하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듣기만 하고 곧바로 잊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애써 이야기한 것을 한쪽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린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복식호흡이나 단전호흡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 듣지 않았을 때,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았을 때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요즘과 달리 노트도 필기구도 없었다. 오로지 듣는 것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할 때 잘 귀기울여 들어야 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새겨 들으려 애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잘 모르면 도반들에게 물어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가급적 외우려 노력하였을 것이다. 필기구도, 노트도, 컴퓨터도 없던 시기에 당연히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기억하고, 이를 사유하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팔정도에서 정념에 대하여 올바른 기억으로 번역해도 무방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만약 올바른 기억이 없다면 사념처의 내용을 하나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한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Satipatthanasutta, 염처경, M10)에서 싸띠가 주로 관찰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으로서의 새김과 관계된 것이다.

 

(사띠, 전재성박사, 디가니까야 해제)

 

 

이처럼 사띠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호흡수행 역시 부처님이 말씀 하신 16단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일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수행은 중구난방이 되어 버릴 것이다.

 

16단계를 모두 기억한 단계에서 실제로 호흡을 하며 호흡관찰을 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인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새기지 않고 단지 대상에 대하여 마음챙김만 한다면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라 보여진다. 마치  MBSR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종교성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수행기법만 채용한 것이 MBSR이다. 따라서 MBSR은 마음챙김만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사띠는 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식카띠(sikkhati)

 

16단계 호흡을 보면 초불연과 전재성박사의 번역에 대한 상이점이 보인다. 그것은 공부짓다라는 말이다.

 

공부짓다라는 말은 선가의 용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공부짓다라는 말은 어떤 빠알리어를 번역한 것일까? 앞서 언급된 내용을 보면 Bahulikat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공부짓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고, 전재성박사는 익히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16단계 호흡에서 빠알리어 식카띠(sikkhati)가 있다. 이 식카띠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또 공부짓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앞서 언급된 Bahulikata공부짓다의 뜻이고, sikkhati도 역시 공부짓다로 번역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는 전자의 경우 익히다’, 후자의 경우 전념하다로 달리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두 빠알리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분없이 공부짓다라고 하였다. .

 

그런 식카띠(sikkhati)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전념하다, 노력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선가의 용어인 공부짓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라고 하여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대하여 공부짓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박사는 신체의 전신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라고 번역함으로서 호흡하는 것에 대하여 전념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뻐알리어 식카띠(sikkhati)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공부짓는다’, 또 한편에서는 전념한다라고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용어에 대한 정화가 필요한 때

 

초기불교가 소개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온 시점이 1999년이므로 이제 14년 된 것이다. 그 사이에 4부 니까야는 모두 번역되었고, 그것도 두 종류의 번역서를 보게 되는 행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번역어를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내용이 많다. ‘잡도리하다, 마음챙기다, 공부짓다와 같은 말이다. 사전을 찾아 보아야 알 수 있고, 심지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신조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선가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도 있다.

 

잡도리하다, 마음챙기다, 공부짓다라는 말은 선가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이런 말은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할 때 이를 공부한다라고 말하고 또 공부짓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화두에 전념하는 것에 대하여 잡도리한다고 말하고, 화두챙기는 것을 마음챙긴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은 빠알리니까야에 선가용어가 상당수 침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전의 한역 번역을 답습한 것도 눈에 띈다. 담마에 대하여 초지일관 법()이라 하는가 하면, 한역 천신(天神)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좋은 예이다. 촌스럽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비속어처럼 보인다. 더구나 촌에 사는 사람들이 본다면 매우 서운해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이제 용어에 대한 정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좀 더 품위있고 격조 높은 용어로 순화할 때가 되었다.

 

 

 

2013-05-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