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마음챙김은 국적불명 번역어, 번역권력과 용어남용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20. 16:07

 

 

마음챙김은 국적불명 번역어, 번역권력과 용어남용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마음챙김

 

틱낫한스님 방한과 관련하여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교계신문사이트에서 기자들이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주요한 요인이다. 이렇게 알만한 사람들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나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초기불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라고 본다. 결정적으로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 하면서 부터일 것이다.

 

2000년 이전에도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을 배워온 1세대 수행자들이 위빠사나를 지도하면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재성교수를 들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김재성교수에 따르면 자신이 가장 먼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여러가지 근거를 들고 있지만 사띠의 영역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mindfulness

 

 

 

마음챙김이 널리 확산된 결정적 원인은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의 대중강연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각종기고문과 방송, TV 등 대중강연을 통하여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교계기자들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틱낫한 스님이 영어로 Mindfulness라 하면 이를 우리말로 마음챙김으로 옮기는 식이다.

 

이런 마음챙김 용어는 심리학에서도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존 카밧진교수를 들 수 있다. 개발한 MBSR프로그램을 소개 하면서 사띠를 의미하는 영역 mindfullness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은 mindfullness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마음챙김으로 소개한다.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빠알리어 사띠(sati)의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한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가 사띠의 원래 의미와 전혀 무관한 뜻이고, 또한 영어의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옮겨 놓는 듯한 번역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과 전혀 관계가 없는 ‘마음’자가 들어 간 것은 명백히 영역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여진다. 이는 법보신문에서 사띠 번역어 논쟁이 발생하였을 때 권오민교수가 지적한 사항이다.

 

권오민교수는 기고문에서  따라서 ‘마인드풀니스’를 비롯하여 영어로 번역된 불교어를 무비판적으로(다만 영어사전에 근거하여) 우리말로 재역하는 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따른다.(사띠논쟁, 혼동서 비롯” , 법보신문 2010-03-04)”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 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말이 마음챙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국적불명의 번역어’라 볼 수 있다.

 

억지로 경전적 근거

 

국적불명의 번역어 마음챙김은 억지 번역이다. 왜 억지번역인가? 그것은 경전적 근거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경전적 근거를 대는 경우를 보았다.

 

각묵스님은 마음챙김 번역어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경이 하나 있다. 운나바바라문경(S48;2)이다. 사띠에 대한 근거가 되는 많은 경이 있음에도 이 경을 든 것은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근거가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라문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눈.귀.코.혀.몸)은 마음()을 의지한다. 마음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운나바 바라문 경>(S48:42)

 

 

( [초기불교산책29]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 ① 마음챙김인가, 2010-07-26)

 

 

초불연사이트에 각묵스님이 올려 놓은 글이다. 경에서 바라문이 마음은 무엇을 의지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Manassa kho brāhmaa, sati paisaraanti)” 라 하였다.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존한다? 마음이 마음챙김에 의존하다니 대체 무슨말일까.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존한다’는 말은 마음을 두 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동어 반복이다. 마치 “나가 나를 챙긴다”와 같은 형식이다. 내가 있는데 또 다른 나가 나를 챙길 수 있다는 형식과 같다.

 

대체 마음이 마음을 챙긴다는 말이 타당한 것일까? 이는 영역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다보니 마음은 마음챙김한다라고 이상하게 번역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바라문이여, 정신은 새김에 의존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새김은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으로 정의 된다.

 

기억을 지우려다 보니

 

각묵스님이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 특히 수행의 의미로 쓰였을 때는 절대로 기억의 의미가 될 수 없다고 각종기고문과 대중강연에서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주로 접두어 ‘anu-’를 붙여 ‘아눗사띠(anussati)’라는 술어를 사용하거나 √smr*에서 파생된 다른 명사인 ‘사라나(saran.a)’라는 단어가 쓰인다.

 

물론 수행과 관계없는 문맥에서 사띠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2010-07-26)”라고 하였다. 예들 들어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할 때 아누가 앞에 붙어 아눗사띠(anussati)할 때만 기억의 의미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나바바라문경에서는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마음챙김 번역의 근거로 삼고 있다고 각종기고문과 대중강연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운나바바라문경에서 기억이 실종된 번역어 마음챙김을 사용하였을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 이는  시각능력 등 다섯가지 감각능력과 정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 범주를 달리하고 서로 다른 대상과 범주를 향유하는 것이 시각능력, 청각능력 등 다섯 가지이지만 이들이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정신(mano)’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정신(mano)에 대하여 “이러한 다섯 가지 능력은 대상을 달리하고 범주를 달리하니 서로 다른 대상과 범주를 향유하는데, 그것들은 정신을 의지하고 정신이 그것들의 대상과 범주를 향유합니다. (전재성님역, S48:42)”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에 따르면 “정신을 탐진치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는 ‘정신기관의 찰나적 파악의 정신’으로 설명한다.(Srp.III.244)”라고 되어 있다. 보는 것, 듣는 것 등 시시각각 찰나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모두 정신작용이라는 뜻이다. 

 

오락가락 번역

 

이런 마노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초지일관 정신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오락가락 하고 있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빠알리어 마노에 대하여 도반들이여,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납니다.(Manañcāvuso pa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a, M18)”라 하였다. 마노를 우리 말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마노라 한 것이다. 그런데 운나바바라문경에서는 마노에 대하여 마음이라고 번역하였다. 번역에 일관성이 없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초불연의 원칙대로 마노를 마노라 번역하지 않고 마음이라 번역한 것일까? 이는 명백히 마음챙김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만일 마노를 마노라 하였을 때 마노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고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챙김 번역어 근거로 삼고 있는 운나바바라문경에서는 마노에 대하여 마노라 번역하지 않고 모두 마음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 결과라 보여진다. 심의식이 모두 마음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안이비설신의에서 사용되는 마노(mano)는 일반적인 의미의 마음이라 번역되는 찌따(citta)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음으로 번역한 것은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를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기억이 실종된 이유

 

각묵스님은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될 때 기억의 의미로 절대로 사용될 수 없음을 힘주어 강조 하였다. 그래서 사띠를 기억이 상실된 마음챙김으로, 그것도 사띠가 마음이라는 어원이 전혀 갖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음챙김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사띠가 수행용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운나바바라문경에서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임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로서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음()을 의지하고,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하고,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렇게 마음챙김은 지금 여기에서 감각대상과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연결고리, 즉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본 것이다.

 

이런 설명이 틀지지 않으나 중요한 것은 기억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을 뿐 정작 중요한 기억의 기능이 실종된 것이다. 그래서 기억과 전혀 무관한 마음이 붙어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가 탄생 된 것이라 본다.

 

사띠가 기억의 의미로 사용되는 근거

 

초불연 번역어 마음챙김에는 기억의 뜻이 없다. 사띠의 어원이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 수행의 의미로 쓰였을 때 절대 기억의 의미가 될 수 없다고 간주 한다. 그래서 사띠는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연결고리임을 강조한다. 그런 예로서 운나바바라문경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도 쓰였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운나바바라문경에 속해 있는 능력상윳따(Indriyasayutta, S48)위방가경(Vibhagasutta, 분별의 경, S48:9)’이 바로 그것이다 위방가경(S48:9)에서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근거가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 vuccati bhikkhave, satindriya.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능력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서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능력이라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8:9, 전재성님역)

 

 

위방가경은 다섯 가지 능력, 오근에 대한 것이다. 믿음의 능력(saddhindriya), 정진의 능력(viriyindriya), 새김의 능력(satindriya), 집중의 능력(samādhindriya), 지혜의 능력(paññindriya) 이렇게 다섯 가지 깨달음으로 이끄는 능력을 말한다. 이중 ‘사띤드리아 (satindriya , 새김의 능력)’에 대한 설명이다.

 

경에서 사띠가 기억의 의미로 사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서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이라고 하였다. 이루 미루어 보았을 때 사띠가 기억의 의미로 쓰였음에 틀림 없다.

 

사띠보장가(satisambojjhaga, 念覺支)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는 사띠가 수행적으로 사용되었을때 그리고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은면 절대로 기억의 의미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혹시 사띤드리아 (satindriya)가 사띠와 인드리아의 복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배제한 것은 아닐까? 마치 아눗사띠처럼 복합어로만 사용되었을 때 기억의 의미만 있다고 보는 것일까? 과연 사띠가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37조도품에서 어느 경우이든지 사띠는 복합어로 사용된다. 팔정도에서도 삼마사띠(samasati, 正念)라 하고, 칠각지에서도 사띠보장가(satisambojjhaga, 念覺支)라 하여 복합어로 쓰이고 있다. 이처럼 5근, 5력,7각지, 8정도에서 사띠는 복합어로 사용된다. 단 4념처에서만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M10)”라고 하여 사띠가 단독으로 사용된다. 그렇다고 하여 4념처만이 수행의 전부라고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이끄는 수단은 4념처 뿐만 아니라 4정근, 4신족, 5근, 5력, 7각지, 8정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중 사띠와 관련된 것이 4념처, 5근, 5력, 7각지, 8정도 이렇게 네 가지이다. 37조도품 중에 사띠가 차지 하는 비중이 8개로서 9개의 정진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초불연에서 마음챙김의 근거로 삼은 경이 운나바바라문경으로 한정한 것은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때 절대로 기억의 의미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라 보여진다.

 

그러나 37조도품에 속해 있는 5근과 7각지에 따르면 사띠가 명백히 기억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특히 7각지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그는 이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된다.( Yasmi samaye bhikkhave, bhikkhu y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 dhamma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go tasmi samaye tassa bhikkhuno āraddho hoti.(S46: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사띠는 반드시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기억은 어떤 것일까?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되새겨 수행에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수행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직무유기인가 한국불교망신인가

 

만일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흘려 들었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수행을 하고 있기 쉽상이었을 것이다. 호흡관찰의 예를 든다면 부처님이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무상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호흡관찰 13단계, S54:1)”라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을 때 홀로 ‘복식호흡’이나 ‘단전호흡’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는 가르침을 새겨 듣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설할 테니 너희들은 새겨 들어라”라고 하였다.

 

이처럼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7각지와 5근에서도 경전적 근거가 분명히 제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는 기억의 의미를 지워 버렸다. 그리고 경전적 근거가 전혀 없는 마음을 집어 넣어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이런 번역태도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기 이전 1990년대에 김재성교수가 영어의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재역하여 사용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한 초불연 번역자들이 가장 기본적인 사띠 번역어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오근을 설명하는 위방가경에서와 같이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서 (S48:9)”라는 내용도 있고, 칠각지를 설명하는 경에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S46:3)”라는 기억에 대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이를 배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알고 배제 하였다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되고, 모르고 인용하지 않았다면 한국불교 망신에 해당될 것이다.

 

대체 어떤 마음을 챙긴다는 말인가

 

챙기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국어사전적 의미는 사용하기 위해 찾아서 한데 모으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학생이 학교 갈 때 가방을 챙기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시간표를 보고 국어책, 수학책 등을 가방에 챙겨 넣는 것이다. 그럴때 챙기다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 한다. 마음도 책가방 챙기는 것처럼 마음에다 이것 저것 챙겨넣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대체 어떤 마음을 챙긴다는 말인가?

 

마음챙김에 대하여 인경스님은 비불교적 용어라 일갈한 바 있다. 법보신문에서 사띠논쟁이 일어 났을 때 인경스님은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제행무상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은 끊임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데 챙겨서 가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이라거나 대상을 파지한다거나 대상을 지키는 것 등으로 설명하지만, 마음챙김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런 설명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챙긴다는 것에 대하여 가방을 챙기듯이 무언가 주어 담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마음은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새겨 듣지 않았을 때

 

하나의 법경(S54:1)’아나빠나사띠가 있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호흡새김으로 옮겼고, 초불연에서는 들숨날숨 마음챙김으로 옮겼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호흡관찰로도 옮길 수 있다. 숨을 들이 쉬고 내쉼을 관찰하여 지혜를 얻는 수행을 말한다.

 

모두 16단계로 되어 있는 호흡관찰수행을 보면 챙긴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전념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공부짓는다라고 하였다. ‘공부짓는다’와 ‘챙긴다’ 역시 같은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숨날숨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16단계 호흡을 보면 분명히 관찰에 대한 것이다. 호흡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희열, 행복 뿐만 아니라 무상함이나 사라짐도 관찰의 대상이다. 어느 것 하나 챙기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가지 현상들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호흡수행은 마음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호흡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이 말씀 하신 16가지 단계를 모두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희열이 일어 났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라고 하면 그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 듣지 않았다면 희열을 즐기면서 앉아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되새겨야 한다. 그래서 수행에 활용해야 단전호흡과 같은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게 된다. 왜 부처님이 그토록 사띠를 강조하였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되리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는 이와 같은 기억의 의미를 배제하고 오로지 대상만 챙기는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내키는 대로 번역인가

 

문화권력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권력이 있듯이 문화계에도 권력이 있다는 말이다. 문화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나 평론가 등을 말한다. 이문열이 한마디 하면 이슈화 되듯이 영향력 있는 문인들의 파워를 문화권력이라 한다.

 

기술권력이라는 말도 있다.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가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 기술자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 가지 않을 정도로 기술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 힘을 어떤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면 이를 기술권력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에 있어도 권력이 있다. 초기불교에 있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미얀마에서 수행을 배워 와서 국내에 보급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말 한마디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수행권력이라 부를 수 있다. 또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사람의 말 한마디 역시 절대적이다. 그래서 번역권력이라 부를 수 있다.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개척 분야나 다름 없는 것이 초기불교이다. 특히 초기불교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처음 개척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용어들이 올바로 사용되면 문제가 없지만 잘못 사용되면 불자들에게 큰 혼란을 줄 수 있다.

 

더구나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만든 듯한 용어가 있는가 하면, 표준어가 아닌 경우도 많다. 어법에 맞는 않는 것도 있고, 비속어도 있고, 사전에 없는 말도 있고, 선가에서만 사용되는 말도 있다. 종종 이런 용어를 접하게 되면 번역자가 즉흥적으로 ‘내키는 대로’ 번역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번역권력과 용어남용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품위와 격조를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나 공포가 일어나는 족족 이를 지배하고 머문다라 하여 족족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속상하고 열받는 번뇌들이 없다.(A6:58,초불연번역)”라 하여 열받는이라는 비속어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품격이 떨어지는 용어가 수 도 없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챙김과 같은 국적불명의 번역어이다. 이는 사띠의 의미도 살리지 못하였을 뿐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불교적이다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은 가방 챙기듯이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초기불교용어도 정화할 때가 되었다. 초기불교 소개자들의 번역권력에 용어가 너무 남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챙김이라는 국적불명의 비불교적 용어를 누가 사용하는지 지켜 볼 것이다.

 

 

 

2013-05-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