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의 경(Pabbajja Sutta, Sn3.1)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24. 17:16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의 경(Pabbajja Sutta, Sn3.1)

 

 

 

빱바자경(출가의 경, Sn3.1)은 해제글에 따르면 설화식에 속한다. 아난다가 과거를 회상하며 설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에서의 화자는 아난다이다. 아난다가 이 경을 설하게 된 동기에 대한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사왓티에 계실 때에 존자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리뿟따 등의 위대한 제자들의 출가는 알려져 있다. 수행승들이나 재가자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존의 출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내가 그것을 밝혀보면 어떨까?  그래서 그는 제따바나에서 자리에 앉아 총채를 들고 수행승들에게 세존의 출가를 밝히기 위해 이 경을 읊은 것이다. (Prj.II.381)

(빱바자경 해제)

 

 

부처님의 출가와 관련된 내용이 숫따니빠따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50년대 말에 번역된 나까무라하지메(中村元)역과 법정스님역과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비교해 보았다. 참고로 법정스님역은 나까무라하지메역을 70년대 중반에 재역한 것이고, 전재성박사역은 빠알리어를 직역한 것이다.

 

 

1. 눈을 갖춘 님

 

 

게송 1(Stn405)

  

빠알리

Pabbajja   kittayissāmi yathā pabbaji cakkhumā, Yatha vīmasamāno so pabbajja samarocayi.

cakkhumā

전재성님역

[아난다]

눈을 갖춘 님이 어떻게 출가를 했는지,

어떻게 생각한 끝에 그가 출가를 기뻐했는지, 나는 그 출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눈을 갖춘 님

中村元()

ある)はいかにして出家したのであるか、かれはどのようにえたのちに、出家んだのであるか、かれの出家をわれはべよう。 

ある

법정스님역

눈이 있는 사람(부처님)은 어째서 출가를 했는지, 그는 무엇을 생각한 끝에 출가를 기뻐했는지, 그의 출가에 대해서 나는 이야기하리라.

눈이 있는 사람(부처님)

영역

I describe the going forth, how the wise one went forth,
I'll tell how he reflected and announced the going forth

the wise one

 

 

아난다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 하고 있다. 부처님이 어떤 연유로 출가하였는지에 대하여 출가이유를 설한 것이다. 청중은 새내기 승려일 수도 있고 재가자일 수도 있고 모든 승려들을 대상으로 한 것일 수도 있다.

 

게송에서 눈을 갖춘님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빨리어가 짝꾸마 (cakkhumā)’이다. ‘눈을 갖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각주에 따르면 Stn31을 보라고 한다.

 

Stn31은 숫따니빠따의 내용을 일련 번호로 매겼을 때의 숫자를 말한다. 찾아 보니 다니야경(Sn1.2) 14번 째 구절이다. 거기에 눈을 갖춘 님이여라는 문구가 보인다. 눈을 갖춘 님에 대한 각주를 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Prj.II.42에 따르면, 부처님에게는 다섯 가지의 눈이 있다.

 

1)자연의 눈(性眼, pakaticakkhu, 肉眼-금강경)

2)하늘의 눈(天眼, dibbacakkhu)

3)지혜의 눈(慧眼, paññācakkhu)

4)보편의 눈(普眼, samantacakkhu, 法眼-금강경)

5)부처의 눈(佛眼, buddhacakkhu)이다.

 

대승의 금강경에서는 자연의 눈이 육안(肉眼)으로, 보편의 눈이 법안(法眼)으로 바뀌었다.

 

(cakkhumā 각주)

 

 

모두 다섯 개의 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주석 Srp.II. 254에 따르면, 지혜의 눈과 육신의 눈 이렇게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지혜의 눈은 불안, 법안, 보안, 천안, 혜안 이렇게 다섯 가지라 한다. 그리고 육신의 눈은 종안(種眼)과 정안(淨眼)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번역을 보면 짝꾸마 (cakkhumā)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눈을 갖춘 님이라 하였고, 나까무라하지메는 ある라 하여 눈있는 사람(부처님)’이라 하였다. 영역에서는 the wise one(현명한 사람)이라 하였다.

 

눈을 갖추었다는 것을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주석에 언급된 다섯 가지 눈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지혜의 눈을 갖추었기 때문에 출가한 것으로 본다. 단순하게 눈을 갖춘 이라 하면 부처님이 왜 출가를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주석을 참고 해야 한다. 주석 없이 본문만 읽는다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고 본다.

 

 

2. 출가이유

 

 

게송 2(Stn406)

  

빠알리

Sambādho'ya gharāvāso rajassāyatana iti, Abbhokāso va pabbajjā iti disvāna pabbaji.

Abbhokāso

전재성님역

재가의 삶은 번잡하고 티끌 쌓이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보고 그가 출가했던 것입니다.

자유로운 공간

中村元()

この在家生活(せまくる)しく、(わずら)わしくて、(ちり)のつもる場所である。ところが出家は、ひろびろとした野外(やがい)であり、(いがない)」とて、出家されたのである。

ひろびろとした野外

법정스님역

`집에서 사는 생활은 비좁고 번거로우며, 먼지가 쌓이는 곳이다. 그러나 출가는 넓직한 들판이며 번거로움이 없다'고 생각해 출가한 것이다.

넓직한 들판

영역

'The household life is full of troubles, it's the sphere of defilements'.
Going forth is like open space' seeing this I went forth.

open space

 

Abbhokāsa: 한데, 옥외, 노천, 야천

 

 

역시 아난다가 화자가 되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출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출가한 이유에 대하여 재가자의 삶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재가자의 삶은 번잡하고 티끌이 쌓이는 장소라 하였다.

 

출가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맛지마니까야에도 있다. 랏타빨라경에서 세존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재가에 살면서 궁극적으로 원만하고 궁극적으로 청정하고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청정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어떨까?(M82)”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재가자의 삶은 티끌이 쌓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출가를 뜻하는 빠알리어 빱바자(pabbajjā)는 원래 재가의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가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승원이 건설되고 나서 들어 간 자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가는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는 Abbhokāsa’ 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자유로운 공간이라 번역하였고, 나까무라 하지메는 ひろびろとした野外(널직한 들판)’이라 하였다. 영역에서는 open space라 하였다. 왜 자유로운 삶이라 하였을까? 이는 다음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3. 청정한 삶

 

 

게송 3(Stn407)

  

빠알리

Pabbajitvāna kāyena pāpa kamma vivajjayi, Vacīduccarita hitvā ājīva parisodhayi.

parisodhayi

전재성님역

출가한 뒤에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피하고, 언어적으로도 짓는 악행을 버리고,

아주 청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청정한 생활

中村元()

出家されたのちには、によるをはなれた。ことばによるをもすてて、生活をすっかりめられた。 

められ

법정스님역

출가한 다음에는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멈추었다. 말로서 짓는 악행(惡行)도 버리고, 아주 깨끗한 생활을 하였다.

깨끗한 생활

영역

Going forth in body, I refrained from doing demerit,  Giving up misconduct in words, led a pure life.

a pure life

 

 

3번 게송은 청정한 삶에 대한 것이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의 삶은 걸림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막행막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승단에서 계를 지키며 청정하게 사는 삶을 말한다. 이를 게송에서는 신구업 삼업을 청정히 하는 것이라 하였다. 재가의 삶을 살면 살수록 티끌이 쌓이지만 출가의 삶은 살면 살수록 청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언어적으로 악행을 버려서 청정한 생활을 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4. 뛰어난 신체적 특징

 

 

게송 4(Stn408)

  

빠알리

Agamā rājagaha buddho magadhāna giribbaja, Piṇḍāya abhihāresi ākiṇṇavaralakkhao.

ākiṇṇavaralakkhao.

전재성님역

깨달은 님은 마가다국의 산으로 둘러싸인 라자가하로 갔습니다.  온몸에 뛰어난 특성을 지닌 그는 탁발하기 위해 간 것이었습니다.

온몸에 뛰어난 특성을 지닌

中村元()

ざめた(ブッダ)はマガダの(首都まれた(おうしゃじょう)にった。すぐれた相好(そうごう)にみちた(ざめた)托鉢のためにそこへいたのである。 

すぐれた相好

법정스님역

눈 뜬 사람은 마가다 나라의 서울, 산으로 둘러싸인 왕사성(王舍城)으로 갔다. 뛰어난 모습을 가진 그는 탁발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뛰어난 모습을 가진

영역

The enlightened one came to the mountains of Magadha in Rājagaha
And went out to collect alms, complete with all noble marks

complete with all noble marks

 

 

 

부처님이 출가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머문 것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 16대국 중에 가장 강대한 나라인 마가다에 머문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전 배움을 찾아 유행하던 시절을 말한다.

 

부처님은 출가하여 고행하기 전에 그 때 당시 최고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던 알라라깔라마와 웃따까라마뿟따로부터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을 수학하였다. 그 때 당시의 모습이 출가의 경이라 볼 수 있다.

 

게송에서는 부처님이 라자가하에서 탁발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모습이 매우 뛰어나 보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이나 전륜성왕만이 가지는 신체적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를  게송에서는 varalakkhaa라 하였다.  뛰어난(vara) 특징(lakkhaa)이라는 뜻이다. 이런 특징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을 뜻한다. 먼 곳에서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부처나 전륜성왕에게서만 나타난다는 삼십이상은 어떤 것일까?

 

맛지마니까야 브라흐마유경(M91)에 따르면 부처님의 삼십이상이 잘 표현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웃따라]

“존자여, 존자 고따마 주위에 퍼져있는 명성이 사실이며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존자 고따마는 그와 같은 사람이며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존자여, 그 존자 고따마는 서른두 가지 위대한 사람의 특징을 갖추고 있습니다.

 

1) 존자 고따마는 땅에 적응해서 안착되는 발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존자 고따마가 지닌 위대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2) 존자 고따마의 발바닥에는 천 개의 살과 테와 바퀴가 달린 모든 형태가 완벽한 수레바퀴가 있습니다.

3) 존자 고따마는 넓고 원만한 발뒤꿈치를 갖고 있습니다.

4) 존자 고따마는 기다란 손가락을 갖고 있습니다.

5) 존자 고따마는 부드럽고 유연한 손과 발을 갖고 있습니다.

6) 존자 고따마는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손발을 갖고 있습니다.

7) 존자 고따마는 복사뼈가 돌출된 발을 갖고 있습니다.

8) 존자 고따마는 사슴과 같은 장딴지를 갖고 있습니다.

9) 존자 고따마는 똑바로 서서 구부리지 않아도 무릎에 와 닿는 두 손을 갖고 있습니다.

10) 존자 고따마는 몸속에 감추어진 성기를 갖고 있습니다.

11) 존자 고따마는 황금빛을 띠고 있습니다.

12) 존자 고따마는 황금과 같은 피부를 갖고 섬세한 피부를 갖고 있습니다. 피부가 섬세하므로 먼지나 때가 몸에 끼지 않습니다.

13) 존자 고따마는 몸의 털이 뭉치지 않고 제각기 자라는데, 그 각각의 털은 털구멍에 하나씩 자랍니다.

14) 존자 고따마는 끝이 위로 향하는 몸의 털을 지니고 있는데, 위로 향하는 털은 감청색이고 검은 색깔이고 오른쪽으로 감겨 올라갑니다.

15) 존자 고따마는 하느님처럼 단정한 몸매를 지니고 있습니다.

16) 존자 고따마는 일곱 군데가 융기된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17) 존자 고따마는 사자와 같은 윗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18) 존자 고따마는 양 어깨 사이에 패인 곳이 없는 충만한 어깨를 지니고 있습니다.

19) 존자 고따마는 니그로다 나무와 같은 몸의 둘레를 갖고 있습니다. 양손을 활짝 뻗은 크기가 몸의 키와 같고, 몸의 키는 양손을 활짝 뻗은 크기와 같습니다.

20) 존자 고따마는 똑같이 둥근 양어깨를 지니고 있습니다.

21) 존자 고따마는 최상의 탁월한 맛을 느끼는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22) 존자 고따마는 사자와 같은 턱을 지니고 있습니다.

23) 존자 고따마는 마흔 개의 치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24) 존자 고따마는 평평하고 가지런한 치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25) 존자 고따마는 간격 없이 고른 치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26) 존자 고따마는 희고 빛나는 치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27) 존자 고따마는 널따란 혀를 지니고 있습니다.

28) 존자 고따마는 까라비까 새의 소리처럼 청정한 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29) 존자 고따마는 깊고 푸른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30) 존자 고따마는 황소의 것과 같은 속눈썹을 지니고 있습니다.

31) 존자 고따마는 미간에 희고 부드러운 면과 같이 생긴 털을 지니고 있습니다.

32) 존자 고따마는 머리 위에 육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존자 고따마에게 있는 위대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존자 고따마는 위대한 사람의 서른두 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습니다.

 

(Brahmayu Sutta –브라흐마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91, 전재성님역)

 

 

 

5. 궁전위에서 부처님을 본 빔비사라왕

 

 

게송 5(Stn409)

  

빠알리

Tamaddasā bimbisāro pāsādasmi patiṭṭhito, Disvā lakkhaa sampanna imamattha abhāsatha.

Imam attha abhāsatha

전재성님역

빔비싸라 왕은 서서 궁전 위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뛰어난 특징을 갖춘 님을 보고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中村元()

(マガダ)ビンビサラは高殿(たかどの)のて、かれをた。すぐれた相好にみちた(ざめた)て、(侍臣に)このことをった。 

侍臣に)このことをった

법정스님역

마가다 왕 빔비사아라는, 높은 다락 위에서 그를 보았다. 뛰어난 모습을 가진 그를 보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신하들에게 말했다.

영역

King Bimbisāra saw him, when standing on the top most storey of his palace.
Seeing his noble marks announced this:

announced this

 

 

빔비사라(bimbisāra)왕이 등장한다. 고대인도 16대국중에 가장 강성하였던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탁발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다른 탁발자들과 달리 매우 위엄있게 보였다.  뛰어난 신체적 특징을 가진 부처님의 탁발모습이 빔비사라왕의 눈에 띈 것이다. 그런 빔비사라왕은 누구일까? 각주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빔비싸라 왕은 마가다국의 국왕이고 부처님의 수호자였다. 그는 15세에 왕위를 계승했고, 52년동안 라자가하(왕사성)에서 통치했다. 부처님은 빔비싸라 왕보다 5년 더 연장자였다. 왕위에 오른 후 적어도 15년 뒤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신도가 되었다.

 

빔비싸라의 아버지는 바띠였고 자신은 마하빠뚜마라고 불렸고 어머니는 빔비였다. 부모들 사이에 존재했던 우정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부처님과 친구라고 하지만. 이 ‘출가의 경’에 있듯이 부처님과 빔비싸라가 처음 만난 것도 빤다바 산에서 이루어졌으며, 부처님이 출가한 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빔비싸라 왕은 이 만남에서 부처님이 올바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먼저 라자가하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라자가하를 방문해서 빔비싸라 왕을 교화했는데, 이 때에 그는 승단에 벨루바나(죽림정사)를 지어 기증했다. 이 때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37년이었다.

 

빔비싸라 왕의 비는 빠세나디 왕의 자매인 꼬쌀라데비였고 그녀의 아들이 아자따쌋뚜였다. 그런데 빔비싸라 왕의 아들인 아자따쌋뚜와 데바닷따가 공모해서 아버지인 빔비싸라와 부처님을 살해하고 왕국과 교단을 장악할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발각되어 빔비싸라 왕의 대신들은 그 두 사람과 음모자들을 처단하길 요구했으나 왕은 태자의 권한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방면한다. 그러나 아자따쌋뚜는 부왕인 빔비싸라왕을 마침내 유폐시키는데 성공하여 그를 굶어 죽인다.

 

(bimbisāra 각주)

 

 

 

 

6.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보고

 

 

게송 6(Stn410)

  

빠알리

Ima bhonto nisāmetha abhirūpo brahā suci, Caraena ceva sampanno yugamanna ca pekkhati.

yugamanna

전재성님역

[빔비싸라 왕]

‘그대들은 저 사람을 보아라. 아름답고 건장하고 청정하고 걸음걸이도 우아할 뿐 아니라 멍에의 길이만큼 앞만을 본다.

멍에의 길이만큼

中村元()

ら、このよ。しく、きく、らかで、いも(そな)わり、るだけである。 

いも(そな)わり

법정스님역

"그대들은 저 사람을 보아라. 아름답고 건장하고 깨끗할 뿐 아니라, 행동도 얌전하게 앞만을 본다.

행동도 얌전하게

영역

 “Good sirs, listen. This one is handsome and pure, Endowed with good conduct, does not look beyond a plough share.

a plough share.

 

Yuga: 멍에

Pekkha: , 관찰

 

 

게송6은 빔비사라왕의 말로 되어 있다. 뛰어난 신체적 특징을 가진 부처님이 탁발을 하자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번에 알아 본 것이다. 그런데 탁발하는 모습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멍에의 길이만큼 (yugamanna)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 당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들은 탁발에 의존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유행하는 수행자들 모두는 전적으로 탁발에 의존한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육사외도들도 유행을 하며 탁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역시 깨달음을 이루기 전 유행자로서 삶을 살아 갈 때 탁발에 의존하였다.

 

그런데 32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진 부처님의 탁발 모습에 대하여 아름답고 건장하고 청정하고 걸음걸이도 우아할 뿐 아니라 멍에의 길이만큼 앞만을 본다.”라고 시적으로 매우 아름답게 묘사 되어 있다. 그런 탁발 모습만 보아도 신심이 절로 일어날 정도이다.

 

그런데 탁발을 할 때 눈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멍에의 길이 만큼 앞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멍에의 길이는 어느 정도일까?

 

멍에란 소나 말의 어깨에 씌운 구부러진 나무를 말한다. 쟁기를 끌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길이는 1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탁발할 때 멍에의 길이만큼이라는 거리는 바로 발아래로부터 1미터 내외를 말한다.

 

 

 

멍에

 

 

게송에서 멍에의 길이만큼 앞만을 본다.”는 뜻의 빠알리어가 “yugamanna ca pekkhati.”이다. 이에 대하여 나까무라하지메는 いもそなわり라 하였다. ‘そな 갖추다라는 뜻이므로 いもそなわり 것는 것도 갖추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나까무라하지메의 번역을 보면 그 어디에도 빠알리어 yuga(멍에)를 뜻하는 말을 찾을 수 없다. 길이를 나타내는 단어 유가(yuga)를 생략하여 번역하는 바람에 이를 재역한 법정스님 역시 멍에라는 말이 들어 가지 않았다. 그래서 행동도 얌전하게 앞만을 본다.”라고 하였다. 어느 정도 앞을 보는지에 대한 거리감각을 알 수 없다.  일역을 재역한 번역의 한계라 본다.

 

그렇다면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할까? 다음 게송에서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7.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게송 7(Stn411)

  

빠알리

Okkhittacakkhu satimā nāya nīcā kulāmiva, Rājadūtā vidhāvantu kuhi bhikkhu gamissati.

satimā

전재성님역

눈을 아래로 뜨고 새김을 확립하고 있다. 그는 천한 가문 출신이 결코 아니다. 왕의 사신들이여, 그를 쫓아가라. 저 수행승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새김을 확립하고 있다.

中村元()

かれはけてをつけている。この(いや)しい出身ではないようだ。使者どもよ、え。この修行者はどこへくのだろう。

をつけている。

법정스님역

그는 눈을 아래로 뜨고 정신을 차리고 있다. 저 사람은 천한 집 출신이 아닌 것 같다. 사신들이여, 뛰어가 그를 따르라. 저 수행자는 어디로 가는가."

정신을 차리고 있다.

영역

Mindfully he turns his eyes down , is not of low caste, end royal messengers to watch where the bhikkhu is going."

Mindfully

  

 

 밥을 빌어 먹는 사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걸인이 동냥을 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두리번 거린다면 걸인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자신을 낮춘다.

 

지하도에서 보는 걸인의 모습을 보면 고개를 처닥고 손만 위로 올리고 있는 모양을 볼 수 있다. 최대한 불행하고 불쌍하게 보이려 하는 것이다. 그런 걸인에게 돈을 주지말라고 한다. 아는 법우님에 따르면 돈을 주기 보다 빵이나 김밥을 주라고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주게 되면 모두 빼앗기기 때문이라 한다. 걸인을 관리하는 또 다른 조직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상납받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그 법우님은 걸인에게 절대 돈을 주지 않고 그 대신 빵을 준다고 한다.

 

탁발을 하는 수행자도 마찬가지라 본다. 먹을 때가 되어 음식을 얻어 먹는 자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어깨에 힘주고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돌아 다닌다면 혐오감을 줄 것이다. 그래서 빌어 먹고 사는 수행자는 음식을 얻으러 갈 때 멍에의 길이만큼 앞만 보고 걷는다고 하였다. 그 멍에의 길이가 발 끝에서 1미터 이내이다. 따라서 눈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 뜰 수밖에 없다. 게송에서 부처님이 그런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게송에서 부처님이 탁발할 때 눈을 아래로 뜨고 새김을 확립하고라 하였다. 멍에의 길이 만큼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걷지만 항상 새김을 확립하며 걷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새김이라는 말이 빠알리어 사띠(sati)를 말한다.

 

초기불교에서 사띠는 매우 중요한 술어이다.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사띠가 언급되어 있는데 전재성박사는 이를 새김이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새김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가 일치 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이라고 정의 한다. 그렇다면 사띠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각주에 실려 있는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Sati: 올바른 새김(正念)을 말한다.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새김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며, 올바른 새김은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삼매의 구성요소 사이의 수반적 관계에 관해서는 붓다고싸의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 세 소년이 놀이하러 정원에 갔다. 걸으면서 꼭대기에 꽃이 활짝 핀 나무를 보았다. 그래서 그 꽃을 따 모으기로 했다. 꽃은 제일 큰 사람의 키를 넘는 것이었으므로 친구가 엎드리고 키 큰 친구가 그 위에 올라 갔으나 떨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때 또 다른 친구가 그 옆에 서서 어깨를 빌려주어 키 큰 친구는 그 어깨에 기대어 꽃을 따 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꽃을 따 모으는 키 큰 친구는 올바른 집중을 의미하고, 등을 제공한 친구는 올바른 노력을 의미하고, 어깨를 빌려준 친구는 올바른 새김을 뜻한다. 올바른 집중은 이와 같이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새김의 지원을 받아 그것들을 수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 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 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게 두지 않는다.

 

새김 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디가니까야에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가 함께 주어져 있다. ‘무엇이 네가지 [새김의 토대]인가?

 

수행승 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에 관해 몸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느낌에 관해 느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사실에 관해 사실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sati 각주, 전재성박사)

 

 

각주에 따르면 새김(sati)대상의 겉모습 속에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라고 하였다.

 

탁발하면서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보면서 걷지만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가장 마지막 20번 게송(Stn424)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라는 문구와 연관되어 보인다. 사띠를 확립하는 것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파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사띠는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 여기에서 분명하게 아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나까무라하지메의 번역을 보면 をつけている라고 되어 있다. ‘정신을 차리고 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띠의 의미와는 동떨어진 번역이라 보여진다. 아마도 사띠의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고 번역하였다고 보여진다. 이를 토씨만 바꾸어 재역한 법정스님 역시 정신을 차리고 있다.”라고 번역하여 재역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8. 저 수행승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게송 8(Stn412)

  

빠알리

Te pesitā rājadūtā piṭṭhito anubandhisu, Kuhi gamissatī bhikkhu kattha vāso bhavissati.

kattha vāso bhavissati.

전재성님역

왕의 사신들이 파견되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왕의 사신]

‘저 수행승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는 어디에 머물려 하는 것일까?

어디에 머물려 하는 것일까?

中村元()

派遣された使者どもは、かれのあとをってった。ーーー「この修行者はどこへくのだろう。かれはどこにんでいるのだろう」と。

どこにんでいるのだろう

법정스님역

왕의 사신들은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저 수행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는 어디에 사는 것일까?"하면서.

어디에 사는 것일까?

영역

The royal messengers followed close behind To learn where he was going, and where he dwelt.

where he dwelt

 

Kattha: 어디에

Vāsa: ,

Bhavissati:  ~일것이다.

 

 

사람들은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하여 더 알려고 한다. 눈길을 끄는 상대방이 어디에 사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등에 알고 싶은 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의 일거수 일투족이 실시간 검색어로 올라 가는 이유도 알고 싶은 호기심에서 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빔비사라왕도 부처님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 그래서 강한 호기심을 가졌다. 마치 추적대를 보내듯이 신하를 시켜 뒤따라 가게 한 것이다.

 

부처님을 뒤따라 간 신하가 kattha vāso bhavissati”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그는 어디에 머물려 하는 것일까?” 하였다. 나까무라하지메는

どこにんでいるのだろう(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라고 번역하였다. ‘머문다산다의 차이점이다.

 

부처님당시에 출가 하면 일정한 거처가 없다. 두타행을 하면 숲에서 살며 이곳 저곳 옮겨 다닌다. 그래서 한 곳에 정착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전재성박사의 머문다라는 표현이 나까무라하지메의 살고 있다(んでいる)’라는 번역보다 더 타당해 보인다. 

 

 

9.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

 

 

게송 9(Stn413)

  

빠알리

Samadāna caramāno guttadvāro susavuto, Khippa patta apūresi sampajāno patissato.

sampajāno patissato.

전재성님역

그는 감관을 수호하여 잘 다스리고,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

차례로 탁발을 빌면서, 잠깐 동안에 발우를 채웠습니다.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

 

中村元()

かれは、感官し、よくまもり、しくし、をつけながら、ごとにうて、そのやかにみたした。 

414「 聖者托鉢えて、その都市て、パンダヴァいた。ーーーかれはそこにんでいるのであろう。

しくし、をつけながら、

법정스님역

그는 모든 감관을 억제하여 잘 지키고 바르게 깨닫고 조심하면서 집집마다 음식을 빌어 잠깐 동안에 바리때를 채웠다.

바르게 깨닫고 조심하면서

영역

With protected sense doors he went for alms in due order Quickly collected the alms food, aware and mindfulness established

aware and mindfulness established

 

Patissata: 주의 깊은, 새김이 있는

Patissati: 주의 깊음, 새김, 기억, 억념

 

 

신하가 말하기를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라고 하였다. 앞서 가는 부처님의 경행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눈을 멍에의 길이만큼 아래로 내려 뜨고 사띠를 확립하며 걸었다와 같은 표현이다. 여기에서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sampajāno patissato’이다.

 

 

빠알리어 삼빠잔나(sampajāna)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채며라 번역하였고, 빠띠사띠(patissati)에 대하여 새김을 확립하고라고 번역하였다.

 

먼저 삼빠잔나에 대하여 보면, 삼빠잔나는 삼(sam)과 빠잔나(pajāna)의 결합어이다. 맛지마니까야 각주에 따르면 따라서 빠잔나는 분명한 앎또는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올바른뜻의 삼(sam)이 앞에 붙으면 삼빠잔나(sampajāna)올바로 분명히 알아차림이 된다. 지금 여기에서 올바로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어떤 경우에 적용될 수 있을까. 사념처에서 “대변 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올바른 알아차림이 삼빠잔나인 것이다. 똥을 싸면 똥을 싼다고 알고, 오줌을 누면 오줌을 눈다고 아는 것이다.

 

그러나 삼이 빠진 빠잔나(pajāna)의 경우 쓰임새가 다르다. 경에 따르면 빠잔나는 호흡관찰에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빠잔나의 경우 호흡관찰을 통한 ‘지혜의 증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분명한 앎이라 번역된다. 따라서 똥누고 오줌을 싸는 등 일상에서 올바로 알아 차리는 것은 삼빠잔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호흡관찰과 같은 지혜수행에서는 빠잔나라는 용어를 쓴다고 볼 수 있다.

 

게송에서 ‘sampajāno patissato’라 하였다. 이는 염처경에서 sampajāno satimā’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삼빠잔나와 사띠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띠를 의미하는 patissato satimā 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다. 둘 다 새김을 확립하여라고 번역된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기면서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사띠에는 기억의 의미가 내포 되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집착하였을 때 재난을 불러 올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면, 이를 되새겨 대상을 볼 때마다 이 말을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삼빠잔나와 사띠가 함께 쓰인 문구 ‘sampajāno patissato’ 또는 sampajāno satimā’에 대한 해석은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라고 번역되지만 반드시 그 이전 문구를 기억해야 한다. 이는 바로 이전에 감관을 수호하여 잘 다스리고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 , 코 등 감각능력을 잘 다스려 대상의 총상(總相)과 세상(細相)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마지막 20번 게송에서와 같이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Kāmesvādīnava disvā, Stn424)처럼 감각대상은 괴로움을 야기하고 결과적으로 재난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명심하고 ‘sampajāno patissato’ 또는 sampajāno satimā’라는 문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지금 여기에서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라 본다

 

이처럼‘sampajāno patissato’가 부처님 가르침과 관련하여 수행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까무라하지메는 しくをつけながら(올바로 자각하고 정신을 차리고)”라고 하였다. 이를 재역한 법정스님 역시 바르게 깨닫고 조심하면서라 번역하여 재역의 한계를 드러냈다. 삼빠잔나와 사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 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10. 빤다바산을 향하여

 

 

게송 10(Stn414)

  

빠알리

Piṇḍacāra  caritvāna1 nikkhamma nagarā muni, Paṇḍava abhihāresi ettha vāso bhavissati.

ettha vāso bhavissati.

전재성님역

성자는 탁발을 끝내고 그 도시 밖으로 나와

‘여기에 나의 처소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빤다바산 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에 나의 처소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中村元()

聖者托鉢えて、その都市て、パンダヴァいた。ーーーかれはそこにんでいるのであろう。

かれはそこにんでいるのであろう

법정스님역

거룩한 분은 탁발을 끝내고 그 도시 밖으로 나와 판 다바산으로 향했다. 아마 그는 그 곳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 그는 그 곳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영역

Collecting the alms food the sage left the town. Turned towards the Pāndava hills, that was where he lived.

that was where he lived.

 

 

부처님을 뒤따라 가던 왕의 사신들은 빤다바(Paṇḍava)산에 이르게 되었다. 부처님의 처소가 있는 곳이다. 임시 거처라 볼 수 있다.

 

 빤다바산은 라자가하시에 있는 다섯 산 중의 하나라 한다. 라자가하 근교에 있는 다섯 산은 빤다바, 깃자꾸따(Gijjakuta), 베바라(Vebhara), 이시길리(Isigili), 베뿔라(Vepulla)산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라자가하는 오늘날 라지기르(Rajgir)를 말한다. 라지기르에 대한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라지기르(Rajgir)지도(A부위)

 

 

 

라지기르는 인도 비하르주에 있다.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이었던 라지기르는 파트나시 아래에 있고 바라나시로부터 약 350키로미터 동쪽에 있다. 그리고 라지기르 바로 위에는 날란다가 있다.

 

라지기르시에 대한 위성사진을 보았다. 위성사진을 보면 고대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는 벌판 가운데 있다. 그리고 시에 남쪽에 거대한 산의 지형이 보인다.  경전에 언급된 빤다바, 깃자꾸따, 베바라, 이시길리, 베뿔라산 이렇게 다섯 산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라지기르(Rajgir) 위성지도

 

 

 

11. 처소를 확인하고

 

 

게송 11(Stn415)

  

빠알리

Disvāna vāsūpagata tato dūtā upāvisu, Ekova dūto āgantivā rājino paivedayi.

āgantivā

전재성님역

그가 처소에 도착한 것을 보자 사신들은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한 사신은 돌아가 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돌아가

中村元()

〔ゴタマ(ブッダ)がみずからの〕住所づいたのをて、そこで使者はかれにづいた。そうして一人使者は(王城に)もどって、報告した、ーーー

王城に)もどって

법정스님역

고오타마가 자기의 처소에 가까이 이른 것을 보자 사신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한 신하는 왕궁으로 돌아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궁으로 돌아가

영역

The messengers followed him, seeing him go to his dwelling.
One of them came back to inform the king.

came back

 

Āgata: 돌아온, 유래된

Āgantu: 도착하는 것

 

 

부처님을 뒤따라 가던 빔비사라왕의 사신들이 드디어 부처님의 처소를 확인 하였다. 그리고 한 사신은 이런 사실을 곧바로 왕에게 알렸다. 왕의 가장 큰 관심사이었기 때문이다.

 

사신이 왕궁으로 돌아 가 보고한 것에 대하여 경에서는 āgantivā라 하였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돌아가로 번역하였다. 한 사신이 왕궁으로 돌아간 것은 문맥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래서 원문에서는 왕궁으로 돌아 갔다는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가다는 뜻의 āgantivā라 한 것이다.

 

그런데 나까무라하지메는 王城もどって(왕성으로 되돌아가)’라 하여 괄호를 이용하여 왕성 (王城)이라는 말을 집어 넣었다. 이번 번역을 주석적 번역이라 한다.

 

주석적 번역은 초불연의 번역에서도 볼 수 있다. 주로 대괄호를 이용하여 앞뒤 문장을 연결하는 말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원어에는 없는 말이지만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친절하게 서비스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석적 번역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돌과 같은 것이다. 독자들은 문맥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는데 굳이 괄호치기를 하여 보충설명한다면 과잉해석이라 본다. 그러나 그런 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번역서는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번역이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낼 수 없는 것이다.

 

나까무라하지메역을 보면 괄호를 이용하여 보충설명식으로 해 놓았다. 예를 들어 使者王城もどって식이다. 원문에 없는 왕성’(王城)’이라는 말을 괄호안에 집어 넣어 독자들이 판단하기 쉽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재역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법정스님은 한 신하는 왕궁으로 돌아가라 하여 괄호안의 왕성을 왕궁으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스타일이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다.

 

초불연의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 라는 문구 역시 대표적인 주석적 번역의 사례이다. 어떻게 탐욕이 빛바랠 수 있을까? 탐욕이 물건도 아닌데 빛 바래다니 말이나 되는가? 이는 빠알리어 위라가 virāgā)에 대한 주석에서의 설명을 그대로 본문에 실은 케이스에 해당된다. 주석에서는 천의 색깔이 빛바래듯이 위라가에 대하여 탐욕이 빛바래다는 뜻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주석의 내용을 본문에 사용하여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라고 정형구로 사용한 것이다.

 

빛 바래는 것은 탐욕뿐만 아니라 성냄 등 모든 오염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탐욕 하나만 꼭 집어서 탐욕이 빛바래고라고 표현한 것은 어법에도 맞지 않고 어색하다.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문구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고 번역하였다.

 

 

 

12. 호랑이나 황소처럼 그리고 사자처럼

 

 

게송 12(Stn416)

  

빠알리

Esa bhikkhu māhārāja paṇḍavassa purakkhato, Nisinno vyagghrasabhova sīhova girigabbhare.

 

전재성님역

[왕의 사신]

 ‘대왕이시여, 그 수행승은 빤다바 산 앞쪽에 있는 굴속에  호랑이나 황소처럼, 그리고 사자처럼 앉아 있습니다.

 

中村元()

大王さま。この修行者はパンダヴァ前方山窟に、牡牛(おうし)のように、また獅子のようにしています。」と。 

 

법정스님역

"대왕이시여, 그 수행자는 판다바산 앞쪽에 있는 굴속에 호랑이나 황소처럼, 그리고 사자처럼 앉아 있습니다."

 

영역

“O! Great King, this one sits in front of the Pāndian mountains, Like a tiger, a bull, or even like a lion among the hills."

 

 

 

 

왕의 사신은 왕에게 부처님의 모습을 전한다. 빤다바산 굴속에 있는 부처님에 대하여 호랑이(vyaggha), 황소(usabha), 사자(sīha)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을 백수의 왕인 사자로 비유한 경은 많다. 상윳따니까야 시하경(Sīha sutta)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짐승들은 짐승의 왕인 사자의 표효하는 소리를 듣고 대부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S22:78)”라고 하였다. 백수의 왕인 사자가 포효하면 동굴에 사는 자는 동굴로 들어가고, 물에 사는 자는 물에 들어가고, 숲에 사는 자는 숲에 들어가고,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 오른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사자후를 발하면 대부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천상에서 한량 없는 세월동안 오래 행복하게 사는 존재들에게는 충분히 두려움과 감동과 전율을 일으킬 수 있다.

 

시하경에 따르면 우리는 실로 영원하지도 않고 견고 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 잡혀있다(S22:78)”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라 한다. 지금 영원히 행복해 할 것 같지만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런 무상을 알았을 때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전율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불사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감동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자후(sihanado)로 비유한다. 사자후는 당당하고 의미있는 선언을 뜻한다. 최상의 지혜에서 사자후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세존]

Yadā buddho abhiññāya

dhammacakka pavattayi
Sadevakassa lokassa

satthā appaipuggalo,

 

초월적인 능력을 깨달아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니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계에서

스승과 비교할 사람 없어라.

 

 

Sakkāyañca nirodhañca

sakkāyassa ca sambhava
Ariya
caṭṭhagika

magga dukkhūpasamagāmina,

 

개체의 소멸과

개체의 발생이 있나니,

여덟가지 고귀한 길이야말로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이네.

 

 

Yepi dīghāyukā devā

vaṇṇavanto yasassino
Bhītā santāsamāpādu

sīhassevitare migā.

 

장수하는 신들은

아름답고 찬양받지만

사자 앞의 짐승처럼

두려워하고 전율했네.

 

 

Avītivattā sakkāya

aniccā kira bho maya
Sutvā arahato vākya

vippamuttassa tādinoti.

 

이미 해탈하신 그와 같은

거룩한 님의 말을 경청하니

개체를 초월하지 못하여

무상한 것은 실로 우리네.

 

(시하경-Sīha sutta-사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78(3-6), 전재성님역)

 

 

 

13. 화려한 수레와 함께 험한 산으로

 

 

게송 13(Stn417)

  

빠알리

Sutvāna dūtavacana bhaddayānena khattiyo, Taramānarūpo niyyāsī yena paṇḍavapabbato.

khattiyo

전재성님역

사신의 말을 듣자 전사의 왕은 화려한 수레를 타고 빤다바 산이 있는 곳으로 재촉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전사의 왕은

中村元()

使者のことばをるや、そのクシャトリヤ(ビンビサ)はって、いでパンダヴァいた。

そのクシャトリヤ(ビンビサ)は

법정스님역

사신의 말을 듣자 빔비사아라 왕은 화려한 수레를 타고 판다바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빔비사아라 왕은

영역

The warrior hearing the words of the messenger, Got into a suitable carriage and left towards the Pāndava hills.

The warrior

 

Khattiya: 끄샤뜨리야, 왕족, 전사계급

 

 

빤다바산의 부처님의 거처를 확인한 빔비사라왕은 곧바로 부처님을 찾아 간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험한 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번역에서 전사의 왕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게송에서 캇띠야(Khattiya)를 번역한 것이다. 캇띠야는 끄샤뜨리야를 말한다. 고대인도에 있어서 네 개의 계급 가운데 두 번째인 왕족이나 전사계급을 말한다. 그래서 빔비사라왕에 대하여 전사의 왕이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나까무라하지메는 친절하게도 괄호를 이용하여 そのクシャトリヤビンビサ라 하였다. ‘그 크샤트리야(빔비사라왕)이라는 뜻이다. 이를 재역한 법정스님은 괄호를 포함하여 빔비사아라 왕은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문에는 Khattiya라는 말은 있어도 빔비사라라는 이름은 없다.

 

 

14. 전사의 왕 빔비사라

 

 

게송 14(Stn418)

  

빠알리

Sayānabhūmi yāyitvā yānā orūyha khattiyo, Pattiko upasakamma āsajja ta upāvisi.

khattiyo

전재성님역

갈 수 있는 곳까지 달려간 뒤 전사의 왕은 수레에서 내려 손수 걸어서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습니다.

전사의 왕은

中村元()

かのクシャトリヤ()は、ってけるところまで(か)り、からりて、いて、かれにづいてした。 

クシャトリヤ()は

법정스님역

왕은 수레로 갈 수 있는 곳까지 달려간 뒤 수레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 그 곁에 앉았다.

왕은

영역

 He went in the carriage as far as he could go, And getting down from it went on foot and reached him.

 

 

 

빤다바산에 도착한 빔비사라왕의 화려한 수레는 더 이상 험한 산길을 올라 가지 못한다. 그래서 수레에서 내려서 걸어서 올라가게 된다. 부처님이 계신 굴속까지 직접 걸어 올라 간 것이다.

 

번역에서 khattiya에 대하여 왜 전사의 왕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부처님 다시 고대인도는 전국시대이었기 때문이라 본다. 16대국이 서로 싸움하며 패권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khattiya에 대하여 전투이미지가 강한 전사계급으로 본 것이다.

 

이런 khattiya(전사의 왕)이라는 명칭은 17번게송(Stn421)에서 군대를 정렬하여 당신께 선물을 드리니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khattiya(전사의 왕)이라고 표현한 것은 16국 시대 호전적인 전쟁의 왕으로서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것이다.  

 

이렇게 게송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경 전체를 문맥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법정스님은 왕은이라고 번역하여 단지 평화시대의 평범한 왕의 이미지로 묘사하였다.

 

 

15.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고

 

 

게송 15(Stn419)

  

빠알리

Nisajja rājā sammodi katha sārāīya tato, Katha so vītisāretvā imamattha abhāsatha.

Nisajja rājā

전재성님역

앉아서 왕은 기뻐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 이와 같은 도리를 말했습니다.

앉아서 왕은

中村元()

して、それから挨拶のことばをした。挨拶のことばをしたあとで、このことばをった。ーーー 

して、

법정스님역

왕은 기뻐하면서 인사를 나눈 후 이렇게 말했다.

왕은

영역

The king sat on a side and exchanged friendly greetings with him
And said this:

The king sat

 

Nisajja: 앉음, 자리, 의자, 좌선

Katha:이야기, 대화, 연설, 충고, 설명

sārāīya: 공손한, 친절한

tato: 그것으로부터

vītisāreti: 지나가게 하다, 교환하다, 대화 하다.

 

 

빔비사라왕와 부처님이 만나는 장면이다. 경에서는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빔비사라왕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의 처소, 그것도 굴속으로 손수 찾아온 목적은 무엇일까?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왔을 것이다.

 

 

 

King Bimbisara and the Buddha

 

 

16. 같은 계급 깟띠야(끄샤뜨리야)

 

 

게송 16(Stn420)

  

빠알리

Yuvā ca daharo cāsi pahamuppatito susu,
Va
ṇṇārohena sampanno jātimā viya khattiyo.

Yuvā ca daharo cāsi pahamuppatito susu

전재성님역

[빔비싸라 왕]

 ‘당신은 어리고 젊습니다. 첫 싹이 트고 있는 청년입니다. 용모가 수려하니 고귀한 왕족 태생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어리고 젊습니다. 첫 싹이 트고 있는 청년입니다

中村元()

「あなたはくてみ、人生めにある若者です。容姿端麗で、(とうと)いクシャトリヤ(王族のようだ。

あなたはくてみ、人生めにある若者です

법정스님역

"당신은 젊음이 넘친 인생의 봄입니다. 용모도 수려하고 귀한 왕족 태생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젊음이 넘친 인생의 봄입니다

영역

. “You are young, in the first stage of youth
Looks quite handsome, and by birth seems to be a warrior.

You are young, in the first stage of youth

 

Dahara: 어린, 젊은, 소년

Susu: 소년, 젊은이

paha: , 종종 추상명사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다.

Viya: ~과 같이, ~처럼

 

 

빔비사라왕이 묻는다. 부처님의 용모를 보고 어리다고 하였다. 그리고 첫 싹이 난 것처럼 싱싱하다고 하였다. 거기에다 32가지 뛰어난 신체적 특징을 가진 부처님을 가까이서 보고 범상치 않음을 알아 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왕족태생인 것 같습니다(jātimā viya khattiyo)라고 물어 본 것이다.

 

여기서 왕족은 빠알리어로 khattiya이다. 이전 게송에서는 캇띠야에 대하여 전사의 왕이라 하였다.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이미지의 빔비사라왕에 대하여 전사의 왕으로 번역하였으나, 32가지 뛰어난 신체적 특징을 가진 부처님의 상호를 보자 같은 계급임을 직감하여 귀한 왕족 태생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17. 코끼리 부대를 주겠다고

 

 

게송 17(Stn421)

  

빠알리

Sohayanto aīkagga nāgasaghapurakkhato, Dadāmi bhoge bhuñjassu jāti vakkhāhi pucchito.

 

전재성님역

코끼리의 무리가 시중드는 위풍당당한 군대를 정렬하여 당신께 선물을 드리니 받으십시오. 묻건대, 당신의 태생을 말해주십시오.

 

中村元()

先頭とする軍隊えて、わたしはあなたにえよう。それを享受なさい。わたしはあなたのまれをう。これをげなさい。

 

법정스님역

코끼리 떼를 앞세운 날쌘 군대를 정비해서 나는 당신께 선물로 드리겠으니 그것을 받으십시오. 나는 당신의 태생을 알고 싶으니 말해 주십시오."

 

영역

You will look splendid on an elephant, with an army attending. Enjoy life I will give you wealth, tell us your birth too".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의 상호를 보자 같은 캇띠야(끄샤뜨리야)임을 직감하고 함께 할 것을 요청한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을 장군감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군대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꼬끼리 군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코끼리 군대는 어떤 의미일까?

 

부처님 당시 16대국 시절 고대인도에서는 전쟁의 시대이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 났는데, 빠알리니까야에서도 전쟁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상윳따니까야에 있는 전쟁의 경(S3:14)’이 그것이다.

 

전쟁의 경에서  한때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타쌋뚜가 네 종류의 군대를 무장시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을 공격하기 위해서 까씨국으로 쳐들어왔다. (S3:14)”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네 종류의 군대라는 말이 나온다.

 

네 종류의 군대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네 종류의 군대는 코끼리부대(象軍, hatthikaya), 기마부대(馬軍, assakaya), 전차부대(車軍, ra-thakaya), 보병부대(步兵, pattikaya)의 사군(四軍, caturagini sena)을 말한다.

 

이렇게 네 종류의 군대를 거느린 빔비사라왕이 코끼리부대(象軍)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였다. 왜 그런 제안을 하였을까? 각주에 따르면 빔비사라왕은 보살(깨닫기 전의 부처님)에게 그의 휘하에 강력한 전사들이 있는 장군의 지위를 부여하려 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상군을 주겠다고 제안한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에게 태생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

 

 

18. 히말라야 중턱의 한 국가

 

 

게송 18(Stn422)

  

빠알리

Uju jānapado rājā himavantassa passato,
Dhanaviriyena sampanno kosalesu niketino.

himavantassa

전재성님역

[세존]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중턱에 한 국가가 있습니다. 꼬쌀라국의 주민으로 재력과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중턱에

中村元()

がいった)、「さま。あちら雪山(ヒマラヤ)のに、つの正直民族がいます。からコサラ住民であり、(そな)えています。

雪山(ヒマラヤ)の

법정스님역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중턱에 한 민족이 있습니다. 옛부터 코오살라 나라의 주민으로 부()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중턱에

영역

.“The king of the state stretching from the side of the Himālayas'  Is endowed with wealth and power, It is Kosala, my home.

the side of the Himālayas

 

Himavant: 설산, 히말라야산

 

 

빤다바산의 누추한 굴속 거처까지 스스로 찾아온 빔비사라왕의 제안과 태생을 묻는 질문에 부처님은 답한다. 히말라야 부근의 한 국가에서 왔다고 하였다. 그 나라는 꼬살라국의 주민이라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 사끼야국(Sakiya)은 꼬살라의 속국이었다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 꼬살라 등 16대국이 있었지만 사끼야족의 나라는 작은 나라이었음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16대국은 다음과 같다.

 

 

 

고대인도 16대국(600 B.C.)

위키피디아 : Mahajanapada

 

 

지도를 보면 꼬살라가 지금의 네팔 가까이 있고 동남쪽에 마가다국이 위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6대국 중에서 마가다와 꼬살라가 가장 강성하였는데 빠알리니까에서도 이 두 나라의 전쟁이야기가 실려 있다.

 

 

19. 빔비사라왕의 요청을 거절하고

 

 

게송 19(Stn423)

  

빠알리

Ādiccā   nāma gottena sākiyā nāma jātiyā, Tamhā kulā pabbajitomhi rāja na kāme abhipatthaya.

Ādiccā   nāma gottena

전재성님역

씨족은 ‘아딧짜’라고 하고, 종족은 ‘싸끼야’라 합니다. 그런 가문에서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왕이여, 나는 출가한 것입니다.

씨족은 ‘아딧짜’라고 하고

中村元()

しては〈太陽(すえ)〉とかいい、種族しては〈シャカ〉(迦族)といいます。さまよ。わたくしはそのから出家したのです。欲望をかなえるためではありません。

しては〈太陽(すえ)〉とかいい

법정스님역

성은 <태양의 후예>라하고, 종족은 <석가족>이라 합니다. 왕이여, 나는 그런 집에서 출가했습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은 <태양의 후예>라하고

영역

From the lineage Sun and the Sākya clan, I became a homeless And have no sensual desires.

the lineage Sun

 

Gotta: 가문, 혈통, 가계, 성씨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에게 자신의 출생을 밝히고 있다. 씨족은 ‘아딧짜’라고 하고, 종족은 ‘싸끼야’라 하였다. 여기서 아딧짜(ādiccā)는 태양을 뜻한다. 그래서 나까무라하지메는 太陽すえ라고 풀이 하여 번역하였다. ‘태양의 예(후예)’라는 뜻이다. 裔가 후손이라는 뜻이고, すえ가 후예라는 뜻이다. 이를 재역한 법정스님은 태양의 후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에는 후예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씨족의 이름인 아딧짜(Ādiccā, 태양)’만 실려 있을 뿐이다.

 

한 눈에 범상치 않음을 알아 본 빔비사라왕에게 부처님은 태생을 이야기 하였다. 같은 깟띠야출신임을 알려 준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라고 말함으로서 코끼리군대를 주겠다는 빔비사라왕의 요청을 사실상 거절하였다.

 

 

20.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게송 20(Stn424)

  

빠알리

Kāmesvādīnava disvā nekkhamma daṭṭhu khemato, Padhānāya gamissāmi ettha me rajjatī5 manoti.

 

nekkhamma daṭṭhu khemato

전재성님역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고자 합니다.

내 마음은 이것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中村元()

欲望には(うれ)いのあることをて、また出離こそであるとて、つとめはげむためにみましょう。わたくしのはこれをしんでいるのです。

出離こそであると

법정스님역

모든 욕망에는 우환이 있고, 출가는 안온하다고 알아 힘써 정진합니다. 내 마음은 이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출가는 안온하다고 알아

영역

I saw the dangers in sensuality and appeasement in giving up.  I go to strive, my mind is attached to it."

Appeasement(진정, 완화) in giving up

 

Disvā: Dassati abs

Nekkhamma: 출가,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남, 헌신, 평온, 신성한 삶, 욕망의 여읨, 출리

daṭṭhu: Dassati abs.

Dassati: 보다,인식하다, 알아차리다, 이해하다.

 

 

출가의 경 마지막 게송이다. 빔비사라왕의 장군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부처님은 출가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말은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 을 본 것(Kāmesvādīnava disvā)이다. 그래서 탁발나갔을 때 눈을 아래로 내려뜨면서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sampajāno patissato)’ 걸었던 것이다. 감관을 수호하며 경행한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재난에서 벗어나 안온을 본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깨닫기 전의 일이다. 그래서 정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정진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음 경전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다음 경이 정진의 경(padhanasutta, Sn3.2)’이기 때문이다.

 

 

 

 

2013-05-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