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는 모임, 끝내 초기불교학당은 개설되지 않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23. 11:37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는 모임, 끝내 초기불교학당은 개설되지 않고

 

 

 

인터넷에 국경이 없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 어느 사이트이든지 막아 놓지만 않으면 들어 갈 수 있다. 그래서 오픈 된 자료를 공유할 수 있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공인(公人)

 

즐겨찾기로 등재되어 있는 사이트를 종종 방문한다. 그런 사이트 중에 초기불전연구원사이트가 있다. 아미담마와 청정도론 그리고 사부 니까야를 완역한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이 운영하는 사이트이다. 그곳에 올려져 있는 주옥 같은 자료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조금 아는 것이 문제가 된 것 같다. 자꾸 잘 못된 점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특히 또다른 빠알리니까야 번역자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접하고 나자 더 두드러졌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자체는 명백히 구업(口業)을 짓는 것이다. 필업(筆業)도 구업의 일종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을 쓰면 쓸 수록 업의 양도 많아지는데 가급적 비난과 비방은 하지 않으려 한다. 건전한 비판을 통하여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점, 이상한 부분,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다.그런 글은 어떤 특정인을 지칭한 비난이나 비방이라기 보다 비판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공인이면 누구든지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파초인지 야자수인지

 

초기불전연구원 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을 매일 본다. 거의 매일 문안 인사올리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초불회원들의 공부모임에 대한 글을 눈여겨 본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공부모임의 발제를 유심히 살펴 본다. 그런 발제문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띄였다.

 

 

인터넷에서 번역의 문제로 뜬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Kadali란 용어는 전재성씨나 법정스님의 글에서는 파초란 용어로 번역되어 있는데요. 어떤 것이 맞는지요? (http://blog.daum.net/bolee591/16155526)

 

(L법우님,  서경 5월 경 발제문입니다. 니까야 강독 편안함경, 출가경, 삿짜까 긴 경, 2013-04-30)

 

 

초불공부모임의 어느 법우님이 발제문에 언급된 내용이다. 지난 4월 6일에 파초인가 야자수인가, 포말경(S22:95) 까달리(kadali)나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의 일부이다.까달리가 파초인지 야자수인지 공부모임에서 스님에게 물어 보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발제문을 보았을 때 인터넷은 확실히 국경이 없음을 알 수 있다.인터넷에 올려진 글은 막아 놓지 않았다면 누구나 접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어 보는 김에 한 가지 더 

 

그런데 물어 보는 김에 한 가지 더 물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은 5월 공부모임의 발제에 들어가 있는 성스런 구함경(M26)에 있는 내용에 대한 것이다. 이 경과 관련하여 초불연의 오역을 지적하하는 글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브라흐마야짜나경(S6:1)을 올렸기 때문이다.어느 부분이 오역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비  고

빠알리 원문

Apārutā tesa amatassa dvārā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
Vihi
sasaññī pagua na bhāsi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ti.

pamuñcantu saddha

전재성박사번역

[세존]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초불연번역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영어번역

The door to deathlessness is open. May those who have ears be released out of faith!
My perception is not hurting and will not speak straightforward words
 Brahma, the exalted Teaching is available to humans.

be released out of faith!

 

 

 

 

brahma-sahampati

 

 

 

맛지마니까야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M26)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에도 실려 있다.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다음 사함빠띠의 간청에 따라 법을 설하기로 결정을 하는데 하나의 조건을 달고 있다. 그것은 이전의 신앙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정반대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하였다.

 

빠알리어  pamuñcantu saddham’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번역처럼 믿음을 버려라가 맞는지  초불연의 번역처럼 믿음을 내어라라가 맞는지 알고 싶다.참고로  이 부분과 관련하여 최근   조준호박사는 불교저널에서세상에 불사(不死)의 문이 열렸다. 듣는 자들은 과거의 낡은 믿음을 버려라(불교저널, 2013-05-08라고 기고한 바 있다.

 

나까무라하지메(中村元)와 법정스님

 

L법우님의 발제문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숫따니빠따에 있는 출가의 경(Sn3.1)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 유행자시절에 마가다 빔비사라왕과의 만남에 대한 것이다. 

 

이 경과 관련하여 법우님은  이 경이 니까야 강독에 소개되어서 또 한 번 감동의 물결입니다.라고 하였다.  법정스님이 번역한 수타니파타에 실려 있는 출가를 말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니까야 강독이 출간 되었다. 이 책은 조계종 스님교육용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출가한 스님을 대상으로 한 강원에서 사용될 교재라 한다. 일종의 스님교과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초불연에서 발행된 니까야에서 핵심이 되는 경을 가려 뽑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출가와 관련된 내용 중에 숫따니빠따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의 출가에 대한 내용이 삽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법정스님이 번역한 수타니파타에 실려 있는 출가경의 내용을 그대로 집어 넣었다는 것이다. 초불연의 두 분 스님들이 빠알리 번역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법정스님의 번역을 승가교재에 집어 넣은 것일까?

 

법정스님이 번역한 수타니파타는 일본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スッタニパ(숫타니파타)를 재역한 것이다. 사실상 토씨만 바꾸어 번역하였다고 보여진다.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은 일역판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항이다. 

 

빠알리 원전을 번역한 것도 아니고 초불연에서 번역한 것도 아닌 일역을 재역한 법정스님의 출가가 스님들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의 빠알리 직역본이 2004년에 출간되어 이미 시중에 출판 되고 있음에도 굳이 법정스님의 번역을 승가교재에 집어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역(誤譯)과 재역(再譯)의 한계

 

숫따니빠따와 관련하여 나까무라하지메역과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비교하여 여러 차례 올려 놓은 바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애경(Sn1.8)번역 비교분석, 한글역과 일역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글이다.

 

나까무라하지메의 자애경(Sn1.8)에 대한 번역을 보면 오역도 눈에 띈다. 첫 번째 게송에서  '아비사멧짜(abhisamecca)'에 대하여  '究極理想じた(궁극의 이상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완료형으로 번역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를 그대로 직역한 법정스님 역시 '통달한 사람'이라 하여 완료형으로 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역이다. 문맥에 따르면 첫 번째 게송에서 완료형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이를 '성취하고자 하는 님은'이라 하여 현재형으로 하였다.

 

바로 이런 것이 재역의 한계이다. 재역을 하면 원역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경직된 번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승가의 교재에 일역을 재역한 번역이 들어 갔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

 

이외에도 망갈라경(Sn2.4)에서 망갈라를 행복으로 번역한 것도 오역에 속한다. 망갈라(magala)는 행복(sukha)의 뜻이 아니라 길상, 행운, 축복의 뜻이기 때문이다.따라서 큰 행복 경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 다면 길상(吉祥)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대길상경(大吉祥經)’ 또는 큰 길상경’, ‘길상경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는 오프라인 모임

 

초기불전연구원 카페를 통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묻고답하기 방의 경우 궁금한 것에 대한 갈증을 풀어 주었다. 카페의 검색창에 몇 개의 키워드를 집어 넣으면 과거 묻고 답한 내용이 고스란히 검색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불연 카페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불자들에게 일종의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불자들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모임을 갖게 되었다. 지난 2010 11월의 일이다.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어서 참여 하지 않았다. 그 때 당시 오프라인 모임 결성 소식을 듣고 서울에 ‘초기불교학당(교양대학)’이 만들어진다는데.(2010-11-0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서울에 초기불교학당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한 껏 고무받아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끝내 초기불교학당은 개설되지 않고

 

초기불교학당이야기는 각묵스님이 카페 게시판에서 아마 내년부터 우리 조계종의 교육원에서 주관하는 가칭 초기불교 학당이라는 초기불교 불교교양대학이 서울에서 개설될 것입니다. 제보고 학장을 맡아라고 해서 제가 난감해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 것에서 기인한다. 분명히 2011년 서울에서 초기불교학당이 개설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스님의 말대로라면 2011년에 서울에서 초기불교학당이 개설 됐었어야 했다. 그러나 2011년은 물론 지금까지 초기불교학당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다. 대체 초기불교학당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까?

 

뜻있는 불자라면 한국불교의 기복적 행태에 대하여 넌더리친다. 사찰은 기도처로 변한지 오래 되었고, 또 영가천도 등 각종 천도재로 인하여 사실상 영혼을 인정하는 종교가 되었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한국불교는 기독교인지 힌두교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런 때 불자들은 초기불교를 전공한 스님이나 재가의 법사들이 적극적으로 파사현정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런 기대는 ‘담마스쿨’로 구현될 수 있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전파하고 거기에서 배운 불자들이 전법사로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말한다. 그런 무대가 2011년 생겨난다기에 한 껏 기대에 부풀었다. 어쩌면 1기 졸업생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초기불교학당은 개설되지 않았다.

 

 

 

2013-05-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