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장미와 연꽃 어떻게 다른가? 연꽃과 수행자 삶의 결실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10. 11:43

 

장미와 연꽃 어떻게 다른가? 연꽃과 수행자 삶의 결실

 

 

 

장미의 계절

 

장미의 계절이다. 해마다 6월이면 이곳 저곳에서 장미가 만발한다. 우리나라 동네에서도 장미를 볼 수 있는데 대부분 가장 흔한 줄장미이다.

 

동네에 줄장미가 담장에 필 때 쯤이면 사람들은 한 번쯤 멈추어 선다. 그리고 항상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절정의 장미를 담는 것을 볼 수 있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때가 되자 어김 없이 장미가 만발하였다.

 

 

 

 

 

 

 

 

 

 

 

 

서울대공원 동물원 옆 장미원

 

장미의 계절에 장미를 원 없이 보려면 장미원에 가야 한다. 해마다 찾는 서울대공원 장미원이다. 일반적으로 서울대공원 동물원 옆 장미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동물원 바로 맞은 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마다 장미를 테마로 한 축제가 열린다. 이른바 서울동물원 장미원 축제가 그것이다.

 

 

 

 

올해 장미원 축제는 6 1일부터 30일까지이다. 매년 이곳을 찾고 있는데 일정이 조정되었다. 종전에는 5월 말부터 열렸으나 이번에는 6 1일부터 30일까지 한달간이다. 이는 6월달이 장미의 계절이라는 유력한 증거이다. 이렇게 일정이 조정 된 것은 잘 된 것이다. 5월 말에 시작 되면 아직 장미가 다 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미천지

 

6 8일 장미원에 갔다. 장미가 만개하여 절정을 이루었다. 온통 장미천지이다. 그것도 울긋불긋 단풍놀이를 보는 듯 하다. 붉은 색 장미만 있는 줄 알았으나 백장미, 노랑장미, 보라색 끼가 있는 것, 컬러가 혼합 된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이름을 가진 장미

 

그리고 개량에 개량을 거듭 해서일까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장미들도 많다. 사람도 이름도 이름이 대부분이다. 유명 오페라가수나 클레오파트라 같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다. 그런 장미는 잎사귀가 크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슈왈츠 마돈나(Schwarze Madonna)

육성국: 독일, 계통 : Hybrid Tea

 

 

 

 

 

 

 

 클레오파트라(Kleopatra)

육성국: 독일, 계통 : Hybrid Tea

 

 

 

 

 

 

 

 탄쵸(Tancho)

육성국: 일본, 계통 : Hybrid Tea

 

 

 

 

 

 

 

 람피온(Lampion)

육성국: 독일, 계통 : Floribunda

 

 

 

 

 

 

히오기(Hiogi)

육성국: 일본, 계통 : Hybrid Tea

 

 

 

 

 

 

우키구모(Ukigumo)

육성국: 일본, 계통 : Floribunda

 

 

 

 

 

 

 타임레스98(Timeless 98)

육성국: 미국, 계통 : Hybrid Tea

 

 

 

이외에도  수 없이 많은 이름이 있다. 그 종류가 백 가지가 넘는다. 팻말이 붙어 있어서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름을 알 수 있는 수 많은 장미가 가득하다. 그곳에서 장미의 얼굴 만큼만이나 사람들의 얼굴은 화사해 보이고 모두 행복해 보인다.

 

바람개비 같은 꽃

 

장미원 축제에 매년 가고 있다. 그런데 장미원 축제에서 장미만 볼 것이 아니다. 장미꽃이 필 때쯤 주목 하고 있는 또 다른 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연장 주변에 있는 나무에서 피는 꽃이다. 마치 바람개비 같은 모습을 한 하얀 꽃이다.

 

 

 

 

 

 

 

 

 

 

 

 

 

 

 

 

 

 

산딸나무꽃

 

이 꽃을 처음 본 것은 서울대공원 장미원이다. 장미원 축제 공연장에서 발견한 꽃이다. 나무 위에서 피는 꽃이 멋지고 아름다워 보여서 블로그에 올렸더니 어느 네티즌이 댓글로 산딸나무라 알려 주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더니 틀림 없었다. 그 후로 장미의 계절이 되면 자연스럽게 산딸나무 꽃이 떠 올랐다.

 

이번 장미원 축제 기간 중에서도 그 자리에 있는 산딸나무에서 꽃이 만개 하였다. 마치 바람개비가 돌아 가는 듯, 마치 여러 마리의 나비가 앉아 있는 듯 산딸나무 꽃 역시 때가 되니 자신의 할 바를 다 하고 있었다.

 

 

 

 

 

 

 

 

 

 

 

 

 

 

 

 

 

 

 

 

 

 

 

 

 

 

 

 

 

 

 

 

 

 

 

 

 

 

 

 

 

 

월드페스티벌

 

장미원 축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월드페스티벌이다. 주로 구 소련의 백러시아 미녀들이 출연하여 전세계 각국의 민속춤을 선 보인다. 매년 보는 춤이지만 매년 볼 때 마다 얼굴이 바뀐다. 이번에도 새로운 얼굴이 선 보였다.

 

 

 

 

 

 

 

 

 

 

 

 

 

 

 

 

 

 

고객감동 서비스

 

그런데 예전과 다르게 민속춤 공연이 끝나면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기념촬용에 응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서비스라 볼 수 있고 고객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계절별로 피는 꽃

 

계절마다 특색이 있다. 특히 꽃이 피는 계절이 그렇다. 일반적으로 4월은 벚꽃의 계절, 6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5월은 꽃들이 앞 다투어 피기 때문에 대표 꽃을 들기 힘들다.

 

그렇다면 7월은 무슨 계절일까? 아마도 연꽃의 계절일 것이다. 보통 7월 말에 절정을 이루어 8월 초 까지 이어지는 연꽃은 햇볕이 작열하는 뜨거운 여름에 핀다. 그리고 첫 서리가 내릴 무렵 절정을 이루는 국화는 가을의 꽃으로서 10월말이나 11월 초에 볼 수 있다. 그래서 겨울을 제외하고 계절마다 특색 있는 꽃을 볼 수 있다.

 

꽃들을 보기 위하여 찾아 가는 곳이 있다. 4월에는 벚꽃을 보기 위하여 서울대공원 호수가를 찾고, 6월에는 장미원을 찾는다. 7월에는 시흥시 관곡지에서 연꽃을 본다. 이렇게 계절마다 찾아 가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은 최근 수년간 다녀 보았기 때문이다.

 

빛나는 청춘 같은 장미

 

지금 서울대공원 동물원 옆 장미원은 장미로 화사하다. 조금 지나면 모두 시들어 버리고 말겠지만 마치 빛나는 청춘 마냥 절정의 장미는 화려 하기 그지 없다.

 

 

 

 

 

 

 

 

 

 

 

 

 

 

 

 

 

 

 

 

 

 

 

 

 

 

 

 

 

 

 

 

 

 

 

 

 

 

 

 

 

 

꽃은 아름답지만

 

장미는 아름답다. 그리고 향기롭다. 그러나 장미는 가시가 있다. 아름답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장미는 아름다움에 비하여 씨는 볼 품이 없다. 크고 화려하고 컬러풀한 꽃이 마치 공주처럼, 왕비처럼, 여왕처럼, 여자 황제처럼 보이지만 열매는 볼 품이 없다.

 

일반적으로 꽃이 크고 아름답고 사람의 시선을 끄는 꽃일수록 결실은 보잘 것 없다. 반면 꽃은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열매는 큰 것이 많다. 과일나무나 농작물에서 볼 수 있다.

 

감꽃이 있다. 노랑빛깔로 꽃이 피지만 잎사귀에 가리어 꽃이 피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열매는 크다. 꽃으로 말하기 보다 결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감자꽃도 그렇다. 주말농장 텃밭에서 보는 감자꽃은 보잘 것 없고 볼품도 없다. 그러나 뿌리에 결과가 있다. 사람을 먹여 살리는 곡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보리나 벼 등 농작물에도 꽃은 피지만 꽃이 피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볼품이 없다. 그러나 결실을 맺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장미는 보기에 화려 하다. 그러나 실속이 없다. 겉보기만 좋을 뿐 결과는 신통치 않은 것이다.

 

장미와 연꽃

 

장미와 비교 되는 것이 연꽃이다. 장미가 서양의 꽃이라면 연꽃은 동양의 꽃이다. 또 장미가 기독교의 상징이라면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다. 그런데 꽃의 아름다움 만을 따진다면 막상막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실은 다르다.

 

장미꽃이 꽃중의 꽃처럼 꽃의 여왕처럼 보이지만 열매는 부각 되지 않는다. 열매가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꽃의 아름다움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 꽃만 있고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연꽃은 다르다. 연꽃은 꽃도 아름답지만 열매도 견실하다는 것이다.

 

꽃과 동시에 열매가

 

대부분 꽃들은 꽃이 지고 난 후 열매를 맺는다. 장미 역시 꽃이 지고 난 후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에 가려 열매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사람들은 열매에 신경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연꽃의 경우 다른 꽃과 달리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꽃과 열매가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연꽃 안에 있는 연밥이 그것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히 연꽃을 불교의 꽃이라 한다. 불교의 꽃이라고 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부처님이 초기경전에서 연꽃의 비유를 들어 법문을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연꽃은 꽃과 동시에 결실을 맺는다. 그래서 열매라 볼 수 있는 연밥이 있다. 이는 씨, 덩이, 뿌리와 함께 식용, 약용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가시가 있는 장미와 달리 연꽃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이렇게 꽃과 열매가 동시에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연꽃이다. 이런 특징은 도(, magga)와 과(, phala)의 비유로도 활용될 수 있다.

 

이 보시의 공덕으로 도()와 과()를 이루시기를!”

 

요즘 초기불교가 유행이다. 기존 대승불교에 식상한 불자들이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는 빠알리니까야를 가까이 하고 부처님의 수행법이라 일컬어지는 위빠사나 수행붐이 일고 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센터를 볼 수 있는데, 카페나 홈페이지에 볼 수 있는 문구가 “이 보시의 공덕으로 도와 과를 이루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다.

 

기도, 천도재와 같은 기복이 없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의지 할 것이라고는 자율보시 밖에 없다. 그래서 수행을 하고 난 다음 능력껏보시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래서 보시를 하고 나면 보시의 공덕으로 도와 과를 이루기를 축원하는 것이다. 이때 도와 과는 사향사과(四向四果)’를 말한다. 도와 과를 이루어 사쌍팔배(四雙八輩)’의 성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magga)와 과(, phala)는 어떤 것일까?

 

사향사과와 사쌍팔배는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 단계를 말한다. 그래서 사향(四向)으로서 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가 있고, 사과(四果)로서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가 있다. 그래서 네 가지 쌍으로 된 여덟가지가 있다 하여 사쌍팔배라 한다. 이와 같은 도와 과는 부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궁국적 목적이다. 그렇다면 도와 과는 어떤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 주석에 따르면 도와 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ariya-puggala)이란 수다원(須陀洹, sotāpanna), 사다함(斯陀含, sakadāgāmi), 아나함(阿那含, anāgāmi), 아라한(阿羅漢, arahatta)의 네 가지이다. 여기에 도(, magga)와 과(, phala)를 각각 곱하면 8가지가 되는데 이를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라고 한다.

 

도()란 그에 상응하는 과()에 들어서기 직전의 한 순간의 체험을 말한다. 과는 도의 결과 즉시 뒤따르는 의식의 순간을 의미한다. 즉 도를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체험이라 한다면, 과는 그 순간적인 체험의 다음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여덟 가지를 출세간의 도과라 하고 이들의 마음을 출세간의 마음(lokuttara-citta)이라 한다.

 

(1) 수다원(須陀洹, sotāpanna):

 

거스를 수 없는 열반의 ‘흐름에 들어선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예류(預流)로 의역하거나 수다원(須陀洹)이라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stream-winner라고 한다. 중생들을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어놓는 열 가지의 족쇄(, sayojana) 가운데에서 처음의 세 가지 족쇄인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회의적 의심(vicikicchā),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에서 벗어난 분이다.

 

수다원은 또한 나쁜 세계(惡趣, apāya)로 인도할 만큼 강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잘라버리며 다른 다섯 가지 불선한 마음, 즉 사견과 함께 하는 탐욕에 뿌리를 둔 네 가지 마음, 그리고 의심과 함께하는 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마음을 영원히 제거해버린다. 수다원은 구경의 열반에 도달하는데 까지 최대 일곱 생이 더 남아 있으며 나쁜 세계에는 결코 태어나지 않는다.

 

(2) 사다함(斯陀含, sakadāgāmi):

 

‘한 번만 더 되돌아올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일래(一來)로 의역하거나 사다함(斯陀含)이라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once-returner라고 한다. 수다원이 제거한 세 가지 족쇄이외의 다른 족쇄들을 더 제거하지는 않지만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과 악의를 희박하게 만든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이는 해탈하기 전에 오직 한 번만 더 이 욕계에 태어난다.

 

(3) 아나함(阿那含, anāgāmi):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불환(不還)으로 의역하거나 아나함(阿那含)으로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none-returner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이는 욕계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색계(色界)의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 거기서 반열반(般涅槃)에 든다.

 

아나함은 감각적 욕망(kāma-rāgā) 적의(paigha)의 족쇄를 잘라 버리며 성냄에 뿌리를 둔 두 가지 마음을 영원히 제거한다.

 

(4) 아라한(阿羅漢, arahatta):

 

아라하따(arhatta)는 아라한의 과위와 상태를 추상적으로 나타낼 때 쓰는 술어이고, 아라한과를 얻은 이를 구체적으로 통칭할 때에는 아라한(arahant)이란 술어를 쓴다. 이 아라한은 동사 arahati(가치가 있다, 받을 만하다)의 ppr(현재분사)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대접과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응공(應供)이라고 의역하거나, 아라한(阿羅漢)이라고 음역했다.

 

PED에서 ‘Before Buddhism used as honorific title of high officials like the English “His Worship”; at the rise of Buddhism applied popularly to all ascetics. Adopted by the Buddhists as technical term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Summum Bonum of religious aspiration (Nibbāna).'라고 설명되듯이, 이 아라한이라는 술어는 원래 불교가 일어나기 전 부터 영어의 “His Worship”과 같이 고관(高官)에게 붙는 존칭어처럼 사용되었고, 나중에 불교가 일어날 즈음에 출가한 모든 사문들을 지칭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종교적인 이상의 최고선인 열반을 성취한 사람에게 붙는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이 아라한은 모든 번뇌(kilesa)를 완전히 멸한 사람을 말하며, 제자(sāvaka)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이다. 부처님도 모든 번뇌를 멸했다는 점에서 아라한이고 이 점에서는 제자와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는 정등각의 지혜(sammā-sambodhi-ñāa)로 제자의 지혜보다 훨씬 월등하기 때문에 부처라고 불릴 뿐이다.

 

이 아라한은 중생을 삼계(三界)에 묶어놓는 열 가지 족쇄(, sayojana)를 완전히 잘라버려 더 이상 어떤 존재로도 윤회하지 않는다. 즉 아라한은 존재를 욕계에 묶어두는 번뇌인 다섯 가지 거친 족쇄(五下分結, orambhāgiya-sayojana) 뿐만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더 미세한 족쇄(五上分結, uddhambhagiya-sayojana), 즉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자만(māna),

들뜸(uddhacca),

무명(avijjā)

 

까지도 완전히 잘라낸 분이다. 그리고 나머지 불선한 마음들, 즉 사견과 함께 하지 않은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 네 가지와 들뜸과 함께 한 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마음까지 완전히 제거한 분이다. 이러한 아라한은 금생의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이 다하면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에 들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아라한은 나이나 성이나 신분이나 승속(僧俗)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경에는 7살의 나이 어린 사미가 아라한을 얻은 예가 있고, 주석서에는 셀라(Selā)와 산끼짜(Sankicca)라는 이름의 나이 어린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ThaA.64; PvA.53) 또한 여성 아라한도 경에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략 400분의 남성 아라한들이 경에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비구이다.

 

하지만 앙굿따라 니까야(A.iii.451)에는 재가 아라한의 이름들이 열거되고 있고, 야사(Yasa) 존자, 케마(Khemā) 비구니, 산따띠(Santati) 장관, 숫도다나(Suddodana)왕과 같이 재가자인 채로 아라한이 된 사람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밀린다빤하」(Mil.264~266)에서는 아라한과를 얻은 재가자는 그날에 바로 출가하여 비구나 비구니가 되거나 반열반에 드는 길밖에는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성인(ariya-puggala),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

 

 

주석에 따르면 “도()란 그에 상응하는 과()에 들어서기 직전의 한 순간의 체험”이라 하였다. 또 과는 도의 결과 즉시 뒤따르는 의식의 순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도를 이루면 역시 열매()를 맺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연꽃으로도 설명된다. 연꽃이 피면 열매도 거의 동시에 맺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도를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체험이라 한다면, 과는 그 순간적인 체험의 다음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이라는 결과”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연꽃이 불교의 꽃이 되었을 것이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흔히 도를 닦는다고 한다. 그래서 득도 했다고 한다. 득도 한 것에 대하여 어떤 스님들은 자신에 책에 써 놓기도 한다. 또 불교tv에서 소개 할 때 득도하였다고 자막으로 알려 주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스님은 동진출가하여 13살 때 득도 하였음을 자막으로 보여 주기도 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도를 닦아 득도 하였다고 하는데 열매도 맺었을까? 아직까지 책의 서문이나 자막으로 열매에 해당되는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 아라한과를 증득 하였다고 명기 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단지 득도 하여 은사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고 명기하고 있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도를 이루면 과가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따라야 하는 실천사항이라 본다.

 

만일 도만 닦고 결과가 없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10, 20, 30, 평생동안 선방에서 도를 닦았지만 결과가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면 수다원과에도 들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수행자라면 당연히 수행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

 

꽃이 피면 열매가 맺는다. 마찬가지로 도를 이루어 과를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학문의 세계에서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아이 중이 비구면 됐지…”

 

미디어붓다에서 어느 스님은 인도유학 이야기를 하였다. 정각원 토요법회를 동영상으로 보여 주었는데, 이 동영상에서 J스님은 자신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1985년부터 1998년까지 13년간 인도 뿌네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였지만 남들처럼 박사학위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학위가 없는 것에 대하여 J스님은 아이 중이 비구면 됐지 그것 따로 피에치디(Phd.)붙이면 무엇하냐(2012년 4월 7 정각원 토요법회)”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이에 더하여 J스님은 ‘난 안해’ 그랬더니 우리 K스님이 괜히 자기도 ‘나도 안할래요’ 그러더라구요.” 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K스님은 빠알리니까야 번역으로 유명한 스님을 말한다. 그래서 인도에서 10년 이상 수학한 두 스님은 박사학위가 없다고 한다.

 

출가자는 재가자와 달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인연을 끊고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세상의 일에 초연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외국유학을 가서 10년 이상 공부하였어도 학위가 없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것을  출가한 비구라는 말로 정당화 하고 있다.

 

세속에서는 아무리 박사과정을 10년 이상 하였더라도 학위가 없으면 학문적 성과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런 성과는 논문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스님들은 인도 유학을 10년 이상 해도, 학위가 없어도 귀국 해서 학장을 하고 강사를 한다. 이 모두가 비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유학을 하여 10년 공부를 하는 것은 도를 닦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학위를 받는 것은 과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꽃이 피면 열매가 맺듯이, 도를 이루어 과를 성취하듯이, 학문의 세계 역시 공부를 하여 학위를 획득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인정받고 알아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10년 유학을 하여 학위를 따지 못하였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룩한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저 10년 동안 유학한 것이라기 보다 뿌네 대학교에서 살다 온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또 선방에서 10, 20, 30년 앉아 있어 보았지만 아무런 깨우침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어떤 변명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본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가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다. 사만냐팔라경(Sāmaññaphala Sutta, D2)이 그것이다.  

 

행복인가, 열반인가

 

디가니까야에 있는 사만냐팔라경은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이라 번역되었다. 널리 불교를 홍보하고 전법하는 경전의 성격이 짙은 디가니까야에서 사만냐팔라경이 두 번째 경으로 위치해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을 하면 반드시 결과를 맺어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라 보여진다.

 

어떤 이는 말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열반인 것은 맞지만 부처님은 행복한 삶에 대하여 말하였다고 한다. 열반을 추구하는 것은 출가수행자들이나 추구해야 할 궁국적 목적이라는 뜻이고, 재가의 불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행복론은 대승불교 전통에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종교평화선언 초안에서도 열반 보다도 뭇삶의 안락과 행복을 강조 하였고, 이번 새로 제정된 승가청규에서도 강조 한 것은 안락과 행복이다. 그래서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라고 시작 되는 정형구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그토록 강조한 열반이 실종된 것이다.

 

공무원 복무 규정 같은 승가청규

 

한국불교에서 열반이 실종 되고 그 자리에 차지한 것이 생명의 안락과 행복이다. 그러다 보니 율장이 있고, 비구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무원 복무규정처럼 승가청규를 만들었다.

 

하지만 열반이 실종된 채로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불제자의 목표라 볼 수 없다. 타종교에서도 이미 실천하고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 것은 열반의 실현이다. 그래서 법응스님은 승가청규에 대한 비판글에서 수행은 개인적으로는 열반의 달성이며(2013-06-05, 불교닷컴)”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종단에서 수행의 목표를 열반에 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중생의 안락과 행복에 두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 볼 수 있다.

 

만일 율장정신에 의거하지 않고 청규에 의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규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도박사건이 일어나면 도박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야 하고, 음주사고가 일어나면 음주에 대한 규정, 먹튀사건이 일어나면 먹튀사건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 야동을 즐겨 본다면 이 또한 청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열반을 목표로 하지 않고 단지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위한 것을 목표로 하는 불교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사만냐팔라경(D2)에서 아자따삿뚜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알 수 있다.

 

 

[아자따삿뚜]

세존이시여, 예를 들어 코끼를 타는 자, 말을 타는 자, 수레를 타는 자, 궁수, 기수, 사령관, 보급전사, 왕족출신의 고위관리, 돌격병, 큰 코끼리와 같은 영웅, 흉갑을 입은 병사, 노예병사, 요리사, 이발사, 목욕사, 제과사, 화만사, 염색공, 직공, 갈대세공인, 도공, 산술가, 경리와 같은 다양한 기능의 분야를 지닌 자들이 있고, 그 밖에도 다른 다양한 그러한 종류의 기능의 분야를 지닌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능의 결실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을 안락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을 안락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부모를 안락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처자를 안락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친지를 안락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 대해서는 유익하고 고귀한 행복을 가져오고 천상에 태어나게 하는 보시를 지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사만냐팔라경-Sāmaññaphala Sutta-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 전재성님역)

 

 

아자따삿뚜왕은 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무엇이냐고 부처님에게 묻는다. 경에서 아자따삿뚜왕은 보통사람들의 현세의 삶의 결실이 안락과 행복임을 말하였다. 이는 종교를 떠나서 누구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문’이나 ‘승가청규’를 보면 중생의 안락과 행복이 마치 불교의 목표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자따삿뚜왕이 지적 하였듯이 이는 보통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 간 것이 성직자들이나 보시자들이 바라는 내생의 행복이다. 이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보시를 강조한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국적인 목적이 아니다. 아자따삿뚜왕이 수행자의 삶의 결실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두 가지로 답한다. 첫 번째는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는 출가하여 신체적으로 자제하고 언어적으로 자제하고 정신적으로 자제하고 최적의 음식과 의복에 만족하고 멀리 여읨을 즐깁니다.(D2)”라고 말씀 하셨다. 무소유와 소욕지족의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 첫번째로 수행자가 해야 할 결실임을 말한다.

 

수행자의 삶에 대한 두번째 결실은?

 

그렇다면 수행자의 삶에 대한 두번째 결실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자따삿뚜왕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

 

 

[세존]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마음이 삼매에 들어 청정해지고 고결해지고 티끌없이  오염을 여의어 유연해지고 적응성이 뛰어나 부동에 도달하여, 마음을 번뇌의 부숨에 대한 궁극적인 앎으로 마음을 지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여,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았을 때, 그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에 의한 번뇌에서 해탈하고 무명에 의힌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라는 궁극의 앎이 일어나며,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또 다른,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입니다.

 

대왕이여, 이것과는 다른,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은 없습니다.

 

(사만냐팔라경-Sāmaññaphala Sutta-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 하셨다. 열반의 실현이야말로 수행자의 결실이라 하였다. 그런 열반은 반드시 출가자에 한한 것은 아닐 것이다.

 

행위에 따라 신분이 결정된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재가자도 열반을 실현을 목표로 수행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제행무상이기 때문이다. 재가자라 하여 언제까지나 재가자로 남아 있으리라는 법이 없다. 재가자가 출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출가자라 하여 언제까지나 출가자로 남아 있으리라는 법이 없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유정법(無有定法)’처럼  출가자와 제가자를 구분하는 어떤 특별한 법이 있을 수 없다. 비록 재가자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출가자와 같은 것이고, 지금 출가자일지라도 재가자와 다름 없는 행위를 한다면 재가자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따라신분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Mā jāti puccha caraañca puccha

kaṭṭhā have jāyati jātavedo,
N
īcā kulīnopi munī dhitīmā

ājāniyo hoti hirīnisedho.

 

[세존]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서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순다리까경-Sundarikasutta, 상윳따니까야 S7:9(1-9),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어떤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런 불의 특징은 ‘화염’이 있고 ‘광채’가 있고 ‘광명’이 있다. 비록 야크 똥을 말려서 불을 피웠을지라도 전단향나무을 태운 불의 빛깔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도와 과를 이루어 현자, 성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열반은 죽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만냐팔라경 모두에 “그 때 마가다국의 왕이자 베데히 비의 아들인 아자따삿뚜가 사월 흰 연꽃이 피는 달의 제 십오일 포살일 만월의 보름날에 대신들에게 둘러싸여 아름다운 궁전의 상층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D2)”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단어가 ‘흰 연꽃’이다. 연꽃은 꽃과 열매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 때문에 사만냐팔라경에서 수행의 결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세에서 수행의 결실을 볼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경에서 현세에서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씀 하셨다. 열반은 죽어서나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실현 가능함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소멸이다. 사성제을 알고 팔정도를 실천하였을 때 괴로움이 소멸 될 뿐만 아니라 윤회 또한 종식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생에서 열반이 실현 가능함을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2013-06-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