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바즈라가르바(金剛藏菩薩)가 설법한 십지경(十地經)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16. 21:33

 

바즈라가르바(金剛藏菩薩)가 설법한 십지경(十地經)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십지경을 읽고 있다. 산스크리트원본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이제까지 한역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은 있었으나 산스크리트원전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은 최초이다. 사부니까야 뿐만 아니라 법구경, 숫따니빠따 등 쿳다까니까야의 일부 경전도 우리말로 옮긴 전재성박사의 십지경-오리지날화엄경은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십지경 서시(序詩)

 

십지경을 열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서시(序詩)이다. 현재 법정스님이 번역한 신역 화엄경에서 십지품에서는 없는 시이다. 시의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서시:송출자]

 

수승한 공덕의 열 가지 초월의 길은

이처럼 각각의 교의로 잘 시설되었고,

세상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일체지자에 의해 열 단계 지평이 설해졌으니,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는 버려지고

띠끌 없는 중도가 신설되었습니다.

이 열 단계 지평의 경(십지경)을 설법할 때에,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은 경청하십시요.

 

 

서시는 송출자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다. 경을 널리 유포하기 위하여 경을 편집한 사람의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서시에서 눈에 띈 것은 허무주와 영원주의, 그리고 중도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많이 보던 용어이다. 마치 깟짜나곳따경에서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S12:15)”라고 말씀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상시킨다.

 

또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S56:11)”의 문구를 떠 올리게 한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초기불교의 내용과 거리가 멀다. 초기불교에서 볼 수 없는 용어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십지경을 보면 열 가지 지평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열 가지 지평의 품을 설명하기 전에 열 단계 지평의 서가 있다. 일종의 머리말같은 것이다. 일종의 안내의 말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십지경을 설하게 된 배경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십지경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서장이라 볼 수 있는 열 단계 지평의 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서장에서 본 부처님은 빠알리니까야에서 접한 부처님과 달랐다. 십지경에서 부처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한 경전에서 부처님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십지경, 화엄경에서는 가능하다. 부처님이 한 마디 설법도 하지 않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아도 경전이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형식으로 부처님은 법을 설한 것일까?

 

브라흐마야짜나경(S6:1)을 모티브로 하여

 

서장을 보면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한 때 세존께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지, 멀지 않은 두 번째 주에 다른 신들이 만든 것을 누리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제왕 바샤바르띤의 궁전, 마니보주로 장엄되어 빛나는 궁전인 마니보장전 안에 많은 깨달음을 향한 님, 즉 보살의 무리와 더불어 계셨습니다.

 

(열 단계 지평의 서, 십지경, 전재성님역)

 

 

이 문장에 대한 주석에서 전재성박사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브라흐마야짜나경(S6:1,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에서 우루벨라마을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아자빨라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님의 독백 즉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S6:1)”를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주석은 법정스님의 신역화엄경에서 볼 수 없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언급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십지경을 읽어 나가면서 초기경과 비교해 가며 읽으라는 무언의 메시지로 보인다. 그래서 십지경을 읽을 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과 비교하였다. 그랬더니 십지경을 만든 작가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작가가 초기경전을 많이 참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십지경을 편찬한 작가는 초기경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진 상태에서 대승보살 사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경을 편찬한 것이라 보여 진다.

 

부처님은 왜 타화자재천에서 설하게 되었을까?

 

서장에 실려 있는 내용은 브라흐마야짜나경(S6:1)에서 가져 온 것이다. 단지 장소만 달리 하였을 뿐이다. 브라흐마야짜나경(S6:1)에서는 우루벨라마을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아자빨라 보리수 아래에서 브라흐마 사함빠띠와 대화를 나누지만, 십지경 편찬자는 바샤바르띤의 궁전, 즉 타화자재천으로 하였다.

 

타화자재천은 여섯 가지 욕계 천상 중에 최상천이다. 이곳에 사는 신들은 자신들의 지배아래 두기 위해 피조물을 창조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한역에서는 이 하늘나라 신들의 제왕 바샤바르띤을 자재천(自在天)’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십지경에서 부처님은 왜 타화자재천에서 설하게 되었을까?

 

십지경 편찬자가 타화자재천을 설법장소로 선정한 것에 대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십지경에 자재천이 부처님의 최초 설법장소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자재천은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어떤 자는 정신, 물질이 바로 자재천이라고 한다. 자재천 등이라 부르는 그들의 정신, 물질이 원일을 갖지 않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틀린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생겼다.”라는 문구가 있다.

 

5세기 붓다고사가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에서 말한 것이다. 정신-물질이 원인과 조건과 결과를 갖는 것임에도 배후에 원인 없이 성립하게 하는 자재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 하기 위해 언급한 내용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스스로 존재 한다는 의미의 자재천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십지경에서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지로서 타화자재천궁을 삼은 것은 인도불교에 있어서 시대상황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열 번째 지평에 도달하면 마헤스와라(대자재천왕)가 된다고?

 

인도에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 것이 기원을 전후 한 시기이다. 십지경은 AD50~150년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십지경 편찬자는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변형하였다고 보여진다. 부처님의 최초 설법지를 보리수 아래가 아닌 타화자재천궁으로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십지경 편찬자는 그 때 당시 브라만교에서 환골탈태한 힌두교의 사상을 받아 들인 흔적도 보인다. 자재천이라는 말이다. 더 결정적으로 열 단계의 경지인 빛구름 깨달음의 지평(법운지)’에서 마혜스와라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혜스와라는 무엇인가?

 

십지경 검색과정에서 안명희 교수(동국대 박사)의 논문을 발견하였다. ‘십지경 수행관의 고찰이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보살이 이 머물면 흔히 摩醯首羅天王이 되어 자재한 능력을 구족하고 여러 衆生 聲聞 僻支佛들에게 보살의 智波羅蜜 위시하여 여타의 波羅蜜行 잘 일러준다고 한다.

 

(안명희 교수, 십지경 수행관의 고찰)

 

십지경 수행관(十地經 修行觀)의 고찰(考察).docx

 

 

 

열 번째 단계 법운지(빛구름의 지평)은 최종 깨달음의 단계이다. 이 단계가 되면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논문에 따르면 법운지에 머물면 마혜수라천왕 (摩醯首羅天王)’이 된다고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깨달음의 긴 여정 끝에 힌두교에서 말하는 대자재천왕이 된다는 것이다.

 

마헤스와라(대자재천왕)는 시바(Siva)신이라는데

 

이 부분과 관련된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지내는 깨달음을 향한 님은 흔히 신들의 제왕 마헤스와라가 되며, 일체의 성문-연각-보살의 초월의 길을 교시하는데 밝고 위력이 있으며, 법계의 분석에 난해한 질문을 받더라도 패배 하는 일이 없습니다.

 

(X 빛구름의 지평, 십지경, 전재성님역)

 

 

최종 단계에서 보살은 신들의 제왕 마헤스와라가 되는 것이다. 마혜스와라는 한역으로 마혜수라천왕 (摩醯首羅天王)’이라 한다. 마헤스와라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Mahesvara: 한역의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 , 위대한 최상의 지배자란 뜻이다. 궁극적인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Akanittha deva: 색구경천)에 사는 신들의 제왕이다. 힌두교의 최고신 시바(Siva)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Mahesvara 주석, 전재성박사)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열 번째 단계의 깨달의 지평인 법운지에서 신들의 제왕인 대자재천왕(마혜스와라, 마헤수라천왕)이 된다는 것은 힌두교의 최고신인 시바(Siva)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 들여지기 때문이다.

 

성관자재와 시바신

 

관자재보살이 있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신봉하는 관세음보살을 말한다. 그런데 관자재보살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자재천을 말한다. 이는 삼장법사 대당서역기에서 그렇게 표현 되어 있다.

 

 

 

‧‧‧ 그런데 산밑의 주민으로서 모습을 보고자 기도드리면 觀自在菩薩 때로는 自在天 모습으로, 때로는 塗灰外道(도회외도)의 모습으로 되어 기원하는 사람을 위로하면서 성취시켜 주기도 한다.

 

(삼장법사, 대당서역기, http://blog.daum.net/bolee591/16154726 )

 

천수다라니의 인도신화학적 고찰.hwp

 

 

 

正覺(문상련, 東國大 佛敎學科)님의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에 대한 인도(印度) 신화학적(神話學的) 일고찰(一考察)’이라는 논문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대당서역기에 표현된 관세음보살은 자재천을 말한다. 그런데 논문에 따르면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śvara)라 불리우는 관자재는 자재천을 말하는데, 자재천은 범어로 이스바라(Īśvara)라고 하는데 시바(Śiva)와 같은 뜻이라 한다. 따라서 인도의 시바신앙이 불교에 전이 되어 천수다라니가 만들어 졌다고 본다.

 

천수다라니에서 성관자재를 찬탄하는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크나큰 자비(慈悲)의 성관자재 보살 마하살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관자재는 다름 아닌 시바신을 뜻한다고 논문에 쓰여 있다.

 

관자재보살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관자재보살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해서 중생구제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십지경에서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 여덟 번째 단계인 부동지(아니뮐의 지평)’가 그것이다. 전재성 박사의 십지경 아니뮐의 지평(8 부동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는 이와 같이 뭇삶들의 몸의 차별 즉, 피부색-특징-상태-새로 크기-가로 크기와 수승한 믿음과 고귀한 의향에 따라 그때그때의 불국토에 그때 그때 대중모임에 여실하게 자신의 몸을 나타냅니다. 그는 수행자의 회중에게는 수행자의 형상을 나타내고, 성직자의 회중에는 성직자의 형상을 나타내고, 왕족의 회중에는 왕족의 형상을 나타내고, 평민의 회중에는 평민의 형상을 나타내고

 

(VIII 아니뮐의 지평, 십지경, 전재성님역)

 

 

보살이 제8지에 들어 가면 중생이 좋아함에 따라서 몸을 나타내오 중생을 교화 한다는 말이다. 십종자재를 얻었기 때문에 종종 몸의 형상을 화현하여 삼계육도의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 천수다라니에서 “바라하 목카 싱하 목카야 사바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멧돼지 형상과 사자의 형상을 한 관자재를 찬탄하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십지경에서 제 8지를 성취하면 갖가지 모습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힌두교에서 비쉬누의 화신(아바타)①물고기(Matsya), ②거북이(Kurma), ③멧돼지(Varāha), ④인사자(人獅子:Narasiha) ⑤난쟁이(Vamana), ⑥영웅 빠라슈라마(Parashurama), ⑦라마(Ramā;Ramāchandra), ⑧ 목동의 신  끄리슈나(Kṛṣṇa), ⑨붓다(Buddha), ⑩ 예언자적인 구제자  깔낀(Kalkin)인것과 유사하다.

 

바즈라가르바(금강장보살)을 상수로 하여

 

앞서 부처님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십지경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십지경은 대승경전이다. 대승경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다지 부각 되지 않는다.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과거불중의 하나 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아예 존재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십지경에서는 단 한마디로 설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십지경은 누가 설한 것일까?

 

십지경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두 번째 주에 타화자재천궁에 계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자 수 많은 보살들이 모여 든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그들 보살들의 특징 중에 이 번 한 생까지만 해탈을 유보한 님이라는 말이 눈에 띤다. 이는 다음 생에서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지위를 말한다.

 

이처럼 부처가 되기 전단계에 이른 수 많은 보살들이 수 많은 국토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하여 모여 들었다. 깨달은 자로부터 설법을 들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직전에 이른 수 많은 보살 중에서도 경에서는 39명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이들 보살의 이름을 모두 풀어 썼다. 예를 들어 금강보살마하살의 경우 금강을 잉태한 깨달음을 향한 위대한 님이라는 식이다.

 

 

 

藏菩

 

 

 

십지경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렇게 한량 없는 국토에서 한량 없는 보살들이 모여 들었을 때 누군가 사회를 보야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모두 다른 국토에서 와서 모였는데, 깨달음을 향한 님인 금강을 잉태한 님 바즈라가르바를 상수로 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바즈라가르바(금강장보살)’을 사회자로 뽑은 것이다.

 

십지경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닌 것 같다. 십지경에서 주인공은 바즈라가르바(금강장보살)’라고 본다. 사회자로 선정되어 마이크를 든 모습 같은 것이다. 왜 그럴까? 십지경에 언급되어 있는 부처님의 설법은 모두 바즈라가르바(금강장보살)’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깨달음을 향한 님 바즈라가르바는 이때에 부처님들의 부사의한 힘에 의해서 크나큰 지혜의 빛의 삼매, 대지혜광명삼매라는 깨달음을 향한 님의 삼매에 들었습니다.

 

(II 열단계 지평의 서, 십지경, 전재성님역)

 

 

사회자 역할의 바즈라가르바가 삼매에 든 것이다. 부처님들의 부사의한 힘에 의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부처님들이다. 복수로 되어 있다. 이는 한 분이 아니라 여러 명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 부사의한 힘이라고 하였다. 부처님들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서, 바즈라가르바가 불가항력으로 삼매에 든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삼매는 대지혜광명삼매라 한다. 그런 삼매는 어떤 것일까?

 

대지혜광명삼매(大智慧光明三昧)에 들자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삼매에 들자마자 십억불국토에 있는 여래들이 존안을 드러내었다고 한다. 삼매속에서 셀 수 없는 부처님들을 친견한 것이다. 그리고 존귀한 부처님들이 바즈라가르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의 존귀한 부처님들]

 

존자여, 승리자의 아들이여, 이처럼 대지혜광명삼매라느 깨달음을 향한 님의 삼매에 들었으니 훌륭하다. 훌륭하다.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여, 또한 시방에서 십억 불국토에 있는 극미진의 숫자와 동일한 세계의 저쪽으로부터 십억 불국토에 있는 극미진의 숫자와 동일한, 바즈라가르바라고 하는 동명의 여래들이 세존이신 바이로짜나에서 비롯된 본래의 서원의 부사의한 가피와 고유한 공덕으로 그대에게 생겨난 앎으로 인해서 그대를 가호해 주었다.

 

(II 열단계 지평의 서, 십지경, 전재성님역)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삼매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들로부터 들은 목소리이다. 그런데 바이로짜나(Vairocana)’라는 말이 나온다. 경에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바이로짜나는 누구일까?

 

바이로짜나(Vairocana)는 누구인가?

 

주석에 따르면, 바이로짜나는 한역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한다. 약칭해서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 한다. 원래는 태양의 광조를 뜻하고, 광대무변한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따라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이로짜나를 진리의 몸이라 한다. 또 법신불(法身佛)이라 한다.

 

주석에 따르면 바이로짜나는 무량겁해의 공덕을 닦아 정각을 성취하여 화엄경의 연화장세계의 주()님이 된 부처님이라 한다. 이렇게 주석에서는 바이로짜나에 대하여 ()이라 하였다. 마치 기독교의 주님, 하나님을 연상하게 해 준다.

 

태양의 광조(光照)를 뜻하는 바이로짜나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에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S22:95)”라 하였는데, 이때 태양의 후예가 빠알리어로 아딧짜반두(ādiccabandhu)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부처님은 바이로짜나의 화신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이로짜나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진 경도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한낮에 계시는 처소로 홀로 명상에 드셨다. 그때 신들의 제왕 제석천과 아수라의 제왕 베로짜나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각각 문기둥에 기대어섰다.

 

그리고 아수라의 제왕 베로짜나가 세존의 앞에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베로짜나]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

사람들은 노력해야 하리.

목표는 완성을 통해 빛나니

이것이야말로 베로짜나의 말이네.”

 

[제석천]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

사람들은 노력해야 하리.

목표는 완성을 통해 빛나니

인내보다 나은 것은 없다네.”

 

[베로짜나]

모든 존재는 가치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목표로 향하니

모든 살아 있는 존재 가운데

결합이야말로 최상의 향락이라

목표는 완성을 통해 빛나니

이것이 베로짜나의 말이네.”

 

[제석천]

모든 존재는 가치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목표로 향하니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결합이야말로 최상의 향락이지만

목표는 완성을 통해 빛나니

인내보다 나은 것은 없다네.

 

(웨로짜나나 아수린다경-Verocanaasurindasutta-아수라의 제왕 베로짜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8, 전재성님역)

 

 

신들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제석천과 아수라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베로짜나가 부처님을 뵈로 찾아 왔다. 그러나 부처님은 명상에 들어 있었다. 그러자 둘이서 기둥에 기대어 한 말이다.

 

여기서 베로짜나(verocana)는 십지경 각주에 따르면 바이로짜나(Vairocana)와 같은 이름이라 한다.  그런데 초기경에서는 베로짜나가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아수라의 제왕이라는 이미지도 있지만 게송에서 “결합이야말로 최상의 향락이라이라고 말한 대목 때문이다. 결합이라는 것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세속적인 쾌락에 대한 결합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결합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남녀간에 성적인 접촉으로 보고 있다.

 

바이로짜나와 같은 말인 베로짜나가 상윳따니까야에 등장한 것은 부처님 당시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 가면서 대승불교가 흥기 할 즈음에 베로짜나라는 말은 진리의 몸, 즉 법신(法身)이라는 바이로짜나라는 말로 변한 것 같다. 그래서 게송에서 결합이야말로 최상의 향락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삼매 상태에서 바이로짜나와 일체가 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라고 후대에 생각하지 않았을까.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삼매에서 배운 것은

 

십지경에서  바이로짜나에서 비롯된 본래의 서원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서원은 본원(本願)을 말한다. 본원은 한 부처님에게서 다른 자에게로 전해진 서원으로 모두 뭇삶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말한다.

 

이처럼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삼매의 상태에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본원에 대한 것이다. 부처가 되어서 중생구제를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부처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법을 해준다. 그리고 가호해주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바즈라가르바(금강장)는 삼매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다면 바즈라가르바(금강장)는 어떻게 하여 삼매에서 깨어 났을까?

 

사회자로 뽑힌 바즈라가르바(금강장)는 자신이 원해서 삼매에 들어 간 것이 아니다. 부사의한 부처님들의 힘에 의해서 삼매에 들어 갔다. 그리고 삼매에 들어가 부처가 되기 위한 여러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 삼매에서 깨어날 때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그들 세상의 존귀하신 부처님들로부터 정수리의 어루만짐을 받자 곧바로 삼매에서 나와서라고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삼매 속에서 부처가 되는 방법,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알게 된 바즈라가르바(금강장)는 모여 있는 보살들에게 자신이 들은 바를 전한다. 핵심내용은 열 가지 지평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대중보살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즈라가르바]

 

열단계 지평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곧,

첫째는 큰 기쁨(歡喜)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둘째는 때여읨(離垢)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셋째는 새벽빛(發光)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넷째는 불꽃놀이(焰慧)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다섯째는 드높음(難勝)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여섯째는 꿰뚫음(現前)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일곱째는 온거님(遠行)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여덟째는 아니뮐(不動)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아홉째는 한슬기(善慧)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열번째는 빛구름(法雲)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입니다.

 

(II 열단계 지평의 서, 십지경, 전재성님역)

 

 

그런데 바즈라가르바(금강장)는 열 가지 지평에 대하여 명칭만 말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침묵한 것이다.

 

비묵띠짠드라(해탈월보살)가 청원하고

 

그러자 모여 있던 수 많은 대중보살들은 궁금해 하였다. 그래서 대표로 비묵띠짠드라(해탈월보살)이 게송으로 묻는다. 그 중 하나의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묵띠짠드라]

 

이러한 모든 승리자의 아들들은

두려움 없이 듣고자 하오니

그 지평선들에 대한 의취를

올바로 분별하여 가르쳐 주소서.

 

(II 열단계 지평의 서, 십지경, 전재성님역)

 

 

이 게송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브리흐마야짜나경(S6:1,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에서 브라흐마 사함빠띠가 말한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 캐러밴의 지도자여, 허물없는 님이여,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 (S6:1)라는 구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역할을 하는 바즈라가르바(금강장)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십지경의 편집자는 상윳따니까야 브리흐마야짜나경(S6:1)을 참고하였음에 틀림 없다. 이는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즈라가르바]

 

미세하고 보기 어렵고 사유를 여의고

마음의 바탕을 떠나 접근하기 어렵네.

슬기로운 자들의 경계는 번뇌를 여의어

세상사람들이 들으면 미혹할 것입니다.

.

.

허공에 그려진 채색화와 같고

새의 길에 의지하는 바람과 같으니,

세존의 번뇌를 여읜 지혜는

분별하더라도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한 나에게 이러한 생각이 일어났으니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이것을 아는 자와

이 최상의 것을 믿는 자를 얻기 어렵다.’

그래서 설명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II 열단계 지평의 서, 십지경, 전재성님역)

 

 

이 게송을 보면 브리흐마야짜나경(S6:1,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신 말씀과 너무나 유사하다. 상윳따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S6:1)”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마치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이처럼 대중보살을 대표하여 비묵띠짠드라(해탈월보살)이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한다. 그것도 목마른 자가 냉수를 배고픈 자가 음식을, 병든 자가 양약을 꿀벌의 무리가 꿀을 원하듯, 이 모임은 당신의 말씀을 득기를 원합니다.”라고 거듭 간청한다.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십지경이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청원경을 모티브로 만들어 진것도 놀랍지만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부처님과 사함빠띠의 대화를 그대로 활용하여 단지 이름만 바꾸어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부처님의 역할을 맡고, 비묵띠짠드라(해탈월)이 사함빠띠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마치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부처님이나 되는 듯이 설법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십지경을 보면 놀라움의 연속이다. 그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주인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어야 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경에서의 주인공은 바즈라가르바(금강장)이다. 일종의 사회자 역할을 하는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대중보살에게 설법하는 것이 십지경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은 십지경에서 어떤 역할일까?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닫고 난 후 두 번째 주에 타화자재천 궁에 가서 설법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십지경을 보면 입도 뻥긋 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십지경에서의 부처님은 마치 뻘쭘하게 서 있는 듯하고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보인다.

 

과연 십지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또 화엄경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였다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는 것일까? 아마 맞을 지도 모른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설법한 것이라면 맞을지 모른다. 모든 국토의 모든 부처님이 바즈라가르바(금강장)에게 십지의 가르침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대중 보살을 향하여 십지의 가르침을 설하려고 한다. 그때 우리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할은 딱 한 번

 

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역할이 딱 한 번 나온다. 경에서 한 마디도 한 것이 없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자 그때 샤키야무니 세존의 미간의 백호에서 깨달음의 힘에서 나오는 빛줄기, 보살력광이라는 이름의 광명, 헤아릴 수 없는 아승지 광선의 다발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II 열단계 지평의 서, 십지경, 전재성님역)

 

 

이것이 우리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이 십지경에서 유일하게 한 일이다. 미간에서 백호광명을 내 보낸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도 샤키야무니라고 샤키야 족 출신의 부처님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할은 끝났다. 열 가지 깨달음 지평에 대한 설법은 모두 바즈라가르바(금강장)가 하기 때문이다.

 

역할을 비교해 보면

 

흔히 화엄사상을 대승불교의 꽃이라 한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교학으로서는 마지막 단계에서 배우는 매우 심오한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에서도 대교과라 하여 4학년 때 배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십지경으로 접한 화엄경은 역사적인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승불교 논사가 초기경전을 보고서 만들어낸 창작으로 본다. 그 증거로서 브리흐마야짜나경(S6:1,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을 각색한 것이다.

 

십지경 편찬자는 대승보살사상을 선양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편집한 것으로 본다. 특히 브리흐마야짜나경(S6:1,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에서 역할에 대한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브리흐마야짜나경(S6:1)

십지경

경전

초기경전

대승경전

설법장소

우루벨라마을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아자빨라 보리수 아래

신들의 하늘나라의 제왕 바샤바르띤의 궁전 (타화자재천궁)

청중

없음

수 많은 국토의 수 많은 보살

설법자

석가모니 부처님

바즈라가르바(금강장)

청원자

브라흐마 사함빠띠

보살 비묵띠짠드라(해탈월)

깨달음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음

바즈라가르바가 삼매 상태에서 허공속의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들음

 

 

표를 보면 매우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청원자가 브라흐마 사함빠띠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의 성립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다. 그런 것 중 하나로서 브라만교를 비판 한 것을 들 수 있다. 브라만교는 부처님 당시 기성종교로서 그리고 기득권 종교로서 영원주의를 대표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영원주의를 논파하였다. 영원주의는 있을 수 없는 거짓임을 밝혀 낸 것이다. 이런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 온 이가 바로 브라흐마 사함빠띠이다. 영원주의로 대표되는 브라흐마(Brahma, 범천, 하느님)가 법을 설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흐마(범천)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제의의 대상이 되는 최고의 숭배자이었다. 그런 브라흐마가 불사(不死)의 문을 열어젖히소서!(S6:1)”라고 애걸하듯이 간청하였다. 이는 브라흐마(하느님)일지라도 다시 태어날 수밖고 윤회 할 수밖에 없는 범부중생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불사의 진리를 설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그러나 십지경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부처님이 설법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법자는 보살로 되어 있다. 그것도 삼매의 상태에서 허공속의 무수한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열 가지 지평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청원자도 보살로 되어 있다. 보살 대중의 대표가 청원하고, 허공속의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보살이 설법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다시 옛날로 되돌아 간듯한 느낌이다.

 

무대 조명장치 같은 역할의 석가모니 부처님

 

십지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할은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긴 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도 뻥긋 하지 않는 역할이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십지경에서 한 역할은 무엇일까?

 

십지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미간에서 백호광명을 내 비추는 일을 하고 있다. 모든 부처님들의 특징이 그러하지만 십지경에서 특별히 샤키야무니 세존이라고 한 것을 보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장 큰 일이 광명을 내 뿜는 일처럼 보여진다.

 

그런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지만 특히 하이라이트 되는 곳이 있다. 십지경의 주인공이자 설법자 역할의 바즈라가르바(금강장)이다. 한 생만 지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수 많은 보살들이 고대 하는 설법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은 자연스럽게  바즈라가르바를 하이라이트 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 모든 여래의 중증무진한 회중의 설법을 가호하는 모든 깨달음을 향한 님을 비추고 나서, 부처님들의 불가사의한 신통변화를 나타내고, 높은 허공 가운데 광대한 빛구름그물의 누각, 대광명운망대(大光明雲網臺)를 만들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십지경에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역할로 나온다. 그러나 대중을 위하여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중보살들이 바즈라가르바의 설법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마치 무대의 조명장치처럼 대광명운망대(大光明雲網臺) , ‘빽빽한 광명의 구름의 그물과 같은 큰 누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래서 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미간백호광명에 대하여 “바즈라가르바의 자태가 명료하게추어져 나타났습니다.”라고 하였다. 모든 대중이 이제 설법을 시작하게 될 바즈라가르바(금강장보살)에게 눈과 귀가 집중 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신력 있는 허공의 부처님 목소리

 

이렇게 바즈라가르바(금강장)의 설법 준비가 끝나자 삼매상태에서 바즈라가르바에게 가르침을 전한 부처님의 위신력 있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경에서는 부처님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허공속의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목소리]

 

.

.

티끌없는 열 단계 지평을

점차적으로 가득 채우고

열 가지 힘을 얻어서

승리자의 지위를 이룰 것이다.

 

크나큰 바다의 물에 잠기고

겁화(刧火)의 불에 떨어져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이 법문을 듣는 것,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신에 잡히고

의심을 더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결코

그것을 들을 수가 없다.

 

수승한 지평의 앎과 길과

깨우쳐 들어감과 지냄과 나아감과

실천행과 경계에 대하여

차제에 따라 설하라.

 

 

 

십지경의 주인공 바즈라가르바(금강장)

 

이에 대하여 바즈라가르바(금강장)는 시방을 둘러보고 더욱 더 이 회중이 청정한 믿음을 내도록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바즈라가르바]

 

미묘하고 알기 어려운, 위대한 선인들의 길은

분별을 넘어서 분별을 여의어, 닿기조차 지극히 어려우니,

혼탁을 여의어 현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

자성이 청정하여, 실로 생멸이 없는 것입니다.

 

.

.

 

그 활동경계는 실로 보기 어렵고 설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향에 의존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승리자의 위력에 힘입어 설하고자 합니다.

함께 하는, 모든 존경하는 님들이여, 들의십시요.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십지경에서 주인공은 바즈라가르바(금강장)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 삼매에서 허공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바즈라가르바가 법을 설한 것이다. 그것이 열 가지 단계 지평의 가르침이라 한다.

 

주연 바즈라가르바, 조연 석가모니 부처님

 

십지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하나의 조연에 불과 하다. 그리고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진다. 서장에 잠시 출연시킨 단역 조연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단역이고 더구나 주연을 위하여 조명을 비추는 역할로 보여진다.

 

우리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이 십지경에서, 대승경전에서 이렇게 묘사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어느 선사는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나 보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
佛敎]라는 宗敎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즉,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산중승님)

 

 

 

2013-06-16

진흙속의연꽃

 

천수다라니의 인도신화학적 고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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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지경 수행관(十地經 修行觀)의 고찰(考察).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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