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갈대의 열매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27. 12:24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갈대의 열매

 

 

 

미디어붓다에 동영상법문이 실려 있다. 법문에서 어느 스님은 초보불자에게 가장 좋은 책이 법구경이라 하였다. 그래서 법보시용으로 법구경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법정스님의 진리의 말씀을 예로 들었다.

 

여러 종류의 법구경이 있다. 한역법구경도 있고 빠알리역 법구경도 있다. 스님이 번역한 것도 학자가 번역한 것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법구경만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전통적인 빠알리 주석서를 참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소개 되어 있는 법구경은 대부분 일역과 영역을 중역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원음이 정확히 전달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원역의 틀을 벗어 나지 못하기 때문에 번역이 경직 될 수밖에 없다. 또 한편 과도한 의역과 주석적 번역으로 인하여 원뜻을 크게 훼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마음이 심란할 때 법구경을 열어 본다. 아무 곳이나 열어 보아도 게송 몇 개만 읽으면 마음이 가라 앉는다. 이것이 법구경의 매력이다. 법구경에 쓰여 있는 말이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런 진리의 말씀은 항상 열반으로 귀결된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o sāsana arahata             요 사사낭 아라한땅

ariyāna dhammajīvina          아리야낭 담마지위낭

paikkosati dummedho              빠띡꼬사띠 둠메도

diṭṭhi nissāya pāpika         딧팅 닛사야 빠삐깡

phalāni kaṭṭhakasseva             팔라니 깟타깟세와

attaghātāy phallati.             앗따가따이 팔라띠.

 

거룩한 님, 고귀한 님,

여법한 삶을 사는 님의 가르침을

지혜롭지 못한 자는

악한 견해에 의지해 방해한다.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갈대의 열매와 같이. (Dhp 164, 전재성님역)

 

 

 

 

갈대열매(Reed Fruit)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갈대의 열매와 같다.(phalāni kaṭṭhakasseva attaghātāy phallati)”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열매가 맺으면 죽는 식물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대나무와 바나나와 갈대라 한다. 갈대가 열매를 맺으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혜롭지 못한 자의 사견은 갈대와 같다는 것이다. 갈대는 열매가 맺으면 죽듯이 어리석은 자의 삿된 견해는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것이라 한다.

 

깟타까(kaṭṭhaka) 갈대인가 대나무인가

 

빠알리 게송에서 갈대에 해당되는 말이 깟타까(kaṭṭhaka)’이다. 전재성박사의 빠알리-한글 사전에 따르면 kaṭṭhaka는 갈대의 일종으로 표기 되어 있다. 그리고 빠알리-한문사전에 따르면 kaṭṭhaka mn[kaṭṭha-ka] 蘆葦라고 표기 되어 있다.

 

葦는 갈대 위자이다. 깟타까가 갈대임을 말한다. 蘆葦(노위)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1~3미터 정도로 높이 자라고 줄기는 곧고 속은 비었으며 잎은 긴 피침형이다. 가을에 솜털이 많은 옅은 잿빛 꽃이 핀다. 줄기는 발, 삿자리 따위를 엮는 데 쓰고, 뿌리는 약으로 쓴다. 습지나 물가의 모래땅에서 자라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온대 지방과 한대 지방에 분포한다. 학명은 Phragmites communis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루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깟타까(kaṭṭhaka)는 갈대임이 틀림 없다. 그러나 거해스님역에는 마치 대나무가 열매를 맺고 스스로 죽어 버리듯.(Dhp164)”라고 되어 있어서 대나무라고 표현 하고 있다. 석지현스님역 역시 열매를 맺으면 곧 죽어버리는 저 대나무처럼. (Dhp164)”라고 되어 있어서 대나무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영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TIPITAKA 사이트에 실려 있는 영문에 that fool, like the bamboo, produces fruits only for self destruction. (Dhp164)”로 되어 있어서 대나무(bamboo)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역(誤譯)이다. 깟타까(kaṭṭhaka)는 대나무가 아니라 갈대이기 때문이다.

 

 

 

대나무열매(Bamboo fruit)

 

 

 

일역을 중역하였을 때

 

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는 우리나라 번역자들이 빠알리 원전에 의존하지 않고 영어 번역을 중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나무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도 있다. 법정스님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성자의 가르침을

좁은 생각으로 비난하는 바보들은

열매가 여물면 저절로 말라 죽는

카타카 풀 처럼 스스로 파멸 한다. (Dhp164, 법정스님역)

 

 

법정스님역을 보면 깟타까(kaṭṭhaka)에 대하여 ‘카타카 풀’이라 하였다. 대나무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이다. 원뜻을 훼손하지 않고 빠알리어 그대로 표현하였지만 ‘카타카 풀’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 궁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정스님은 어떻게 하여 빠알리 ‘카타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법정스님의 숫타니파타가 있다. 이 책은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의 책을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까무라 하지메의 법구경을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검색결과 ブッダの理のことば感興のことば는 제목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岩波書店 에서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붓다의 진리의 말-감흥의 말이 된다. 법정스님의 법구경 진리의 말씀과 유사한 제목이다. 164번 게송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愚かにも、い見解にもとづいて、

理にって生きる聖者たちのえを罵るならば、

その人はい報いが熟する。

カッタカという草は果が熟すると自分自身が滅びてしまうように。

(Dhp164,  中村元著)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역을 우리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어리석게도 나쁜 견해에 사로잡혀

진리에 따라 사는 진인-성자들의 가르침을 모독하면

그 사람은 악한 과보가 익는다.

캇타까라는 풀처럼 과실이 익으면 자기스스로 멸해 버리는 것과 같다.

 

 

법정스님은 어리석은 자들을 바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빠알리 원어는 물론 일역에도 바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어 愚かにも  바보가 아니라 어리석게도라고 번역 되므로 바보라고 한 것은 과도한 의역이라 본다.

 

다음으로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보면 カッタカという草は (캇타까라는 풀은)이라 하였다. 이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 법정스님역 카타카 풀 처럼이 된다. 일역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놓은 것이다.

 

여인에게 미묘법을 설하지 마소서

 

게송 164번에서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는 인연담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전재성박사의 법구경-담마파다에도 인연담이 있다. 인연담에 실려 있는 법구경은 거해스님의 법구경정도이다.

 

전통적인 빠알리 주석서를 참고한 전재성박사의 법구경-담마파다인연담은 어떤 것일까? 164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여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것을 보고 장로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저 어리석은 여인은 부처님의 미묘한 가르침을 알지 못합니다. 그녀에게 존재의 다발(오온) 등의 미묘한 가르침을 설하지 마시고 보시의 이야기와 지계의 이야기를 해 주십시요.’라고 말했다.

 

(Dhp 164  인연담, 전재성박사)

 

 

장로를 따르는 재가여자신도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 여인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와서 감탄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여인은 장로에게 부처님의 설법이 듣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로는 허락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틀림 없이 그 쪽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인은 부처님의 설법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하는 곳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러자 뒤쫒아 온 장로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 어리석은 여인은 부처님의 미묘한 가르침을 알지 못합니다. 그녀에게 존재의 다발(오온) 등의 미묘한 가르침을 설하지 마시고 보시의 이야기와 지계의 이야기를 해 주십시요.”라고 말한 것이다.

 

절에 10, 20, 30년을 다녔어도

 

이제까지 장로는 여인에게 오로지 보시공덕과 지계하는 것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오온 등 미묘한 설법을 들으면 자신을 찾지 않게 될 것이라는 증오의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모두 설하라는 말과 같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 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하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장로는 오로지 보시공덕만 강조 하였을 뿐 오온과 같은 미묘법을 설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지금도 사찰에서는 열심히 기도하십시요라고 말하고 법문에서는 보시공덕을 강조한다. 절에 10, 20, 30년을 다녔어도 부처님의 미묘법을 들어 볼 수 없는 것이다.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한 재가불자

 

법구경 인연담과 같이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에게도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과 같이 미묘법을 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시공덕만 강조하고 지계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초보적인 가르침과 함께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사성제 등 출세간적 가르침도 펼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는 왜 오온과 같은 미묘법을 설하지 않는 것일까? 첫째로, 한국불교가 대승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승법을 설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둘째로, 스님들이 근본불교의 가르침을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몰라서 설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의 요인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불자들은 초기불교를 접하면 두 번 다시 이전의 가르침을 돌아 보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기도와 보시만 강조하는 불교와 전혀 다른 가르침을 접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연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여인은 장로의 가르침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게 되었다.

 

인연담에서 질투와 사견에 사로 잡힌 장로의 어리석은 행위를 갈대의 열매와 같은 것으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여, 그대가 사악한 견해에 의존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매도하고 자신을 파멸시키려한다.’라고 말씀 하셨다.

 

이어서 부처님은 거룩한 님, 고귀한 님, 여법한 삶을 사는 님의 가르침을 지혜롭지 못한 자는 악한 견해에 의지해 방해한다.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갈대의 열매와 같다.(Dhp164)”라고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여인은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하였다고 한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성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암노새가 수태하면

 

법구경 게송164번과 유사한 내용이 상윳따니까야에 보인다. 17상윳따 이득과 명예의 모음(Lābhasakkāra Sayutta, S17)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한때 세존께서 데바닷따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라자가하에 있는 깃자꾸따 산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데바닷따에 관하여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데바닷따가 가진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파멸시키고, 데바닷따가 가진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쇠망하게 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파초가 열매를 맺으면 자멸하고 파초가 열매를 맺으면 쇠망하듯이, 수행승들이여, 데바닷따에게 생겨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파멸시키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쇠망하게 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자멸하고 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쇠망하듯이, 수행승들이여, 데바닷따에게 생겨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파멸시키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쇠망하게 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갈대가 열매를 맺으면 자멸하고 갈대가 열매를 맺으면 쇠망하듯이, 수행승들이여, 데바닷따에게 생겨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파멸시키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쇠망하게 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암노새가 수태하면 자멸하고 암노새가 수태하면 쇠망하듯이, 수행승들이여, 데바닷따에게 생겨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파멸시키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쇠망하게 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득과 명예와 칭송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멍에를 여윈 위없는 안온을 얻는 데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우리는 이미 생겨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버릴 것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지내겠다.’라고 배워야 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Phala ve kadali hanti phala

veu phala naa,
Sakkāro kāpurisa
hanti

gabbho assatari yathā'ti.

 

[세존]

 파초와 대나무와 갈대는

자신의 열매가 자신을 죽이네.

수태가 노새를 죽이듯,

명성이 악인을 죽이네.”

 

(앗따와다경-Attavadhasutta-자멸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35,전재성님역)

 

 

 

 

파초열매(Plantain fruit)

 

 

 

자멸의 경에서는 파초(kadali), 대나무(veu), 갈대(naa), 암노새(assatari)이렇게 네 가지의 예를 들었다. 파초, 대나무, 갈대는 열매를 맺으면 죽는 식물이다. 그리고 암노새는 임신으로 죽는다고 한다. 악행을 저지르는 어리석은 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악행을 저지르면 그 과보로 인하여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빅쿠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도 열매를 맺으면 죽는 식물, 그리고 임신하면 죽는 노새와 같은 것으로 비유하였다.

 

경에서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대한 빠알리어는 랍바삭까라실로까(lābhasakkārasiloka)’이다. 이는 Lābha(이득)sakkāra(존경, 환대, 숭배)siloka(명성)의 복합어이다. 빅쿠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였을 때 어떤 결과를 보여 줄 것인가는 이득과 명예의 모음(Lābhasakkāra Sayutta, S17)에 실려 있는 수 많은 경에서 상세하게 설해져 있다.

 

사업승, 예능승, 정치승

 

스님들은 왜 출가하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십인십색처럼 이유가 다양하다. 그런데 어떤 출가승의 행태를 보면 세속의 범부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마치 사업을 하듯이 돈벌이에 열중하는 스님도 있다. 회사를 만들고 대표이사로 취임하기도 한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하여 재개발사업, 임대사업에 뛰어 들기도 한다. 그러다 사기를 당하여 엄청난 손실로 절이 파산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모두 신도들이 낸 시줏돈으로 한 것이다. 이른바 사업승을 말한다.

 

노래를 잘하는 스님이 있다. 그래서 산사음악회에서도 볼 수 있고 TV에서도 볼 수 있다. 음반을 몇 개 내어서 가수스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스님도 있고, 춤도 잘 추는 스님도 있고, 음식을 잘 만드는 스님도 있다. 세속인들이나 하는 일을 스님들도 하는 것이다. 그런 스님들은 인기가 좋아 신도들이 잘 따른다. 이름을 붙이자면 예능승이라 할 수 있다.

 

선거때만 되면 감투에 올인하는 스님들도 있다. 종회, 총무원 등 불교의 권력기관을 말한다. 그리고 목 좋은 사찰의 주지가 되기 위하여 천문학적인 선거자금을 쓰기도 한다. 고위직을 차지 하기 위하여 이전투구를 벌이는 정치승의 모습이 세속에서 정치판 못지 않다.

 

부처님은 비구들이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면 파멸에 이를 것이라 경고 하였다. 신도들에게는 기도만 강요하고보시에 대한 법문만 하면서 돈벌이이 몰두 하는 사업승, 신도들에게 오온과 같은 미묘법을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는 노래나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예능승, 그리고 오로지 승가의 이익과 문중의 이익만을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위직에 진출하려는 정치승, 이런 스님들이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갈대의 열매

 

 법구경 164번 게송에서는 갈대의 열매 비유를 들었다. 그리고 상윳따니까야에서는 파초, 대나무, 갈대, 암노새의 예를 들었다. 누구든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혜롭지 못한 자는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갈대의 열매와 같다.(Dhp 164)”라고 하였다.

 

 

 

 

2013-06-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