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이다!” 불교의 행복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19. 12:34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이다!” 불교의 행복론

 

 

 

현실의 삶을 살아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불교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다. 먹고 살아야 하기에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갖가지 사건이 일어남에 따라 이를 해결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버린다. 이런 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반복 된다. 그러다 보니 한달이 금새 지나가 버리고 계절이 바뀐다. 그래서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초전법륜경을 외우고 있는데

 

9일간의 중국 실크로드 여행에서 초전법륜경을 외웠다. 모두 외운 것이 아니고 반절 외웠다. 여행지에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아침 나절에 시간이 많이 남기 때문에 그 시간을 이용하여 호텔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외운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초전법륜경 후반부를 외지 못하고 있다.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여행지에서와 같이 한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재가자가 생활속에서 불교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다.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큰 발심을 하지 않는 한 매우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왜 공부하기 위하여 동굴이 생겨 났는지 이해할 만 한다. 돈황의 막고굴이나 투루판의 천불동에 가보면 크고 작은 수 많은 동굴이 있는데, 이런 동굴이 생겨난 것 자체가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라 보여 진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

 

여행지에서 외운 초전법륜경 전반부에 이런 말이 있다.

 

 

요짜양 까메수

까마수칼리까누요고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Yocayā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hito  (S56:11)

 

 

 이 빠알리어에 대한 번역은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S56:11)”라고 되어 있다. 고락중도에 있어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것이다.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그런데 빠알리 문구 중에 까마수칼리까누요고(kāmasukhallikānuyogo)’라는 말에서 걸렸다.까마(Kāma)욕구, 갈망, 애욕, 성적인 쾌락을 뜻 하는 말인데, 거기에다 수칼리까누요고(sukhallikānuyogo)’가 붙어서 복합어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수칼리까누요고는 무슨 뜻일까?

 

빠알리-한글사전에 대하여

 

빠알리중에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빠알리 사전 사이트(http://www.palidictionary.appspot.com/  ) 을 찾아 보았다. 그래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빠알리 문장을 외울 때 뜻을 알고 외우면 훨씬 잘 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세달 전 사이트가 개편 되고 나서 먹통이 되었다. 단어를 입력하여 검색하여도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다시 예전처럼 검색하면 곧바로 나오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다.

 

빠알리 사전 사이트가 작동이 되지 않으니 가지고 있는 빠알리사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전재성박사가 펴낸 빠알리-한글사전 개정판이다. 빠알리 사전 사이트와 달리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상세하게 우리말로 되어 있는 빠알리-한글사전은 전재성박사의 것이 최초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빠알리 니까야를 번역한 어느 스님은 카페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기 때문이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물론 빠알리는 독학할 수 있습니다.

책으로는 세계적으로 빠알리 공부의 입문서로 잘 알려진 붓다닷따 스님이 지은 First Course of Pali 라는 책이 제일 좋습니다. 스리랑카의 유명한 학승이셨던 붓다닷따 스님께서 1920년대에 지은 책인데 지금도 입문서로 널리 공부되고 있습니다. 저도 1988년에 이 책으로 한국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현음 스님의 지도로 10여분이 모여서 그룹스타디를 한 것이 빠알리 공부의 시작이었습니다. 특히 매 단원별로 그 단원에 관계된 빠알리 문법을 바탕으로 독해문제풀이를 중점으로 된 책이기 때문에 혼자서 뒤에 나와있는 글로서리를 통해서 해석하면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도수 거사님이 한국어로 빠알리 초급과 중급에 해당하는 책을 두 권 내었습니다. 이것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www.yosiamun.com으로 가셔서 백도수 저자로 검색해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구입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지만 어학 공부는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빠알리는 문법도 그리 까다롭지 않고 특히 한국말과 어순이나 문법이 유사하기 때문에 쉽게 배울수 있습니다. 집중적으로 한다면 사실 문법은 두어시간으로 요약해서 정리하고 바로 경전의 문장을 독해하면서 공부하면 쉽게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 빠알리어라고 저는 봅니다. 문제는 배우는 사람의 진지함이겠지요.

그리고 사전은 PTS에서 출판한 Pali-English Dictionary가 제일 좋습니다. 한글로 나온 사전도 있는데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PTS사전은 인터넷에서도 찾아볼수 있어서 좋습니다. 초불까페의 <초기불전 연구원 소식> 게시판에 들어가시면 유용한 웹사이트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빠알리는 조금만 노력하면 배울 수 있고 특히 장기적으로 볼때 초기경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부해야한다고 봅니다. 너무 급한 마음을 내지마시고 서서히 한걸음한걸음 내디디시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몇 년 지나고 보면 초기 가르침에 많이 눈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도하시고 노력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http://cafe.daum.net/chobul/1ApY/500  )

 

 

스님이 작성한 글에 따르면 빠알리 사전은 PTS에서 출판한 Pali-English Dictionary가 제일 좋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영문이다. 물론 영어로 통하는 시대에 영어로 표현된 것이 더 뜻이 와 닿을 수 있다.

 

우리말로 된 것이 있다면 후학에게는 더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한글로 나온 사전도 있는데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내치고 있다. 한글로 나온 것이라면 대표적으로 전재성박사가 편저한 빠알리-한글사전일 것이다. 전재성박사의 빠알리-한글사전이 권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형편 없는 것일까?

 

까마수칼리까누요고(kāmasukhallikānuyogo)

 

빠알리 사전 사이트가 작동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전재성박사의 빠알리-한글사전을 뒤적거리지 않을 수 없다. 초전법륜경 고락중도 부분에 실려 있는 수칼리까누요고(sukhallikānuyogo)를 찾아 보았다. 사전을 찾아 보니 수칼리까누요고는 수카(sukha)를 근거로 한다.

 

수카는 즐거운, 행복한, 행복, 편안을 뜻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이 수카인 것이다. 그러나 수카가 반드시 긍정적으로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수칼리까누요고가 좋은 예이다.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니 수칼리까누요고는 수칼리까(sukhallika)를 뿌리를 하고 있다. 수칼리까(sukhallika)는  ‘adj.  [bsk.  sukhala-ika] 쾌락의, 향락의.’라고 설명되어 있다. 행복이라는 말 보다 쾌락이나 향락 등 먹고 마시고 즐기는 뉘앙스가 강하다. 수칼리까에 누요고가 붙으면 수칼리까누요고(sukhallikānuyogo)가 되는데, 사전에 따르면 ‘향락에 탐닉하는, 쾌락의 생활을 하는, 안락행’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욕구, 갈망, 애욕, 성적인 쾌락을 뜻하는 까마(Kāma)’향락에 탐닉하는, 쾌락의 생활을 하는, 안락행의 뜻을 가진 수칼리까누요고(sukhallikānuyogo)’가 결합되면 까마수칼리까누요고(kāmasukhallikānuyogo)라는 복합어가 된다.

 

까마수칼리까누요고(kāmasukhallikānuyogo)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이라고 번역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 , 코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이용한 쾌락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이런 쾌락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는 것을 즐기는 것 뿐만 아니라 이들 다섯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음식에 대한 탐욕, 성적인 쾌락도 포함 된다.

 

 

 

 

 

 

 

 

 

 

 

 

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S12:63)

 

그렇다면 음식에 대한 갈애와 성적인 쾌락을 탐착하는 것이 왜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총동원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S12:63)’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의 자양분은 이와 같이 여겨져야 된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의 자양분이 완전히 알려질 때 다섯 감역의 쾌락에 대한 욕구도 완전히 알려진다. 다섯 감역의 쾌락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알려질 때 그로 인해 고귀한 제자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될 그 결박이 소멸된다.

 

(Puttamasasutta- 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여 S12:63, 전재성님역)

 

 

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은 인연상윳따(Abhisamaya Sayutta,S12)에 실려 있다. 이 경을 설하게 된 동기는 승단에서 너무 많은 음식과 생필품을 받아 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미래의 수행승들에게 이 법문을 음미하면서 자신의 제어를 위한 진리의 거울로 삼으라고 한 것이라 한다.

 

경의 이름이 ‘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이다. 아들고기라니 듣기만 해도 섬찟하다. 이런 법문을 한 이유는 윤회의 동력이 되는 자양분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먹을 수 있는 자양분, 접촉의 자양분, 의도의 자양분, 의식의 자양분 이렇게 네 가지의 자양분이 있는데, 이런 자양분을 섭취하는 한 윤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자양분 중에 첫 번째 먹을 수 있는 자양분은 음식의 자양분을 말한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존재에 대한 갈망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에 대한 갈애의 예를 아들고기로 비유하였다.

 

사막에서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가다가 음식이 바닥 나서 아들을 고기로 하여 생명을 유지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경의 제목이 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S12:63)’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존재에 대한 갈애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거의 본능적이라 볼 수 있다.

 

음식과 다섯 감역의 쾌락에 대한 욕구(五慾樂, pañcakāmaguiko)

 

본능의 바탕에 식욕과 성욕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다섯 감역의 쾌락에 대한 욕구(pañcakāmaguiko)’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음식에 대한 갈애가 군, , 코 등 다섯가지 감각기관의 갈애가 총동원 된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pañcakāmaguiko: 오욕락이라 하며 다섯 감관, 즉 안----신의 대상을 말한다. Srp.II.110에 따르면, 이것은 세 가지 방식으로 완전히 알려진다.

 

1) 한 가지에 대한 완전한 이해:

미각의 기관에서 맛에 대하여 일어난 갈애는 다섯 감관에서 일어난 갈애와 같다.

 

1)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발우에 놓인 한 덩어리의 음식과 관련해서 일어난다.

 

3) 뿌리에 대한 완전한 이해:

자양분은 사람들이 잘 먹으면 감각적 쾌락의 욕구가 증가하므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유형의 뿌리가 되기 쉽다.

 

(pañcakāmaguiko-오욕락 각주, 전재성박사)

 

 

음식이 오욕락의 뿌리가 되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각주를 보면 미각의 기관에서 맛에 대하여 일어난 갈애는 다섯 감관에서 일어난 갈애와 같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갈애는 탁발을 하여 얻은 한 덩어리의 밥덩어리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먹는 것을 즐기면 이는 또 눈, , 코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먹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초기경을 보면 음식에 대한 절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그리고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Sn2.11)”라 하였고, 디가니까야에서 식사에서 알맞은 분량을 알고(D16)”라 하였다. 이오 초기경전에서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 즐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을 것을 말한다. 그런데 수행자가 하루 세끼, 그것도 간식까지 배불리 양껏 먹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될까? 각주에 세 번째의 내용과 같이 다섯 가지 감각적 뿌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음식에 대한 갈애는 오욕락의 뿌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생리적 욕구인 식욕과 성욕

 

먹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이다.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생리적 욕구라고도 한다. 생리적 욕구 중에 식욕과 거의 동등하게 취급 되는 것이 성욕이다. 그래서 식욕과 성욕은 생리적 욕구로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식욕이 오욕락을 대표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식욕과 성욕은 거의 동급이라 볼 수 있다. 식욕이 강한 자는 성욕도 강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먹는 것을 절제하라고 하였을 것이다.

 

식욕은 오욕락을 대표하는 것이라 하였다. 식욕으로 감각적 접촉은 미각뿐만 아니라 눈, , 코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총동원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욕과 성욕은 전형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오욕락의 추구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까마수칼리까누요고(kāmasukhallikānuyogo),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초전법륜경을 외우면서 복합어 까마수칼리까누요고(kāmasukhallikānuyogo)’에 들어 있는 수카(sukha)에 주목 하였다. 그런 수카는 일반적으로 행복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요즘 불교계에서는 중생의 안락과 행복 또는 생명의 안락과 행복이 마치 불교의 목적인양 말한다. 조계종에서 추진하고 있는 종교평화선언이나 승가청규에도 불교의 목적이 마치 안락과 행복인처럼 쓰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수칼리까누요고(kāmasukhallikānuyogo)’에 들어 있는 수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과 거리가 멀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행복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수카라는 말이 반드시 긍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

 

빠알리어 수카(행복)는 긍정과 부정을 모두 내포 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불교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열반이다. 열반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고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행복과 오욕락

 

불교의 목적이 열반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목적이 마치 행복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조계종 결사추진본부 도법스님도 공공연히 뭇삶의 안락과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조계종 고위층에서 말하는 행복론이 마치 불교의 목표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행복론은 주장하는 이들의 경전적 근거는 무엇일까? 대부분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들고 있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는 문구를 근거로 들고 있다.

 

전도선언에 따르면 부처님이 중생의 이익(hita)과 안락(sukha)을 위해 전도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문구만을 들어 말한다면 불교가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말은 어느 종교에서나 강조하는 말이다.

 

행복은 오욕락을 추구하는 일상적 행복도 있지만 종교가 추구하는 행복은 모두 다르다. 유일신교라면 창조주를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들만의 행복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행복론을 말한다. 그러나 행복만을 이야기하다 보면 잘 목고 잘 살기만을 바라는 오욕락이 되기 쉽다. 그런 행복을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며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

 

전도명령을 어기는 경우

 

대부분 불자나 스님들이 불교가 행복(sukha)의 종교라거나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말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행복론을 강조하는 이들이 간과 하는 것이 있다. 전도선언에서 부처님은 중생의 이익과 안락(sukha, 행복)을 위하여 전도하라고 말씀을 하였지만 또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 본래부터 눈에 띠끌이 거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그들이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쎄나니 마을로 가겠다.”

 

(Dutiyamārapāsasutta-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S4:5(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중생의 이익과 안락(행복)을 떠나는 전도자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을 전하긴 전하된 빠짐 없이 전달하라는 말이다

 

만일 전도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일부만 전달하면 부처님의 전도명령을 어긴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종의 직무유기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에게나 이해 하기 사성제, 십이연기와 같은 설법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근기에 따라 대기설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심을 내는 설법, 보시하고 지계 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부터 펴는 것이다.

 

재가자에게도 사성제를 설한 부처님

 

법사들은 비록 재가자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용할 능력이 생겨나면 빠짐 없이 알려 주어야 한다. 이는 부처님이 재가자인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세상에 재가신자는 발생과 소멸에 대한 고귀하고 통찰력 있는 지혜를 갖추고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성취합니다.(S55:3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재가자일지라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반드시 사성제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사성제는 다름 아닌 열반의 실현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재가자들에게 단계적 가르침을 설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라고 말씀 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재가자의 출가자 따라하기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불교의 목적이 열반인 것은 맞지만 재가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재가자는 재가자로서의 역할이 있는데 출가자 따라 하기를 한다면 죽도 밥도 안된다는 논리이다. 또 재가자가 출가자 따라하기를 하면 가족도 내 팽개쳐서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문제가 발생될 수 있고, 또 모두가 출가 하게 된다면 인류의 씨가 마를 것을 염려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이 열반인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지만 재가자는 재가자에 맞는 신행생활을 해야 함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재가자의 행복론이다. 따라서 재가자에게 필요한 불교는 행복이라 한다, 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라 한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재가자의 추구하는 삶이 행복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Sn 1.8)”라 하였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하고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말하는 행복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오욕락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는 부처님이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Kāmesvādīnava disvā, Sn3.1)”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이 행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 하신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고 말한 것을 뒤집어서 생각할 수 있다. ,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는 문구를 뒤집어 말하면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하고 바라는 것과 똑 같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악도에 떨어지지 말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실제로 빠알리나까야 주석을 보면 부처님이 행복하기를!”하고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낸 것에 대하여 지옥고를 받지 말기를!”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고 써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그대도 행복하기를 바라며(Sn5.1)”이라 하였고, “그대에게 행운이 있기를!(Sn5.14)”라 하였다. 이는 괴로움에 처해 있는 뭇삶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연민에서 알 수 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이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문구가 있다.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문구 다음에 이어지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라는 문구이다.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무엇일까? 지옥과 같은 악처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 한편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서 많은 사람들의 안락(행복, sukha)을 위하여전도할 것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의 안락(행복, sukha)을 위하여라는 말은 괴로움을 해방되기를 바라는 불쌍한 마음, 연민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긴 행복이라는 것은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보통사람들의 추구하는 행복은 오욕락이 되기 쉽다.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TV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저녁 먹을 시간에 경쟁적으로 먹거리 프로를 방영하기 때문이다. 먹는 다는 것 자체가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 특히 감각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와 같이 중생들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따라서 중생의 행복은 오욕락의 추구가 아니라  불행하지 않는 것,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

 

초기불교가 곧 대승불교랍니다!”

 

중생들이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해법을 제시 하신 분이 부처님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사성제에서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말씀 하셨고 이에 대한 실천 방법이 팔정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성제이다. 그리고 실천방법은 팔정도이다. 이런 가르침을 편 것은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이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이런 부처님의 마음에 대하여 사띠현정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주셨다.

 

 

이런 보살 되는 불교 또한 초기 불교의 가르침 안에서도 가능합니다! 왜 꼭 대승이라야 할까요? 나는 주장합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망설이시다가 법천의 권청으로 설법을 하시게 되어 불교는 '대승'이 된 것이라고! 교단을 꾸리고 설법을 하셔서 '사쌍팔배의 도과' 성취가 가능한 중생을 몸소 찾아 다니시면서 가르침을 주시는 이런 번거로움을 무릅쓰시겠다고 결심하신 순간 이미 '대승'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불교가 곧 대승불교랍니다!

 

(사띠현정, ‘바즈라가르바(金剛藏菩薩) 설법한 십지경(十地經)의 댓글)

 

 

사띠현정님에 따르면 부처님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법을 설하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대승이라 하였다.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중생이 고통에서 해방 되기를 바라는 것이 보살의 사상이고 대승이다. 따라서 소승이니 대승이니 편가르는 것이 당치 않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전도선언 그 자체가 보살사상에 대한 선언이고 대승사상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불교가 바로 대승불교라 하였다.

 

열반이 불교의 목적이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렇다고 하여 중생들이 오욕락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부처님이 행복하기를 바란 것은 다름 아닌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 것이다. 이는 괴로움의 소멸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윤회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오욕락의 뉘앙스를 품고 있는 ‘행복의 종교’라기 보다,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바라는 괴로움에서 해방을 추구하는 종교라 볼 수 있다. 괴로움의 소멸은 열반으로 실현된다. 그래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 된다. 

 

괴로움의 소멸되고 윤회가 종식 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성되는 것이라 본다. 이런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재가자가 출가자가 되고, 출가자가 재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06-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