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보살인가 아라한인가, 아라한의 중생교화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12. 11:44

 

보살인가 아라한인가아라한의 중생교화

 

 

 

이른 아침에

 

아침 일찍 일터로 향한다. 아침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여름날 농부가 땀나는 낮에 일하기 보다 일어나자 마자 논으로 나가 김을 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아침시간을 활용하면 저녁에 일하는 것 보다 몇 배 생산성이 높다. 그래서 이른 아침 일찍 출근하여 한 두시간 동안 빡세게집중하면 어제 못다한 일은 거의 다 마무리 된다. 그리고 고객이 출근하는 9시 이전에 자료를 발송한다.

 

6시 대의 이른 아침에 일터를 향하다 보면 꼭 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이블과 찬송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돌아 가는 사람들이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귀가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마주 치는 어떤 이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새벽기도에서의 감동이어서일까 찬송가를 부르며 걷는 것이다. 그러다 마주치면 기습적으로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며 지나간다.

 

기도는 기독교인들의 전용어

 

사는 곳은 기독교세가 강한 곳이다. 눈에 걸리는 것이 교회나 성당이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서 심심치 않게 기도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백명 가량 먹을 수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밥먹기 전에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람, 성호를 긋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교회나 성당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기도는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라 본다. 창조주에 피조물의 관계에 있어서 기도는 당연한 것이다. 부자관계이고 주종관계이기 때문에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인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목사들 설교를 들어 보면 말끝마다 “~해 주시고, ~해주십시요이다.

 

그런데 기독교 용어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기도가 한국불교에 예사로 쓰이고 있다. 절에서의 행사 일정표를 보면 거의 대부분 기도라고 말한다. 불공 또는 공양(puja)이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유행하는 기도라는 말은 기독교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라 본다.

 

중학교는 불교학교, 고등학교는 미션스쿨

 

중학교는 불교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라 불리우는 기독교학교를 다녔다. 다니고 싶어 다닌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청소년 시기에 두 종교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먼저 알게 된 불교의 영향이 더 컸다. 그래서 기독교학교에 배정 받았을 때 반감이 심하였다. 그것은 기도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가 세웠다는 그 학교에서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것 같았다. 방송예배, 월예배, 성경시간 등 거의 매일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되는 기도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매일 찬송가가 학교에 울려 퍼졌다.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에게는 축복이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고역이었다.

 

믿겨지지 않는 대상을 향하여

 

청소년기에 불교와 기독교를 접하였다. 그러나 먼저 접한 불교가 이후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불교와 기독교를 모두 접하다 보니 기독교의 모순점이 보이기 시작 하였다. 기독교 학교에서 교목이 아무리 설교를 신명나게 해도, 성가대의 음성이 아무리 감동을 주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다.

 

자꾸 무언가 있다고 하며 그 대상에 기도를 하지만 제3자의 눈으로 보기에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믿겨지지 않는 대상에게 울부짓듯이 믿싸옵니다, 믿싸옵니다라고 애원 하는 것이 진정성이 없어 보였다.  

 

믿기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믿기면 믿지 말라 해도 믿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믿으라고 말한다. 일단 믿고 보자는 것이다. 일종의 맹목적 믿음이라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불교와 기독교 두 종교를 접한 이래 종교를 접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살다 보니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더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근본 문제도 생겼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종교를 가져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종교를 갖는다면 당연히 불교이다. 중학교 다닐 때 이미 접하였기 때문이다.

 

불교교양대학에서 접한 불교

 

2004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였다. 도심 포교당에서 운영하는 불교교양대학이다. 중학교 다닌 이래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책을 통하여 반야심경, 금강경 등을 접하기는 하였으나 책을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책으로 접한 불교이었지만 항상 불자라고 생각하였다. 절에 다니지 않았지만 종교란에는 불자라 적어 넣었다. 굳이 이름한다면 정서적 불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교양대학에서 접한 불교는 중학교 시절에 접한 불교와 달랐다. 중학교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일생에 대하여 배웠다. 그러다 보니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교양대학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마치 하나님 아버지 부르듯이,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애타게 찾듯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정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라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관음기도, 지장기도, 신중기도 등 갖가지 기도가 그것이다.  기도라는 말이 기독교용어임에도 절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매우 이상 하였다.

 

불교를 접하면서 또 하나 놀란 것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신격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소원을 다 들어 주는 식으로 말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실려 있는 7난과 구남구녀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특히 화난(火難), 수난(水難), 풍난(風難), 검난(劍難), 귀난(鬼難), 옥난(獄難), 적난.(賊難)  7난을 만났을 때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 즉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힘으로 모두 벗어 날 수 있다는 신앙이다.

 

자각각타(自覺覺他)

 

하지만 염피관음력에 따른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는 것은 대표적인 기복신앙이다. 유일신교에서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이를 타각(他覺)’이라 하여 인정한다.

 

이런 타각에 대하여 월호스님은 2004년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힌 쥐든 검은 쥐든 고양이가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또는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기도 하고 옆에서 누가 깨워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는 자각과 타각 을 모두 수용하는 말이다. 이런 자각과 타각의 논리는 조계종 종헌에도 그대로 나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에 따르면 “제 2 조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문구에서 자각각타(自覺覺他)’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스스로 깨닫고 다른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선불교에서는 ‘줄탁동기(啄同機)’라는 말을 사용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본인 뿐만 아니라 스승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화두를 타파 할 때 스승의 한 마디 말이 마치 어미닭이 알껍질을 밖에서 깨주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한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줄탁동기는 선불교식 깨달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줄탁동기라는 말은 없다. 깨달음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남이 옆에서 깨닫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병아리 부화의 비유를 들어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면, 그 알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원하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 (M16)”라고 말씀 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스승의 역할은 마치 어미 닭이 알을 품어 주듯이 깨달음을 위한 환경의 조성으로 족하다는 것을 말한다.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이듯이 제자가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스스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깨닫는 다는 것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자신이라는 한 세계를 파괴하면서 거듭 태어나는 것임을 말한다.

 

초기경에 따르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 세계를 파괴함으로서 성취된다. ,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여겼던 세계를 깨는 것은 스스로의 힘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조탁(彫琢)’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불교에서는 안팍에서 서로 쪼아 한 세계를 깨는 줄탁()’ 이라 하였다.

 

조탁과 줄탁의 차이만큼 큰 것이 대승불교와 근본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근본불교의 경우 자각이 강조 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자각각타가 강조 된다. 특히 각타의 사상이 대승보살사상이라 볼 수 있다.

 

기도의 대상이 된 관세음보살

 

대승불교에서 근본불교로 전향하였다. 그런 전향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면 누구나 전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혀 다른 종교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불교학자 체르바츠키 (Stcherbatsky) 박사는 “ 마하야나 ( 대승 ) 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 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런 바탕에 대승보살사상이 있다.

 

대승보살의 대표주자는 관세음보살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기복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보살사상의 원래 취지와는 180도 다른 것이다. 그래서 한국불교가 기복을 넘어 기독교화 되었다고 말한다.

 

기도의 대상으로서 관세음보살은 신격화 되어 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사상의 원래 취지는 이와 다르다. 그렇다면 왜 관세음보살을 명호 하는가? 대승의 가르침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을 명호 하는 것은 기도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과 같은 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말하는 관세음보살은 자신의 모든 소원을 들어 줄 것 같은 초월적 존재로 변질 되었다. 이렇게 기복화된 보살사상에 대하여 기독교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길희성 교수의 보살예수라는 책이 있다. 기독교신학자이자 종교다원주의자인 길희성 교수는 보살사상과 기독교와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특징인 보살사상을 기독교에 적용하여 보살예수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예수의 행적이 보살사상과 유사함을 발견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보살사상을 가져 간 것은 기복을 가져 간 것이 아니다. 중생구제라는 보살사상 그 자체를 가져 간 것이다. 이처럼 좋은 것은 기독교에서 가져가고 반대로 좋지 않은 것은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한국불교의 기독교 따라하기

 

불자들이 기존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로 전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독교와 구분이 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허공의 부처님이라든가, 관세음보살에 대한 기도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항상 하는 말이 열심히 기도하세요이다. 이렇게 기도를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와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음을 간파 할 수 있다. 스님의 법문에서 부처님 대신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으면 목사가 설교한 것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한국불교에서 기독교 따라하기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점이 있을 것이다. 각종 기도로 인하여 사찰경제가 나아 지는 것이 가장 큰 효과라 본다. 그러나 기도만 강조하며 기독교 따라 하기에 바쁘다면 불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기독교에 대한 열등감뿐이다. 실제로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기독교에 대한 열등감을 은연중 조장한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기 때문에 복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모두 부자가 되었다. ”라는 식의 법문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구원관은 무엇일까?

 

이처럼 기도와 기복을 강조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불자들은 궁극적은 구원은 어떤 것일까? 기독교에서는 배타적 구원관에 따라 유일신을 믿으면 천국에 태어남을 강조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뚜렷한 구원관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기도하고 기복만을 바라는 것이 마치 현세에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도 구원이 없을 수 없다. 그것은 매우 거창한 것이다. 부처가 되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사말이 성불하세요이다.

 

대승불교의 구원관이자 궁극적 목표는 성불(成佛)’이다. 그런데 성불하기 위해서는 3아승지 겁 이상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좋은 예이다. 그래서 초기경에 따르면 이 세상에 출현한 부처님은 과거 25불 또는 과거 7불이라 하여 몇 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승불교에서는 모두 부처가 되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목표를 너무 크게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사말로 성불하세요라고 말하지만 누구 하나 진지하게 성불할 것을 다짐 하지는 않는다. 그저 겉치레 인사일 뿐이다.

 

부처가 되려면 3아승지 겁이나 되는 한량 없는 세월 동안 보살도를 닦아야 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부처로부터 반드시 수기를 받아야 한다. 과연 이것이 실현 가능한 일일까?

 

대승불교에서 구원관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나 멀고 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가 된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모두 부처가 된 다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처가 된 다음 해야 할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깨닫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도 같은 것이다.

 

초기불교의 구원관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성불하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부처가 출현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경전을 통하여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려 하기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허황된 꿈,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을 접고 현실적으로 접근 한 것이다.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면서 불교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일종의 불교적 구원관이라 볼 수 있는 열반이다. 이는 아라한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Khīā jāti,               키나 자띠

vusita brahmacariya,   우시땅 브라흐마짜리양

kata karaīya,         까땅 까라니양

nāpara itthattāyā        나빠랑 잇탓따야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와 같은 아라한선언을 하게 된다.

 

이러한 선언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청정한지, 번뇌가 소멸되었는지에 대하여 스스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선언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구원관이다. 그리고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아라한 선언에 대하여 의문을 품은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아라한이 되고 나서 그 이후 행적에 대한 것이 경전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보살사상이 출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라한이 된 다음에 무엇하느냐고?

 

아라한선언은 매력적이다. 그래서 읽을 때 마다 감동을 준다. 특히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그렇다. 따라서 괴로움을 소멸하여 다시 태어남이 없는 상태, 즉 불사(不死)가 불교적 구원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적 구원관은 유일신교의 구원관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따르면 그는 오래지 않아, 그러기 위해 양가의 자제들이 당연히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그 위없는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곧바로 알았다.(S6:3)”와 같은 정형구를 볼 수 있다. 아라한이 됨으로서 출가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무엇을 해야 할까? 아라한이 되면 아무 하는 일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비슷한 말이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Nābhinandāmi maraa

 nābhinandāmi jīvita,
Kāla
ca paikakhāmi

nibbisa bhatako yathā.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Thag.606)

 

(아라한의 인생관,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patticca-samuppada에서)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테라가타(장로게)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 따르면 아라한이 된 자가 마치 월급날을 기다리는 월급생활자 처럼 죽음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일까.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게송 다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Nābhinandāmi maraa

nābhinandāmi jīnita,
Kāla
ca paikakhāmi

sampajāno patissato

 

죽음도 즐거워하지 않고,

삶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주의 깊은, 올바른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죽을 때를 기대한다. (Thag.607)

 

 

번뇌 다한 아라한이 죽음을 맞이 하는 태도에 대하여 노래 하고 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사띠를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을 유지 한다 (sampajāno patissato)’ 는 말이다.

 

월급생활자가 월급을 기다리는 것처럼 죽음을 맞는 다는 이야기는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보인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세존]

Paṇḍitoti samaññāto

sāriputto akodhano,
Appiccho sorato danto

kāla kakhati sudanto.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잘 훈련된 자처럼 때를 기다리는 님,

싸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

 

(수시마경-Susīmasutta, 상윳따니까야 S2:29, 전재성님역)

 

 

경에서 ‘잘 훈련된 자(kāla kakhati sudanto)’는 번뇌를 끊은 자를 말한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번뇌를 끊은 자는 여러 다른 시간에 열반에 들게 되므로 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기다리듯이 열반의 때를 기다린다.(Srp. I. 126)” 라고 설명되어 있다.

 

범부와 아라한의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아라한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실재하는 사건의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남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사유할 뿐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죽음은 죽음, 또는 죽음에 접근에 대한 사유에 대한 체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위법적 사유의 근본구조 속에서 죽음을 사유하면서 그것을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동일시 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해서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되는 존재의 다발은 죽음과 동일시 된다.

 

모든 사물의 변화는 유위법적이며 그 속성을 주이성(住異性)에 두는 무상으로 나타나는 만큼. 괴로움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 marana)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라한의 체험 속에는 변화와 소멸은 자각 되지만 늙고 죽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에게서의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놓음(jīvita pariyādāna)’이라고 불린다. 아라한의 체험에는 구조적으로 불사(不死: amata)가 수반된다.

 

(Dhp114 주석, 전재성박사)

 

 

죽음이라고 해서 똑 같은 죽음이 아니다. 번뇌에 가득찬 범부와 번뇌 다한 아라한의 죽음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부의 오온에 대한 죽음을 그냥 ‘죽음’이라 부르지만, 번뇌 다한 아라한의 오온에 대한 죽음을 ‘죽지 않은  죽음’ 또는 ‘불사’라 부르는  것이다.

 

이 역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를 만들어 정리 할 수 있다.

 

 

 

 

죽음(: marana)

불사(不死: amata)

오온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동일시 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여김.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라한의 체험.

오온의 파괴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되는 존재의 다발(오온)은 죽음과 동일시함.

존재의 다발(오온)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놓음

(jīvita pariyādāna)으로 봄

죽음

괴로움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존재의 다발(오온)의 파괴는 죽음(: marana)으로 이해함.

아라한의 체험에는 구조적으로 불사(不死: amata)가 수반됨.

의 미

범부의 죽음

아라한의 죽음

 

 

아라한의 인생관

 

이런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12연기 법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전도된 인식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불선(不善)을 알고 있고, 이는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무엇에도 갈애가 없습니다.

 

아라한도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를 들어줘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 sakhāra-dukkha)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이러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때 이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마음은 파괴적 욕망으로 아라한은 거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장로게」(Thag.654; 606; 1003)에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어떤 아라한의 게송이 있는 것입니다.

 

(아라한의 인생관,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patticca-samuppada)

 

 

번뇌가 다하고 오온에 대하여 집착을 내려 놓은 아라한에게 있어서 살고 죽는 것은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한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이미 정복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아라한이 하는 일은?

 

이와 같은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불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해야 할일 다 마친 아라한은 남은 생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는 불교tv 에서 이들 비구와 비구니들은 자비와 지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남을 돕는 평범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열반을 성취하였다고 하여 그들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다거나 사업을 하여 돈을 크게 벌었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열반을 성취하였다고 하여, 깨달았다고 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여 아무일도 하지 않고 생을 마감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아라한이 된 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남을 도우며 살았음을 말한다. 그리고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삶을 살았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라한이 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됨을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보살정신이라 볼 수 있다.

 

대승보살사상의 원형 나룻배론

 

부처님의 대승보살사상은 초기경전에 이미 실려 있다. 후대 대승보살 사상이 성립 되기 이전에 부처님은 대승사상을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승보살사상을 다음과 같은 숫따니빠따 게송에서 볼 수 있다.

 

 

Yathāpi nāva dahamāruhitvā
Piyena'rittena sama
gibhūto,
So t
āraye tattha bahūpi aññe
Tatr
ūpāyaññū kusalo mutīmā.

 

Evampi yo vedagū bhāvitatto
Bahussuto hoti avedhadhammo,
So kho pare nijjhapaye paj
āna
Sot
āvadhānūpanīsūpanne.

 

현명한 자가 튼튼한 나룻배에 올라서 노와 키를 장착하고,

그 도구에 대하여 잘 알고 잘 다룬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줄 수 있는 것과 같이,(321)

 

지혜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성품을 가진 참사람은,

가르침을 귀를 기울이고 따르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다.(322)

 

(나와경-nāvā sutta-나룻배의 경, 숫따니빠따 Sn2.8, 전재성님역)

 

 

주해에 따르면 이 경은 가르침의 경(Dhammasutta)이라고도 불리며, 싸리뿟타와 목갈라나에 관계된 경이다.

 

앗사지의 경행에 반한 우빠띳사(사리뿟따)

 

이에 대한 경의 해제는 다음과 같다.

 

 

라자가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웃빠띳사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 바라문 부인 루빠싸리가 아기를 가졌는데, 그와 이웃한 꼴리따 마을의 바라문 부인 목갈라니도 아기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같은 날에 태어났는데, 각각 마을 이름을 따서 우빠띳사와 꼴리야라고 불렀다.

 

그들은 같이 먼지구덩이에서 놀면서 함께 성장하였는데 항상 각각 오백명의 청년들에 둘러싸였고 그들이 이끄는 오백의 가마나 오백의 준마가 이끄는 수레와 함께 나들이를 했다. 라자가하에서 산정제(山頂祭)가 있는 날 시내에 마가다의 주민들이 잘 아는 왕족들이 마련된 자리에 앉아 화려한 행사를 보았다.

 

그런데 우빠띳사가 그들을 보고, 춤추고 노래하지만 그들은 모두 백년도 못가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꼴리따도 우빠띳사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은 불사(不死)를 찾아서 출가하기로 서로 뜻을 모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를 버리고 라자가하로 가서 유행자인 싼자야에게 오백명의 바라문 청년들과 함께 출가하였다. 그들은 출가한지 며칠 되지 않아 세 가지 베다와 유행자의 가르침을 모두 터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산자야에게서 불사의 가르침을 얻지 못하고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이때 이미 세존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사의 가르침을 찾아 세상을 떠돌다 다시 라자가하로 돌아왔다. 이때에 마침 부처님의 제자인 앗싸지가 아침 일찍 탁발하러 나갔다.

 

우빠띳사는 그의 단아한 자태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를 보고 쫒아가 그의 감관이 맑고 깨끗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모든 현상은 원인에서 생겨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우빠띳사는 이 가르침을 듣고 진리의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꼴리야에게 가서 그를 불러 함께 부처님 앞에 승단에 가입했다. 그들은 수행승이 된 다음에 각각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라고 불리게 되었다.

 

목갈라나가 먼저 이렛만에 네 가지의 위대한 존재(四大)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을 관찰하여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했고, 사리뿟따는 열나흘 만에 느낌에 대한 통찰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리뿟따는 존자 앗싸지와 함께 한곳에서 보냈는데, 세존의 시중을 들고는 앗싸지의 시중도 들었다.

 

그는 존자 앗싸지를 ‘이 존자는 과거의 나의 스승이었다. 나는 이 존자로 인해서 세존의 가르침을 알게 되었다.’라고 시중을 들었다. 앗싸지가 한곳에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존자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다섯 번 예배하고 합장했다.

이것을 보고 수행승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수제자임에도 바라문교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방위를 향해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사리뿟따의 행위가 방위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에 대한 예경임을 지적하면서 이 경전을 설했다.

 

(나와경 인연담)

 

 

인연담에 주목한 것은 앗사지의 경행이다.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하였을 때 오비구 중의 하나인 앗사지는 우빠띳사(사리뿟따)가 목격하였을 때 이미 아라한 이었다. 그런데 부처님과 같은 체험을 하여 아라한이 된 앗사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을 가까이 머물면서 탁발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간 것이다. 깨달았다고 하여 사람들과 접촉 없이 깊은 숲속이나 산중에서 홀로 생활하였던 것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아라한이 되었어도 탁발을 함으로서 사람들과 접촉하였기 때문이다.

 

아라한의 중생교화

 

그런데 눈을 아래로 내려 뜨며 사띠를 유지하며 경행하는 모습에 우빠띳사(사리뿟따)가 반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은 원인에서 생겨난다난다는 앗사지의 한 마디 말에 진리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제자가 아라한이 되었어도 중생교화를 하였음을 말한다. 다만 행동으로 보여 주었을 뿐이다. 믿지 않은 사람 붙들고 신앙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성자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인격적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깨달은 성자, 아라한에 대하여 나룻배로 비유하였다.

 

경에서 나룻배는 대승을 말한다. 나룻배에 대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 줄 수 있는 것 같이라는 문구가 이를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나룻배는 큰 수레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깨달은 현자에 대하여 나룻배를 조정하는 사람으로 묘사 하고 있다. 나룻배 그 자체가 아니라 나룻배를 조정하는 사람, 즉 선장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현자에 대하여 노와 키를 잡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 하고 있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자 또는 참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예를 들었다.

 

 

Yathā naro āpaga otaritvā
Mahodaka
1 salila sīghasota,
So vuyham
āno anusotagāmi
Ki
so pare pakkati tārayetu.

 

Tathecha dhamma avibhāvayitvā
Bahussut
āna anisāmayattha,
Saya
ajāna avītiṇṇakakho
Ki
so pare sakkati nijjhāpetu.

 

마치 사람이 물이 넘치고, 홍수가 져서,

물결이 거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 (319)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많이 배운 사람에게서 그 의미를 경청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모르고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320)

 

 (나와경-nāvā sutta-나룻배의 경, 숫따니빠따 Sn2.8,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나룻배의 노와 키를 잡을 수 있는 자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거센 물결에서 남을 건네 주려 한다면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자 이어야함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물에 빠진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해 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에 물결에 휩쓸려 사는 자에 대하여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Stn319)”라고 반문 하였다.

 

또 남을 구제 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우고 익혀야 함을 말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자가 남을 구제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자에 대하여 그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Stn320)”라고 반문하고 있다.

 

아라한의 출현 그 자체가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여 결과를 얻은 자가 제대로 중생구제를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자를 현자, 참사람이라 하였는데, 인연담에 따르면 앗사지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앗사지는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사띠를 유지한 채 보여 준 것 밖에 없다.

 

만일 앗사지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여 숲속에서 홀로 살았다면 우빠띳사(사리뿟따)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라한이 되었어도 탁발을 함으로서 사람들과 접촉을 하였기에 다른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또 탁발로 인하여 주민들과 접촉을 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커다란 공덕을 쌓게 하였다. 음식을 얻어 먹으면 단지 얻어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축원도 해주고 법문도 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서 아무 할 일이 없이 생을 마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아직 깨닫지 못한 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이 가장 큰 것이고, 탁발을 통하여 재가자들에게 공덕을 쌓게 하는 등 여러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청정한 아라한이 출현 하였다는 것 그 자체가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한 것이다. 아라한이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중생구제가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2013-06-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