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하느님세계에서 아비지옥까지, 부처님의 자비광명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4. 12:06

 

하느님세계에서 아비지옥까지, 부처님의 자비광명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초전법륜경(S56:11) 후반부를 외웠다. 여행에서 돌아 온 후 몇 일간 엄두나 나지 외우지 못하였으나 다시 재발심하여 후반부를 모두 외웠다. 이제 여행지에서 외운 전반부와 결합하는 것만 남았다. 그러나 시간문제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라따나경(보배경, Sn2.1), 자야망갈라가타(길상승리게), 멧따경(자애경, Sn1.8),망갈라경(길상경, Sn2.4)에 이어 다섯 번째로 내 것이 될 것이다.

 

언제 보아도 가슴 벅찬 게송

 

야와끼완짜 메 빅카웨(Yāvakīvañca me bhikkhave)”로 시작 되는 초전법륜경 후반부를 외면서 환희하였다. 그것은 환희로운 장면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환희한 것은 부처님 자신이 깨달은 바를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 의 세계 등에 선언하는 장면이다. 언제 보아도 가슴 벅찬 게송은 다음과 같다.

 

 

akuppā me cetovimutti,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ayamantimā jāti           아야만띠마 자띠

natthidāni punabbhavoti    낫티다니 뿌납바워띠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부처님이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감흥어린 시구로 말한 것이다. 다시 태어남이 없다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자신의 번뇌가 어느 정도 소멸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느 정도 청정해졌는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리고 열 두 가지 형태(삼전십이행상)’로 완전히 알려 졌을 때 번뇌가 완전히 소멸되고 지극히 청정해 졌음을 스스로 알았다. 그래서 경에서는 나에게 앎과 봄이 생겨났다. 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라고 스스로 선언 하였다.

 

이처럼 번뇌가 소멸했는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 또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들의 세게, 하느님의 세계 (sabrahmake), 악마의 세계, 사문과 성직자의 세계, , 인간의 세계 등에 자신 있게 깨달음을 선언 한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덜 완성되고 불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깨달음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무상정득각(無上正等覺)이라 한다.  그런 깨달음을 이룬자를 ‘정득각자(anuttaro)’ 하고 여래 십호중의 하나로 부른다.

 

곡괭이 들어 갑니다!”

 

두 번째로 가슴벅찬 환희의 장면은 땅의 신 붐마데와(bhummā devā)’가 외친 장면이다. 부처님이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네(사슴동산)의 미가다야에서 오비구에게 설법하였을 때이다. 이를 모두 귀담아 들은 땅의 신이 가슴벅찬 환희로 외친 것이다.

 

땅의 신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산에서 산소를 만들 때 곡괭이를 들면서 곡괭이 들어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땅을 파는 장면 같은 것을 말한다. 또 큰 나무를 자를 때 도끼 들어갑니다!”라고 나무에게 신고 하는 것도 일종의 자연을 파괴 하고 훼손하는 것에 대하여 일종의 자기고백인 셈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옛날 사람들은 대지나 나무에게도 주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꼰단냐가 이해한 생멸은?

 

경에서 보는 땅의 신도 마찬가지라 본다. 땅의 신이라고 표현된 붐마데와(bhummā devā)는 사슴동산에서 주인과 같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오비구간의 대화내용을 다 듣고 있었고,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최초로 이해한 꼰단냐 비구의 외침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꼰단냐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나서 무슨 말을 하였을까? 꼰단냐는 가르침을 이해하여 진리의 눈(dhammacakkhu)’ 이 생겨 나자 다음과 같이 선언 하였기 때문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sabbanta nirodhadhammanti      삽반땅 니로다담만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제행무상개념,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다(Sabbe sakhārā aniccā, Dhp277)”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의 문맥을 보면 오온에 한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전반부에서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Ida dukkha ariyasaccanti)”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은 생노병사에서부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의 괴로움에 이르기 까지 괴로움의 본질을 설법하였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괴로움 그 자체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오온에 집착 하는 것이 괴로움의 본질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이렇게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괴로움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생겨났다라고 하였을까?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꼰단냐존자는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이다. 이때 진리의 눈은 본래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빠알리어 우다빠디(udapādi)를 보면 알 수 있다.

 

진리의 눈(dhammacakkhu)’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처럼 누구에게나 내재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하여 새롭게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형인 생겨났다(arose)”라는 뜻의 우다빠디(udapādi)를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우다빠디의 원형은 우다빳자띠(udapajjati)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면 udapajjati udapajja + ati 로 되어 있다. 여기서 udapajjà‘was born; arose’로 설명된다. 주목하는 것은 태어남에 대한 빠알리어 jati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과 같은 유정물에 관련된 용어이다. 그래서 udapajjati는 태어남, 일어난 것으로 번역 되는데, 이는 없던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꼰난냐 존자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나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선언문에서 생멸은 오온에 대한 생멸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초전(初轉),  모종의 이해차원

 

그렇다면 왜 오온에 대한 생멸을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할까? 이는 꼰단냐의 깨달음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오온에 대한 생멸을 이해하는 것을 사성제에 대한 이해로 보고, 이를 초전(初轉)이라 볼 수 있다. ‘모종의 이해차원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Ida dukkhaariyasaccanti )”라고 고성제에 대하여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다. 또 집성제에 대해서는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 (Ida dukkhasamudayo ariyasaccanti)”라고 역시 확실히 아는 것이다. 나머지 멸성제 와 도성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차원의 이해를 하였을 때 꼰단냐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번뇌는 남아 있다. 그래서 이제 흐름에 든 성자이고 수다원 단계이다.

 

이전(二轉), 수행단계

 

그렇다면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을 통하여 번뇌를 남김 없이 소멸하는 것이다. 그런 수행은 수습(修習)이라 할 수 있다. 습관을 들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전(二轉)을 말씀 하셨다. 이전은 다름 아닌 수행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과 관련하여 부처님은 고성제에 대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 (dukkha ariyasacca pariññeyyanti)”라 하였고, 집성제에서는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 (dukkhasamudayo ariyasacca pahātabbanti)”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멸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 (dukkhanirodho ariyasacca sacchikātabbanti)”라 하였고, 도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 bhāvetabbanti)”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모두 수행과 관련 된 것이다. 사과(四果)로 본다면 사다함과 아나함 단계이다. 이 단계는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의 단계이기 때문에 오도송이 보이지 않는다.

 

삼전(三轉), 아라한 선언

 

그러나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는 아라한 선언을 한다. 그것이 삼전(三轉)이다. 이는 번뇌의 소멸과 청정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머리로 사성제를 이해하는 차원이 꼰단냐의 깨달음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진리의 눈이 생겨난다고 하는데, 이를 수다원 선언이라고도 한다.

 

꼰단냐가 수다원 선언을 한 것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하였음을 뜻한다. 남은 것은 수행을 통하여 번뇌를 남김 없이 소멸하는 것이다. 이제 시간만 남은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동일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느 다름 아닌 열반이고 또 다른 말로 불사(不死,atama)이다. 부처님이 선언한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라고 말한 것과 같은 선언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명과 공덕이 다하면

 

이와 같은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제까지 모든 존재들이 윤회하여 왔기 때문이다. 지금 하늘나라에 사는 존재일지라도 수명과 공덕이 다하면 어떤 세계에 태어날지 모른다. 수와 복을 모두 찾아 먹었으므로 아마도 악처에 태어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천상의 존재들은 수명이 다할수록 더욱 더 두려움에 떨 것임에 틀림 없다. 특히 하느님이라 불리우는 브라흐마신들이 더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전생을 모두 잊어 버리고 영원히 살 것 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또 자신이 만물을 창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윤회에 대한 공포는 더 컷으리라 본다.

 

빅뉴스를  긴급타전한 붐마데와

 

그래서 꼰단냐가 진리의 눈이 생겼을 때 이는 빅뉴스이었을 것이다. 윤회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런 빅뉴스를 가장 먼저 타전한 것이 땅의 신 붐마데와이다. 그는 부처님이 설법한 바라나시 이시빠따네(사슴동산) 미가다야에 있는 땅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땅의 신은 얼마나 감격하였을까? 부처님과 오비구와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던 부마데와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eta bhagavatā bārāasiya isipatane migadāye

anuttara dhammacakka pavattita appativattiy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

 

 

땅의 신 붐바데와가 외친 것은 하나의 정형구이다. 마치 신문의 ‘호외’와 같고, 방송에서의 ‘스팟뉴스’와 같은 것이다. 전세계로 긴급 타전된 뉴스와도 같은 것이다.

 

자신들의 문제이었기에

 

이런 뉴스가 어디까지 전해졌을까? 모두 신들의 세계로 전해졌다. 즉 붐마데와의 외침을 듣자 바로 위 천상에 있는 짜뚬마하라지까(사대천왕)가 알게 된다. 그리고 차례로 따와띵사(삼십삼천), 야마(야마천), 뚜시따(도솔천), 님마나라띠(화락천), 빠라님미따와사왓띠(타화자재천) 순으로 마치 릴레이 하듯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세계(brahmakāyikā)까지 전달 되었다. 빅뉴스가 인간이 아닌 천상에 먼저 전달된 것이다. 그것도 천상의 꼭대기에 해당되는 하느님(브라흐마)세계 까지 전달된 것이다.

 

그 시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경에 따르면 떼나 카네나 떼나 무훗떼나 (tena khaena tena muhuttena)”라 하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이다. 땅의 신의 외침을 듣고 천상의 정점에 있는 브라흐마에게 까지 전달 된 것은 눈깜짝할 시간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는 이들 신들이 그 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신들의 문제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수와 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지만 아래 세계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바퀴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할 때 꼰단냐가 이해하였다. 이는 불교사적으로 보았을 때 대사건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이 최초로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법의 바퀴가 굴러 가는 순간이다.

 

한 번 구르기 시작한 법의 바퀴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굴러 오고 있다. 그런 법의 바퀴는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 (appativattiya)’ 이라 하였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바퀴이다.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광대한 빛이

 

그런데 이를 옆에서 지켜 보던 땅의 신 붐마데와가 세상에 알려 버린 것이다. 그것도 신들의 세계에 알려 버린 것이다. 법의 바퀴가 굴러 감을 알게 되자 스스로 외친 것이다. 그런 외침을 바로 위에 있는 신이 듣게 되고, 또 그 위에 있는 신이 듣게 되어 마침내 하느님(브라흐마)의 귀에도 들어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천상의 정점에 있는 하느님은 외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위에 천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뉴스를 듣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경에서는 이 빅뉴스가 하느님 세계까지 미치자 전에 보지 못하던 광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Ayañca dasasahassī lokadhātu            아얀짜 다사사핫시 로까다뚜

sakampi sampakampi sampavedhi.         산깜삐 삼빠깜삐 삼빠웨디.

Appamāo ca uāro obhāso                압빠마노 짜 울랄로 오바소

loke pāturahosi:                        로께 빠뚜라호시:

atikkamma devāna devānubhāvanti.      아띳깜마 데와낭 데와누바완띠.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

 

 

 

 

 

Energy you bring — ball of light

 

 

 

여기서 일만세계(dasasahassī lokadhātu)는 불교적 우주관을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대천세계(十千世界)’라는 뜻이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사대륙의 세계 또는 우주를 말한다. 천이 열이면 일만이다. 이런 일만세계가 진동한 것이다. 그리고 무량(Appamāo)하고 광대한 빛(uāro obhāso)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신들의 위력을 뛰어 넘었다는데

 

세계가 진동하고 빛이 나타났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SF판타지 소설을 쓴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비유이다. 법의 바퀴가 최초로 굴러 가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밤중에 번개가 치면 갑자기 번쩍하며 순간적으로 환해진다. 그리고 몇 초 후 천지를 진동하는 우르르꽝꽝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이런 것을 확대하여 묘사한 것이라 보여진다.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무량한 빛이 우주 구석까지 미쳤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 번도 빛이 들어간적이 없는 곳까지 비추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신들의 위력(devānubhāvanti)’을 뛰어 넘었다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브라흐마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 지배종교이었던 브라만교를 말한다. 그렇다면 경에 묘사된 신들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

 

디가니까야 자나바싸바의 경(D18)’에 따르면 신들의 위력에 대한 설명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제석천]

 

벗들이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나는 징조들이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D18)

 

 

제석천은 도솔천(뚜시따)의 왕이다. 이는 욕계천상의 신으로서 하느님(브라흐마) 보다는 한참 아래이고,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신이다. 그런데 천상의 정점에 있는 신 브라흐마(하느님)이 나타날 때는 전조가 있다고 한다. 출현하기 전에 먼저 광대한 빛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브라흐마가 출현하기 전에 보여주는 전조라 한다. 마치 태양이 떠오를 때 일출이 먼저 성립하는 것과 같다. 이른 아침에 태양이 아직 떠 오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날이 훤한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경에서 신들의 위력(devānubhāvanti)’으로 표현 되었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이를 뛰어 넘는 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뛰어 넘은 것일까?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

 

초기경에서 일만세계의 진동과 광대한 빛에 대한 이야기는 초전법륜경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디가니까야의 비유의 큰 경(Mahāpadāna Sutta, D14)’에서도 볼 수 있고, 맛지마니까야의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bbhutta Sutta , M123)’에서도 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의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M123)’에 따르면, 부처님이 모태에 들었을 때와 모태에서 나왔을 때에 대한 묘사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난다여, 보살이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 무리에서 죽어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었을 때에, 신들의 세계에, 악마들의 세계에, 하느님들의 세계에,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에,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달도 태양도 그와 같은 커다란 신통력 그와 같은 커다란 위신력으로도 빛을 비출 수 없는,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 빛으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라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듣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배웠습니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bbhutta Sutta , 맛지마니까야 M123, 전재성님역)

 

 

이처럼 디가니까야와 맛지마니까에서는 부처님이 모태에 들었을 때와 모태에서 나왔을 때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 빛은 브라흐마신이 출현할 때 볼 수 있는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빛이었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아난다는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던 일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초전법륜경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일만세계의 진동과 광대한 빛이 나타나는 것은 세 가지임을 알 수 있다 1)보살이 모태에 들었을때와 2)모태에서 태어났을 때, 그리고 3)최초로 법의 바퀴가 굴러 갈 때, 이렇게 세 가지 경우라 볼 수 있다.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

 

위 문구에서 초전법륜경에는 표시되어 있지만 디가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lokantarikā aghā asavutā andhakārā andhakāratimisā)’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디가니까야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lokantarikā aghā asavutā andhakārā andhakāratimisā: 세계 주변에서 수미산을 둘러 싸고 있는 철위산(cakkavala)이 있다. 세계의 철위산 사이에 하나의 아비지옥이 있다. 이 문구는 80,000km에 달하는 아비지옥을 묘사한 것이다. Smv. 433에 따르면, 칠흑 같은 암흑은 시각의식의 생기를 막는 암흑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비유의 큰 경-Mahāpadāna Sutta D14, 각주, 전재성박사)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라는 것은 지옥을 뜻한다고 한다.

 

맛지마니까야 각주에 따르면 lokantarikā는 세계 사이를 말하는데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지옥을 의미한다. 그리고 aghā 어둡다는 뜻인데 이는 완전히 감추어진의 뜻이라 한다. asavutā 밑에서 지지 되지 않는의 뜻이라 한다. andhakāratimisā 는 시각의식의 장애에 의한 어둠을 말한다.

 

이는 무슨 말일까? 세 세계의 사이에는 8000요자나 거리에 해당되는 공간이 있다고 한다. 이를 디가니까야 주석에서는 80,000km로 환산하여 설명하였다. 즉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버려진 공간을 말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각주에서는 서로 닿는 수레바퀴발우 그릇사이의 공간과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일종의 사각지대를 말한다.

 

그런 곳은 항상 어둠에 가득찬 곳이라 한다. 그래서 그곳에 떨어진 자들은 태어날 때 시각능력을 갖지 못한다고 한다. 마치 땅속에서만 사는 두더지나 동굴안에서만 사는 박쥐의 눈이 퇴화 되어 시각능력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그런 곳에는 어떤 자들이 가게 되는 것일까? 맛지마니까야 각주에 따르면 부모를 죽이거나 올바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죽이거나 습관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은 무거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태어나는 곳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는 한마디로 어두컴컴한 아비지옥을 말한다. 그 어느 쪽 세계에도 속하지 않고 철저하게 버려진 세계, 어둠의 세계를 말한다.

 

아비지옥에 이르기 까지

 

그런데 부처님의 출현으로 그런 곳까지 빛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은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 빛으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그제서야 처음으로 서로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이처럼 아비지옥 구석 구석까지 부처님의 무량하고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은 신들의 위신력을 뛰어 넘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입태와 탄생, 그리고 초전법륜으로 인하여 위로는 하늘세계,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이르기 까지 모두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이야말로 윤회를 종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으로 본다.

 

과거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은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한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은 무엇일까? ‘비유의 큰 경(D14)’에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라 볼 수 있다. 비빳씬 붓다가 수행승의 무리에게 의무계율을 송창한 것이다.

 

 

[비빳씬]

 

1)

Khantī parama tapo titikkhā,

Nibbāna parama vadanti buddhā.

Na hi pabbajito parūpaghātī

Samao hoti para vihehayanto.

 

참고 인내하는 것이 최상의 고행이며

열반은 궁극이다. 깨달은 님들은 말한다.

출가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 님이고

수행자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 님이다.(Dhp184)

 

2)

Sabbapāpassa akaraa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

eta buddhānasāsana.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의 가르침이다.(Dhp183)

 

3)

Anūpavādo anūpaghāto

pātimokkhe ca savaro,

mattaññutā ca bhattasmi

pantañca sayanāsana,

Adhicitte ca āyogo

eta buddhāna sāsana

 

비방을 삼가고 해치지 않고

계행의 덕목을 지키고

식사에서 알맞은 분량을 알고

홀로 떨어져 앉거나 눕고

보다 높은 마음에 전념하는 것,

이것이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5)

 

(비유의 큰 경-Mahāpadāna Sutta D14,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법구경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두 번째 게송(Dhp183)을 보면 불교의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다. 과거에 출현한 부처님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이기 때문이다.

 

여든 살 노인도 행하기 힘든 것

 

법구경 183번 게송은 당나라 시대 백거이와도 관련이 있다. 백거이가 도림선사를 찾아가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도림선사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이라 하였다. 그러자 백거이는 “ ‘모든 죄악을 짓지 말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받들어 행하라.’라는 말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는 말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선사는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으나 여든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게송은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라 한다.

 

 

 

2013-07-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