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대승불교의 깨달음과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13. 23:30

 

대승불교의 깨달음과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가?

 

 

 

초기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는 것이다. 주로 글쓰기를 이용하여 공부한다. 하루 일과 중 거의 반을 글쓰기에 할애 한다.

 

돈도 안되는 글쓰기를 왜 하는가? 그것은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듯이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글이 쓰고 싶기 때문이고 가르침을 더 알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니까야를 통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발견하였을 때 마치 보석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든다. 주로 각주, 주석서, 해제글 등을 통해서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가르침를 분석하고 설명해 놓은 주석의 중요성은 마치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

 

불교를 안 것은 오래 되었다. 종립중학교 다녔을 때 처음 접하였기 때문이다. 1학년 때 부처님의 일생부터 배웠는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부처님의 일생인데, 그 중에서도 사대문 밖에서의 생노병사 체험 등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 후 불교와 인연이 끊어졌다. 그리고 한 참 후 2004년도에 다시 불교를 접하였다. 대승불교와의 인연이다. 스스로 선택하여 찾아가 공부한 것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언가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는 듯 하였다. 관세음보살정근에 따라 108배를 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철야기도회 등을 하였지만 기독교 따라하기로 보였다.

 

기독교 따라하기의 전형은 법문이다.  법문에서 부처님 대신에 하나님으로 바꾸면 목사가 설교한 것인지 햇갈릴 정도이었다. 설교라면 고교시절 미션스쿨에서 3년간 지겹게 들어 보았는데, 스님의 법문이 그것과 크게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불교가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지 의문스러웠다.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불교교양대학으로 맺어진 법우님들과의 인연이 벌써 햇수로 10년째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사찰순례, 연등축제 등 수많은 행사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법우님들은 여전히 대승불자들이다. 그럼에도 행사에 참여하면 의식에 따른다.

 

대승불교의 정견(正見)

 

초기불교를 스스로 공부하면서 대승불교와 비교하게 된다. 어떤 점이 가장 다른 것일까? 주로 불교TV사이트에서 스님들의 법문이나 학자의 강의를 들어 보았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이 정견(正見)’에 대한 것이었다.

 

정견에 대한 단순한 풀이는 바른 견해이다.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이 바른 견해에 대하여 대승불교와 초기불교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정견 개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불교TV사이트에서 로버트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서부터이다. 버스웰 교수는 대승에서 말하는 정견은 내 마음속의 본래불이 있다고 믿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전제가 있어야 화두참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내 마음속에 본래불, 불성, 진여가 있다고 확고 하게 믿는 마음이 간화선 3요체 중의 하나인 대신심이라 하였다. 그런데 도법스님도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첫째가 정견(正見)이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가 바로 정견이다. 정견이 그대로 부처의 견해이다.

 

대부분 정견을 거친 다음 더욱 향상 발전해서 부처의 견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이다. 그 밖에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지 않다.

 

만일 정견 말고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전도몽상의 견해일 뿐이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지금 여기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 직면한 존재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고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이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도법스님은 존재의 실상, 본래부처를 보고 이해하는 것이 정견이라 하였다. 이런 정견이 바로 서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대승에서 말하는 정견은 본래 자기가 부처이었던 것을 아는 것이라 한다. 이런 견해는 설우스님의 법문에서도 들었고, 최근 혜원스님은 불교TV사이트에서 팔정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정견은 모든 우주만물 두두물물 그것들이 자타시비없이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그런 시비없이 어떤 진여 불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제5 불교의 바른 신심2013-04-15 불교TV)”라고 말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선사들이 말하는 정견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정견과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는 정견을 무어라 말할까?

 

초기불교의 정견(正見)

 

 

초기불교를 접하고 모든 것을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이제 까지 알았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무자로서 공의 입장에서 그토록 부정하였던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 불교의 핵심 교리부터 다시 본 것이다.

 

초기불교 교리는 37조도품으로 설명된다. 특히 팔정도가 가장 핵심인데, 그 중에서도 핵심이 정견이다. 그렇다면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 위방가경에 정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Ya kho bhikkhave,

dukkhe ñāa

dukkhasamudaye ñāa

dukkhanirodhe ñāa

dukkhanirodhagāminiyā paipadāya ñāa,

aya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세존]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2)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알고

3)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정견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성제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dukkhe ñāa~)”로 설명된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고

 

누군가 정견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불자들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한국불교에서는 정견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팔정도에서의 정견이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스님도 없고 그럼에 따라 불자들도 모르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정견이 사성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이삼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정견은 고사하고 팔정도라는 것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가에서는 정견이란 본래불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 내용도 스님들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불교TV법문을 듣고서 알았다. 절에서 스님들은 본래불을 아는 것, 즉 간화선의 3요체 중의 하나인 대신심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하는 말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이었다.

 

버스웰 교수 강의를 통해 들은 정견이야기는 그 어떤 선사의 법문 보다도 매우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웠다. 영어로 이야기하고 우리말 자막이 나오는 형식이었지만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진여의 관점에서 볼 때,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이다. 이를 ‘본각(本覺,original enlightment)’이라 한다.

 

그러나 통상적인 현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수행을 통해 변화시켜야 하는 무지한 중생들이다.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실현되고 얻어져야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를 성취된 깨달음, 속세의 깨달음, 조건 지어진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시각(始覺, acquired enlightment)’이라 한다. 얻어진 깨달음이란 뜻이다.

 

(버스웰 교수,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11, 12, 불교tv)

 

 

버스웰 교수는 본각과 시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 있는 내용이다. 설명에서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 한다. 그러서 모두 부처라 한다. 단지 자신이 깨닫지 못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의 과정이라 한다.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이 자신이 이미 깨달은 존재임을 믿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간화선의 3요체 중의 하나인 대신심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녹취하고 정리하여 하나의 불교를 위하여, 원효스님의 일심(一心)사상과 화쟁(和爭)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나그네는 어느 길로 가야 할 지 망설인다. 만약 길을 잘못 들어서면 헤매게 될 지 모른다. 그래서 프로스트는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다.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 피천득 옮김)

 

 

 

 

The Road not Taken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유명한 시이다. 시에서 마지막 구절에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라고 후회하고 있다. 그것은 잘못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을 가게 된 것에 대한 후회이다.

 

산에서 길을 가다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 그 때 가장 안전한 것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다니지 않은 샛길이나 아예 길 없는 길로 들어 서는 경우도 있다. 그때 대부분 후회하게 된다.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이다.

 

정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이 있고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이 있는데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선불교에서는 본래불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고,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두 갈래 길을 연상하게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정견이 다르면 깨달음도 달라진다. 길이 다르니 목적지가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효는 물, 바람, 파도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불각에서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인 구경각까지 이루었다 할지라도 결국 깨달음은 우리가 새롭게 창조해낸것이 아니라 늘 거기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 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 깨달음의 실현은 우리가 본생적으로 깨달은 존재라는 진리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버스웰 교수,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11, 12, 불교tv)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대승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자신이 본래 부처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라 한다.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이다. 그래서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본래적으로 깨달은 존재임을 확인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깨달음의 단계

 

이와 같은 깨달음의 단계가 대승기신론에 설명되어 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No

  

   

1

본각

(本覺,original enlightment)

-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

-모든 존재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기만 하면 됨

2

시각

(始覺, acquired enlightment)

-속세의 깨달음, 얻어진 깨달음

-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성취되어야함을 의미

3

불각

(不覺, nonenlightment)

-지금 여기 이 순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

- 불각의 상태를 자각해야만 함

4

상사각

(相似覺, pseudo-enlightment)

-허위, 가짜의 깨달음

- 도덕, 윤리를 수행의 출발점으로

-원효는 소승불교의 깨달음이라 함

5

수분각

(隨分覺, approximate enlightment)

-대략 깨달은 단계

-깨달음이 이미 내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단계

-여전히 이분법적 아상에 집착하고 있는 단계

6

구경각

(究竟覺, final enlightment)

-마지막 깨달음, 궁극적 깨달음

-이분법적 분리가 사라진 단계

 

 

표에서 본각이 있다. 이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깨달은 존재임을 말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가장 먼저 우리가 본래 깨달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심을 먼저 내라고 한다. 이렇게 본래 부처임을 굳게 믿었을 때 초발심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초발심하였을 대승불교에서는 이미 깨달은 것으로 본다. 그 다음 부터는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만 하는 과정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다. 10, 20, 30년 될 수도 있다. 아니 평생 걸릴 수 있고 어쩌면 이 생에서 확인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스님들이 선방에서 10, 20, 30년 심지어 평생 화두참구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법성계에 따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하였다. 이 말은 처음 깨달음의 마음 을 내는 그 순간에 이미 깨달음이 성취되어 있다라는 뜻이다. 다만 과정만 남아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이처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본래불을 아는것이라 한다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초전법륜경(S56;11)이 아닐까 생각된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두 번 깨달음이 있게 된다.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꼰단냐존자가 법안이 생겨났을 때의 깨달음이다. 그때 꼰단냐는 이렇게 말한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삽반땅 니로다담만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S56:11)

 

 

경에 따르면 꼰단냐에게서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viraja vītamala dhammacakkhu udapādi)”라 하였다. 중요한 말은 생겨났다(udapādi)’라는 말이다. 이는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을 말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거나 우리는 본래불이라는 것과 다른 말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이다. 발생된 것이다. 없던 것에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이점이 가장 차이가 크다.

 

그런 법안은 다름 아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진리이다. 일견 매우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이 한 구절로 인하여 꼰단냐존자는 사성제를 모두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를 이해하였기 때문에 성자의 흐름에 든 것이다. 수다원이 된 것이다.

 

깨달음의 완성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 그래서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된다.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이다. 그 과정이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이다. 마침내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깨달음이 완성된다. 이때 다음과 같은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akuppā me cetovimutti,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ayamantimā jāti 아야만띠마 자띠

natthidāni punabbhavoti 낫티다니 뿌납바워띠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S56:11)

 

 

부처님은 아라한이다. 십호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번뇌가 소멸되고 청정하게 된 것을 자신이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이 없고 윤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고 한다.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의 단계

 

이와 같은 사성제의 가르침은 결국 깨달음의 이해에서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이를 삼전십이행상과 함께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1

2

3

고성제

궁극적으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과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알려져야 한다.

(pariññeyyanti)

그것은 나에게 완전히 알려졌다.

(pariññātanti)

집성제

갈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제거 되어야 한다.

(pahātabbanti)

그것은 나에게서 제거 되었다.

(pahīnanti)

멸성제

열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실현되어야 한다.

(sacchikātabbanti)

그것은 나에게 실현되었다.

(sacchikatanti)

도성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닦여져야 한다. (bhāvetabbanti)

그것은 나에게 닦여졌다.

(bhāvitanti)

도의 단계

견도(見道)

 

사성제의 이해

(수다원)

수도(修道)

 

번뇌의 소멸 과정

(사다함, 아나함)

무학도(無學道)

 

번뇌의 소멸 및

깨달음의 완성

(아라한)

 

 

표를 보면 견도, 수도, 무학도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번뇌가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감각적 욕망(kāma-rāga)’ 등 오하분결이 사다함과 아나함의 과정을 거치면서 소멸되고, 아라한이 되었을 때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등 오상분결이 모두 소멸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열반에 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정견이 서로 다르다 보니

 

두 개의 표를 비교해 보면 첫번째와 마지막 단계를 주목하게 된다. 이는 선불교와 초기불교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확연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즉 정견이 다름으로 인하여 목적지도 달라짐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의 정견은 우리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초발심시변정각이라 하여 믿기만 하면 깨달음은 이미 성취된 것과 같다고 한다. 다만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과정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번뇌의 소멸과 같은 구체적인 말은 보이지 않는다. 또 나 자신이 부처임을 확인하였을 때 이분법적 분리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하나가 됨을 말한다. 그래서 본래불과 내가 다름 없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번뇌를 남김 없이 소멸하여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청정범행을 닦아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였을 때 깨달음은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정견이 다르면 깨달음의 내용도 다른 것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정견과 깨달은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철저하게 부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반야심경에서 그렇다.

 

초전법륜경을 무력화 시킨 반야심경

 

불자들이 조석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에는 무()자와 불()자가 많이 들어가 있다.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긍정적인 언표보다 부정적인 언표를 하는 것이 더 잘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 중의 두 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대한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S56:11)”라는 문구를 부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법의 공상이라는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다는 것이다. 생멸은 오로지 현상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고, 공의 세계 진여의 세계에서는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둘째, 불구부정(不垢不淨)에 대한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를 부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역시 법의 공상이라는 것이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더럽다든가 깨끗하다는 것은 오로지 현상계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법계에서는 더럽지도 깨끗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공의 논리로 간단하게 부정하였다. 불생불멸, 불구부정으로 초전법륜경의 가르침이 부정되었고, 이후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모두 공의 입장에서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다 보니 정견이 달라졌다. 정견이 달라지다 보니 목적지 또한 달라졌다. 서로 다른 길로 간 것이다.

 

정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스님들은 정견이 중요하다고 한다. 법문할 때 마다 늘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정견이라는 것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대신심을 내기 위한 그 정견을 말한다. 나 자신이 본래불임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초기불교와 다르다. 그래서 일묵스님은 정견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어떤 방향을 수행을 할 것인가는 정견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신다면 수행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먼저 정견에 대한 올바른 이해하고, 그에 맞게 단계 단계를 밟으면서 수행을 하면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데,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게 되면 수행이 중구난방이 됩니다.

 

(일묵스님 특별법문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 제2 팔정도란 무엇인가?, 불교tv)

 

 

정견은 방향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한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길을 잃고 헤메이기 쉽듯이 정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수행이 중구난방 되어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었을 때, 더구나 지도고 나침반도 없이 안내자도 없이 홀로 갔을 때 길을 잃고 헤매이기 쉽다는 것이다.

 

안내자로서 부처님

 

그렇다면 헤메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이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길을 가본 안내자를 말한다. 그 가이드의 말대로 따른 다면 틀림 없이 목적지까지 갈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다면, 그때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왕이나 왕의 대신들에게 ‘왕이시여,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저는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도시를 다시 세우십시오.’라고 권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들이 그 도시를 다시 세웠다면, 그 도시가 나중에 번영하고 부유해지고 사람들이 몰리고 인구가 많아져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옛 성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승들이여, 전생에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이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7-5),전재성님역)

 

 

나그네가 길을 걷다가 우연하게 아름다운 고대도시를 발견한다. 여기서 나그네는 부처님을 말하고 아름다운 고대도시는 열반을 말한다. 이렇게 고대도시를 발견한 부처님은 안내자로서 부처님이다. 그래서 자신의 말대로 그 길을 죽 따라 가면 아름다운 고대도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 도시에 이르는 방법, 즉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다름 아닌 팔정도라 한다.

 

부처님이 가셨던 길

 

부처님의 고대도시 이야기를 보면 프로스트의 시 두 갈래의 길이 생각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또는 길 없는 길로 들어 섰다가 후회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확실한 길을 제시한다. 부처님 자신이 갔었던 길이고, 그 도시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라 하였다.

 

팔정도에서 정견이 바로 사성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나 아름다운 도시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길 아닌 길, 길 없는 길로 들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지도없이 나침반 없이 더구나 안내자도 없이 홀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길을 잃어 버리기 쉽상일 것이다. 그래서 정견을 바로 세워야 길을 잃지 않고 헤메이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2013-07-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