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보조 수단으로 전락한 사띠(sati)
법인스님의 글에서
불교포커스에 실려 있는 컬럼을 읽었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교육부장을 지냈고 현재 보선스님 캠프의 대변인을 맡고 있는 법인 스님의 글이다.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마치 무엇이든 그것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그것에 의해서 용어가 생기나니 장작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지저깨비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지저깨비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짚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짚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소똥을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소똥불이라는 용어가 생기며 왕겨를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왕겨불이라는 용어가 생기며 쓰레기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쓰레기불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무엇이던 그 조건을 반연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에 의해서 용어가 생긴다. 눈과 형상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눈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귀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코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혀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몸과 감촉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마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 맛지마 니까야 -
(법인스님, 길은, 가면 뒤에 있다 수행으로 인간은 변할 수 있는가? ① 불교포커스 2013-09-07)
스님은 글쓰기를 좋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곳 저곳에 기고한 글을 많이 보았다. 언젠가 ‘휴심정’에 기고한 글을 보았는데 스님은 청소년시절에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고교시절 출가한 것이다. 이는 자발적 출가라 본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절에 맡겨져 자란 동진출가와는 다른 것이다.
어렸을적 출가한 스님들
현재 한국불교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이 어렸을적 출가한 스님들이라 생각된다. 보릿고개를 못넘겨서 절에 맡겨진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하여 절에 맡겨져 자랐을 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스님이 된 것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라 스님이 된 스님들은 유독 세상것들에 대하여 호기심과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는 자발적으로 출가한 스님들과 대조 되는 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문제 되고 있는 은처, 도박 등 갖가지 승려비리의 주인공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도 동진출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은처의혹을 받고 있고 동시에 도박하였다고 고발된 상태이다. 더구나 중앙종회 시절 고위직을 맡았을 때 룸살롱 출입한 이력까지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갖가지 의혹과 추문으로 점철된 스님은 어렸을 적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자발적 출가가 아닌 절에 맡겨져 동진출가하게 된 스님들이 고위직에 있는 한 한국불교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할 수밖에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가?
법인스님이 인용한 문구를 찾아 보니 맛지마니까야 38번경인 ‘Mahātaṇhāsaṅkhayasutta’이다.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이라 번역된다. 대승불교환경에서 초기불교경전을 인용하여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놀랍지만 출처를 좀더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단지 ‘- 맛지마 니까야 –‘라고 처리한 것은 개선해야 될 점이라 본다.
스님이 인용한 책은 초기불전연구원에서 간행된 맛지마니까야이다. 대림스님이 번역하고 각묵스님이 감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스님들은 대부분 초불연 번역서를 인용한다. 성전협의 맛지마니까야가 나온지 10년이 넘었고 개정판이 나온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불과 1년도 안된 번역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할까?
인용된 경을 보면 ‘알음알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마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라는 구절을 보면 알음알이가 두 번 나오는데 일반독자들이 이해 하기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할 것이라 보여진다.
비구를 비구라 부르지 않아서?
그렇다면 성전협의 전재성박사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인용된 문장과 관련된 내용을 옮겨 보았다.
[세존]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불이란 그 연료에 따라서 이름 지어지는 것과 같다. 불이 장작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장작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나무조각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모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섶에 의해서 타게 되면 그 때는 섶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쇠똥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쇠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왕겨로 인해서 타게 되면 왕겨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쓰레기로 인해서 타게 되면 쓰레기불이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의식은 어떠한 것도 그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이름 지어진다.
1)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시각의식이라고 한다.
2) 청각과 소리를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청각의식이라고 한다.
3) 후각과 냄새를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후각의식이라고 한다.
4) 미각과 맛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미각의식이라고 한다.
5) 촉각을 감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촉각의식이라고 한다.
6) 정신과 사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정신의식이라고 한다.
(Mahātaṇhāsaṅ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님역)
번역비교를 해 보면 우선 부르는 명칭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초불연에서는 “비구들이여”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수행승들이여”라고 하였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스님들이 재가불자가 번역한 것에 대하여 ‘비토(veto)’를 놓은 것이라 보여 진다. 비구를 비구라 부르지 않고 수행승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용납할 수 없음을 뜻한다고 보여진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스님들이 인용하는 경전은 대부분 초불연 것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수행승들이여”라고 시작 되는 재가자의 번역을 인용한 스님의 글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마노의 알음알이’ 라고
경에서 빠알리어 윈냐나에 대하여 초불연에서 ‘알음알이’라 하였다. 이에 비하여 성전협에서는 ‘의식’이라 하였다. 오온에서 ‘색수상행식’ 할 때 ‘식(識)’에 대하여 ‘알음알이’와 ‘의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다른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번역된 전혀 다른 느낌이 된 것 같다. 경에서 여섯 번째 항목을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viññāṇaṃ, manoviññāṇanteva saṅkhaṃ gacchati.
1)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마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초불연)
2) 정신과 사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정신의식이라고 한다.(성전협)
빠알리어 마노(Mano)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원어 그대로 사용하여 ‘마노[意]’라 하였고, 성전협은 ‘정신’이라 하였다. 빠알리어 원냐나(viññāṇ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알음알이’라 하였고, 성전협은 ‘의식’이라 하였다. 담마( Dhamm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법’이라 하였고, 성전협은 ‘사실’이라 하였다. 그런데 마노와 윈냐나가 결합된 마노윈냐나(manoviññāṇan)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마노의 알음알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정신의식’이라 하였다. 어느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의 몫이다.
스님들 세계에서 초불연 번역서가 읽혀 지다 보니 방송에서도 초불연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불교 방송과 불교 tv에서 방송스타 스님으로 유명한 월호 스님도 최근 초기경전을 인용한 법문을 즐겨 하고 있는데, 스님이 법문 중에 ‘알음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았다. 초불연 번역서의 영향이라 본다. 그러나 일반불자들에게 있어서 식을 알음알이로 해석하여 말하는 것에 대하여 선뜻 와 닿지 않는다. 들으면 들을수록 생소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알음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스님들이 오로지 초불연 번역서 한가지에만 매달리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없었던 존재가 아닌 空性이며”
경에서 마음이 대상을 보았을 때 의식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장작불, 모닥불 등 그때 그때 조건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붙여지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발생할 뿐이지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법인 스님은 자신의 컬럼에서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있었던, 없었던 존재가 아닌 空性이며, 모든 존재는 조건발생인 緣起이며,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가질 수 없는 無常하다는 '사실판단'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법인스님, 길은, 가면 뒤에 있다 수행으로 인간은 변할 수 있는가? ① 불교포커스 2013-09-07)
우리나라 스님들 거의 대부분은 대승불교에서 출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원에서 한문으로 된 대승불교 경전을 배우고 선원에서는 간화선 위주의 수행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절 인연이 되어 빠알리니까야를 접하게 된 것이라 본다. 그러다 보니 철저하게 대승불교 또는 선불교의 관점에서 초기불교를 접근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하여 초기불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들은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초기불교를 말할 때 대승불교의 교리를 곁들여 이야기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스리랑카에서 십수년간 공부하였다는 ‘아눌라 비구니 스님’은 청정도론의 16단계 지혜를 설명할 때 항상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이나 불생불멸 등과 같은 문구를 곁들였다. 또 아잔브람으로부터 초기불교를 배웠다는 ‘각산스님’ 역시 불교방송 사이트 법문을 보면 반야심경과 연관시켜 법문을 하였다. 이렇게 우리나라 스님들은 대승불교를 뼈대로 하여 초기불교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일까 법인스님 역시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있었던, 없었던 존재가 아닌 空性이며” 라고 하여 ‘공성’을 말하고 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는 미산스님
빠알리니까야에 공성이라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회색승복의 초기불교주의자들은 공이나 공성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특히 대승경전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반야심경의 심오한 문구와 접목을 시도 하고 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미산스님도 빠질 수 없다.
미산스님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학승이다. 스님을 소개할 때 항상 따라 붙는 수식어가 있다. 옥스퍼드 박사라는 타이틀이다. 인도와 영국에서 초기불교를 전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스님은 간화선을 놓지 않는다. 스님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보았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툰다.
비구들이여,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210)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는 이렇듯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는 안목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초기경전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 내지 선불교에 대한 촌평들을 간헐적으로 접할 수 있다. 그 촌평들을 읽어보면, 세간과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는, 법답게 말하는 자의 면모가 확인된다고 말해도 허언이 아닐 것이다:
(법답게 말하는 자는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고 —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를 읽고)
미산스님의 책 ‘초기경전 강의’에 대한 서평에 있는 글이다. 소개자는 미산스님에 대하여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는 안목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있는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툰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 때문에 초기불교이든 대승불교이든 모두 진리로 받아 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책에서 인용한 경전 문구가 “비구들이여”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초불연의 책을 인용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을 말할까 구체적으로 어떤 경전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책에서 근거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경전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었다.
Nāhaṃ bhikkhave, lokena vivadāmi. Loko ca1- kho bhikkhave, mayā vivadati. Na bhikkhave, dhammavādi kenaci lokasmiṃ vivad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Puppha sutta-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각주에 따르면 중생계, 조건계, 현상계 이렇게 세 가지 세상이라 한다. 부처님이 “세상과 함께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을 때는 ‘중생계’를 말하고, “세상에는 원리가 있다.”라고 말하였을 때는 ‘조건계’가 된다. 그리고 부처님이 “여래는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성장한다.”라고 말하면 ‘현상계’가 된다.
앗티(atthī)와 낫티(natthī)
그런데 이어지는 법문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ṃ bhikkhave, n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natthīti vadāmi. Yaṃ bhikkhave, 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atthīti vadāmi.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이다’라고 말한다.
(Puppha sutta-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4, 전재성님역)
번역문에서 ‘앗티(atthī)’ 에 대하여 ‘이다’ 로 번역하였고 ‘낫티(natthī)’ 에 대하여 ‘아니다’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인식론적’으로 보아 번역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이를 ‘있다’ 와 ‘있지 않다’라고 ‘존재론적’으로 번역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있다고 말한다.(S22.94)”로 번역하였다.
불교는 존재론인가 인식론인가?
성전협과 초불연 두 번역문을 보면 ‘이다’와 ‘있다’ 그리고 ‘아니다’와 ‘없다’의 차이이다. 이런 차이는 현상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볼 것인가 존재론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차이라 보여 진다. 그렇다면 불교는 인식론일까? 존재로일까? 이에 대하여 재가의 묘원법사는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시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기서 조금 짚고 넘어 가야 될 것이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불교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식론이에요. 존재는 그 것 자체가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을 말합니다.
사실 존재는 인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이 때의 인식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며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귀결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면 무아를 알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착 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서양철학은 존재론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 이야기 우리 많이 들어 보았을 거에요. 그러나 이러한 존재는 지극히 사변적인 것이에요. 존재의 실재는 인식을 통해서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관념(개념)과 실재의 문제이에요. 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바로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입니다.
몸을 존재로 보면 관념으로 보는 것이라서 몸이 가진 성품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인식으로 보면 몸이 가진 성품을 보아서 사물을 바르게 통찰 할 수가 있습니다.
(묘원법사,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년 10월 29일자,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5:사대)
묘원법사는 재가자로서 현재 위빠사나를 지도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7년간 실참수행을 한 결과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천주교를 믿다가 미얀마에서 수행을 통하여 불교로 전향하였는데 대승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묘원법사에 따르면 초기불교는 인식론임에 틀림 없다. 만일 초기불교에서 존재론을 말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존재론을 말한다면 이는 서양철학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한다. 몸을 존재론으로 보면 관념(개념)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개념으로 보면 몸이 가진 성품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물을 바르게 통찰할 수 없다고 한다. 몸이니 정신이니 하는 말은 이름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 개념으로서 실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느낌을 통하여 차갑다든가 딱딱하든가 등으로 인식하였을 때 비로소 실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에 대하여 개념적인 존재론으로 보면 결코 무상, 고, 무아를 볼 수 없고,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인식론으로 보아야 무상, 고, 무아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빅쿠 보디(Bhikkhu Bodhi)의 존재론
꽃의 경(Puppha sutta, S22.94)에서 앗티(atthī)와 낫티(natthī)에 대하여 성전협의 전재성박사는 ‘이다’와 ‘아니다’라 하여 인식론적으로 번역하였다. 반면 초불연의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은 ‘있다’와 ‘없다’라 하여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전재성박사의 각주에 따르면 CDB에서 존재론적 번역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CDB는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의 약자로서 ‘빅쿠 보디(Bhikkhu Bodhi)’ 가 상윳따니까야를 번역한 책을 말한다.
전재성박사의 각주에 쓰여 있는 CDB의 atthīti와 natthīti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Cdb.949에서 존재론적인 번역을 택하고 Cdb.1085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책 12:15의 경에서 이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보완적인 가르침을 제공한다. 세존은 모든 존재론적인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만 부정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깟짜야나곳따경’이 중도적인 가르침이 존재와 비존재의 정태적이고 실체론적인 개념을 몰아내는데 비해 여기서는 동일한 중도적인 가르침이 존재론적인 주제에 관한 결정론적인 견해를 화해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상한 과정으로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한 긍정은 세계에는 실재론적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환상가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꽃의 경(Puppha sutta, S22.94) 에서 atthīti와 natthīti에 대한 각주, 전재성박사)
오늘날 ‘빅쿠 보디(Bhikkhu Bodhi)’의 영향력은 매우 큰 것 같다. 빅쿠 보디가 지은 CDB가 종종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주에 따르면 빅쿠 보디는 깟짜야나곳따경(S12:15)에 언급된 부처님의 중도사상에서 존재론을 완전히 부정하였음에도 꽃의 경(S22.94)에서 만큼은 존재론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atthī와 natthī에 대하여 ‘있다’와 ‘없다’라고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존재론에 기반을 둔 실재론적 존재가 있음을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빅쿠 보디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경에 언급된 현자라는 말을 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각주에 따르면 “뿌쌩은 Joumal Asiatique 1902 p257 Madhyamakavrtti III 에 이 문장이 인용되면서 ‘현자들이(paṇḍitānaṃ)’라는 단어가 빠진 것을 지적했다.(Krs.II.117)”라고 지적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제대로 인용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빅쿠 보디의 존재론은 특수한 현상에 대한 설명에 대하여 일반화, 합리화, 정당화 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원융을 시도하는
꽃의 경에서 빅쿠 보디의 존재론적 번역의 영향이어서일까 초불연에서는 atthī와 natthī에 대하여 ‘있다’와 ‘없다’라고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꽃의 경’의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리는 문구를 인용하여 미산스님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원융을 시도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자신의 책에서 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의 이치와 우주 만유의 이법을 가르쳐주는 연기법은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설해집니다. 초기경전 말고도 연기법과 관련된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특히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화엄경은 연기법을 우주적인 차원에서 확대해석한 것입니다. ‘총상’, ‘별상’, ‘사사무애’, ‘이사무애’ 등의 개념들을 도입하여 연기법을 총체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연기緣起의 ABC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61)
(미산스님, 법답게 말하는 자는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고 —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를 읽고)
미산스님의 책 61쪽에 있는 내용이다. 스님은 초기불교의 연기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계연가가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초기불교의 연기를 우주적 차원에서 확대해석한 것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이사무애, 사사무애라는 것이다. 이는 법계연기를 말한다.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 법계연기
법계연기와 부처님이 설한 연기는 다르다. 법계연기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若有此卽有彼)”로 표현되는 ‘상호의존적 연기’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부처님이 설한 연기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若無此卽滅彼).”라 하여 ‘상호의존적연기’와 ‘조건발생적연기’를 모두 만족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계연기에는 조건발생에 따른 연기가 빠져 있다. 만일 대승불교의 연기관에 조건 발생연기를 적용한다면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오로지 상호의존적 연기이어야만 법계연기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계연기는 존재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若有此卽有彼)”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실재론을 부정하였다. 브라만이나 아뜨만과 같은 실재를 부정하기 위하여 조건발생적 연기법을 적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은 자신의 책에서 “연기법을 총체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화엄경입니다.”라 하였다. 하지만 화엄경의 법계연기는 상호의존적 연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연기법을 총체적으로 설하고 있다는 부분은 맞지 않다고 본다.
여래장사상은 실체론이 아니라고
존재론에 대한 대표적 예가 여래장사상이다. 이에 대하여 미산스님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승불교 쪽의 여래장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실체론적으로 흘러버릴 요소가 있습니다. 불교는 무아를 이야기하는데, 여래장 사상은 ‘여래장’, ‘불성’이라는 영원불멸의 뭔가가 있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 설령 여래장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것이 연기적, 중도적인 관점에서 다시 걸러져야 합니다. 이런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 여래장을 이야기하게 되면 실체론으로 갈 가능성이 다분하지요. 그러나 연기의 프리즘을 통해 이야기하면 일반적인 실체론과는 다른 차원을 지니게 됩니다.(74)
(미산스님, 법답게 말하는 자는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고 —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를 읽고)
미산스님은 여래장 사상이 실체론이 아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실체’이다. 그런 실체는 ‘실재’와 다르다. 스님은 여래장 사상이 실체론이 아니라고 하였지 실재론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실체(實體)는 ‘어떤 대상의 진정한 정체나 본질’ 또는 ‘현실에 존재하는 물체’로 정의 된다. 눈, 귀 등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을 말한다. 그러나 실재(實在)는 ‘실제로 존재함’의 뜻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세계’라는 철학적 의미가 있다.
실체와 실재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미산스님은 여래장에 대하여 실체론이 아니라고 하였을 뿐 실재가 아니다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말을 뒤집어 말하면 ‘여래장사상은 실재론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수행 체험을 직접 해보면”
스님은 여래장사상에 대하여 “일반적인 실체론과는 다른 차원을 지니게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실재한다는 의미로 본다. 왜 그렇게 보는가? 그것은 미산스님이 초기불교를 전공하였음에도 여전히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들어 본래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믿고 본래불을 수행을 통하여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자에게 있어서 본래불은 실재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론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자신의 책에서 간화선 수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 체험을 직접 해보면 불성, 참나, 이런 것이 어떤 자리인지를 스스로 체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체득한 상태에서는 어떤 용어를 쓰더라도 걸리지 않죠. 그 말을 쓰는 당사자는 체득해서 걸림이 없는데, 혹 다른 사람이 그걸 듣고 실체론적으로 뭐가 있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어요.(314)
(미산스님, 법답게 말하는 자는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고 —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를 읽고)
간화선 수행을 하면 불성, 참나 등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여래장 사상의 불성, 참나, 본래불, 진여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대하여 실체가 아니라 한다. 그렇다고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진여, 불성, 참나 등이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을 통하여 실재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존재론이다.
나를 찾는 수행
여래장 사상의 참나, 불성, 본마음, 진여 등 여러 이름은 개념화 된 것이다. 몸에 대하여 ‘몸’이라고 명칭 되어진 것과 같다. 그러나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몸은 실체가 없다. 단지 수행을 통한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경행을 할 때 부드러움, 딱딱함 등을 느낄 때 성품은 실재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참나, 불성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알 수 없다. 실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간화선 수행자는 참나 등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믿음이다. 그래서 간화선에서는 가장 먼저 믿음을 내라고 한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다. 이것이 간화선 3요체 중에 대신근이다. 이런 믿음의 바탕하에 실재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간화선 수행이다. 그렇게 궁극적 실재와 합일 하기 위하여 선방에서 10년, 20년, 30년, 평생을 보낸다. 하지만 아직까지 궁극적 실재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참나, 불성 등은 거북털, 토끼뿔, 개뿔 처럼 오로지 개념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불성, 참나 등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여래장 사상의 참나, 진여, 불성이 실체는 없지만 실재 하는 것으로 본다. 만약 존재한다면 개념적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나를 찾는 수행이 간화선이다.
오늘날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이 초기불교를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와의 원융을 시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승불교가 주체가 되어 초기불교를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한다. 초기불교를 연구하고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하긴 히지만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간화선의 보조 수단으로 전락한 사띠(sati)
대승불교, 특히 선불교와 초기불교와의 원융시도는 수행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원융이다. 간화선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초기불교의 수행을 이론을 접목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사띠(sati)를 들 수 있다.
회색승복의 미산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부처님은 사띠라는 말을 수행언어로 쓰십니다. 물론 이때 사띠에는 기억이라는 뜻도 분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에서 사띠라는 말을 쓸 때는 과거의 것을 끄집어내어 외운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현재 깨어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한문의 ‘염念’자를 잘 보세요. ‘이제 금今’자에 ‘마음 심心’자,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지금 어떤 명상의 대상, 수행 대상—화두면 화두, 호흡이면 호흡—에 밀착해서 그것을 놓치지 않는 마음이 ‘염’입니다. [...] 팔정도에서도 간화선에서도 사띠는 매우 중요합니다. [...] 간화선의 경우는 화두를 놓치지 않으면 이게 의정으로 변해 의정이 우리 몸의 60조 세포에 가득 차고, 완전히 의심덩어리가 된 몸과 마음 전체가 의단으로 변했을 때, 바로 그때 완전한 삼매가 형성되고, 여기서 굉장히 강한 사띠가 형성됩니다. 간화선의 중요 포인트도 여기에 있습니다.(263)
(미산스님, 법답게 말하는 자는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고 —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를 읽고)
미산스님의 글을 보면 각묵스님이 각종강연이나 기고문에서 했던 말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띠라는 용어에 대하여 단지 ‘지금 현재 깨어 있는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대상을 놓치 않는 마음’이 사띠라 하여 간화선 수행의 의단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스님의 글을 보면 회색승복을 입은 불교에서는 초기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 하는 사띠가 단지 간화선 수행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
사띠가 기억의 의미가 아니라고
초기불교 전도사로 잘 알려진 각묵스님은 각종 기고문에서 사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그럼 마음챙김(念, sati)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음챙김은 빠알리어 사띠(sati, 念, 기억)의 역어인데 이것은 √smr.(기억하다)에서 파생된 추상명사로 사전적인 의미는 ‘기억’이다. 그러나 초기불전에서 사띠(sati)는 거의 대부분 기억이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주로 접두어 ‘anu-’를 붙여 ‘아눗사띠(anussati)’라는 술어를 사용하거나 √smr.에서 파생된 다른 명사인 ‘사라나(saran.a)’라는 단어가 쓰인다. 물론 수행과 관계없는 문맥에서 사띠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 ① 왜 마음챙김인가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스님, [불교신문 2643호/ 7월28일자], 2010-07-24)
스님은 사띠가 기억의 의미가 아니라고 하였다. 특히 수행과 관련해서 기억이라는 의미로 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수행에 맞는 번역어로서 마음챙김이라는 새로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영향이어서일까 미산스님 역시 사띠가 기억의 의미가 아니라 ‘지금 현재 깨어 있는 마음’임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런 마음이 바로 마음챙김이라 한다. 이런 마음챙김은 다름 아닌 화두 챙김과 같다고 주장한다.
마음챙김은 화두 챙김과 같다고
이런 마음챙김은 다름 아닌 화두 챙김과 같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챙긴다는 것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에서 수행법인 화두 챙기는 것, 화두를 챙긴다, 챙김이라는 말을 따와가지고 마음챙김이라 했습니다. 마음챙김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국불교 전통수행법을 초기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하고 연결시켜 주는 번역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장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화두챙김과 마음챙김은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미산스님의 대상을 놓치지 않고 현재 깨어 있는 마음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본다. 초기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인 사띠가 간화선의 화두를 참구하는 용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회색승복을 입었기 때문이라 본다. 간화선을 위주로 하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초기불교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인 사띠에 대하여 간화선에서는 화두 참구 하는데 있어서 부수적인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회색승복의 초기불교주의자들의 말처럼 사띠라는 용어가 수행의 의미로 쓰일 때는 기억의 의미가 없이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각묵스님은 사띠 번역어를 마음챙김으로 하였다. 그러나 번역어 마음챙김이라는 말에는 가장 중요한 ‘기억’이라는 뜻이 없다. 마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가장 중요한 기억이라는 뜻이 빠진 것이 번역어 마음챙김이다. 그런데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이라고 명명한 것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운나바바라문경(S48)과 불설안반수의경을 들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그래서 수행에 맞는 번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번역을 할 것인가. 그래서 ‘운나바 바라문경’에서는 사띠는 우리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죠. 그렇게 문답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챙기는 역할을 한다. 혹은 마음이 대상을 챙겨서 해탈 열반으로 지향한다. 이래 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장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초기불교전도사이자 빠알리나까야 번역자인 각묵스님이 이해 하는 사띠에 대하여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챙기는 역할”이라 하였다.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이라는 말에 기억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근거로 들어 말한 것이다. 과연 각묵스님의 말처럼 사띠라는 용어가 수행용어로 사용되었을 때 기억이라는 말이 들어 가지 않은 것일까?
오력에서 사띠의 정의를 보면
흔히 초기불교에서 교학체계에 대하여 ‘온처계근제연’으로 설명된다. 한자어의 머릿글자를 따서 외우기 쉽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온처계근제연’은 ‘5온 12처 18계 22근 4성제 12연기’의 약자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수행체계는 어떤 것일까?
초기불교 수행체계는 37도품으로 설명된다. 표현된다.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구성요소가 모두 37개가 있다는 것이다. 이 37개 중에 사띠와 관련된 것이 8 개이다. 그래서 9개의 정진 다음으로 많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사띠가 초기불교 수행에 얼마나 비중이 높은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띠 8개는 사념처(4), 오근(1), 오력(1), 칠각지(1), 팔정도(1)에 있다. 이중 오력과 칠각지에서 사띠의 정의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오력에 들어 있는 사띠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능력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실천하여,…
(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8:10, 전재성님역)
오력에 있어서 사띠에 대한 설명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사띠에 대하여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실천하여”라고 말씀 하였다. 이는 사띠가 기억의 기능이 있음을 말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 될 때는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대체 어떤 경을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각묵스님은 자신이 번역한 문장에서도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S48:10, 분석 경, 각묵스님역)”라 하였다. 자신이 번역한 마음챙김의 기능이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라고 하였음에도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라고 말한 대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칠각지에서 정의된 사띠
또 하나 사띠가 기억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칠각지에서 볼 수 있다. 칠각지에서 부처님은 사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그는 이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된다. 수행승이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닦으면, 그 때 수행승의 새김의 깨달음 고리는 닦임으로 원만해진다. 이와 같이 새김을 닦으면서 그는 그 가르침을 지혜로 고찰하고 조사하고 탐구한다.
(계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3, 전재성님역)
칠각지에서도 사띠가 기억의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이 사띠라 하였다.
새기고 또 새겨서 항상 기억하는 것
이처럼 오력과 칠각지에서 공통적으로 사띠에 대하여 기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기억은 무었일까? 다름 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기고 또 새겨서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사념처에서 사띠는?
이렇게 오력과 칠각지에서 사띠에 대하여 정의 되어 있다. 그런데 사띠가 들어간 팔정도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사념처로 설명하고 있다. 사념처에는 사띠에 대한 항목이 네 개나 들어가 있다. 그래서 37조도품 중 총 여덟 개에서 반에 해당되는 네 개가 사념처에 있는 것이다. 그런 사념처에서는 사띠는 어떻게 정의 되어 있을까?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1)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초불연, M10)
2)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성전협, M10)
사념처에서는 사띠가 단독으로 사용되기 보다 ‘삼빠잔나’와 함께 사용된다. 그래서 ‘sampajāno satimā’로 표현 되는데, 이를 초불연에서는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라 하였고, 성전협은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라 하였다.
삼빠잔나와 알아차림
삼빠잔나를 알아차림이라 번역한 것은 모두 같다. 그러나 사띠를 번역한 것을 보면 마음챙김과 새김으로 다르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각묵스님이 언급한대로 기억이라는 기능이 없는 것을 말하고, 새김은 기억의 기능이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띠에 대하여 단순히 알아차림이라 번역하기 보다 새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제자가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사띠에 대하여 기억이 기능이 들어 가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사띠의 원래 의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긴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부처님의 제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지 않은 것을 하고 앉아 있을지 모른다. 부처님이 궁극적 실재는 없다고 하였는데 나를 찾는 수행을 하고 앉아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띠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겨야만 수행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챙김인가 새김인가?
부처님이 열반할 때 시자인 아난다에게 당부한 것이 있다.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라고 묻자 부처님은 최종적으로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Sati, ānanda, upaṭṭhāpetabbā, D16)”라고 하였다. 여기서 새김은 사띠를 말한다.
사띠에 대하여 단순히 ‘마음챙겨야 한다’거나 ‘알아차려야 한다’라고 말하면 정확한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본다. 사띠의 원래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띠의 원래 의미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새김’이라고 번역된 것은 매우 탁월하다. 기억의 의미도 있을 뿐 더러 돼새기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새김을 확립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지금 여기서 알아차리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
그런데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면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마음챙김에 기억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알아차림만이 있을 것이다. 왜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 없이 단지 ‘현재 깨어 있는 마음’이나 ‘대상을 놓지 않은 마음’으로 두는 것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기능이 있는 새김이라는 용어는 모두 아우른다. 새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난다에게 필요한 가르침은
아난다에게 필요한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부정관’일 것이다. 사념처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머리카락, 몸털 등 32가지가 오물로 가득차 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또 시체 등과 같은 열 가지에 대하여 관찰하면 세상의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외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Sati, ānanda, upaṭṭhāpetabbā, D16)”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sampajāno patissato)
이처럼 사띠에 대하여 단순히 대상을 알아차린다든가 지금 현재 깨어 있는 마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병이 났을 때도 탁발을 나갈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띠를 확립한다는 것은 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띠와 삼빠잔나는 대체적으로 함께 사용된다.
초기경에서 탁발을 나갈 때 “그는 감관을 수호하여 잘 다스리고,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Sn3.1)”라는 문구가 있는데, 여기서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가 ‘sampajāno patissato’이다. 이는 사념처에서 ‘sampajāno satimā’와 같은 의미이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김(sati)’ 하는 바탕에서 ‘알아차림(sampajāna)’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겨야 탁발을 나갔을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병이 났을 때도 가르침을 기억하고 가르침에 의지할 수 있다. 기리마난다경(A10:60) 이 좋은 예라 본다.
인식의 전환만으로도 병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알아차리면 병도 낫고 병도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약을 쓰지 않고 수술하지 않아도 낫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세존]
이난다여, 만약 그대가 수행승 기리마난다에게 가까이 가서 이와 같은 열 가지 지각에 대하여 설하면, 수행승 기리마난다가 이와 같은 열 가지 지각에 대하여 듣고 질병이 그 자리에서 나아 질 수 있을 것이다. 열 가지란 무엇인가?
아난다여, 무상에 대한 지각, 실체 없음에 대한 지각, 부정에 대한 지각, 위험에 대한 지각, 버림에 대한 지각, 사라짐에 대한 지각, 소멸에 대한 지각, 모든 세계에 즐길만한 것이 없음에 대한 지각, 모든 형성의 무상에 대한 지작, 호흡새김이다.
(기리마난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0: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열 가지 가르침을 주었다. 열 가지에 대하여 지각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로 ‘인식의 전환’이다. 약을 먹지 않아도 수술을 하지 않아도 중병이 나을 수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보면 “물질이 무상하고 느낌이 무상하고 지각이 무상하고 형성이 무상히고 의식이 무상하다.’고 성찰한다. (A10:60)”라고 하였다. 이는 오온이 무상함을 관찰함을 말한다.
이런 관찰은 인식의 전환을 야기 한다. 생각이 바뀜에 따라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경의 말미에서 아난다의 열 가지 지각에 대한 설명을 듣자 기리마난다는 “질병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질병에서 회복 되어 병이 나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인식의 전환만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긴 결과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본다면 사띠는 단순히 ‘알아차림’이나 ‘지금 현재 깨어 있는 마음’ 또는 ‘대상을 놓지 않는 마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2000년을 전후하여
2000년을 전후하여 세상이 크게 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변환한 것이었다. 그래서 디지털 기기의 사용이 본격화 되었다. 그럼에 따라 컴퓨터 환경도 크게 바뀌어 도스시대에서 윈도우시대로 급속하게 변환 되었다. 이렇게 윈도우 환경으로 바뀌자 소프트웨어도 급속하게 윈도우 버전으로 바뀐다. 대표적으로 캐드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2000년 이전에 도스버전 캐드를 사용하였다. 도스버전에 익숙하다 보니 윈도우 컴퓨터 시대가 되었음에도 윈도우 버전 캐드를 사용할 수 없었다. 마치 아날로그와 디지털 차이만큼이나 도스와 윈도우의 차이가 컷기 때문이다. 차이라기 보다 차라리 ‘단절’이 나을 듯 하다. 도스버전 캐드시스템은 윈도우 환경에서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윈도우 버전 캐드 시스템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러자 이전에 애지중지 하며 사용하였던 도스버전은 버려지게 되었다. 윈도우환경하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최근 까지 도스버전을 쓰는 것을 보았다. 윈도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불편을 감수 하며 옛것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 불과 10여년 밖에 되지 않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구석기인처럼 보였다.
불교도 마찬가지라 본다. 빠알리니까야가 1999년에 최초로 번역되어 나온 이래 4부 니까야가 완역되었다. 이는 디지털시대가 가 열린 것과 같다. 대승불교는 직관적이기 때문에 아날로그 이미지와 유사하고, 초기불교는 이성적이기 때문에 디지털 이미지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불교는 디지털 이지미와 매우 유사하다. 이렇게 초기불교가 도입된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정보통신과 교통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부처님의 원음이 전파된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 보기 때문이다.
간화선 보조 수단으로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다르다. 그 차이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만큼이나 크고 도스캐드프로그램과 윈도우캐드프로그램만큼이나 단절 된 것이다. 그럼에도 회색승복을 입은 초기불교주의자들은 대승불교와 ‘원융’을 시도 하고 있다. 대승의 입장에서 초기불교를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사띠’이다.
회색승복의 초기불교주의자들은 사띠에 대하여 간화선 수행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이 역력하다. 이는 각묵스님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초기불교를 전파하고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한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 간화선은 초기경에서 이야기 하는 오근, 오력과 배대해서 이해하면 된다. 간화선도 불교수행인 이상 불교 교학적인 입장에서 간화선을 어떤 식으로 든지 설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 저는 무엇입니까. 초기불교를 전공하는 사람이잖아요. 저는 나름대로 간화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4: 제23장 오력, 제24장 칠각지(전반부))
각묵스님은 오력에 대하여 간화선의 삼요체인 대신근, 대분지, 대의정에 배대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저는 나름대로 간화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승의 입장에서 초기불교를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대승과 초기불교와의 원융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띠의 번역어 마음챙김에는 기억의 기능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는 뜻의 기억의 뜻이 있다면 간화선 삼요체에 배대 치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다. 그래서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기억의 기능이 빠진 채 ‘지금 현재 깨어 있는 마음’ 또는 ‘대상을 놓지 않는 마음’의 역할이다. 이는 마음챙김이 화두챙김과 유사함을 말한다.
하지만 사띠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가르침에 대하여 기억하고 사유하여 지금 현재 깨어 있음은 물론 대상을 놓지 않는 마음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색승복의 초기불교주의자들은 사띠의 의미를 반감하였다. 그리고 대승의 간화선 수행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 이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와 융합을 꾀하는 것이다. 하지만 융합하려 하려 하는 것은 마치 아날로그 전축에 CD를 넣으려 하는 것과 같고, 윈도우 도스버전 컴퓨터에서 윈도우 캐드프로그램을 깔려고 하는 것과 같다.
계속 원융을 시도한다면
만일 회색승복을 입은 초기불교주의자들이 대승과 초기불교를 원융을 계속 시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가르침을 크게 훼손할 것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회색승복을 입은 승가에서는 같은 회색의 스님이 번역한 번역물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2013-09-13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경법(八敬法)이 성립한 이유는? 고따미의 경(A8.51)과 대애도비구니경 (0) | 2013.09.28 |
---|---|
부끄러운 자화상 호국불교, 전사의 경(S42.3) (0) | 2013.09.27 |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왜 어려운가, 정법(正法)만나기가 왜 어려운가 (0) | 2013.09.12 |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고” 여덟 가지 힘과 갈애 (0) | 2013.09.10 |
빠알리니까야 반복구문, 이대로 생략해도 좋은가? (0) | 2013.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