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고” 여덟 가지 힘과 갈애
어느 스님의 영상법문을 듣고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불교TV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영상법문이다. 법문에서 스님은 인상적인 말을 하였다. ‘힘으로 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었다. 여러 가지의 예를 들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이었다. 어린아이는 ‘떼’를 쓰는 것으로 힘을 삼고,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는다는 취지의 법문이었다. 이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 것은 현실적으로 타당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여인이 힘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 ‘성냄’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중에 글을 쓰기 위하여 다시 찾아 보았다. 그러나 어느 파일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글로 쓴 것이라면 ‘찾기’로 해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영상법문의 경우 이곳 저곳 찔러 보아야 하기 때문에 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찾는 것을 포기하고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다.
여덟 가지 힘으로 삼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를 뒤적이다가 해제에서 문제의 문구를 발견하였다. 스님이 법문한 내용과 같은 이야기이었다. 간단한 내용임에도 해제에서 소개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마도 공감하는 내용이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Aṭṭhimāni bhikkhave, balāni, katamāni aṭṭha: ruṇṇabalā bhikkhave, dārakā, kodhabalo mātugāmo, āvudhabalā corā, issariyabalā rājāno, ujjhattibalā bālā, nijjhattibalā1 paṇḍitā, paṭisaṅkhānabalā bahussutā, khantibalā samaṇabrāhmaṇā, imāni kho bhikkhave, aṭṭhabalān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힘이 있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린아이는 우는 것으로 힘을 삼고,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고,
도둑은 무기로 힘을 삼고, 왕은 권력으로 힘을 삼고, 어리석은 자는 불만으로 힘을 삼고, 현명한 자는 성찰로 힘을 삼고, 많이 배운자는 숙고로 힘을 삼고, 수행자나 성직자는 인내로 힘을 삼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힘이 있다.
(Bala sutta-힘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23, 전재성님역)
법수별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앙굿따라니까야이다. 여덟 가지 힘에 대한 이야기는 앙굿따라니까야 앗타까니빠따(Atthakanipāta)에 들어 있다. 여덟(8)을 주제로 한 모음이다. 그래서 힘의 경도 여덟 가지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왜 출처를 말하지 않는가?
여덟 가지 힘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스님이 법문한 내용과 똑같다. 그러나 스님은 법문에서 출처를 말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이야기한 것처럼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 스님들의 고질적인 병폐라 본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전반적으로 경을 근거로 하여 법문 하지 않는다. 법문할 때 주로 자신의 이야기 위주로 이야기 한다. 심지어 시시콜콜한 신상이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연설하듯이 법문하는 스님도 있고 마치 호통치듯이 큰소리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호통법문’을 들었을 때 거부감을 느낀다. 본인은 호통법문을 함으로써 스트레스가 풀릴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듣는 사람을 전혀 고려 하지 않은 일방적인 이야기의 전달에 지나지 않는다.
경을 근거로 하지 않은 것은 글쓰기에서도 볼 수 있다. 좀처럼 근거를 밝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는 것을 많이 보았다. 예를 들어 하나의 게송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그냥 ‘법구경에 있다’라고 하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이다. 법구경에 수 백개의 게송이 있지만 몇 번째 게송인지 알 수 없다. 그럴 경우 법구경 게송 넘버를 표기하는 것이 예의라 본다.
니까야도 마찬가지이다. 초전법륜경을 인용한다면 ‘S56.11 ‘라고 표현 해 주어야 한다. S는 상윳따니까야를 지칭하고, 56은 56번째 진리상윳따를 의미하고, 11 은 11번째에 있는 경을 말한다. 이렇게 근거를 표시 해주면 나중에 찾아 보기 쉽다. 글을 쓴다면 최소한 경의 근거를 표시해 주는 것이 좋고, 법문을 한다면 경의 이름이라도 알려 주는 것이 좋다. 그러나 대부분 경의 근거를 대지 않고 마치 자신이 이야기 한 것처럼 말한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슬쩍 가져가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스님들이 예를 들어 말한 내용들이 모두 초기경전에 실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덟 가지 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고
경에서 부처님은 여덟 가지 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우는 것이 힘 (ruṇṇabalā)’이라 하였다.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우는 아이에게 젖준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는 떼를 써서 부모를 굴복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또 여인은 ‘성냄이 힘(kodhabala)’ 이라 하였다. 이 말 역시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대체로 여인들은 화를 냄으로서 남자를 굴복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여 지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여덟 가지 예를 들고 있다. 어린 아이, 여인, 도둑, 왕, 어리석은 자, 현명한 자, 수행자나 성직자 이렇게 여덟 부류의 사람이다. 그래서 이들 여덟 부류가 힘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경에서는 이들 여덟 가지 힘이 어떤 이유로 발생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단지 어리석은 자는 ‘불만으로 힘을 삼는다(ujjhattibalā)’든가, 현명한 자는 ‘성찰로 힘을 삼는다(paṭisaṅkhānabalā)’는 식으로 짤막하게 한 문장으로 끝내고 있다.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것은 더 이상 긴 설명을 필요치 않을 정도로 깊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권력으로 힘을 삼는다(issariyabalā)’든가, 도둑이나 강도는 ‘무기로 힘 을 삼는 다(āvudhabalā)’는 설명은 지극히 타당한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수행자나 성직자는 ‘인내를 힘으로 삼는다(khantibalā)’고 하였다.
남성은 탐욕, 여성은 성냄?
경에서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는다고 하였다. 화를 내는 것이 여인의 힘의 원천이라 한다. 그래서 화를 냄으로 인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남성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여인에 대해서는 성냄이 힘의 원천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묘사 하였다면 ‘이는 남녀차별이고 불평등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이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미 여덟 가지 안에 다 언급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둑이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기라 하였는데, 무기를 든 도둑들 거의 대다수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남성이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마도 ‘탐욕’이 될 것이다.
여성의 힘이 성냄에서 나온다면 남성의 힘은 탐욕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명예욕, 권력욕 등 오욕락에 대한 추구는 남성에게 작용하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질투는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다. 영화제목이기도 하고 책의 제목이기도 한다. 성인영화에서는 질투가 시기와 미움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힘으로 묘사 되어 있다. 아동도서에서는 질투라는 감정속에 숨겨진 긍정적인 힘으로 묘사 되어 있다. 또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기형도의 시도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가혹한 것이 많았구나
구름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렷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니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인은 자신의 희망이 질투에서 비롯되었음 말하고 있다. 시인이 젊은 날에 품었던 꿈과 열정은 결국 질투에 불과하였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질투는 자신을 지탱하게 해주는 커다란 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자신을 지탱해 주는 힘의 원천은
누구나 자신을 지탱해 주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다. 또 재산일 수도 있다. 통장에 잔고가 많이 쌓여 있을 때 든든한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보험을 들었다면 역시 미래의 힘이 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명예, 권력 등 수 많은 힘의 원천이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을 지탱해 주는 힘의 원천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o ariyasaccaṃ: 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ṃ: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아이가 우는 것으로 힘으로 삼는 것도 여인이 성냄을 힘으로 삼는 것도 알고 보면 ‘갈애’ 때문이다. 또 도둑이 무기로 힘을 삼는 것도 갈애 때문이고, 어리석은 자가 불만을 힘으로 삼는 것도 갈애 때문이다. 질투가 힘인 것도 갈애에 따른 것이다. 배우자, 자식에 대하여 힘을 원천으로 삼는 것도 갈애 때문이고, 재산을 많이 갖고자 하는 것 역시 갈애 때문이다. 그런 갈애의 특징은 무엇일까?
갈애는 경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즐기는 것(nandi)’이다. 그것도 즐길거리를 찾아 여기저기로 찾아 다니는 것이다. 이를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bhinandinī)’라 하였다. 그래서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눈으로, 귀로, 혀로, 감촉 등으로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즐길거리를 찾아 헤메이다보면
오늘날 HD 화면으로 제공 되는 이야기들은 눈으로 즐길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방송 저 방송에서 경쟁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즐길거리를 탐닉하다 보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래서 또 다른 즐길거리를 찾아 리모콘으로 수 많은 채널을 선택한다. 음악도 즐길거리에 속한다. 전철이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스마트폰에 연결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귀로 즐기는 것이다.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음악을 찾아 이곡 저곡 선곡한다. 이렇게 ‘여기 저기에서 환희’하는 것을 경에서는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bhinandinī)’라 하였다.
맛을 찾아서 맛집을 순례하고, 사랑을 찾아 이사람 저사람 사귀는 것도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다. 이처럼 이리 저리, 여기 저기에서 즐길거리를 찾는 것에 대하여 경에서는 ‘갈애(taṇhā)’라 하였다. 그것도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ponobhavikā)’ 갈애라 하였다. 미래에 새로운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이 갈애라는 것이다. 즐길거리를 찾아 헤메이다보면 미래에 어느 존재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아를 바탕으로 한 갈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하는 갈애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kāmataṇhā), 존재에 대한 갈애 (bhavataṇhā), 비존재에 대한 갈애 (vibhavataṇhā) 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갈애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철저하게 자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은 나의 마음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여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감각적 쾌락을 누려도 내가 누리는 것이고, 오래 영원히 살고 싶은 것고 내가 바라는 것이다. 심지어 죽어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싶은 욕망도 이몸과 마음이 내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애는 철저하게 자아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다.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는 갈애
그런데 십이연기에 따르면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때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한자어 ‘갈애’라는 말에 천착하여 즐거운 느낌만이 갈애를 유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갈애에 대하여 ‘애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갈애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것이다. 그 결과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염오하고 이욕해야 함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갈애가 어떻게 새로운 태어남으로 되어 지는 것일까? 이는 십이연기 순관을 보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라는 정형구가 이를 말해 준다. 갈애가 결국 태어남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어남을 업유(業有)라 한다. 업으로 인한 태어남을 말한다.
조건발생적 연기를 설한목적은?
부처님은 연기법에서 조건발생적 법칙에 대한 가르침을 펼친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부처님이 연기의 순관만을 이야기 하였다면 이는 윤회하는 삶에 대한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조건발생적 연기를 설한 궁극적 목적은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연기의 역관을 설하였다.
연기의 역관과 같은 것이 사성제에서 멸성제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멸성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o ariyasaccaṃ: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갈애의 소멸이 멸성제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갈애의 소멸은 결국 윤회의 종식을 말한다. 갈애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갈애의 대상에 대하여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여야 함을 말한다. 오온이 나의 것, 나의 마음,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오온에 대하여 염리, 이욕 하면 해탈할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괴로움의 소멸이자 동시에 윤회의 종식이다.
갈애의 소멸과 윤회의 종식
이는 다음과 같은 법구경의 게송에서 확인 할 수 있다.
Anekajātisaṃsāraṃ 아네까자띠삼사랑
sandhāvissaṃ anibbisaṃ 산다윗상 아닙비상
Gahakārakaṃ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ṃ 둑카 자띠 뿌납뿌낭.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Gahakāraka diṭṭhosi 가하까라까 딧토시
Puna gehaṃ na kāhasi 뿌나 게항 나 까하시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삽바 떼 빠수까 박가
gahakūṭaṃ visaṅkhitaṃ 가하꾸땅 위상카땅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위산카라가땅 찟땅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딴하낭 카양 앗자가.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 153-154,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taṇhānaṃ khayam-ajjhagā)”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열반을 성취함으로써 조건지워진 것들에서 벗어낫다.(DhpA.III.129)”는 뜻이다. 이는 십이연기의 역관에서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라는 정형구와 일치한다.
갈애가 소멸하면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더 이상 윤회 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집을 짓는 자, 즉 갈애가 윤회하게 하는 원인을 알았기 때문에 조건소멸에 따른 연기법으로 갈애를 부순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이와 같이 십이연기의 역관과 사성제의 멸성제는 같은 의미이다. 부처님이 십이연기 순관을 설한 것은 역관을 염두에 둔 것이고, 부처님이 집성제를 설한 것은 멸성제를 염두에 두고 설한 것이다. 따라서 십이연기는 반드시 순관과 역관이 항상 한쌍으로써 정형화 되어 있고, 사성제에서 집성제와 멸성제는 항상 함께 설명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Vuttaṃ kho panetaṃ bhagavatā: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Paṭiccasamuppannā kho panime yadidaṃ pañcupādānakkhandhā. Yo imesu pañcasupādānakkhandhesu chando ālayo anunayo ajjhosānaṃ, so dukkhasamudayo. Yo imesu pañcasupādānakkhandhesu chandarāgavinayo chandarāgappahānaṃ, so dukkhanirod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ṃ hoti.
[싸리뿟따]
그런데 세존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은 연기된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 욕망하고 집착하고 경향을 갖고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발생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벗들이여, 이렇게 되면 그 수행승들에게 많은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Mahāhatthipadopamasutta-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2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라고 하였다. 이는 매우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 오로지 이 경에서만 나오는 말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연기를 보는 자는 조건적으로 생겨난 사실(緣生法, paticca samuppanne dhamme)을 보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사실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Pps.II.230)”는 뜻이라 한다.
조건발생적으로 사유하는 자만이
십이연기에서 갈애를 조건으로 결국 태어남이 있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집성제에서 갈애가 ‘새로운 태어남(ponobhavikā)’을 야기 한다는 말과 같다. 이로 보았을 때 연기와 사성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볼 수 있다”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연기적으로 조건발생적으로 사유하는 자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에 대하여 알려면 그 사람이 연기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본마음이나 참나 등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상호의존적 연생만 이야기 할 뿐 조건발생에 따른 연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깨달은 자라 볼 수 없다. 또 불성이나 법성 등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사성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결코 진리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십이연기와 사성제와의 상관관계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따라서 연기를 말하지 않는 깨달음과 진리는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한다.
갈애는 윤회의 동력
윤회의 동력은 갈애이다. 갈애야말로 세세생생 윤회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그런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한다. 그래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발생된다. 이때 즐거우면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탐욕’이 발생하고, 괴로우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성냄’이 발생한다. 이런 탐욕과 성냄은 윤회의 원동력이 된다. 탐욕과 성냄은 업으로서의 태어남을 유발하기 때문에 윤회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땔감’이라 볼 수 있다. 탐욕과 성냄이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은 동시에 발생할 수 없다. 그래서 두 가지 중의 하나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좋아함과 싫어함이 극명한 사람이 갈애가 강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에서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고 (A8:23)”라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본다면 여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싫어함’에 더 민감한 것 같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등 ‘좋아함’에 더 민감한 것 같은데 이는 남자가 여자와 비교하여 신체적 구조가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남성은 더 자극적이어서 즐거움이나 좋아함 등 거머쥐려는 성격이 더 강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남자는 탐욕으로 여자는 성냄으로 특정지어지는 것은 아닐까?
글쓰기는 나의 힘
시기 하고 질투 하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을 때 질투하는 것은 엄청난 힘을 야기 한다. 반면 한반에서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있을 때 그 아이를 질투하면 더 큰 자극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질투는 부정적인 힘도 있고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힘도 있다.
지금 글쓰기 하는 것도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자극 받았을 때이다. 삶의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일로 느낌이 일어 났을 때 글쓰기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넋두리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가르침과 결합 해야 한다. 그래서 경전을 찾아 보게 된다. 경전을 찾는 이유는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그래서 방대한 경전에서 답을 찾게 되었을 때 글쓰기가 힘을 받는다. 그런 글쓰기는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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