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에 매여 있는 뭇삶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30. 12:32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에 매여 있는 뭇삶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사람들은 집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로 불리우고, 직장에서는 대리나 과장 또는 사장으로 불리운다. 군대 훈련병 시절에는 번호로 불리운다. 유격장에서는 올빼미 넘버로 불리운다. 맞선 프로에서는 여자1호이니 또는 남자3호 등으로 불리운다.

 

이렇게 명칭 부여 되었을 때 그 명칭이나 이름을 부르면 하고 대답하거나 뒤돌아 본다든가 하여 반응을 보인다. 이는 이름이나 명칭, 별명,  아이디 등을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amaññā hesā lokasmi

nāmagotta pakappita
Sammucc
ā samudāgata

tattha tattha pakappita

 

세상에서 쓰는 이름이나 성은

명칭의 시설에 지나지 않으니,

그때마다 통하는 명칭으로 생겨나

여기 저기 시설되는 것입니다.

 

(Vāseṭṭhasutta-바쎗타의 경, 숫따니빠따 Sn3.9, 전재성님역)

 

 

세상에서 통용되는 이름이나 성 등의 여러 명칭이 단지 부여된 것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부르기 좋게 그때그때 부여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름이나 명칭을 부여 받게 되었을까?

 

호모사피엔스

 

부처님은 와셋타경(Sn3.9)경에서 인간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다른 생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벌레나 나비는 출생의 특징이 있다. 이는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다. 네 발 달린 짐승 역시 짐승만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물들은 출생에 따른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떠할까? 사람도 나비나 개, 사자처럼 출생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은 오로지 한종이다. 그래서 호모사피엔스라 한다. 지구상에 인류는 오로지 한 종 밖에 없다. 따라서 출생에 따른 다양성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각기 인간의 몸자체에는 그런 구별이 없습니다. 인간 가운데 구별은 단지 명칭일 뿐입니다. (Sn3.9)”라고 말씀 하였다. 단지 인간을 구분하는 명칭(Samaññā)’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그때 그때 통용 되는 명칭이 있어서 구분된다는 것이다.

 

소치는 바라문

 

부처님 당시 바라문이 있었다. 바라문은 사성계급에 있어서 가장 정점에 있는 계층으로서 지배계층이었다. 그런 바라문은 태생적으로 바라문이었을까? 바라문이나 노예나 같은 호모사피엔스임에도 바라문은 태어 날 때부터 바라문이었을?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o  hi koci manussesu

gorakkha upajīvati,
Eva
vāseṭṭha jānāhi

kassapo so na brāhmao.

 

인간 가운데 소를 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와셋타여, 그는 농부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Vāseṭṭhasutta-바쎗타의 경, 숫따니빠따 Sn3.9, 전재성님역)

 

 

소를 치며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바라문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바라문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농사를 짓고 있다면 농부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이처럼 태생이 바라문이 아니라 행위가 신분을 결정한다고 하였다. 이는 고대의 인도에서 바라문들이나 현자들은 생활이나 계행이나 행위에서 잘못 행하는 자에게 바라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출가수행자들에게도 볼 수 있다.

 

농사짓는 출가수행자

 

마성스님의 글 ‘출가절의 현대적 의미’에서 옮긴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문이 있었다. 그는 한적한 곳에 가서 열심히 정진하여 출가한 본래의 목적인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히말라야 산록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들어가 그곳에 정착했다. 그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급자족하면서 수행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농기구가 필요했다. 그는 농기구를 마련했다. 그런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가축도 필요했다. 가축의 배설물이 있어야 퇴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 양, 돼지, 닭 등 많은 가축을 길렀다. 그러다 보니 일손이 모자랐다. 하루 종일 바삐 움직여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가난한 여인이 찾아왔다. 그는 부족한 일손을 도와달라고 그녀에게 요청했다. 그렇게 같이 살면서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길렀다. 그러는 사이 자녀도 열두 명이나 생겼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정진하여 출가한 목적을 이루려고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그는 이미 늙어 더 이상 정진할 수도 없는 촌로(村老)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성스님, 출가절의 현대적 의미)

 

 

마성스님이 언급한 이야기는 백유경에 실려 있다. 마성스님이 비유로 든 이야기를 보면, 출가자가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출가자가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출가자는 오로지 재가자의 보시에 의하여 생계를 꾸려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하려 했을 때 재가자와 다름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종종 TV프로에서 스님들의 이야기를 본다. 그럴 경우 스님들은 별종에 해당된다. 본업인 수행과 포교 보다 부업에 더 열중하는 스님들을 말한다. 특히 특산품을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스님도 있다. 그런 스님을 과연 스님이라 부를 수 있을까? 특산품을 재배하여 생계를 이어 간다면 스님이 아니라 농부라 볼 수 있다. 스님은 명칭에 불과할 뿐 농사짓는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스님이 아니라 농부라 불러야 할 것이다.

 

()를 주관하고 있다면

 

와셋타경에서 또 하나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Yo hi koci manussesu

porohiccena jīvati,
Eva
vāseṭṭha jānāhi

yājako so na brāhmao.

 

인간 가운데서 제사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와셋타여, 그는 제관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Vāseṭṭhasutta-바쎗타의 경, 숫따니빠따 Sn3.9, 전재성님역)

 

 

이는 바라문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옛날 바라문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옛날 바라문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이었고,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버리고 자기의 참된 이익을 위하여 유행하였음을 말한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 올수록 대규모 동물희생제 등을 주관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감각적 쾌락을 즐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이 되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라문의 타락으로 보는 것이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은 제사장일 뿐이지 원래 의미의 바라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에서 천도재에 열중한다면 제자장일 뿐이지 더 이상 스님이라 볼 수 없다. 비록 수행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을 지라도 현재 하고 있는 행위가 재를 주관하고 있다면 수행자가 아니라 제관일 뿐이라는 말이다.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상에서 쓰는 이름이나 성은

명칭의 시설에 지나지 않으니,

그때마다 통하는 명칭으로 생겨나

여기 저기 시설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에게 그릇된 견해가

오랜 세월 잠재됩니다.

무지한 사람은

‘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된다’

라고 말합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

 

(Vāseṭṭhasutta-바쎗타의 경, 숫따니빠따 Sn3.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태생으로 귀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행위에 의하여 명칭이 그때 그때 명칭이 부여 된다고 하였다. 고귀한 명칭을 부여 받은 자가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되는 것도 행위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

 

재벌3세가 탈세를 하여 수천억대 비자금을 조성 하였을 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도둑놈”이다. 아무리 사장님 소리 들어도 사원들을 마구 다루면 “깡패”라는 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그를 사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도둑놈’이나 ‘깡패’라 부른다. 그때그때 행위에 따라 새로운 명칭이 부여 된다.

 

무엇이든지 처음 하기가 어렵다

 

재벌회사 사장 몰래 도둑놈 행위를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비자금을 몰래 조성하여 회사돈을 도둑질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Evameta  yathābhūta

kamma passanti paṇḍitā,
Pa
icca samuppādadasā1

kammavipākakovidā.

 

현자들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그 행위를 봅니다.

그들은 연기를 보는 님으로서,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습니다.

 

(Vāseṭṭhasutta-바쎗타의 경, 숫따니빠따 Sn3.9, 전재성님역)

 

 

 

 

 

 

 

행위를 하면 그에 대한 과보가 있다. 행위에 대한 과보(kammavipākakovidā)’라는 것은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여기서 행위는 단지 인간의 사회적인 신분을 결정하는 현재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존재의 상태로 묶어 두는 힘이라는 특별한 의미로 바뀐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업의 과보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자주 반복 되다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 대하 드라마 중에 신선조가 있다. 50부작으로 된 대하 시대드라마로서 일본 막부말기 낭사’, 즉 떠돌이 사무라이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을 한 번도 베어 보지 못한 어떤 새내기 사무라이가 사람을 베었을 때 느낌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고참 사무라이에게 물어 본다. 그러자 베어 본 경험이 많은 사무라이가 답하길 처음 베었을 때 두려웠으나 자주 베다 보니 마치 매일 밥먹는 것처럼 무덤덤하다.”라고 말하였다.

 

모든 범죄행위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처음 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자주 하다 보면 무디어 진다. 비자금 조성하는 것도 처음 어려웠을 뿐이지 자주 하다 보니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는 행위에 대한 과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 현자들은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였다. 연기에 대한 과보를 말한다.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뒤따르는 것을 현자들은 안다. 그런 행위에 대한 과보가 ‘존재를 존재의 상태로 묶어 두는 힘’이라 하였다. 그런 힘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mmānā vattati loko

kammanā vattati pajā,
Kammanibandhan
ā sattā

rathassāiva yāyato.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합니다.

뭇 삶은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에 매여 있습니다.

 

(Vāseṭṭhasutta-바쎗타의 경, 숫따니빠따 Sn3.9, 전재성님역)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업에 대한 과보를 말한다. 행위을 하면 업을 짓게 되는데 연기법칙에 따르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연기법은 다름 아닌 인과법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말로 조건법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연기법은 헤뚜빳짜야팔라(hetu-paccaya-phala)’로 설명된다. 이는 인연과(因緣果)이다. 원인(hetu, )과 조건(paccaya, )과 결과(phala, )인 것이다. 범죄를 저지를 조건이 형성되어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말한다. 반드시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뭇 삶은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에 매여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감쪽같이 세상을 속여도

 

설령 세상을 감쪽 같이 속여 완전범죄에 성공하였을 지라도 자기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M129)”라 하였다. 이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 자신을 엄습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런 과보는 현생에서 받아서 괴롭고 다음생에서 받을 것이기 때문에 괴롭다. 과거 지은 악행이 엄습하면 지금 여기서 괴로운 것이고, 또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내생도 괴롭다. 그래서 악행을 저지르면 이세상과 저세상 두 세상에서 고통 받아 이래 저래 괴롭다.

 

행위에 매여 있는 뭇삶

 

최근 어느 사미스님의 폭행사건이 있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폭행사건에 대한 글을 동영상과 함께 올렸다. 올린지 일주일만에 거의 1000회에 달하는 동영상 조회수가 기록 되어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불자들의 분노와 국민들의 관심에 따른 결과라 본다.

 

동영상을 보면 조계종 호법부 스님과 종무원들의 행위는 조폭과 같았다. 불법으로 납치 하여 감금하고 린치까지 가하였기 때문이다. 후속기사에 따르면 납치된 스님은 피멍이 들었다. 온 몸에 커다란 피멍이 들어 그 날의 폭행 정도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런 폭력을 가한 스님은 더 이상 스님이라 부를 수 없다. 폭행을 하였으므로 깡패라 부를 수 있고, 또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움직이었기 때문에 조직폭력배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와셋타경에서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신분이 결정 된다고 하였다. 조계종 스님들이 나이 어린 사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였다면 깡패나 다름 없다. 겉으로는 스님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행위로 보았을 때 깡패들이자 조폭들이다.

 

스님이 조폭행위를 하였다면 그 스님을 조폭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단지 명칭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현재의 행위가 인간존재를 결정 짓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뉘만 스님일 뿐 실제로 조폭이라는 것이다.  이는 행위가 존재를 묶어 두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을 행사한 행위가 업으로 작용하여 그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현자들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그 행위를 봅니다.

그들은 연기를 보는 님으로서,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합니다.

뭇 삶은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에 매여 있습니다. (Sn3.9)

 

 

 

2013-08-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