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빠알리니까야 반복구문, 이대로 생략해도 좋은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31. 23:24

 

빠알리니까야 반복구문, 이대로 생략해도 좋은가?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한 배를 탄 것이나 다름 없다. 마치 배가 등대와 나침반으로 목적지를 항해 하여 가듯이 불자들은 가르침을 지도로 삼아 부처님을 안내자로 삼아 목적지를 향하여 간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Sn3.4)”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이다. 바라문 등 외도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아 귀의할 때 하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라고 하여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행운의 시대에

 

불자들이 크게 의존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경전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초기불교 경전에 크게 의지 한다. 최근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마치 면전에서 보는 듯, 바로 옆에서 듣는 듯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래서 요즘 불자들은 행운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운의 시대에 살고 있는 불자들이 접할 수 있는 번역서에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성전협의 번역서이고 또 하나는 초불연의 번역서이다. 이 두 번역서로 인하여 한국불교는 여러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대승경전과도 다르고 한문으로 경전과도 달리 빠알리어로 된 니까야를 직접 번역하였기 때문에 더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번역서마다 특징이 있다. 이는 번역자의 개인적인 역량과 번역환경에 따라 달리 번역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역서를 종종 비교하곤 한다.

 

두 번역서를 비교 하게 된 동기

 

두 번역서를 비교 하게 된 동기가 있다. 어느 날 어떤 스님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승가에서는 초불연의 번역서를 사용하지 성전협의 번역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유는 성전협의 번역이 문제가 많기 때문이라 하였다. 번역에 오류가 많아 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승가에서는 초불연의 번역서를 교재로 사용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대체 어떤 이유로 재가에서 번역된 번역서를 배척하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 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두 번역서를 비교 분석하게 되었다. 그 결과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글로 올린 바 있다.

 

팔이 안으로 굽듯이

 

수 년동안 수 많은 글을 쓰면서 매일 경전을 보고 있다. 그래서 이제 경전 보는 것은 매우 익숙하다. 그런데 경전을 보면 볼수록 두 번역서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짧은 것과 긴 것은 대보면 바로 알 수 있듯이 두 경전을 일대일로 비교 해 보면 장단점이 드러난다. 그리고 번역상의 문제점도 발견된다.  특히 초불연의 번역이 그렇다. 이는 승가에서 말한 것과 정반대이었다.

 

그렇다면 왜 승가에서는 재가에서 번역한 최초의 번역서를 배척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기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재가에서 번역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이는 역사적으로 구마라즙, 삼장법사 등 모든 번역이 승가에서 이루어졌는데, 재가에서 번역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인 것 같다. 이는 스님들의 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 많은 법구경 번역본이 있다. 그런데 불교TV 나 일반 법회에서 스님들이 교재로 하고 있는 것은 스님들이 번역한 것이다. 불교TV에서 어느 스님은 거해스님의 법구경을 교재로 사용한 것을 보았고, 정각원 법회에서 J스님은 법정스님의 진리의 말씀을 교재 삼아 이야기 하였다. 성전협에서 발간된 법구경이 있음에도 교재로 채택하지 않은 것이다. 첨고로 거해스님의 법구경은 과도한 의역이 특징이고 또 주석이 매우 빈약하다. 법정스님이 번역한 법구경 진리의 말씀’은 일본 나까무라 하지메의 일역을 우리말로 중역한 것이다.

 

성전협 법구경은 빠알리어를 직역하였다. 더구나 방대한 주석이 실려 있는데 이는 스리랑카 붓다고사의 법구의석을 참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승가로 부터 외면 당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승가에서 번역된 번역서를 더 선호한 것은 팔이 안으로 굽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vs “수행승들이여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번역용어라 본다. 그 중에 부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 하는 말 빅카웨에 대한 번역용어이다. 초불연은 전통의 한문경전을 그대로 답습하여 비구들이여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은 수행승들이여라고 새롭게 번역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승가입장에서는 수행승들이여라는 번역을 도저히 받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승가에서 성전협의 번역서를 교재로 받아 들이길 거부한 것이라 보여 진다.

 

사방승가 개념으로 본다면

 

부처님이 비구들이여라고 한 것은 관행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반드시 비구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는 빅쿠뿐만 아니라 빅쿠니도 있고, 또 재가의 우빠사까(우바새, 청신사), 우빠시까(우바이, 청신녀)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부대중 모두 수행자로 볼 수 있다.

 

사부 대중을 모두 승가로 본다면 이는 사방승가(四方僧伽; Cattu- disasamgha)의 개념이 된다. 그래서 빅카웨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라고 말하는 것도 타당하다. 그렇다면 사방승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방승가는 시간적으로 삼세에 걸쳐 확대되고 공간적으로는 우주적으로 확대되는 보편적 승가를 지칭한다. 현전승가는 시간, 공간적으로 제한된 사방승가의 지역승가로서의 생활공동체이다. 그러나 재가신자인 우바새나 우바이가 없이는 사방승가와 현전승가의 이념이 성립할 수 없다

 

출가자는 생활의 물자를 얻기위해 노동할 수 없음으로, 우바새와 우바이로부터 생활필수품인 의식주를 위한 생필품와 의약품(四資具)을 공급받아야 생활공동체로서의 현전승가가 유지된다. 또 우바새와 우바이로부터 승가람(僧伽藍), 승가람물(僧伽藍物), (), 방물(房物)등을 기증받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지시켜야 ‘부처님을 상수로하는 승가’ 즉 사방승가가 성립할 수 있다.

 

비록 현전승가와 사방승가 모두 재가신도에 관한 언급이 없이 비구, 비구니 승가로 규정 되어 있지만, 재가자 없이는 승가가 성립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사방승가 개념으로 본다면 재가자도 승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빅카웨를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오로지 ‘비구승’으로 한정 되어 버린다. 이는 불평등하다. 또 한문경전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비구승들에게는 “비구들이여”라고 하는 것이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재가자들에게는 받아 들이기에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래서 차라리 “수행승들이여”라고 하는 것이 재가자들에게는 부담 없다는 것이다. 재가자가 비구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매번 “비구들이여”라는 문구를 마주 칠 때 불편 한 것이다. 그래서 비구들이여라고 하는 것 보다 수행승들이여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재가불자들에게 그렇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님

 

최근 넷상에서 알고 지내는 법우님으로부터 장문의 글을 받았다. 번역비교한 것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을 담은 글이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기에  전문을 싣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번역, 적절치 못한 용어"라고까지 하기에는,,,,

대림스님과 각묵스남에 의해 번역되어진 초기불전연구원의 사부경장은
두 분의 개인적인 희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개인적인 목적이나 취미를 위해서 아니라,
우리 나라에 부처님의 말씀을 있는대로 전하고자 하는 거룩한 염원이요,
부처님의 제자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함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분은 10∼20년을 이를 위해 필요한 공부에 전념하셨고
또 빨리 경전을 전하고 싶으나 '잘못된' 번역을 피하기 위해
아비담마, 청정도론 혹은 주석서 등 경전 주변에 대한 연구를 선행하는 고생과,
권위 있는 스승들을 찾아뵙고 몸소 수행하고 묻는 긴 우회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종단에서 밀어준 사업도 이니고, 국가에서 밀어준 사업도 아닙니다.
일본이나 영국의 사례를 볼 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긴 세월을 고생하신 결과 두 분은 몸을 크게 상하셨습니다.
즉, 두 분 스님은 죽을 고생을 해가며 당신들의 몸과 건강을 우리 손에 있는 경전과 바꾸신 것입니다.

'적절한'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20∼30년,
많은 스승들이나 학자들이 참여해야 하고, 충분한 예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에 소위 '윤문(
潤文)'이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색하거나 적절하지 않음을 피하면서,
경전의 요의를 쉽고 명확히 하기 위한 작업 말입니다.
이것은 국어학자가 할 수 있는 기술적인 일도 아닙니다.
경전의 뜻을 꿰뚫어 알면서도 언어의 아름다움이나 간결함을 살려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초기불전연구원 혹은 전재성 박사님의 번역은 그러한 체계적 도움을 받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정히 마음이 흡족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이제 나와 있는 두 가지 번역은 최초의 시도요 초벌구이고
언젠가는 이제 시작한 사람들이 모여서 방대한 작업을 통해
별도의 공인된 번역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도반'으로 혹은 '존자'로 번역 하신데는 각각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생각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혹시 님께서는 이 일로 대림스님이나 각묵스님께 이유를 물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여기 어떤 아버지가 있어서 하루 종일 피띰을 흘려
가족들을 위해 먹을 것을 가져왔다고 합시다.
아버지는 오랜 노고로 인해 몸까지 크게 상해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것으로 밥을 먹고 연명하는 식구들이나 아이들이 있는데
상을 차리는데 도움 하나 주지도 않은 그 중 하나가 왜 김이 없냐고 투정을 하고 나온다면
이것이 적절한 일이겠습니까?

나는 이 번역이 마음에 든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
"잘못된 번역", '부적절한 번역" 혹은 "적절치 않은 용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를 생각할 때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닐런지요?,,,,

((()))

 

(A법우님)

 

 

A법우님의 문제 제기에 감사 드린다. 왜냐하면 그만큼 관심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맙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Dhp 76)”라 하였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항상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은 없을 것이라 하였다.

 

스님은 공인이기 때문에

 

먼저 초불연의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노고에 감사 드린다. 불모지나 다름 없는 초기불교를 개척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특히 번역뿐만 아니라 대중강연과 각종 기고문을 통해서 부처님의 원음을 널리 확산시킨 공로는 매우 크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접한 불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번역비교는 피해 갈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스님은 공인이기 때문이다. 번역으로 인하여 세상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비교를 피해 갈 수 없다. 단 비방이나 비난이 아닌 건전한 비판을 통해서이다. 이는 더 나은 번역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불자들이 부처님의 원음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함이다.

 

수 없이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번역비교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넷상으로 수 없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주로 초불연 번역에 대한 것이다. 올린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파초인가 야자수인가, 포말경(S22:95) 까달리(kadali)나무

2)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브라흐마야짜나경(S6:1)

3) 빠알리니까야에서 선가(禪家)용어

4) 위밧자, 해체인가 분별인가십이연기와 위방가경(S12:2)

5) 마노의 대상으로서 담마, 사실인가 법인가

6)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 특징 가지

 

 

이외에도 수 많은 글이 있다. 그러나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어느 것 하나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제기된 문제가 가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올린 것이 정당해서 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비록 큰 스승의 말이라 하더라도

 

A법우님은 초불연 번역에 대한 비판을 불편해 하고 있다. 두 분 스님들의 노력의 결과물에 대하여 "잘못된 번역", '부적절한 번역" 혹은 "적절치 않은 용어"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한 불편함이다. 하지만 누구나 잘못이 있으면 지적할 수 있다. 그런 지적을 오히려 고마워 해야 할 것이다. 깔라마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세존]

“깔라마들이여, 당신들이 미심쩍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의심스러운 것은 미심쩍은 일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깔라마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악하고 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식자에게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여 받아 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깔라마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5, 전재성박사역)

 

 

경에서 부처님은 전승이나 권위, 그리고 스승이라 하여 끄달리지 말라고 하였다. 비록 큰 스승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말이 잘못된 것이라면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본다면 비록 초불연의 두 스님의 노고가 지대하긴 하지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그다지 실례가 아니라고 본다.

 

용어를 피해 가다 보니

 

A법우님은 글에서 “'도반'으로 혹은 '존자'로 번역 하신데는 각각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생각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불연에서 ‘아위소(Āvuso)’에 대하여 도반으로 번역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성전협의 번역이 먼저 나왔기 때문에 성전협의 벗이여라는 말을 피해가다 보니 도반이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 것은 두 번역서의 용어를 비교 하여 보면 알 수 있다. 상대방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 가다 보니 다른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두 경전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용어를 잘못 사용하였을 경우 독자들에게 심각한 혼란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초불연의 도반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도반이 될 수 없는 경우

 

초불연에서는 외도에게도 도반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부처님이 자이나교의 니간타들에게 도반 니간타들이여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또 니간타가 부처님에게 도반 고따마시여라고 하였다. 과연 이교도에게 도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만일 기독교 목사가 불자들에게 자매님또는 형제님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거꾸로 스님이 기독교인게 보살님” “거사님이라고 말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역시 불쾌하게 생각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도반 니간타들이여라고 하였을 때 자이나교도들은 불쾌 하게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자이나교도가 도반 고따마시여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도 언짢게 생각하였을 것임에 틀림 없다.

 

도반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불교용어로서함께 불도를 닦는 벗으로 설명되어 있다.  불도를 함께 닦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럼에도 도반 니간타들이여라고 말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이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도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번역하다 만 것처럼

 

어떤 번역이 가장 잘 된 것일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원문을 있는 그대로 그 시대에 맞는 언어로 또 표준어로 번역한 것이 잘 된 번역이다. 그런데 원문을 모두 다 번역하지 않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실제로 그런 번역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52.~74. “그는 물을불을바람을존재들을신들을빠자빠띠를브라흐마를광음천을변정천을광과천을승자천을공무변처를식무변처를무소유처를비상비비상처를본 것을들은 것을감지한 것을안 것을동일한 것을다른 것을전체를열반을 열반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안다.

 

(뿌리에 대한 법문의 경, 맛지마니까야 M1, 초불연 번역)

 

 

초불연에서 번역한 맛지마니까야 뿌리에 대한 법문의 경(M1)’의 일부이다. 모두 23개의 경우가 표시 되어 있다. 용어를 보면 한역아함경의 용어를 답습한 것이 많다. 광음천, 변정천, 광과천 같은 한자식 용어이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의 번역은 과감하게 한글화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광음천을 빛이 흐르는 하느님의 신들, 광음천을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세계의 신들, 변정천을 탁월한 과보로 얻은 하느님 세계의 신들로 번역하였다. 이와 같은 긴 번역의 장단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역아함경의 한자식번역을 그대로 답습한 것 보다 이해가 쉬운 것은 사실이다.

 

경에서 물을…”이라 하여 구문이 생략 되어 있다. 원래 물을 물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안다라는 구문을 생략하여 물을…”이라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22개 항목을 모두 생략구문으로 처리하였다. 하지만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구문생략 없이 빠짐 없이 모두 실어 놓았다.

 

단어 뒤어 점을 세 개 표시(…)하여 구성된 생략구문을 접하였을 때 매우 생소하였다. 어떤 경전이든지 모두 다 표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단어만 나열한 생략구문을 접하였을 때 마치 번역하다 만 것처럼보였다.

 

왜 생략구문을 사용하였을까?

 

그렇다면 왜 초불연에서는 생략구문을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이 없다. 해제 등 경전 그 어디에도 생략구문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만 초불연 카페의 댓글에 생략구문에 대한 언급이 보일 뿐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동의어의 나열과 정형구의 계속적인 반복이 초기경의 가장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경을 외워서 전하다보니 나열과 반복은 암기를 위한 필수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유행가 가사도 중요한 메시지?는 후렴구로 만들어서 반복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문자로 정착이 되면 이러한 나열과 반복은 오히려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방해가 되기가 쉽습니다.

 

처음에 읽은 문장이 계속해서 나오면 대부분 그냥 건성 건성 넘어가버리기 쉽상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아함경을 번역할때는 반복되는 정형구와 동의어 나열은 모두 생략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간략하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요 요즘 나오는 영어번역도 대부분 반복된 전형구는 생략하여 출간합니다. 이렇게 되면 글로써는 오히려 더 정확한 메시지 전달이 된다고 봅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이런 방법을 시도하려 생각해보았지만 경을 축약한다는것이 두렵고, 지금 단계에서는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하여서 원전에 나타나는 단어는 한자도 빼지 않고 옴겨야한다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였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경전번역이 거의 마무리되고 중요한 경들을 뽑아서 다이제스트 본이나 요약본을 낼때는 축약번역을 할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인연살이님의 좋은 제언에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하고 다른 법우님들의 의견도 기다리겠습니다.

 

(각묵스님 댓글, Re 경에서의 끊어읽기를 위한 쉼표사용의 예문을 올립니다.2006.05.21. 09:33 http://cafe.daum.net/chobul/19wI/2553)

 

 

이글은 각묵스님이 2006년도에 작성한 글이다. 그것도 댓글형식으로 되어 있다. 각묵스님은 댓글에서 생략구문을 사용한 이유에 대하여 한문경전의 영향이 크다고 하였다. 한역 아함경의 예를 들었는데 아함경의 경우 지루하게 반복되는 반복문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반야심경에서도 볼 수 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구문이 있다. 이것이 대표적인 생략구문이다. 색에 대해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였고, 나머지 수상행식에 대해서는 역시 그러하다의 뜻인 역부여시로 처리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 번역한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반복구문은 역부여시처럼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반복구문을 나열하는 것에 대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 하였다. 그리고 영역을 예로 들어 현대의 번역을 보면 반복구문이 모두 생략 되어 있다고 하였다.

 

왜 반복구문인가?  

 

하지만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실려 있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이는 해제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라문교를 비롯하여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인도의 학파들이 진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억을 최상의 것으로 삼았던 데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문자로 쓰인 것은 사람들이 단어를 잘못 강조하거나 문장을 잘못 나누거나 문장을 잘못 베껴 쓰게 되면 너무도 쉽게 내용이 바뀔 수가 있지만, 배운 바 대로 암송하면 올바른 억양과 리듬, 올바른 배열을 통해서 문장의 내용을 충실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야 해제,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의 해제에 따르면 구전으로 된 경전은 암송하기 쉽게 정형화 되어 있고 반복구문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억양과 리듬을 넣어서 암송할 수 있는데, 이런 방법으로 훼손 없이 전승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반복구문 생략은  부당해 보인다. 반복 함으로서 의미를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데 반야심경의 역부여시와 같이 ‘…’ 처리 한다는 것은 경전 독송의 맛을 떨어 뜨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복구문이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빠알리니까야에 고스란히 전승되어 왔다면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다. 동어반복이라 하여 생략한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 맛지마니까야 개정판 일러두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7. 구전되어 반복되어 온 관용어구는 가능한 통일을 기했으며, 모든 경에서 생략된 내용들을 모두 복원해서 독자가 알기 쉽게 했다.

 

(맛지마니까야 개정판 해제, 일러두기,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빠알리어로 전승되어 온 경전에 대하여 함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심지어 조사 하나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반복구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록 반복이 지겨울 수 있지만 반복어를 넣은 것은 뜻을 더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역부여시’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성전협의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반복구문이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실려 있다.

 

생략된 반복구문

 

두 가지 번역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반복구문에 대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반복구문이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으로 불필요 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도반들이여,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습니다. 느낀 것을 인식하고 인식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사량분별하고 사량분별한 것을 원인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마음으로 알아지는 법들에 대해 사량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가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도반들이여,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도반들이여, 혀와 맛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도반들이여,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도반들이여,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습니다. 느낀 것을 인식하고 인식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사량분별하고 사량분별한 것을 원인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마음으로 알아지는 법들에 대해 사량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가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꿀덩어리 경, 맛지마니까야 M18, 초불연 대림/각묵스님역)

 

 

 

초불연 번역을 보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대하여 생략구문을 사용하였다. 처음과 마지막 부분만 완전한 문장이 있을 뿐 중간에는 구문이 생략 되어 있다.

 

생략없는 반복구문

 

반면 성전협의 전재성박사의 번역은 어떠할까? 같은 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벗들이여, 청각과 소리를 조건으로 해서 청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벗들이여, 후각과 냄새를 조건으로 해서 후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벗들이여, 미각과 맛을 조건으로 해서 미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벗들이여, 촉각과 감촉을 조건으로 해서 촉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벗들이여, 정신과 사실을 조건으로 해서 정신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7, 성전협 전재성님역)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반복구문 생략 없이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번역해 놓았다.

 

루뻬수(rūpesu)  빠빤짜(papañca)

 

두 번역서를 보면 차이가 많이 난다. 용어의 경우 루뻬수(rūpesu)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형색’이라 하였다. 형색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사람의 겉모양이나 차림새 등에서 나타나는 특성.” 또는 “얼굴빛이나 표정 따위에서 나타나는 특성.”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각묵스님의 강연에 따르면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낸 신조어라 하였다. 형상과 색의 합성어라 한다. 루뻬수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형상’으로 번역하였다.

 

빠알리어 빠빤짜(papañc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사량분별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희론이라 하였다. 그런데 사량분별이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 없는 말이다. 다만 사량과 분별이 구분 되어 설명되어 있기는 하다. 이때 사량은 생각하여 헤아리다의 뜻이다. 분별은 종류에 따라 나누어 가르다의 뜻이다. 따라서 사량분별은 생각하여 헤아리고 종류에 따라 나누어 가르다라고 정의 될 수 있다.

 

형색과 마찬가지로 초불연에서 새롭게 만든 신조어가 사량분별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량분별이라는 말은 선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초불연 번역에는 선가의 용어가 많다. ‘알음알이하다, 잡도리하다, 공부짓다등이 모두 선가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런 용어는 일반사람들에게는 생소하다.

 

빠빤짜(papañca)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희론(戱論)으로 번역하였다. 희론은 잘못되고 무의미한 말로서 진리에 어긋나고 그릇된 집착과 차별에서 비롯되어 사람들을 망상의 세계 속에 빠뜨리는 것을 말한다.

 

과연 어떤 것이 맞을까?

 

이렇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도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생략구문 사용여부이다. 초불연에서는 모든 빠알리니까야 번역에서 생략구문을 사용하였고, 성전협에서는 모두 복원하였다.

 

초불연에서는 반복구문을 사용하는 것이 메시지 전달효과가 더 낫다고 하였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 하였다. 더구나 한역아함경에서도 반야심경의 역부여시처럼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반복구문을 생략하였다고 하였다.

 

반면 성전협의 경우 반복구문을 사용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반복구문을 통하여 올바른 억양과 리듬, 올바른 배열을 통해서 문장의 내용을 충실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빠짐 없이 반복구문을 실었고 심지어 PTS원본에 없는 경우 모두 복원하였다고 하였다. 과연 어떤 것이 맞을까? 그것은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2013-08-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