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가짜열반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의 다섯 가지 유형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28. 12:04

 

가짜열반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의 다섯 가지 유형

 

 

 

 

인터넷시대의 당나귀들

 

인터넷시대에 당나귀들이 있다. 불교단멸론자들을 말한다. 왜 그들이 당나귀인가? 청정도론에 소의 무리를 뒤따르는 당나귀라는 말이 있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반승반속의 무리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시대의 당나귀는 불자들의 뒤를 따라 가는 삿된견해를 가진 무리들을 말한다.

 

인터넷시대에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다. 그래서 블로그나 카페, 각종 토론사이트를 통하여 글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한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블로그나 카페를 만들어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의 주장을 보면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혹세무민하기 때문이다. 단멸론이 대표적이다.

 

인터넷시대 단멸론자는 ‘일베충’과 같다. 마치 일베가 무엇인지 알아 보기 위하여 일베사이트를 들락 거리다가 감염되어 일베충이 되는 것처럼, 단멸론자의 견해를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단멸론자가 될 수 있다.

 

당나귀들의 주장을 보면 매우 그럴싸 하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 보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왜곡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만든 짬뽕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멸론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단멸론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떤 이가 댓글을 달았다. 21세기에 구닥다리 윤회 전생론으로 공상소설이나 쓰는 불교는 초기든 대승이든 희망이 없다.”라는 짤막한 글이다. 인사말도 없이 툭 내던지듯 써 놓은 것을 보면 마치 똥을 싸고 달아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댓글을 보면 그 짤막한 문구에 단멸론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멸론자들은 윤회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단멸론의 가장 큰 특징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윤회를 인정하면 단멸론이 성립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윤회를 인정하는 단멸론은 있을 수 없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단멸론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사후업보나 내세 등 죽음 이후의 모든 것들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인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로서 몸이 파괴되어 생명이 다한 뒤에 바로 여기서 모든 것은 더 이상 즐겁게 느껴지지 않고 식어 버릴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이 구절은 빠알리니까야 뿐만 아니라 아함경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구절로만 본다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 또한 소멸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하지만 이는 경전을 왜곡하여 해석한 것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 적용 되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에게 적용 되는 문구에 대하여 일반 범부에 대하여 거두절미하여 필요한 부분만 적용한 것이다. 마치 조선일보 수법과 똑 같다. 거두절미 하여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조선일보의 전형적인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나귀들이 단멸론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가장 크게 의지하는 것이 무엇일까?

 

연기법 정형구

 

당나귀들도 연기법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반쪽짜리 연기법이다. 경에서 거두절미하여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여 사실을 왜곡하듯이 연기법에서도 필요한 부분만 가져다 활용한다. 그것이 바로 상호의존적 연기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성제도 연기법에 근거한 것이고, 사성제가 더 확장된 것이 십이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기법은 크게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 이렇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다음과 정형구로 알 수 있다.

 

 

imasmi sati ida hoti.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이것이 연기의 정형구이다.

 

상호의존적 연기만 고집하는 이유

 

그런데 당나귀들은 첫번째와 세 번째 문장만을 절취하여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진다.”라는 문장만을 사용한다. 이것이 상호의존적 연기이다. 중간에 있는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조건적 연기는 의도적으로 빼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적 연기는 대승불교에서도 보인다. 법계연기를 설명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성철스님도 백일법문에서 상호의존적 연기로 중도사상을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사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상호의존적 연기가 단멸론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육체’를 대입하고, ‘저것’에 대하여 정신을 대입하면 상호의존적 연기가 완성된다. 그래서 “육체가 있을 때 정신이 있게 되며,  육체가 없을 때 정신도 없아진다.”가 된다. 육체가 멸할 때 정신도 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으로 사용되는 것이 상호의존적연기이다. 하지만 이는 반쪽짜리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와 같은 조건 발생연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조건발생연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당나귀들은 조건발생적 연기를 의도적으로 거론 하지 않는다. 만일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로 시작 되는 십이연기의 조건 발생 연기를 적용하면 단멸론은 설자리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조건발생적 연기가 윤회를 잘 설명하고 있기 문이다. 따라서 당나귀들에게 있어서 조건발생적 연기는 절대로활용해서는 안되는 문구이다. 그래서 당나귀들은 삼세양중인인과, 재생연결식, 윤회 등의 용어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리고 개거품을 물며 부정한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당나귀들은 아라한이나 범부나 모두 무상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과 함께 모두 소멸되는 것이라 한다. 또  무아이기 때문에 성자나 범부는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초등학생수준의 단순하고 무식한 말이다. 그럼에도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라고 하는 주장에 넘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성자나 범부나 육체와 정신의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주장에 넘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나귀들은 사성제를 말하고 팔정도를 실천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넌센스이다. 성자나 범부나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굳이 수행을 할 필요도 없고 도덕적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선행을 하여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다. 지금 살아 있을 때 즐겁게 살면 그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당나귀들은 지금 여기를 매우 강조한다.

 

불교가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종교라고?

 

행복을 말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누구나 행복을 말한다. 명사들도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종교인들도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라 한다.

 

불교에서도 행복을 말한다. 어떤 이는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종교평화선언 초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고,   전도선언에서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S4:5)”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불교가 행복만을 추구하는 종교로 인식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행복(sukha)의 다른 말이 즐거움()’이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대승기신론에서 유래 하였고,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에서도 사용한 바 있다. 만일 불교가 행복 또는 즐거움만 추구하면 종교라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로지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불교 말고도 많은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교가 즐거움만 추구하는 종교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삿된견해이다. 왜 삿된견해인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라는데

 

당나귀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라 한다. 성자이든 범부이든 무상하고 무아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살면 될 뿐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당나귀들이 말하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삿된 견해이다. 왜 삿된 견해인가?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도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감각적 쾌락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쾌락은 지금 이 생에서 향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생의 지복을 기다리며 즐거움을 누릴 귀중한 현재의 순간을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으로서, 디가 니까야, <계온품(戒蘊品)〉의「범망경(梵網經 Brahmājala Sutta)」(D1)에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62가지 사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세속 사람들이 열중하는 문제이지 수행자와 비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비구에게 있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난했던 세속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비구가 세속의 번잡스러움이나 이성(異性)의 유혹에 교란 받지 않고 출세간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매우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필요한 것까지도 희생해가면서 수행자들에게 제일 좋은 음식과 가사를 바칩니다. 비구가 사람들의 보시로 생활하면서 재가자와 똑같이 세속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매우 부적절 합니다.

 

더구나 비구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세상을 버립니다. 만약 비구가 재가자처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고귀한 이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자는 즐거운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집)

 

 

마하시사야도는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현법열반론은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에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죽어서나 가능한 내세의 행복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라 한다. 이는 내세와 윤회와 업보를 부정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현법열반론은 가짜열반론

 

현법열반론은 삿된 견해이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따르면 현법열반론은 62가지 삿된견해에 속한다. 브라흐마잘라경에 현법열번론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anti, bhikkhave, eke samaabrāhmaā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 sato sattassa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 paññapenti pañcahi vatthūhi.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현세열반론자로서 다섯 가지 근거를 통해서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현세열반론자’라 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의 번역이다.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는 diṭṭhadhammanibbāna와 vàda의 복합어이다. diṭṭhadhammanibbāna는 diṭṭhadhamma+nibbāna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어의 핵심은 딧타담마(diṭṭhadhamma)이다. 딧타담마는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딧타담마(diṭṭhadhamma)는 직접경험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말한다. 또 “그때 그때 경험되는 자기존재와 동의어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현세(현법)열반이란 이 자기존재안의 괴로움의 지멸을 뜻한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경험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눈, 귀, 코 등으로 즐기는 오욕락을 말한다.

 

‘지금 여기’라는 말이 빠알리어로 ‘딧타(diṭṭha)’이다. 딧타는 보여진(seen)의 의미이다. 그래서 딧타담마에 대하여 견법(見法)이라고 말한다. 이를 중국에서는 현법(現法)으로 옮겼다. 그래서 현법은 ‘현재’나 ‘지금 여기’나 ‘금생’으로 해석이 된다.

 

현법은 과거생과 미래 생에 대()가 될 때는 ‘금생’의 의미가 되고, 과거와 미래에 대가 되어서 나타날 때는 ‘현재’의 의미가 된다. 영어로는  ‘here and now’로 표현 된다. 그래서 현법은  ‘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의미로 쓰인다.

 

딧타담마(diṭṭhadhamma)는 일반적으로 현법이라 번역된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 지는 최고의 즐거움을 열반으로 보고 있는데 이를 딧타담마닙바나(diṭṭhadhammanibbāna)’라 한다. 지금여기에서 느끼는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가짜열반이다. 왜 가짜열반인가?

 

가짜열반의 다섯가지 유형

 

부처님은 가짜열반인 현법열반에 대하여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 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2)

또한 다른 자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말한다. ‘벗이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최상의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벗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으로 그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원인으로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벗이여, 그래서 이 자아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3)

또한 다른 자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말한다. ‘벗이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최상의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거기에 사유과 있고 숙고가 있는 한, 그것은 거친 것이라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벗이여, 그래서 이 자아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4)

또한 다른 자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말한다. ‘벗이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최상의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거기에 희열이 있고 마음의 환호가 있는 한, 그것은 거친 것이라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벗이여, 이 자아가 희열이 사라진 뒤,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평정하게 지내고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있는 행복한 삶이라고 부르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5)

또한 다른 자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말한다. ‘벗이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최상의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거기에 즐거움이라는 마음의 향수가 있는 한, 그것은 거친 것이라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벗이여, 이 자아가 즐거움과 괴로움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Samadhi

 

 

부처님은 가짜열반의 다섯가지 유형에 대하여 말하였다. 공통적으로 모두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열반을 성취할 수 없으므로 다섯 가지에 대하여 가짜열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선정삼매도 가짜 열반

 

가짜열반은 기본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 쾌락에 욕망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향수 하는 것이 현법열반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선정삼매도 가짜 열반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아를 갖고서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 쾌락, 즐거움, 희열, 행복, 평정을 향수하는 것은 모두 가짜 열반이라는 것이다.

 

다섯 가지 가짜열반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No

현법열반

 

공통사항

1

오욕락을 즐기는 것

형상, 소리, 냄새, , 감촉을 구족하여 줄기는 것.

1) 자아를 기반으로 함.

 

2) 현존 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함.

2

첫 번째 선정을 성취 하는 것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읨으로 인한 희열과 행복을 즐기는 것.

3

두 번째 선정을 성취 하는 것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즐기는 것.

4

세 번째 선정을 성취 하는 것

희열이 사라진 뒤,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평정하게 지내고 신체적으로 행복을 즐기는 것.

5

네 번째 선정을 성취 하는 것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즐기는 것.

 

 

 

현법열반론자들은 가짜 열반론자들이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모두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즐거움을 느껴도 내가 느끼는 것이고, 선정삼매의 즐거움도 내가 느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법열반론자들도 무상과 괴로움을 말한다. 경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으로 그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원인으로~.(D1)”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무아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무상, , 무아 이렇게 세 가지 특징 중에 무아만 빼고 무상괴로움만을 말하는 것이다.

 

자아를 기반으로 하는 한

 

이렇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 현법열반론자들도 무상과 괴로움을 알기에 ‘인생무상’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 대하여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느낀다. 그런 근심, 절망은 누가 느끼는 것일까? 자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을 때도 내가 마음이 울적한 것이고, 늙어 가는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 것도 내가 슬퍼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범부의 사고 방식이다.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뻐도 내가 행복한 것이고, 슬퍼도 내가 불행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두 번째 현법열반론을 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선정삼매에서 오는 희열과 행복도 열반이라 하였다. 선정삼매도 열반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짜열반이다.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정삼매로 인한 행복 역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는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도 마찬가지이다.

 

자아를 기반으로 하면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열반을 말한다. 열반은 ‘무아’이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유형 모두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열반은 무뉘만 열반인 가짜 열반이다.

 

만일 자아를 기반으로 지금 여기에서 최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향유하는 것이 열반이라 한다면 열반의 유형은 무척 많아 질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감을 느꼈다면 바로 그 상태가 열반일 것이다. 또 술을 마셔서 기분이 좋아 졌다면 역시 열반이라 할 것이다. 또 이성과 보드라운 잠자리를 가져 절정의 기분을 느꼈다면 이 또한 열반에 해당될 것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가짜열반인 현법열반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와 같이 파악되고 이와 같이 집착된 견해의 토대는 이와 같은 운명, 이와 같은 미래로 이끌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여래는 그것을 분명히 알 뿐만 아니라 그 이상도 분명히 안다. 그러나 여래는 그 분명히 아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을 여의고 여래는 적멸을 자각한다. 수행승들이여, 느낌들의 생성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여래는 집착없이 해탈한다.

 

(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위 문장은 62가지 삿된 견해 말미에 나오는 정형구이다. 경에서 ‘이와 같이 파악되고’라는 말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 ‘이와 같이 집착된’이라는 말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집착된 견해가 발생하는데 각주에 따르면 1)존재의 다발(오온), 2)무명, 3)접촉, 4)지각, 5)사유, 6)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 7)악한 친구, 8)타자의 소리 이렇게 여덟 가지 견해의 토대가 있다.

 

부처님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여 집착없이 해탈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하는 진짜열반이다. 오온을 나로 여겨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집착이 발생하기 때문에 결코 열반을 성취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

 

자아가 있는 한 그 느낌에서 오는 행복, 즐거움, 평정은 단지 느낌에 그칠 뿐이다. 느낌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다하면 소멸 하게 되어 이다. 그래서 자아가 느끼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단지 행복감일 뿐이다. 그것도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sukhā vedanā dukkhato diṭṭhā hoti, dukkhā vedanā sallato diṭṭhā hoti, adukkhamasukhā vedanā aniccato diṭṭhā hoti, aya vuccati bhikkhave bhikkhu sammaddaso acchecchi taha, vāvattayī saññojana, sammāmānābhisamayā antamakāsi dukkhass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본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탐욕의 경향을 버린 바른 관찰자’ 라고 한다. 그는 갈애를 부수고 결박을 자르고 아만에 대한 바른 이해로 괴로움의 종극에 도달한다

 

(Daṭṭhabbasutta-본다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5, 전재성님역)

 

 

 

2013-08-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