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 송이” 생명의 불꽃과 네 가지 자양분
70년대 유행가 중에 ‘불꽃’이 있다. 가사를 보면 마지막 후렴구에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 송이”로 되어 있다. 자신을 타오르는 불꽃으로 묘사 한 것이다. 그런 불꽃에 대하여 ‘생명의 꽃, 영원의 꽃’이라 하였다.
하지만 불꽃은 금지곡이 되었다. 가수 정미조가 1975년 동경가요제에서 한국를 대표하는 노래로 출전하기도 하였지만 그 때 당시 경직된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방송부적격이라는 애매모호한 판정을 받아 금지곡이 된 것이다.
불꽃의 작곡가는 송창식이라 한다. 동경가요제에서 국가대표곡으로 출전한 불꽃이 금지곡이 되자 1974년 MBC가수왕 이었던 송창식의 대표곡 ‘왜 불러’도 금지곡이 되었다. 두 곡이 왜 금지곡이 되었는지는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다만 가사 내용이 살벌한 유신독재정권과 맞지 않아서 일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생명의 꽃
불꽃 노래 가사 중에 불꽃에 대하여 ‘생명의 꽃’이라 하였다. 불교적 관점에 보았을 때 매우 적절한 비유라 본다. 빠알리니까야 따르면 등불에 대한 비유가 많은데 주로 생명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불꽃이 계속 타오르는 것을 생명과도 같은 것으로 보았다. 물론 윤회하는 삶을 말한다.
불꽃이 꺼지면
불꽃이 꺼지면 어떻게 될까? 니까야에서는 이를 번뇌의 소멸 또는 열반으로 보았다. 번뇌다한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기 때문이다.
Khīṇaṃ purāṇaṃ navaṃ natthi sambhavaṃ 키-낭 뿌라-낭 나왕 낫티 삼바왕
Virattacittā āyatike bhavasmiṃ, 위랏따찟따- 아-야띠께 바와스밍
Te ṇīṇabilā avirūḷhicchandā 떼 니나빌라- 아위루-리찬다-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닙반띠 디-라- 야-타-얌빠디-뽀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Ratanasuttaṃ-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숫따니빠따 라따나경(보석경, Sn2.1)에서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라 하였다. 이는 등불이 더 이상 타오르지 않고 등불이 꺼진 상태를 열반으로 묘사한 것이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하였을 때 불사(不死, atama)가 실현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등불에 대한 비유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Nāhu assāsapassāso
ṭhitacittassa tādino,
Anejo santimārabbha
cakkhumā parinibbuto
Asallīnena cittena
vedanaṃ ajjhavāsayi,
Pajjotasseva nibbāṇaṃ
vimokkho cetaso ahūti.
[아누룻다]
“확고한 마음을 지닌 완전한 분에게
들숨도 날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네.
욕망이 없는 지멸을 성취하여
눈을 갖춘 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셨네.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죽음의 고통을 참아내고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그분의 마음은 참으로 해탈되었네.”
(Parinibbāṇasutta-완전한 열반의 경, 상윳따니까야 S6: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완전한 열반(parinibbuta)’에 대하여 아누룻다가 읊은 게송이다. 게송에서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Pajjotasseva nibbāṇaṃ)”이라 하였느데, 각주에 따르면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을 수 없고 완전히 서술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서 등불처럼 꺼진다.(Srp.I.225)”라 하였다.
기름과 심지를 조건으로
이와 같이 빠알리니까에서는 등불이 꺼지는 것을 열반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등불이 계속 켜져 있다’는 것은 삶이 지속 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삶의 불꽃은 유지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Seyyathāpi bhikkhave, telaṃ ca paṭicca vaṭṭiṃ ca paṭicca telappadīpo jhāyeyya, tatra puriso kālena kālaṃ telaṃ āsiñceyya, vaṭṭiṃ upasaṃhareyya, evaṃ hi so bhikkhave telappadīpo tadāhāro tadūpādāno ciraṃ dīghamaddhānaṃ jaleyya.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기름과 심지를 인연으로 등불이 타오를 때 어떤 사람이 때때로 기름을 붓고 심지를 올리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러한 연료와 땔감으로 등불은 오랜 시간 동안 타오를 것이다.
(Saññojanasutta-결박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3,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등불의 예를 들어 생명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조건으로 타오른다. 한번 타오른 불꽃은 기름과 심지가 다 하기 전까지 계속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 불꽃과 바로 이전의 불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불꽃이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강물이 흘러 가듯이 하나의 불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인연으로’라고 하였는데, 이는 빠알리어 ‘빠띳짜(paṭicca)’를 말한다. 불꽃은 조건발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전 불꽃을 조건으로 다음불꽃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고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고, 내일 또한 오늘의 연속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삶 역시 끊임 없이 조건하여 발생한다. 그래서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존]
“결박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서 즐거움을 보는 자에게는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며,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난다.
(Saññojanasutta-결박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3,전재성님역)
경을 모두 조건발생함을 알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일어나거나 누군가가 일어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꽃도 마찬 가지이다. 이전 불꽃을 조건으로 다음 불꽃이 일어나는 것 역시 조건발생이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불꽃이 계속 타오르는 것이다. 그런 불꽃은 생명의 불꽃과도 같다. 뭇삶들 역시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끊임 없이 삶이 연속되기 때문이다.
단멸론자들은
그런데 기름과 심지가 다하여 불이 꺼져 버릴 수 있다. 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 기름과 심지를 계속 공급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때때로 기름을 붓고 심지를 올리면 불꽃은 더 오랜 시간 타오를 것이라 하였다. 그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
등불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을 가정 하였을 때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 들였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단지 등불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임에도 불구 하고 어떤 사람이 계속 기름을 공급하는 것을 가정하면 유신론적 또는 단멸론적 견해로 빠지고 만다. 특히 단멸론적 견해가 그렇다.
인터넷 시대에 단멸론자들은 등불의 비유를 들어 한번 꺼진 불꽃은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 불을 붙여 주기 전에는 꺼진 불은 다시 일어 날 수 없다.
누군가 불을 붙여 주어 불꽃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창조론에 가깝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창조론을 배격한다. 이는 연기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회의 시초를 설명할 때 부처님은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S15:11)”라고 하였다.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이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은 부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맞지 않는 ‘희론(빠빤짜)’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단멸론자들은 등불의 비유를 들면서 단멸론을 합리화 한다. 한번 꺼진 등불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듯이, 누구든지 육체가 멸하여 생명이 멸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기름과 심지를 공급하는 것에 대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한다. 하지만 경에서는 불이 꺼지기 전에 누군가 기름과 심지를 공급하여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꺼지기 전에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일까?
네 가지 자양분이 있는데
뭇삶에 있어서 생명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등불의 비유에서 기름과 심지를 계속 공급해주는 어떤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자양분의 경(S12:11)’에 명쾌 하게 설명되어 있다.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liṅkāro āhāro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ṃ catutthaṃ.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Āhārasutta-자양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1,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네 가지 자양분(āhārā)이 있다고 하였다. 이를 물질(Kabaliṅkāra), 접촉(phassa), 의도(manosañcetanā), 의식(viññāṇa) 이렇게 네 가지의 자양분이다. 결국 이 네 가지 자양분이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심지와 기름 같은 것이고 또한 기름과 심지를 계속 공급하는 어떤 사람과 같은 것이다.
윤회의 땔감, 우빠다나(upādāna)
네 가지 자양분은 삶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윤회의 동력이 된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물질의 자양분이 있어야 삶을 불꽃을 유지 할 수 있다. 불꽃은 이전 불꽃을 조건으로 발생 되듯이 뭇삶들 역시 조건에 따른 발생에 따라 삶이 유지 된다.
조건 발생의 가장 첫단계는 접촉에서 이루어진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발생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발생되는데, 집착 단계가 되면 단단히 들러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업이 발생될 수밖에 없어서 새로운 태어남이 있게 된다. 이런 집착을 ‘우빠다나(upādāna)’라 한다.
경의 각주에 따르면 우빠다나(집착)는 자양분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런 우빠다나는 땔감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우빠다나에 대하여 인터넷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upàdàna
: [nt.] grasping; attachment; fuel.。
:n. [upa-à-dà-ana] ① 取, 取著, 執着. ② 燃料. -kkhandha 取蘊.。
영어설명에 따르면 ‘집착(grasping)’과 더불어 ‘연료(fuel)’라는 뜻이 있다. 일본어 사전에도 ‘燃料’라 하여 ‘연료’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났다는 것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땔감이 마련되어 있다는 말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각주에서도 “우빠다나는 땔감을 의미하는데, 아하라(자양분)도 역시 불이나 등불의 자양분으로서 땔감을 뜻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죽음의식(死識, cuticitta)
네 가지 자양분은 땔감으로 설명된다. 삶을 유지해 주는 음식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가지 중에 ‘의식의 자양분(viññāṇa āhārā)’이 있다. 이 의식의 땔감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죽음의식(死識, cuticitta)’이라 하였다. 이는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한생과 다음생을 연결시켜 주는 ‘재생의 마음’이다. 이로 보았을 때 등불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때때로 기름을 붓고 심지를 올리면”라는 문구 중에 어떤 사람이 죽음의식, 즉 재생연결식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러나 네 가지 자양분 모두 어떤 사람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결박의 경에서 “기름과 심지가 소모된다면 등불은 자양분이 없어 소멸될 것이다.(S12:53).” 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계속 기름과 심지를 공급해 주어야 불꽃이 유지 되듯이, 네 가지 자양분이 계속 공급되면 뭇삶들의 생명의 붗꽃은 계속 유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네 가지 자양분은 무엇인가?
생명의 불꽃을 유지해 주는 것이 자양분이다. 경에서는 물질(Kabaliṅkāra), 접촉(phassa), 의도(manosañcetanā), 의식(viññāṇa)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 되고 있다. 이런 자양분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Srp.II. 25-26에 따르면, 자양분은 조건들이다. 조건들은 자신의 효과를 자양하기 때문에 자양분이라 한다.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은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으로 유지되는 신체적인 몸의 특별한 조건이 된다. 정신적인 몸에서는 접촉은 특수한 조건이 되고, 의도는 의식의 특수한 조건이 되고, 의식은 명색의 특수한 조건이 된다.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은 음식을 삼키면 신체의 요소들을 산출하고, 접촉의 자양분은 세 가지 느낌을 산출하고, 의도의 자양분은 세 가지 존재를 산출하고, 의식의 자양분은 다시 태어날 때 명색을 산출한다.
(네 가지 자양분 각주, 전재성박사)
삶의 원동력이자 윤회의 동력이 되는 네 가지 자양분은 연기법적으로 설명된다. 조건에 따른 발생을 말한다.
표로 정리해 보면
이런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용을 보충하였다.
네 가지 자양분 |
조건 발생 |
결과 |
물질의 자양분 Kabaliṅkāra āhārā |
신체적인 몸의 조건이 됨 |
신체의 요소들을 산출 |
접촉의 자양분 phassa āhārā |
정신적인 몸의 조건이 됨 |
세 가지 느낌을 산출 |
의도의 자양분 manosañcetanā āhārā |
의식의 특수한 조건이 됨 |
세 가지 존재를 산출 (욕계, 색계, 무색계) |
의식의 자양분 viññāṇa āhārā |
명색의 특수한 조건이 됨 |
다시 태어날 때 명색을 산출 (재생연결식) |
네 가지 자양분은 뭇삶들의 원동력이다. 또 동시에 윤회의 동력이다. 그렇다고 하여 자양분에 대하여 반드시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각주에 따르면 긍정적인 면도 있기 때문이다.
열 가지 긍정적인 자양분
앙굿따라 니까야(AN.V.146)에 실려 있는 열 가지 긍정적인 자양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지런함과 노력은 부의 자양분이다.
둘째, 장식과 치장은 미의 자양분이다.
셋째, 적절한 섭생은 건강의 자양분이다.
넷째, 좋은 친구는 계행의 자양분이다.
다섯째, 감각능력의 수호는 청정한 삶의 자양분이다.
여섯째, 다투지 않음이 우정의 자양분이다.
일곱째, 학습은 박학의 자양분이다.
여덟째, 귀를 기울이고 질문을 하는 것은 지혜의 자양분이다.
아홉째, 전념하고 탐구하는 것은 사실의 자양분이다.
열째, 올바로 실천하는 것은 하늘의 자양분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열 가지 자양분을 보면 매우 현실적인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현실적인 삶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 현세적인 가르침도 펼치셨다.
생명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원동력은?
삶은 등불과도 같다, 자양분은 심지와 기름처럼 땔감과도 같다. 기름과 심지가 있어야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듯이, 뭇삶 역시 물질, 접촉, 의도, 의식 이라는 네 가지 자양분이 있어야 생명의 불꽃이 계속 유지 된다. 그렇다면 계속 생명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네가지 자양분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을 원천으로 하는가? 이 네 가지 자양분은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근거로 하고 갈애를 원천으로 한다.
(Āhārasutta-자양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1,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네 가지 자양분이 모두 ‘갈애’를 원천으로 하고 있음을 말씀 하셨다. 모든 것이 갈애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생명의 불꽃이 유지 되는 것도 ‘갈애’ 때문이다. 그런 갈애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적은 근본적인 욕구를 말한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
자양분은 일종의 땔감이다. 땔감이 있어야 불이 계속 타오르듯이 뭇삶들은 계속 집착이라는 땔감을 공급해 주고 있다. 그런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발생된다.
집착이 있는 한 생명의 불꽃은 계속 타오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S35:28)”고 하였다. 그런 불은 다름 아닌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다. 탐욕이 불이 일어난 것은 탐욕이라는 땔감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등불이 꺼질 때
생명의 불꽃은 집착을 땔감으로 유지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집착의 등불을 꺼지게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등불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기름과 심지를 인연으로 등불이 타오를 때 어떤 사람이 때때로 기름을 붓지 않고 심지를 올리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 최초의 연료가 다 떨어져도 다른 것이 채워지지 않는 등불은 땔감도 없고 연료도 없어 꺼져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결박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서 해로움을 보는 자에게는 갈애가 소멸한다.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며,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판,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
(Saññojanasutta-결박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3,전재성님역)
땔감이 있어야 불꽃이 유지 된다. 그러나 땔감이 떨어지면 더 이상 불꽃은 유지 되지 않고 사그라져 버린다. 불이 꺼져 버리는 것이다.
탐진치로 불타는 세상에서 탐욕이라는 땔감, 성냄이라는 땔감, 어리석음이라는 땔감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았을 때 등불이 꺼지듯이 열반에 들 것이라 한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종식이 되고 윤회 또한 종식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생명의 탐진치로 이루어진 생명의 불꽃은 꺼지고 만다.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것을 아쉬워하지만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만일 세세생생 윤회하며 생명의 불꽃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집착(우빠다나)’이라는 땔감을 계속 공급해 주면 된다. 그런 집착은 악행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선행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집착이 있는 한 결코 생명의 불꽃은 꺼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착은 결국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 설령 아무리 선행을 한다해도 선행 역시 집착에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운명적 파탄으로 이끈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일어나고, 그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발생한다고 하였는데, 이 집착으로 인하여 태어남을 피할 수 없다. 태어남은 ‘늙음과 죽음, 슬픔, 비판, 고통, 근심, 절망’으로 귀결 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운명적 파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13-08-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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