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상서로운 징조와 파멸의 문, 별똥별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20. 15:18

 

상서로운 징조와 파멸의 문, 별똥별을 보고

 

 

열대야는 끝나고

 

세월에 장사 없다 하였다. 이제 여름도 다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에 잘만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열대야가 비로소 끝났음을 차가워진 새벽공기로 알았다.

 

열대야는 끝났지만 낮은 무척 덥다.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래야 곡식이 잘 자라기 때문이다. 아열대성 작물인 벼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분과 햇볕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논에는 물이 찰랑찰랑 넘치고 하늘에서는 따가운 햇살이 사정 없이 내려 쪼여야 병충해 없이 벼가 잘 자란다고 한다.

 

쌍개울에서

 

저녁에 쌍개울에 갔다. 생태하천으로 거듭난 두 개의 지류가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쌍개울이라고 최근 붙여진 이름이다. 하천에는 보행자겸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있어서 운동 나온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두 개의 하천이 합류 되는 지점에 쉼터가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저녁에 바람을 쏘이기 위하여 둥그런 마루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마침 남쪽 하늘에는 둥그런 달이 떠 있다. 날자를 보니 보름이 이틀 남았다. 음력으로 8 13일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달을 보니 거의 원형에 가깝다. 그리고 달이 무척 크게 보인다.

 

 

 

 

 

 

긴 꼬리를 그리며 별똥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달을 한참 쳐다 보았다. 잠시 딴 곳을 보고 있는 사이에 옆에 앉은 어떤 이가 별똥이다!라고 소리쳤다. 그 순간 달이 있는 하늘을 쳐다 보았다. 긴 꼬리를 그리며 별똥이 떨어졌다.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1초도 되지 않은 것 같다.

 

별똥이 떨어진 것을 보았을 때 밤하늘의 불꽃놀이가 연상되었다. 불꽃놀이 할 때 화약을 쏘아 올리는데 그 때 긴 괘적을 남기며 올라 간다. 별똥이 떨어질 때 꼭 그런 모양이었다. 긴 괘적을 남기고 허공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a shooting star

 

 

 

130년 주기의 페르세우스 유성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똥을 본다는 것이 매우 드믄일디. 그래서 인터넷검색을 해 보았다. 최근 경향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별똥별 우주쇼’ 장면이 탄성을 자아냈다. 13일 오전 강원 횡성군 ‘천문인의 집’에서 바라본 하늘에 “페르세우스 유성우(Perseids)”가 만들어낸 별똥별이 떨어졌다. 페르세우스 유성우는 혜성 스위프트 터틀(Swift Tuttle)의 잔해가 만들어낸 티끌로, 페르세우스 자리 주변을 방사점으로 출현해 그 이름이 붙여졌다.

NASA
는 앞서 “11일과 12(한국시간으로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5시 사이) 지구 전역에서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우(Perseids)가 대거 관측될 것”이라고 밝혔다. 13일 오전에 펼쳐졌던 ‘별똥별 우주쇼’는 130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도는 혜성인 스위프트 터틀(Swift Tuttle)의 잔해가 지구 대기권으로 떨어지는 모습이다.

국내에서도 빛 공해가 없고 구름이 적은 교외에서 시간당 최대 100개의 유성을 관측할 수 있었다. 13일 새벽 4시쯤 유성우가 절정에 달해 시간 당 최고 100개의 별똥별이 떨어지는 장관이 목격됐다.
 

 

( 별똥별 우주쇼 “13 새벽 절정”, 경향신문 2013-08-13)

 

 

 

 

 

경향신문에 따르면 별똥이 떨어질 시기라는 것이다. 130년 주기로 태양을 도는 혜성이 8 11일 부터 13일 까지 대거 관측 될 것이라 이미 예고 되었다고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19일 저녁 쌍개울에서 관측된 별똥별 역시 페르세우스 유성우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별똥별의 징조는?

 

별똥쑈를 본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소설이나 야사를 보면 별똥이 떨어진 것을 보고 큰 인물이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 많이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별똥은 불행의 상징이다. 반대로 행운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별똥별을 봄으로 인하여 한편에서는 불길한 징조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행운의 징조라고 한다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그날의 운세

 

아침시간은 모두 바쁘다. 일터에 나가는 사람들은 5분 늦게 출발하면 5분 늦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단 1분이라도 빨리 나가기 위하여 서두른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 간다. 그런데 도착하자 마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웬지 하루 일과가 슬슬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반대로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였는데 막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5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출근시간에 5분 늦게 출발하면 10분 이상 늦게 도착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놓쳤으니 그 날 하루가 잘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렇게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서 그날의 운세를 대강 짚어 본다. 이런 예측은 타당한 것일까?

 

상서로운 징조에 대하여

 

상서로운 징조는 어떤 것일까? 숫따니빠따의 망갈라경(길상경, Sn2.4) 주석에 상서로운 징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Prj. I. 118-123 에 따르면 전 인도에서 도시의 성문이나 집회당에서 세속적으로 ‘어떠한 것이 축복인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 보는 것의 축복이라고 하는 자들은 상서로운 것이라고 인정된 형상이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독수리나, 빌와 나무의 싹이나, 임산부나, 잘 차려 입은 소년이나, 가득 찬 항아리나, 신선한 물고기나, 준마나, 준마가 끄는 수레나, 암소나, 갈색의 황소나, 다른 상서로운 것으로 인정된 것을 보는 것이 축복이다.

 

2) 듣는 것의 축복이라고 하는 자들은 상서로운 것이라고 인정된 소리가 곧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번영!'이나 ‘성장!’이나 ‘충만!'이나 '아름다움!’이나‘오늘 좋은 밤을!, 아름다운 순간을!, 좋은 날을!, 축복을!’과 같거나 어떤 상서로운 것으로 인정된 것을 듣는 것이 축복이다.

 

3) 인식된 것이 축복이라고 하는 자들은 상서로운 것으로 인정된 향기와 맛과 감촉이 곧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른 아침에 일어나 연꽃의 향기와 같은 꽃의 향기를 맡거나, 이빨을 청소하거나, 땅을 접촉하거나, 푸른 곡식이나, 신선한 쇠똥이나, 거북이나, 참깨수레나, 꽃이나, 열매를 만지거나, 신선한 진흙을 바르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거나 ,아름다운 터어반을 걸치는 것이나, 어떤 상서로운 것의 향기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감촉을 느끼는 것이 축복이다.

 

지상에서의 이러한 논쟁이 뜨거워지자 하늘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해서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인 도리천에까지 알려졌다. 제석천은 하늘아들을 파견하여 부처님에게 여쭈어 볼 것을 청했는데 이렇게 해서 이 경이 설해진 것이다.

 

(마하망갈라경 해제, 전재성박사)

 

 

행운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처님 당시 고대 인도에서 어떤 것이 행운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만일 어느 누가 준마가 끄는 수레나 갈색의 황소를 보았다면 이는 상서로운 징조라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계속 파란 불만 있어서 신호등에 걸리지 않았을 때 그 날의 일이 잘 풀릴 것 같다고 예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장, 충만, 축복 과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역시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 것이다. 마치 교회에서 목사가 은혜, 성령 등의 갖은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축원 기도를 하는 것과 같다.

 

또 좋은 향기, 달콤한 맛,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을 때 또한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마치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때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것이라고 예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고대인도에서는 보는 것, 듣는 것, 인식 되는 것 이렇게 세 가지에 대하여 어느 것이 상서로운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치 별똥별이 떨어졌을 때 어느 큰 인물이 죽을 징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의 현상일 뿐인데 거기에다 큰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다. 대신 부처님은 상서로운일, 행운, 축복이 일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망갈라경에서 볼 수 있는 열 가지이다.

 

무엇이 축복인가

 

망갈라경에서 축복에 대한 이야기는 세간적인 것에서부터 출세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특히 세간적인 것을 보면 상식을 크게 벗어 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는 것이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조짐이라 하였고, 분수에 맞게 살며 공덕을 지으며 사는 것이 축복이라 하였다. 또 많이 배우고 익히는 것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라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식을 돌보는 것 역시 미래에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 하였다. 또 술을 마시지 않는 것,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만족할 줄 아는 것,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배우는 것 또한 상서러운 일이 일어날 징조라 하였다.  

 

그런데 경에서는 출세간적인 것으로 열반을 들고 있다. 감관을 청정하게 하여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는 것이 더 없는 축복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망갈라경에서는 인간의 기본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좋은 징조, 축복을 가져올 것이라 하였다. 그 어디에도 요행을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별똥별을 보았다고 하여 행운의 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인식한다고 하여 축복이 찾아 오지 않음을 말한다.

 

파멸의 문

 

부처님은 축복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을까? 부처님은 불행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다.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빠라바와경(Sn1.6)이 그것이다. 우리말로 파멸의 경으로 번역된다.

 

빠라바와경은 망갈라경과 정 반대의 구조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망갈라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는 것이 더 없는 축복이라 하였으나, 빠라바와경에서는 자기는 풍족하게 살면서도, 늙게 되어 젊음을 잃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1.6)”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파멸의 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경에 따르면 크게 열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이를 세분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파멸의 문

  

1

가르침을 싫어하는 것

dhammadessī

 

2

참사람이 아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Asantassa pisā hontī sante na kuruta piya

 

3

수면에 빠지는 버릇이 있는 것

Niddāsīlī

 

4

교제를 즐기는 버릇이 있는 것

sabhāsīlī

잡담을 즐기는 것

5

정진하지 않는 것

anuṭṭhātā

 

6

나태한 것

Alaso

 

7

화를 잘내는 것

kodhapaññāo

 

8

자신은 풍족하게 살면서 젊음을 잃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

Yo mātara vā pitara vā jiṇṇaka gatayobbana

 

9

성직자나 수행자, 혹은 걸식자를 속이는 것 Yo brāhmaa vā samaa vā añña vāpi vaibbaka, Musāvādena vañceti

 

10

엄청나게 재물이 많은 자가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

Pahūtavitto puriso sahirañño sabhojano,
Eko bhuñjati sādūni

인색한 자

11

혈통에 자부심이 강하고, 재산을 자랑하고, 가문을 뽐내고 친지를 멸시하는 것

Jātitthadadho dhana tthaddho gottatthaddho ca yo naro

 

12

여색에 미치는 것

Itthidhutto

 

13

술에 중독되는 것

surādhutto

 

14

도박에 빠지는 것

akkhadhatto

 

15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리는 것

Dissati paradāresu

 

16

젊은 시절이 지난 남자가 띰발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루는 것

Atītayobbano poso āneti timbarutthani,
Tassā issā na supati

 

17

술에 취하고 재물을 낭비하는 여자나 그와 같은 남자에게 실권을 맡기는 것

Itthisoṇḍi vikirai purīsa vāpi tādisa,
Issarīyasmī
hāpeti

사치하는 자

18

왕족의 가문에 태어나더라도 권세는 작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하는 것

Appabhogo mahātaho khattiye jāyato kule,
Sodha rajja
patthayati

능력이 없는 자

 

 

경에서는 열 여덟 가지 사항에 대하여 파멸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이라 하였다. 파멸의 문으로 들어 가면 파멸되고 말 것이다. 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듯이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말이다. 별똥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큰 인물이 죽을 것이라거나 엘리베이터가 지나 가버려서 그 날은 재수 없을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과 다르다.

 

가르침을 싫어 하는 자

 

파멸의 문에서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가르침을 싫어 하는 것 (dhammadessī)’ 이다. 가르침이란 부처님의 담마를 말한다. 가르침을 따랐을 때는 번영하지만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삿된 견해를 가졌을 때는 파멸할 것이라 하였다.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든가 하여 업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는 자들이 대표적이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참사람이 아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어리석은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유유상종의 법칙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25)”라고 하였다. 도둑은 도둑들과 관계를 맺고, 폭력배는 조폭과 관계를 맺듯이 뭇삶들은 자신의 경향과 관련 있는 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런 경향은 과거세도 그랬고 미래세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하여 파멸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어떤 잡담을 하는가

 

네 번째 항을 보면 교제를 즐기는 버릇(sabhāsīlī)이 있는 것도 파멸의 문이라 하였다. 왜 교제를 즐기는 것이 파멸의 문인가? 주석에 따르면 잡담을 즐기기 때문이라 하였다. 왁자지껄 하게 떠드는 것을 말한다. 이는 외도에게서 볼 수 있다.  뽓따빠다의 경(D9)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래서 세존 께서는 말리까 공원의 띤두까 나무로 둘러싸인 공개토론장인 에까쌀라 강당을 찾아 가셨다.

 

그 무렵 유행자 뽓따빠다는 많은 유행자의 무리와 함께 앉아서 시끄럽게 왁자지껄 큰 소리로 떠들면서 여러 가지 잡담, 예를 들어 왕에 대한 이야기, 도적에 대한 이야기, 대신들에 대한 이야기, 군사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대에 대한 이야기, 꽃다발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척에 대한 이야기, 수레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부락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도로에 대한 이야기, 목욕장에서의 이야기, 망령에 대한 이야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시비비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Poṭṭhapādasutta-뽓따빠다의 경, 디가니까야 D9, 전재성님역)

 

 

어느 강연에 따르면 남자는 하루에 15,000단어를 해야 하고, 여자는 이 보다 훨씬 더 많은 25,000단어를 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부간에 대화를 많이 할 것을 강조 하였다.

 

사람이 말하지 않고 살 수 없을까? 말하지 않아도 신문이나 책,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와 접하기 때문에 그다지 심심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책도 인터넷도 없는 무문관에서라면 어떻게 될까? 수행을 하지 않는 일반사람이라면 아마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말을 하고 산다. 그래서 틈만 나면 입을 놀린다. 사람을 만나면 어떤 말이든지 하고 산다. 그런 말의 종류가 경에 표현 되어 있다. 세어 보니 스물 세 가지이다. 아마 보통사람들이 말의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다 들어 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식 이야기나 여자 이야기 등 23 가지 종류에 대한 이야기가 삶을 살아 가는데 모두 도움이 되는 말들일까? 스트레스 푸는데 도움이 될지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두 잡담이기 때문이다.

 

경에 따르면 공개토론장에서 외도들은 잡답을 즐기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외도들은 잡담을 할까? 주석에 따르면 유행자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서부터 탑묘의 일, 보리수의 일, 스승과 친교사의 일,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과 같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Smv.367)”라 하였다. 할 일이 없어서 잡담이나 하고 앉아 있는 유행승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모든 공덕을 파괴 하는 분노

 

일곱 번째 항을 보면 화를 잘내는 것(kodhapaññāo)’이 파멸의 문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성내기를 밥먹듯이 하는데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파멸이 예고 될 수 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분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면 가능하다.

 

 

Mā vo kodho ajjhabhavi

mā ca kujjhittha kujjhana,
Akkodho avihi
sā ca

ariyesu vasati sadā
Atha pāpajana
kodho

pabbato vābhimaddatīti.

 

[제석천]

분노가 그대를 이기게 하지 말고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

분노가 없고 해침이 없는 자는

항상 거룩한 님 가운데 사네.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분노는 악한 사람을 부수어 버리네.

 

(Akkodhasutta-분노 없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25,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mā ca kujjhittha kujjhana)” 하였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본다. 왜냐하면 대부분 상대방이 화를 내면 맞받아 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내는 자에게 화를 내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 하였다.

 

화를 내면 자신만 괴롭다. 상대방이 화를 받아 주지 않으면 고스란히 화가 되돌아 자신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를 내면 가장 큰 손실이 따른다. 화를 냄으로서 그 동안 쌓은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화를 내었다면 다시는 보려 하지 않을 것이고, 고객에게 화를 내었다면 다시는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화를 내면 이제까지 쌓은 공덕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를 게송에서는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분노는 악한 사람을 부수어 버리네. (Atha pāpajana kodho pabbato vābhimaddatīti”라고 표현 하였다.

 

인색한 자의 말로는

 

열 번째 항에서 엄청나게 재물이 많은 자가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파멸의 문이라 하였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말한다. 이웃이 굶어 죽어도 자신만은 호의호식 하는 케이스가 이에 해당된다. 이처럼 인색한 자의 말로는 어떤 것일까?

 

경에 따르면 오로지 자기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며 남이야 죽든 살든 관여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면 대체로 아귀의 과보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e'dha maccharino loke

kadariyā paribhāsakā,
Aññesa
dadamānāna

antarāyakarā narā.

 

Niraya tiracchānayoni

yamalokañcupapajjare,
Sace enti manussatta

daidde jāyare kule,
Co
a piṇḍo ratī khiḍḍā

yattha kicchena labbhati.

 

[세존]

이 세상에 인색하여

재물을 아끼고 걸식자를 꾸짖으며

베풀고자 하는 다른 이를

베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람

 

지옥과 축생과

아귀의 세계에 떨어지며

인간의 세계에 이르더라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네.

 

(Maccharisutta-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9, 전재성님역)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가 있다. 그래서 이 집 저 집 전국적으로 유명한 맛집순례를 하고 다니며 식도락을 즐긴다. 그가 죽어서 어떻게 될까? 베푼 것 없이 인색하게 살며 평생 맛만 탐한 부자는 죽어서 아귀의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한다. 입은 작은데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아귀를 말한다. 설령 인간으로 태어나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라 한다.

 

나이 든 노인의 질투

 

열 여섯 번째 항을 보면 젊은 시절이 지난 남자가 띰발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루는 것도 파멸의 문을 예약해 놓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경에서는 띰발루(timbaru) 열매 같은 가슴이라 하였는데, 이는 띰발루 열매가 여성의 가슴 처럼 풍만하게 생겼음을 말한다. 그래서 띰발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이라 하였다

 

 

 

띰바루(timbaru)열매

학명Strychnos이다.

출처 : Strychnos madagascariensis

 

 

젊은 여인과 사는 노인은 질투에 잠못이룰 것이라 하였다. 그런 질투는 어떤 것일까? 주석에서 이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흔히 고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부자집 노인이 젊은 여인을 후처로 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여인과 같이 사는 노인은 여인을 만족 시켜 주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후처가 늙은이를 향하여힘도 없으면서라고 경멸하듯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육체적으로 한계를 느낀 늙은이는 여인의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한다.  

 

후처로 들어 온 여자가 행실이 좋지 않다면 바람을 피울 수도 있다. 그럴 때 노인의 고민은 깊어 질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루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나이 들어 젊은 여인을 취하는 것은 파멸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자리가 그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능력있게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재앙에 가깝다. 특히 고위직일수록 그렇다. 만일 한나라의 대통령 자리에 무능력자가 앉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닐 것이다. 또 사기꾼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국고가 거덜 날 지 모른다.

 

만일 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무능력한 스님이 앉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은처, 도박 등 갖가지 의혹을 가진 스님이 큰 욕심을 내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를 탐하였을 때 어떻게 될까? 이는 한국불교와 불자들을 나락에 빠뜨리는 재난이 될 것이다.

 

능력이 부족함에도 꿈을 크게 꾸는 자가 있다. 그런 자가 높은 자리를 탐하였을 때 그 조직, 그 회사, 그 나라에 ‘재앙’이 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왕족의 가문에 태어나더라도 권세는 작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파멸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으로 보았다.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

 

아침 출근길에 차를 몰고 가는데 푸른 신호등만 보인다면 오늘 하루 일이 술술 잘 풀릴 것 같고, 반대로 붉은 신호등만 걸려 갈 때 마다 선다면 왠지 무언가 꼬이는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 같다고 믿는 생각일 뿐이다. 별똥별이나 신호등을 보고서 행운이나 불행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어 날 것 같은 조짐이나 행운, 길상, 축복은 징조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는 상서로운 일어 날 것이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에는 파멸의 문이 열릴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망갈라경(길상경, Sn2.4)에서는 길상에 대한 것을 가르침을 설하였고, 빠라바와경(파멸의 경, Sn1.6)에서는 파멸의 가르침에 대하여 설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S4:21)”라고 설명 된다.

 

 

 

2013-08-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