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생상담은 아무나 하나? 패배자 없는 고귀한 승리를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12. 16:16

 

인생상담은 아무나 하나? 패배자 없는 고귀한 승리를 위하여

 

 

 

하루에도 수 없이 경계에 부딪친다. 그 때 마다 무참히 깨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특히 아침이 되었을 때 알 수 있다. 전날 내가 한 일이 부끄러웠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다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매일 경계에 부딪치며 매일 깨지며 매일 후회하며 살아 간다. 그러면서 또한 성장해 간다. 그런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없을까?

 

최상의 승리자는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o sahassa sahassena           요 사핫상 사핫세나

sagāme mānuse jine              상가메 마누세 지네

ekañca jeyyamattāna            에깐짜 제이야맛따낭

sa ve sagāmajuttamo.            사 웨 상가마줏따모.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 103)

 

 

한사람이 백만대군을 상대하여 이길 수 있을까? 전쟁에서 단 한사람의 군인 홀로 참전하여 백만이나 대군을 무찔러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구경 게송에 따르면 홀로 참전하여 백만대군을 무찔러 승리한다고 최상의 승리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최상의 승리자는 누구인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진정한 승리자는 자신을 이기는 자이다. 주석 Dhp A.II.226에 따르면, “밤낮으로 명상주제를 명상하여 자신을 제어하여 탐욕의 번뇌를 정복한 자가 전쟁의 정복자 가운데 최상의 정복자이자, 전장의 마루에 서 있는 가장 탁월하고 고귀한 전사이다.”라 하였다. 자기자신을 제어 할 수 있는 자가 홀로 백만대군을 이기는 것 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이는 온갖 경계에 부딪쳤을 때 알 수 있다.

 

개그맨 보다 더 웃기는 신부

 

몇 일전 우연히 황창연 신부의 강연을 들었다. KBS 아침마당프로에서이다. 오전 일찍 방송하는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남자와 여자의 특성에 대하여 강의 하였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개그맨 보다 더 재미 있게 강의 하여서 개그맨 보다 더 웃기다는 개신교의 장경동 목사 못지 않은 웃음을 선사 하였다. 또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부부간의 갈등에 대하여 해법을 제시하였다. 평소 근엄해 보이는 신부가 의성어까지 써 가며 말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 신부도 저런 면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고정관념이 바뀌는 순간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개신교에 장경동목사가 있다면 천주교에 황창연 신부가 있고, 불교에 법륜스님이 있다면 천주교에는 또한 황창연신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황창연신부가 특강한 내용 중에 한 말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종자가 다른데 서로 함께 사는 부부를 보면 존경스럽다라는 내용이다. 자신은 홀로 살기 때문에 부딪칠 일이 없지만 화성인과 금성인처럼 완전히 종자가 다른 두 남녀가 함께 산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신부는 수십년 동안 함께한 부부의 인내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종자는 어떻게 인내하여야 할까?

 

그럼 차라리 헤어 지십시요

 

삶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문제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치고 이를 해결해 나간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안되는 문제도 있다. 그럴 경우 잘 아는 사람이나 유명인에게 인생상담을 한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선생은 강의에서 인생상담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부부생활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도올 선생은 귀찮아서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라 생각된다. 상담자는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한 것인데, 이를 그대로 받아 들여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고 말한 것은 정확한 해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면 다른 사람의 말도 들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양자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본 다음에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고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만나지 못하면

 

불자들도 스님에게 인생상담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스님들 법문을 들어보면 불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부간에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 도올 선생처럼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고 말할까? 실제로 그런 취지로 말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징징짜면서 인생상담을 하길레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법구경에도 유사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가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 61)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자와 길을 같이 가는 것은 괴로운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차라리 홀로 갈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수행자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특히 출가수행자에게 적용 되는 말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인연을 끊고 출가한 수행자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을 멀리하면 그만이다. 이는 재가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법연으로 만난 도반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상대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하지만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 등 가족관계는 이와 다르다. 보기 싫다고 하여 그만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만약 보기 싫다고 하여 홀로 간다면 우리 사회는 혼자 사는 사람으로 넘쳐 날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

 

초전법륜경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appiyehi sampayogo dukkho, S56:11)”이라 하였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이지만 사랑하지 않은 것과 만나는 것 역시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이런 일은 삶의 과정에서 무수하게 발생한다. 가족간에서도 발생할 수 있고, 직장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부부간, 부모자식간의 갈등이 발생하였을 때 이는 사랑하지 않은 것과 만남이 된다. 또 직장에서 못된 상사를 만나거나 마음에 안든 부하를 만나는 것도 사랑하지 않은 것과의 만남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을까? 수행자라면 걸망싸면 그만이지만 얽히고 설킨 인연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싫어 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서로 종자가 다른, 종족이 다른 듯이 보이는 금성인과 같은 남자와 화성인 같은 여자가 만나서 살았을 때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한쪽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인생상담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고해성사를 많이 듣다 보니

 

아침 방송에서 황창연 신부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듣고 있던 방청객들은 황신부가 말할 때 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속으로 동의한다는 뜻이다.

 

황신부는 남자와 여자의 경우 뇌구조가 다르다든가, 남자는 15000마디를 하지만 여자는 25000마디를 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는가 하는 말들을 하였다. 들어 보면 매우 준비를 많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네안데르탈인이 왜 멸종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크크크와 같은 의성어로 웃움바다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황신부의 강의에서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는 말은 없었다. 그 대신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 이해 하지 못하는 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서로 종자가 다른 남자와 여자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황신부의 강연을 들어 보면 마치 부부생활을 해 본 것처럼 리얼하게 이야기 한다. 그러자 사회자가 신부님은 어떻게 그렇게 부부생활에 대해서 잘 아세요?”라 묻는다. 그러자 황신부는 고해성사를 많이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인생상담을 많이 하다 보니 자신이 직접 체험을 하지 않았어도 간접적으로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생상담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로 매우 유명하다. 법륜스님 역시 아침 방송에 출연 하여 강연한 바 있다. 스님의 즉문즉설은 대부분 가족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해법이다. 그것도 불교적 해법이다. 구체적으로 금강경의 무유정법(無有定法)’에 근거한다고 한다. “마땅히 정해진 법이 없다라는 무유정법에 따라 부부간, 시부모간, 부모자식간의 갈등에 해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런 법륜스님도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는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 보라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황창연신부나 법륜스님은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종교가 달라서 상세한 해법은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라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인생상담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저 그러려니하면서

 

대부분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타인에게 의존하려고 한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스님이나 신부, 목사에게 인생상담을 받으려 할 것이다. 대부분 자신의 어려운 현실을 이야기 하며 하소연 하는 형식이라 한다. 그래서 상담을 들어 주는 사람은 특별히 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들어만 주면 되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싶으나 말할 상대가 없어서 찾아 온 것이기 때문에 잘 들어 주면 그것 자체로도 훌륭한 상담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훌륭한 상담은  무엇일까?

 

인생상담 대부분은 자신의 주변에 대한 문제이다. 주로 가족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다. 그러다 보니 헤어질 수도 없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상담을 한다. 그럴 경우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는 말을 포함 하여 수 많은 해법이 제시된다.

 

그러나 불교적 해법을 제시한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저 그러려니하면서 보내는 것이다. 왜 이 방법이 효과적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변화때문이다.

 

제행무상에서 희망을

 

세상은 변한다. 어느 것 하나 고정 되어 있지 않고 끊임 없이 바뀐다. 당장 날씨가 그렇다. 어제 맑은 날이었다가도 오늘 비가 오는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맑은 날씨가 점차 탁해지면서 구름을 형성하고 마침내 비가 오는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 지금 이 마음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런 마음은 날씨 보다 더 변덕스러워서 시시각각 변한다. 따라서 지금 보기 싫은 것도 조건이 바뀌면 좋아 질 수 있다. 그래서 보기 싫은 것을 보아도 개입하지 않고 그러려니하며 내버려 두면 된다. 좀 지나면 분명히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래서 이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이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희망을 갖는다. 만일 변함이 없다면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지금 보기 싫은 사람이 보기 싫은 채로 영원히 그대로 있다면 괴로운 일이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보기 싫은 사람도 변하고 보기 싫다는 마음 자체도 변한다. 그래서 변화에서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가장 많이 변해야 할 사람은 자기자신이다. 자기자신이 변함으로서 남의 변화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승리자는

 

자기자신이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해법을 법구경에서 볼 수 있다.

 

 

Attā bave jita seyyo           앗따 하웨 지땅 세이요

yā cāya itarā pajā             야 짜양 이따라 빠자

attadantassa posassa             앗다단따싸 뽀사차

nicca saññatacārino.           닛짱 산냐따짜리노.

 

자신을 다스리고

언제나 자제하며 사는 자,

자신을 이기는 자가

다른 사람을 이기는 자보다 낫다.(Dhp 104)

 

 

 

자신을 다스린다 (Attā bave jita seyyo)”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복 보다는 자신에 대한 번뇌에 대한 승리로 자제된 자아가 더 고귀하다.(DhpA.II.229)”라는 말이다. 또 게송에서 언제나 자제하며 사는 자는 번뇌에서 벗어나 자신을 잘 제어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제어된 자이다. 다름 아닌 십선행을 하고 십악행을 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게송에서 자신을 이기는 자가 다른 사람을 이기는 자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다른 사람이 술수나 무력이나 힘에 의한 굴욕으로 전쟁에서 패했다면, 그들을 정복한 자의 승리는 고귀한 것이 못된다라고 하였다. 힘으로 밀어 부쳐 승리를 거두 었지만 패한 자는 승복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승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귀한 승리는 어떤 것일까?

 

남자가 백전백패할 때

 

법구경 게송 104번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도박이야기기 나온다. 도박을 하면 승패가 갈린다. 때로 내가 이기기도 하고 상대방이 이기기도 한다. 그런 승리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소한 승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최상의 이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술수나 무력, 힘에 의하여 승리를 쟁취 한 것 역시 사소한 승리라 볼 수 있다. 패자가 남아 있는 한 완전한 승리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귀한 승리는 어떤 것일까?  

 

부부싸움을 하면 한편이 이길 수도 있고 무승부가 될 수도있다. 그런데 말싸움을 하면 남자가 백전백패라 한다. 황창연 신부의 강연에 따르면 여자와 남자의 뇌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라 한다. 여자는 좌측과 우측 두 개의 뇌를 사용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말을 할 수 있음에 반하여 남자의 경우 한쪽 뇌만 쓰기 때문에 황신부의 표현을 빌리면 크크크하다 만다는 것이다. 여자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지만 남자는 오로지 한순간에 하나의 일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말싸움을 하면 백전백패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자가 승리하였다고 하여 완전한 승리로 볼 수 있을까?

 

크크크하다 볼일 못 본 남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폭력적인 수단으로 여자를 제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말싸움에서 진 남자나 폭력적인 방법에 굴복한 여자 모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패자를 만들 수 없는 승리

 

인생상담을 하는데 있어서 피상담자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그럼 차라리 헤어지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나 인생상담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패자를 만들 수 없는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다스리고 언제나 자제하며 사는 자, 자신을 이기는 자가 다른 사람을 이기는 자보다 낫다. 천신도 건달바도 악마도 하느님도 그와 같은 존재의 승리를 패배로 바꿀 수 없다.(DhpA.II.227-229)”라고 하였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자기자신을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패자 없는 고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바로 이것이 불교적 해법이라 본다.

 

 

 

2013-08-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