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유학(有學) 무학(無學)의 행동양식, 학인 아지따의 질문(Sn5.2)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10. 15:20

 

유학(有學) 무학(無學)의 행동양식, 학인 아지따의 질문(Sn5.2)

 

 

 

대승경전을 읽었는데

 

어느 스님의 이야기이다. 50년 동안 선()수행을한 스님이 있다. 처음 출가하여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대승경전을 읽었는데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 줄 알았다고 한다. 특히 부처님의 말씀에 모두 사실인줄 알고 신심이 나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출가 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대승불교 경전이 부처님 열반 후 500~600년 지난 후 후대인이 만든 가짜라고 하더라.”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 이 말을 듣고 너무 충격이 커서 중노릇을 계속할지 말지 고민도 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안이 있었기

 

불자들은 대승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 틀림없는 부처님의 말씀이라 믿고 있다. 누구나 그렇게 믿었을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 금강경을 접하였을 때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식으로 불자가 되어 접한 최초의 대승경전이 금강경이었는데, 한문으로 된 금강경의 모든 내용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중에 감동적인 내용이 있다.  금강경의 정종분이라 볼 수 있는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라는 문구이다. 풀이하면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했으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느니라.”라고 번역된다. 그래서 대승정종분을 독송하였을 때 기분이 고조 되었고 한문독송하는 맛이 났다.

 

그러나 지금 금강경을 부처님의 원음이라 보지 않는다. 사실을 알고 나니 모든 대승경전이 후대에 편찬 된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고 하여 앞서 언급한 스님처럼 불자노릇을 그만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기경전이다. 그것도 빠알리니까야이다.

 

빠알리니까야를 접하고

 

빠알리니까야를 접하고 부처님의 원음을 알게 되었다.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법구경, 숫따니빠따 등 수 많은 경전을 접하고 비로소 이것이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니까야도 후대에 편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디가니까야는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포교용으로 편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 모두 담겨져 있다. 따라서 어느 니까야를 읽어 보아도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에는 변화가 없다.

 

상윳따니까야에는 하늘아들, 마라, 브라흐마 등 초월적 존재가 등장한다. 그래서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런 구성은 모든 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범천이 등장하였다고 하여

 

그렇다고 하여 니까야가 허구일까? 범천이 등장하였다고 하여 후대 편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니까야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어느 스님은 혹시 제석천이나 범천을 보신 분이 있으면 저에게 문자 보내 주세요 ” 라고 회의석상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다. 하늘사람, 하늘아들, 마라, 범천, 제석천이 등장하는 니까야가 허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한 말이다.

 

니까야에 마라, 범천 등이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초월적 존재가 일종의 조연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라가 등장하였을 때 마라는 부처님과 대척점에 있다. 그래서 늘 반대의 견해를 제시한다. 이렇게 마라를 등장시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또 경에서는 범천(브라흐마)이 자주 등장한다. 하느님이라고도 번역되는 범천이 등장한다고 하여 니까야의 가치가 상실 되는 것일까?

 

범천 중에 바까(Baka)가 있다. 바까범천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전생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경에서 바까는 망상적 유형의 범천으로 등장한다.

 

그런 바까에게 부처님은 바까의 전생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견고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S6:4)”라고 알려 준다. 바까범천이 삿된 견해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회의론자들은

 

니까야에서 마라, 범천 등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럼에도 회의론자들은 마라나 범천 등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였다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 조작되고 후대에 끼워 넣어진 것이라 강변한다. 또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만 펼쳤지 내세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윤회, 재생연결식, 삼세양중인과  등 업과 내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회의론자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니까야를 읽어 보았다면 결코 그런 견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전적 근거 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니까야를 읽어 보면 하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경전이든지 사성제, 팔정도, 연기 등 부처님의 근본교설에서 벗어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수천개의 경과 팔만사천 법문이 무상, , 무아,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 근본가르침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 틀림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면, 설령 경에서 마라나 범천 등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였을 때 그 괴로움의 내용이 나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 없는 사실임을 확인하면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범천, 마라 등 초월적 존재 등 모든 니까야의 내용을 거부감 없이 전적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숫따니빠따를 인용한 상윳따니까야

 

니까야에도 고층(古層)이 있다. 고층의 경전일수록 부처님의 원음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말씀을 면전에서 듣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난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싸리뿟따여, ‘피인으로 가는 길’에서 아지따의 질문 가운데 이와 같은 시가 있다.

 

[아지따]

‘존자여, 세상에는

진리를 성찰한 자들도 있고, 여러 학인들도 있으니,

그들의 고귀한 삶에 관해 여쭈오니

현명한 님으로서 말씀헤 주십시요.’

 

싸리뿟따여, 이 간략하게 질문한 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상세하게 그 뜻을 밝힐 수 있겠는가?”

 

(Bhūtasutta-생겨난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1, 전재성님역)

 

 

사부 니까야 중에 상윳따니까야가 가장 고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연기를 설하는 인연상윳따(Abhisamayasayutta,S12)에서 숫따니빠따의 ‘피안으로 가는 품’의 경을 인용하고 있다.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Sn5.2)’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숫따니빠따가 가장 고층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숫따니빠따의 제4품인 여덟 게송의 품, 5품인 피안으로 가는 길의 품은 부처님의 원음이 그대로 실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이 두 개의 품에 대한 주석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닛데사라 한다.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Ajita sutta, Sn5.2)

 

상윳따니까야에서도 인용된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은 어떤 내용일까.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Kenassu nicuto lekā (iccā yasmā ajito) kenasasu nappakāsati,
Kiss
ābhilepana brūsi kisu tassa sahabbhaya.

 

[존자 아지따]

“세상은 무엇으로 덮여있습니까?

세상은 무엇 때문에 빛나지 않습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커다란 공포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2.

Avijjāya nivuto loko (ajitāti bhagavā)
Vevicch
ā pamādā nappakāsati,
Jappabhilepana
brūmi dukkhamassa mahabbhaya.

 

[세존]

“아지따여, 세상은 무명에 덮여있습니다.

세상은 탐욕과 방일 때문에 빛나지 않습니다.

갈망이 더럽히는 것이며,

괴로움이 그 커다란 공포라고 나는 말합니다.

 

 

3.

Savanti  sabbadhi sotā (iccā yasmā ajito)
Sot
āna ki nivāraa
Sot
āna savara brūhi kena sotā pithiyare

 

[존자 아지따]

“흐름은

어느 곳에나 흐르고 있습니다.

흐름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흐름을 제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흐름은 어떻게 그쳐집니까?

 

 

4.

Yāni sotāni lokasmi (ajitāti bhagavā)
Sati tesa
nivāraa,
Sot
āna savara brūmi Paññāyete pithiyare,

 

[세존]

“아지따여,

세상에서 어떠한 흐름이든지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 흐름을 막는 것이고,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흐름은 지혜로 인해 그쳐지는 것입니다.

 

 

5.

Paññā ceva sati ca (iccāyasmā ajito)
N
āmarūpan ca mārisa,
Eta
me puṭṭho pabrūhi kattheta uparujjhati

 

[존자 아지따]

“존자여, 지혜, 새김과 더불어 명색(정신-신체적 과정)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와 같이 여쭈니 말씀해 주십시오.”

 

 

6.

Yameta Paññāha apucchi ajita ta vadāmi te,
Yattha n
āmañca rūpañca asesa uparujjhati,
Viññ
āassa nirodhena ettheta uparujjhati.

 

[세존]

“아지따여, 그 질문한다면,

그대에게 명색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7.

Ye ca sakhātadhammā se ye ca sekhā puthu idha,
Tesa
me nipako iriya puehā pabrūhi mārisa.

 

[존자 아지따]

이 세상에는

진리를 헤아린 자들도 있고,

여러 학인들도 있습니다.

존자여, 그들의 행동양식에 대하여 여쭈오니

현명한 님으로서 말씀해 주십시오.

 

 

8.

Kāmesu nābhigijjheyya manasā nāvilo siyā,
Kusalo sabbadhamm
āna sato bhikkhu paribbajeti.

 

[세존]

“감각적 쾌락을 탐해서는 안 되며,

정신이 혼란되어서도 안 됩니다.

수행승은 모든 가르침에 숙달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유행하여야 합니다.

 

(Ajita sutta-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5.2, 전재성님역)

 

 

 

 

 

이 경이 설해진 동기는 서시에 나온다. 서시의 주석에 따르면 “성전에 통달한 바라문 바바린이 어느 날 유행자인 손님을 맞았는데 그가 500금의 보시를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자 그 유행자는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다.  바라문 바바린은 그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어떤 하늘 사람의 도움으로 부처님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열여섯 제자를 부처님에게 보내서 질문을 하게 유도한 것이 이 피안의 길에 대한 품이 생겨나게 된 동기이다.” 라고 설명 되어 있다.

 

친절한 부처님

 

바바린의 열 여섯 제자 중의 하나인 아지따가 첫 번째 질문자로 등장한다. 첫번째 질문자로 선정된 아지따가 부처님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 본다. 아지따의 질문에 부처님은 친절하게 답변을 해준다. 이런 태도는 선종에서 보기 힘들다.

 

선종에서는 제자가 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차나 한잔 들게나라고 말한다든가,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든가, 양구(침묵)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지어 호통()과 방망이()으로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이에게 문답식 등으로 친절하게 알려 준다. 이런 모습의 부처님을 빠알리니까야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학인(sekhā)이란?

 

경에서 아지따는 학인(sekhā)으로 표현 되어 있다. 학인이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학인은 네쌍으로 된 여덟이 되는 참사람(사쌍팔배) 가운데 거룩한 님(아라한)을 제외한 나머지 성자를 뜻한다.”라고 되어 있다. 번뇌가 다하여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의 아라한을 제외한 성자가 학인이라는 뜻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는데 아직 더 배울 것이 남아 있는 부처님의 제자가 학인인 것이다.

 

열반에 대한 질문

 

경에 따르면 아지따는 아직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 바라문 스승의 명을 받고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보려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궁금하게 생각하였던 것을 물어 본다. 그 중에 하나가 열반이다.

 

아지따는 부처님에게 “명색(정신-신체적 과정)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 (Nāmarūpan ca mārisa)”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Viññāassa nirodhena ettheta uparujjhati)”라고 말한다. 이것이 열반에 대한 설명이다.

 

브라만 출신 아지따의 질문을 보면 소멸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색이 소멸한다는 것은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과 열반은 어떻게 다르냐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라고 연기법적으로답한다. 이는 연기에 있어서 역관에 해당되는 것이다.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라고 설명된다.

 

윤회할 수밖에 없는 자

 

의식이 소멸하면 더 이상 명색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의식은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명색이 소멸한 다음에도 의식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바보와 현자의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러한 몸이 생겨나고 외부에 명색이 주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쌍의 성립에 의해 접촉, 즉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생겨나고 어리석은 자는 그들 또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접촉을 통해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Bālapaṇḍitasutta-바보와 현자의 경, 상윳따니까여 S12:9, 전재성님역)

 

 

경에서 현세의 몸이라고 번역된 것은 카야(kaya, )’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자신의 의식을 갖춘 몸이라 한다. 한쌍이라고 하는 것은 주석에 따르면 자신의 의식을 갖춘 몸외적으로 주어지는 명색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S12:9)”고 하였다. 이말은 무엇을 말할까? 번뇌가 남아 있는 한 윤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에게는 무명이 파기 되지 않고 갈애가 극복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는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청정한 삶을 닦지 않는다. (S12:9)”라고 하였다. 청정한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도 또 다른 몸을 받는다. (Tasmā bālo kāyassa bhedā kāyūpago hoti., S12:9)”라고 하였다.

 

죽은 뒤에도 또 다른 몸을 받는다에 대하여 한 단어로 표현하면 ‘kāyūpaga’이다. 까유빠가(kāyūpaga)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adj.] attached to the body(몸에 붙음); going to a new birth(재생이 됨).’로 설명된다. 한자어로 着身体的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결생식을 말한다. 다른 말로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 무명과 갈애가 극복되지 않으면 새로운 몸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몸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몸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현명한 이에게도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그러나 현명한 이에게는 이 무명이 파기되고 갈애가 극복된다.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현명한 이는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청정한 삶을 닦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이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 다른 몸을 받지 않는다. 그는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난다. 그는 괴로움에서 해탈된다고 나는 말한다.

 

(Bālapaṇḍitasutta-바보와 현자의 경, 상윳따니까여 S12:9, 전재성님역)

 

 

청정하지 않은 자가 죽으면 몸을 다시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으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 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 (S12:65)”라고 말씀 하였다.

 

재생의식은 조건으로부터 되돌아 옴을 말한다. 재생할 조건, 즉 업이 남아 있는 한 명색을 넘어서지 못함을 말한다. 명색과 함께 발생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S12:65)”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재생연결식과 명색이 동시발생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식(名色緣識)’이라 한다.

 

하지만 번뇌 다한 아라한은 명색을 넘어선다. 의식의 소멸과 함께 더 이상 명색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이 6번 게송에서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Sn5.2)”라 는 내용이다. 게송에서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명색을 말한다. 따라서 청정한 삶을 살아 번뇌 다한 아라한은 의식이  소멸됨에 따라 더 이상 명색이 일어나지 않아 재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열반이라 한다.

 

학인(sekhā)이 되는 과정은?

 

상윳따니까야에서 숫따니빠따를 인용한 경이 생겨난 것의 경(Bhūtasutta, S12:31)’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아지따 경(Sn5.2)의 일곱 번째 게송 이 세상에는 진리를 헤아린 자들도 있고, 여러 학인들도 있습니다. 존자여, 그들의 행동양식에 대하여 여쭈오니 현명한 님으로서 말씀해 주십시오. (Sn5.2)”을 언급하고 있다. 

 

부처님이 이 게송을 언급하며 사리뿟따에게 그 뜻을 밝힐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그것도 세 번이나 묻는다. 세 번째 물음에 사리뿟따는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이것은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봅니다.  이것은 생겨난 것이라고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서 생겨난 것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관찰합니다.

 

이것은 자양분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봅니다.  이것은 자양분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서 생겨난 것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실천합니다.

 

그 자양분이 소멸되는 것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은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합니다. 그 자양분이 소멸되는 것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은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서 소멸되고야 마는 것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실천합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해서 학인이 됩니다.

 

(Bhūtasutta-생겨난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1, 전재성님역)

 

 

세 번째 침묵한 끝에 사리뿟따는 학인이 되는 과정에 대하여 설명한다. 내용은 부처님이 설한 무상한 생멸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의 동력이 되는 자양분의 생멸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무상하고 무아인 것을 알아서 싫어하여 떠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렇게 실천하는 자가 학인이라고 하였다.

 

사리뿟따는 왜 세 번이나 침묵하였을까?

 

그렇다면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설명 요청에 세 번이나 침묵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붓다고싸는 Srp.II.60에서 싸리뿟따의 침묵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왜 싸리뿟따는 질문에 관해 세 번이나 침묵했는가? 스승의 질문이나 의도에 관해 의심했는가? 질문자체에 관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숙고 했다. 스승께서는 내가 배우거나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단계에서 이야기 하길 바란다. 존재의 다발[: kjandha], 세계[:dhatu], 감각영역[: ayatana] 또는 조건의 양상의 관점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스승의 마음에 들까?

 

(사리뿟따의 침묵, 전재성박사)

 

 

각주에 따르면 사리뿟따가 침묵한 것은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스승의 마음에 들까?”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누구 보다 많이 알고 있었음에도 세 번이나 침묵한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과 사리뿟따의 대화를 보면 아름다운 광경이 떠 오른다. 겸손하고 예의바른 제자가 스승에게 나지막하게 가르침을 조리 있게 말하는 장면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요의경과 불요의경은 없다!

 

사리뿟따 존자는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반면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을 탐해서는 안 되며, 정신이 혼란되어서도 안 됩니다.  수행승은 모든 가르침에 숙달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유행하여야 합니다. Sn5.2”라고 짧게 설명하였다.

 

이는 길게 설명한 사리뿟따와 짧게 설명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승경전식 표현을 빌면 불요의요의의 관계라 볼 수 있다. 사리뿟따가 길게 설명하였으므로 불요의가 되고, 부처님이 짧게 설명하였으므로 요의가 된다.

 

대승불교에서는 대승경전을 요의경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뜻이나 마음으로 전승된 대승불교야 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라 본다. 반면에 초기불교 경전을 소승경전이라 하여 불요의경이라 한다. 말이나 글로서 이루어진 경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표현 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팔만사천 법문이 되었다고 말한다.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은 “내가 알고 나서 그대들에게 설한 것이 매우 적고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S56:31)”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설한 것이 매우 적다는 것은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것은 바른 이치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에 도움이 되지 않고, 사라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소멸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적멸에 도움이 되지 않고, 곧 바른 앎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올바른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설하지 않았다. (S56:31)”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은데, 설하지 않은 이유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 (D16)”라 하였다. 더 이상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 대승주의자들은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을 마음으로 전승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음으로 전승받은 경전이 요의경이라 하고, 문자로 된 것을 불요의경이라 하여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짧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사리뿟따는 길게 대답하였다. 길게 대답하였다고 하여 불요의이고, 짧게 요점만 대답하였다고 하여 요의라고 볼 수 있을까?

 

생겨난 것의 경(S12:31)’에서 사리 뿟따가 길게 대답하지만 부처님은 이를 추인하고 다시 반복한다. 사리뿟따가 말한 것이 부처님의 생각과 같음을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짧게 대답하였다고 하여,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하여, 할과 방으로 가르친다고 하여 요의라 볼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요의와 불요의는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진리를 성찰한 자?

 

‘생겨난 것의 경(S12:31)’에서 인용된 학인 아지따의 물음을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진리를 성찰한 자’이고 또 하나는 ‘여러 학인들’이다. 이들의 고귀한 삶에 대하여 여쭌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 사리뿟따는 학인들에 대하여 먼저 설명하였다. 여기서 진리를 성찰한 자란 무상 등을 통해 철저히 성찰된 가르침을 지닌 자를 말한다. 사리뿟따는 진리를 성찰한 자의 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세존이시여, 어떻게 진리를 성찰하는 님이 됩니까? 세존이시여, 이것은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합니다. 이것은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서 생겨난 것을 싫어 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집착없이 해탈합니다.

 

이것은 자양분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합니다. 이것은 자양분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서 자양분으로 생겨난 것을 싫어 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집착없이 해탈합니다.

 

그 자양분이 소멸되는 것을 통해서 생겨난 것은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서 소멸되고 마는 것을 싫어 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집착없이 해탈합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해서 진리를 성찰하는 님이 됩니다.

 

(Bhūtasutta-생겨난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1, 전재성님역)

 

 

사리뿟따는 학인이 되는 과정을 먼저 설명하고 이어서 진리를 성찰한 자가 되는 과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렇게 순서를 둔 것은 학인은 유학(有學)’에 대한 것이고, 진리를 성찰한 자는 무학(無學)’, 즉 아라한에 대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는 경에서 집착없이 해탈한다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유학의 학인 단계에서는 싫어 하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다고 실천합니다라 하여 실천을 강조 하였으나, 진리를 성찰하는 자의 설명에서는 해탈합니다라고 하여 해탈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학인은 실천이고 , 진리를 성찰한 자는 해탈임을 알 수 있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질문에 세 번이나 침묵을 지키다 답변을 하였다. 그 답변을 듣고 부처님은 싸리뿟따여, 훌륭하다. 싸리뿟따여, 훌륭하다라고 두 번이나 말하면서 추인하였다. 그리고 사리뿟따가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였다. 이는 사리뿟따의 답변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닛데사는 사리뿟따의 작품

 

상윳따니까야의 생겨난 것의 경(S12:31)’에서는 숫따니빠따의 게송이 인용되어 있다. 부처님이 학인 아지따의 질문을 소재로 하여 사리뿟따와 대화를 나눈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숫따니빠따가 매우 고층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학인 아지따의 질문이 들어가 있는 피안가는 길의 품은 부처님의 원음이라 한다. 따라서 숫따니빠따에 있는 게송은 이미 부처님 당시에 학인들에게 암송되어 졌다고 한다. 그럼에 따라 주석이 만들어 졌는데 그것이 닛데사라 한다.

 

그런데 닛데사의 저자가 사리뿟따라 한다. 그 증거로서 생겨난 것의 경(S12:31)’을 들 수 있다. 사리뿟따는 세 번의 침묵 끝에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답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리뿟따가 닛데사의 저자라는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닛데사가 사리뿟따의 저작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앗타까왁가와 빠라야나왁가는 『숫따니빠따』의 마지막 두 장이며 빠알리 삼장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감흥어』에 보면 소나 장로가 앗타까왁가를 암송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증지부』에는 난다마따라는 여성 재가신도가 빠라야나왁가를 낭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두 장은 일찍부터 스님들과 재가신도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숫따니빠따』의 이 두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신 일이 다섯 번 이상이나 된다. 이 두 장이 높이 평가되어 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많은 고어들과 간결한 고문체로 구성되어있는 점을 보아 아주 초기에 이에 대한 주석이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나중에 경장에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두 주석이 사리뿟따 존자에 의해서 설해졌다는 종래의 해석은 매우 타당성이 높다. 오늘날 빠알리 경전에서 발견되는 문장전체는 아니더라도 그 주석의 핵심내용은 사리뿟따 존자가 설한 것이 틀림없다. 『닛데사』가 어휘설명과 문맥해설, 부처님의 말씀에 준거한 인용문 그리고 많은 동의어를 사용한 용어 설명 등 적절한 언어 교육을 위한 자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스님들의 체계적인 교육에 이 위대한 장로가 큰 관심을 가졌던 점과 잘 부합되는 것이다.

 

(사리뿟따 이야기-Sāriputta The Marshal of the Dhamma, 냐나뽀니까 스님 지음)

 

 

냐나뽀니까 빅쿠의 사리뿟따이야기(Sāriputta The Marshal of the Dhamma)에 따르면 숫따니빠따의 마지막 두 게송, 즉 여덟 게송의 품(4)과 피안가는 품(5)은 부처님 당시에도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들도 암송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주석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냐나뽀니까  빅쿠는 사리뿟따 존자가 설한 것이 틀림없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닛데사는 사리뿟따의 작품이라고 본다. 그 증거를 상윳따니까야 생겨난 것의 경(S12:31)’에서 본다. 경에서 사리뿟따가 학인과 진리를 성찰하는 자에 대하여 완벽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2013-08-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