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떻게 해야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5. 22:30

 

어떻게 해야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느낌에 목숨을 거는

 

갈애의 끝은 어디일까? 언젠가 소설을 읽었다. 신문에 연재 된 소설인데 나이 어린 소녀가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 하는 내용이다. 소설속의 소녀는 좋은 상대를 만났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며 상대방에게 이렇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였다.

 

나이 든 노인들의 성을 다룬 단편영화가 있다. ‘죽어도 좋아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70대의 노인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묘사된 장면을 보면 성인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남자 노인이 사랑을 나누며 이제 죽어도 좋아라는 말을 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은 느낌에 목숨을 건다.

 

세 가지 느낌이 있는데

 

느낌에는 몇 가지가 있을까? 목숨을 걸 정도로 즐거운 느낌만 있을까? 부처님은 느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isso imā bhikkhave vedanā, katamā tisso,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Imā kho bhikkhave tisso vedan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다.

수행승들이여, 세가지 느낌은 이와 같다.

 

(Samādhisutta-삼매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정의한 느낌은 세 가지이다. 즐거운 느낌(sukhā vedanā), 괴로운 느낌 (dukkhā vedanā),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adukkhamasukhā vedanā) 이렇게 세 가지이다.

 

아비담마의 다섯 가지 느낌

 

그런데 아비담마에서는 여기에 두 가지를 추가하여 모두 다섯가지 느낌을 말하고 있다. 초기경전의 세 가지 느낌과 아비담마의 다섯 가지 느낌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느낌에 대한 초기경과 아비담마 차이

초기경전

아비담마

핵심어

즐거운 느낌

(樂受, sukhā vedanā)

육체적 즐거움

(sukha)

즐거움

정신적인 기쁨

(somanassa)

기쁨

괴로운 느낌

(苦受, dukkhā vedanā)

육체적 고통

(dukkha)

고통

정신적인 불만족

(domanassa)

불만족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不苦不樂受,

adukkhamasukhā vedanā)

중립적인 느낌

(upekkha)

평온(지둔함)

 

 

표를 보면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육체적 즐거움(sukha)’정신적인 기쁨(somanassa)’으로 나누고 있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는 육체적 고통(dukkha)’정신적인 불만족(domanassa)’으로 나누고 있다. 좋고 싫은 느낌에 대하여 정신과 육체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에 대하여 중립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우뻭카웨다나(upekkha vedanā)’라 하여 조건에 따라 언제든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사선정에서의 우뻭카와 달리 지둔한 평온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같은 평온이지만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으로 본다.

 

거머쥐고, 밀쳐내고

 

부처님이 느낌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동력이 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ukhāya bhikkhave vedanāya rāgānusayo pahātabbo, dukkhāya vedanāya paighānusayo pahātabbo,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pahātabbo.

 

[세존]

수행승들이여, 즐거운 느낌에서 유래하는 탐욕의 경향을 끊어 버려야 한다.  괴로운 느낌에서 유래하는 분노의 경향도 끊어 버려야 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 유래하는 무명의 경향도 끊어 버려야 한다.

 

(Pahānasutta-끊어 버림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 가지 느낌에 대하여 세 가지 마음을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마음 부수

  

즐거운 느낌 유래하는

Sukhāya vedanāya

탐욕의 경향

rāgānusayo

거머 쥐는

괴로운 느낌 유래하는

dukkhāya vedanāya

분노의 경향

paighānusayo

밀쳐 내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 유래하는

adukkhamasukhāya vedanāya

무명의 경향

avijjānusayo

무덤덤한

 

 

표를 보면 즐거운 느낌은 탐욕을 유발하고, 괴로운 느낌은 성냄을 유발함을 알 수 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 쥐려하기 때문에 탐욕이 생기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밀쳐 내려하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의 느낌은 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마음이라 한다.

 

세상의 상식을 뒤집어 엎는 역설

 

접촉이 일어나면 어느 경우이든지 세 가지 느낌중의 하나가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  이렇게 세 가지 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건다. “죽어도 좋아하며 감각적 쾌락에 목숨을 건다.

 

그렇다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sukhā vedanā dukkhato diṭṭhā hoti, dukkhā vedanā sallato diṭṭhā hoti, adukkhamasukhā vedanā aniccato diṭṭhā hoti, aya vuccati bhikkhave bhikkhu sammaddaso acchecchi taha, vāvattayī saññojana, sammāmānābhisamayā antamakāsi dukkhass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본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탐욕의 경향을 버린 바른 관찰자라고 한다. 그는 갈애를 부수고 결박을 자르고 아만에 대한 바른 이해로 괴로움의 종극에 도달한다

 

(Daṭṭhabbasutta-본다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 가지 느낌에 대하여 보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한다(sukhā vedanā dukkhato diṭṭhā)’고 하였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한다(dukkhā vedanā sallato diṭṭhā)고 하였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adukkhamasukhā vedanā aniccato diṭṭhā)’고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특히 즐거움 느낌이 발생하였을 때 그 즐거운 느낌이 바로 괴로운 느낌이라고 말씀 하신 것은 세상의 상식을 뒤집어 엎는 역설이다.

 

즐거움이 괴로움이라고

 

소설에서 “차라리 이렇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라든가 영화에서 “죽어도 좋아”라고 하였을 때 이는 즐거움의 극치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즐거움이 결국 괴로움이라 하였다. 왜 이런 역설이 통하는 것일까? 이는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십이연기 정형구에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M38)”라는 문구가 있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내용이다.

 

십이연기 정형구에 따르면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절망으로 귀결되도록 되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이다.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의 소까(Soka, 슬픔), 빠리데와(parideva, 비탄), 둑카(dukkha, 고통), 도마낫사(domanassa, 근심), 우빠야사(upāyāsā, 절망)이 모두 괴로움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무리 즐겁고 행복한 시간일지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단지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낄 뿐이다. “죽어도 좋아라고 감각적 쾌락을 탐하지만 일시적이다. 좋은 시간이 계속 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다. 항상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한다(sukhā vedanā dukkhato diṭṭhā)”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괴로운 느낌 다음에 무엇이 일어납니까?”

 

경에서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한다(dukkhā vedanā sallato diṭṭhā)”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왜 화살(salla)로 볼 것을 요청하였을까?

 

인터넷토론 카페에서 느낌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질문자는 세 가지 느낌 중에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만들어지는가?라는 주제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5온에 대한 관찰이 정확하다면,,,
느낌에는 3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은 그만 두고,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것이 요점이었습니다.

 

(인터넷 토론 카페)

 

 

질문자는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느낌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이 ‘갈애’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유독 괴로운 느낌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것이다.

 

갈애를 애욕으로 파악하는 한

 

십이연기에서 느낌 다음에 일어 나는 것은 갈애이다. 그래서 정형구를 보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Vedanāpaccayā tahā)”라고 표현 된다. 반드시 조건(paccaya)’이 들어 감을 알 수 있다. 스스로 갈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라는 선행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갈애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갈애의 조건이 되는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 이렇게 세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즐거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괴로운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일어나는 것을 이해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오랫동안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느낌 다음의 갈애에 대하여 한문경전에서는 ()’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 을 조건으로 일어 나는 갈애를 이해 못하는 것이다. 이는 갈애를 남녀간의 사랑의 의미인 애욕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딴하(tahā)의 의미는?

 

갈애에 대한 빠알리어는 딴하(tahā)’이다. 이 딴하를 중국에서 ()’로 번역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애가 이성간의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일까? 딴하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찾으면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tahā : [f.] craving; thirst; lust; attachment.

 

 

딴하는 영어로 craving (갈망, 갈망하는, 열망), thirst (갈증, 갈망), lust (욕망, 정욕, 갈망), attachment (부착, 애착, 애정)의 뜻이다. 딴하(갈애)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라 볼 수 있다.

 

딴하에 대한 중국사전과 일본어 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tahā : f. , , 愛欲.

 

 

한자로 표시된 것을 보면 갈애(), (), 욕애(愛欲)로 표현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사랑 ()자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 딴하에 대하여 애로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빠알리 어원을 모르고 단지 한자어 애로 해석하면 혼란을 가져 올 수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괴로움도 느낌이므로 괴로운 느낌을 조건으로 사랑이 일어난다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순이다. 한자어 애를 한자의 뜻 그대로 받아 들였을 때 오류이다.

 

두 방의 화살을 맞을 때

 

괴로움 느낌도 갈애가 될 수 있다. 즐거운 느낌만 갈애가 되는 것이다. 이는 경에서 부처님은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한다(dukkhā vedanā sallato diṭṭhā, S36: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대체 이말은 무슨 뜻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사람을 화살로 찌르고 또한 그를 두 번째의 화살로 찔렀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그는 두 개의 화살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면 우울해하고 피로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진다.

 

그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 가지 종류의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그에게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여 분노가 생겨난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대한 분노를 느끼며 괴로운 느낌에 대한 분노의 경향을 잠재시킨다.

 

(Sallasutta-화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6, 전재성님역)

 

 

 

suffering

 

 

화살을 맞으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런 고통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 고통이고 또하나는 정신적 괴로움이다. 이는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분류 방법이다.  

 

아비담마에서는 괴로움을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육체적 고통(dukkha)’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 불만족(domanassa)’이다. 여기서 고통은 육체적 고통은 고통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처음 화살을 맞았을 때를 말한다.

 

하지만 정신적 불만족은 다르다. 육체적 고통으로 야기된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정신적 괴로움이라 한다.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두 번째 화살을 맞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두 번 화살을 맞는다고 한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만족 이렇게 두 방의 화살이다.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그러나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오로지 한 방의 화살만 맞는다고 한다.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였을 때 정신적 괴로움으로 까지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였을 때 단지 “괴롭네”하며 알아 차리면 그 뿐이라 한다.

 

하지만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를 더 확장하여 아파 죽겠네!”라고 한다. 죽겠네가 다름 아닌 갈애로서 정신적 괴로움, 정신적 불만족(domanassa)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부 들은 괴로운 느낌을 받았을 때 두 방의 화살을 맞고, 현자들은 괴로운 느낌을 받았을 때 오직 한방의 화살만 맞을 뿐이라 한다.

 

즐거우나 괴로우나 두 방의 화살

 

두 방의 화살을 맞는 것은 괴로운 느낌을 가질 때만이 아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이 갈애로 발전하였을 때 일어난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좋아 죽겠네!” “죽어도 좋아!”라고 말한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육체적 즐거움(sukha)을 넘어 정신적 즐거움(somanassa)으로 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였을 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항상 두 방의 화살을 맞는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의 화살

2의 화살

  

즐거운 느낌

좋은 느낌

좋아 죽겠네!”

탐욕

괴로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로워 죽겠네!”

성냄

육체와 정신의 느낌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

아비담마

배우지 못한 범부

해당

해당

화살 두 방

잘 배운 고귀한 제자

해당

해당 안됨

화살 한 방

십이연기

느낌

갈애

 

 

 

행복한 자와 괴로운 자가 있는데

 

지금 행복한 자가 있다. 그는 지금 이 행복이 계속 유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욱 더 행복이 계속 되기를 바란다. 이는  즐거움에 대한 갈애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 좋다에서 더 나아가 좋아 죽겠네!”라고 발전 한 것이다.

 

하지만 바램과 달리 그런 즐거운 느낌은 오래 지속 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즐거움이 오래 지속 되지 않아 괴로운 느낌이 발생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고(sukhā vedanā dukkhato diṭṭhā, S36:5)” 라고 말씀 하셨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괴로운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이다. 그러나 이는 진리이다. 즐거움은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뿐인데, 그런 즐거움과 행복이 천년만년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이 범부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하여 목숨을 건다. “죽어도 좋아”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좋아 죽겠네!”의 다른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괴로운자가 있다. 하루 빨리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즐거움에 대한 갈애이다.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발생하는가?”라고 질문한 어느 네티즌의 답이 될 것이다.

 

지금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였을 때 사람들은 한시 바삐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 친다. 그래서 괴로움이 발생하면 괴로워 죽겠네!”라 한다. 이는 이미 괴로운느낌이 갈애로 발전한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 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럴 때 부처님은 화살을 두 방 맞았다고 하였다. 육체적 화살과 정신적 화살을 말한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dukkhā vedanā sallato diṭṭhā S36:5)”라고 하였다.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면 갈애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갈애는 한자어 ‘애’나 ‘애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갈애를 뜻하는 빠알리어 딴하는 craving (갈망, 갈망하는, 열망), thirst (갈증, 갈망)으로 해석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괴로워 죽겠네!” 아파 죽겠네라고 말하는 것은 갈애에 해당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Dukkhī sukha patthayati,        

sukhī bhiyyopi icchati;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청정도론 제17 238)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환락을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여 갈애가 발생 하였을 때 범부들이 하는 말이 괴로워 죽겠네이다. 그래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범부들이 괴로움을 벗어 나는 방법은 없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또한 즐거운 느낌과 접촉하여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에서 환락을 찾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감각적 쾌락 이외에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Sallasutta-화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6, 전재성님역)

 

 

지금 괴로움에 처한 사람이 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괴로워 죽겠네!”라고 말하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는 청정도론의 게송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Dukkhī sukha patthayati)”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는 갈애이다.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정신적 괴로움까지 야기해서 이미 화살을 두 방이나 맞은 상태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사람이 괴로움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이 다름 아닌 환락이라 한다. 지금 괴로움에 처한 사람이 무언가 즐길거리를 찾아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괴로울 때 술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그 때 뿐이다. 당면한 괴로움이 술의 힘으로 해결 되지 않는다. 또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감각적 쾌락에 몰두 한다. “죽어도 좋아!”를 외치며 순간의 쾌락에 목숨을 건다. 그렇다고 하여 결코 괴로운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 더 오래 동안 유지 되지 않아 괴롭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으로 귀결 되는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환락으로 괴로움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것이 범부들이라 한다. 그렇다면 잘 배운 제자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누구나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는다. 부처님이나 아라한도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처님이 돌조각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 때 세존께서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S1:38)”라는 대목이 있다. 이처럼 부처님도 괴로운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아라한, 잘 배운 제자가 못 배운 일반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방일하지 않고 성실하게 정진할 때에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라고 분명히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것인가?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한 분노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

 

(Gelaññasutta-병실의 경1, 상윳따니까야 S36:7,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 나는 방법에 대하여 설하였다.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환락’으로 벗어나려 하지만, 부처님은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부처님은 알아차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라고 분명히 알라고 하였다.

 

괴로움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생겨 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또 괴로움이 일아날 만한 조건이 발생되었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되는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괴로운 느낌의 본질을 알아 괴로움을 관찰하면 된다.

 

괴로움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면 괴로운 느낌에 관한 분노의 성향은 버려지게 되고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알아 차리는 것이다. “괴로워 죽겠네”가 아니라 단지 “괴롭네”라고 알아 차리면 괴로움이 더 이상 갈애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런 방식은 즐거운 느낌도 마찬가지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분명한 앎

조건 발생관찰

관찰 효과

즐거운 느낌이 생겨나면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즐거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탐욕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면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분노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나면

 

나에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무명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

 

 

 

 

관념(개념)을 이야기 하지 말고 느낌을 말 하세요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하는 이야기가 있다. 경행과 좌선이 끝난 다음 인터뷰시간이 있는데 그 때 질문자는 자신이 체험한 바를 스승에게 이야기 한다. 그 때 질문자가 참나, 불성, 유위법이나 무위법, 진제나 속제, 이법계 현상계 등과 같은 말을 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그 때 스승은 관념(개념)을 이야기 하지 말고 느낌을 말 하세요라고 충고한다.

 

좌선을 하면 가장 강한 대상에 집중한다. 호흡을 볼 수도 있지만 호흡은 항상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가장 강한 대상을 관찰한다. 예를 들어 다리가 저릴 때 통증이 나면 통증에 마음을 그곳에 둔다. 가려움이 생기면 가려운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리고 통증과 가려움을 지켜 본다.

 

통증이나 가려움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일어날 조건이 되어서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조건 발생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다리 저림 통증이나 가려움을 지켜 보고 있으면 슬며시 사라진다.

 

이는 무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토끼뿔과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도 마찬 가지이다. 경에서와 같이 이 몸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된 것이다. 그런 이 몸 역시 무상하고 형성된 것으로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으로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조건으로 생겨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항상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면 결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잠재성향은 버려질 것이라 한다.

 

 

Yo sukha dukkhato adda

dukkhamaddakkhi sallato
Adukkhamasukha
santa

addakkhī na aniccato.

Sa ve sammaddaso bhikkhu

parijānāti vedanā
So vedan
ā pariññāya diṭṭhadhamme

anāsavoKāyassa bhedā dhammaṭṭho

sakha nopeti vedaguti.

 

[세존]

즐거움을 괴롭다고 보고

괴로움을 화살이라 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으면

그것을 무상하다고 보는 자.

 

그 수행승은 바른 관찰자로서

느낌을 완전히 이해한다.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느낌을 완전히 알아

현세에 번뇌를 여의고 지혜에 정통한 자는

몸이 파괴된 후에 헤아려질 수 없네.(S36:5)

 

 

 

 

 

2013-08-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