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29. 18:29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수행자의 삶의 결실

 

 

 

번잡한 곳을 떠나 일단 숲에 들어서면 마음이 안정된다. 항상 다니는 산행 코스가 그렇다. 더 깊숙이 들어 감에 따라 즐거움으로 변한다. 그런 맛에 산행을 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포도 송이처럼 다발을 이룬 열매

 

산책로를 따라 가다 보면 여러 종류의 나무를 본다. 한여름이라 그런지 꽃은 보이지 않고 그대신 열매가 달려 있다. 처음 산길에서 작은 열매를 보았다. 마치 포도 송이처럼 다발을 이루고 있다. 열매를 볼 때 마다 항상 느끼는 감정이 있다. 그것은 탐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열매 이름을 알 수 없다.

 

 

 

 

 

쪽동백 꽃은 아름답지만 열매는

 

산행을 하다 보면 갖가지 열매를 본다. 그 중에는 눈에 익은 것도 있다. 봄에 피었던 쪽 동백이 결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에 비하여 열매는 덜 하다.

 

쪽 동백은 열매 보다 꽃이 더 아름답다. 일반적으로 꽃이 아름다우면 열매가 보잘 것 없는 것 같다. 쪽동백도 그런 케이스라 보여진다. 이렇게 산길에서는 누구 하나 괸심있게 쳐다 보지 않지만 스스로 꽃을 피우고 때 되면 열매를 맺는다.

 

 

 

 

 

 

 

 

 

 

 

중부지방에서 보기 힘든 탱자나무가

 

산책로 겸 등산로이자 올레길을 좀 더 가면 중부지방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탱자나무가 있다. 탱자나무에는 열매가 맺어 있다. 마치 작은 탁구공처럼 동그란 모양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는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하였다. 그런데 탱자나무에는 가시가 있다. 가시의 용도는 침입을 방지하는 역할도 하지만 또 다른 용도가 있다. 그것은 논에서 잡은 우렁을 빼 먹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꽃은 작지만 열매는 큰 감나무

 

탱자 나무 옆을 보니 어느 집에 감나무가 열렸다. 중간 정도 자란 것 같다. 잎사귀와 열매가 모두 녹색이다. 이제 꽃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풋풋한 모습이다. 그런 감나무 꽃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커다란 잎사귀에 꼭꼭 숨어서 좀처럼 모습을 보여 주지 않지만 꽃 보다 열매이다. 

 

 

 

 

 

 

 

 

 

 

은행나무 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감나무 옆에 은행나무가 있다. 도시에서 흔해 빠진 것이 은행나무이지만 유심히 쳐다 볼 때가 있다. 열매 때문이다. 암나무에서만 맺는 열매를 보면 그렇게 탐스러울 수가 없다. 은행나무 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지만 열매만큼은 풍성하게 보여 준다. 이렇게 꽃 보다 열매로 말해 주는 나무도 있다.

 

 

 

 

 

 

 

 

 

 

 

수중지뢰 처럼 생긴 산딸나무 열매

 

길을 걷다 보니 꽃 보다 열매가 더 눈에 띈다. 그런데 매우 특이 하게 생긴 열매를 발견하였다. 이제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작은 구형에 여러 개의 돌기가 있는 것이 마치 수중 지뢰 처럼 보인다.

 

이 열매는 무엇일까? 그러나 바로 의문이 풀렸다. 꽃이 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람개비처럼 생긴 산딸나무이었다. 산딸나무 꽃의 흔적이 몇 개 남아 있어서 이 열매가 산딸나무임을 알 수 있었다.

 

 

 

 

 

 

 

 

 

 

 

연꽃이 왜 불교의 상징인가

 

여름에 산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꽃 보다 열매이다. 봄에 핀 꽃이 결실을 하여 결실을 한 것이다. 그래서 비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받아 하루가 다르게 커 나간다.

 

이처럼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비록 그 꽃이 작을 지라도 열매는 얼마든 지 클 수 있다. 감나무처럼 꽃이 있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작은 꽃이지만 열매 만큼은 무척 커서 그 과실을 맛 볼 수 있다.

 

그러나 꽃은 화려 하지만 열매는 별 볼일 없는 것도 있다. 크고 붉고 화려한 장미의 경우 열매가 달려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꽃과 열매고 동시에 나오는 연꽃은 모든 꽃중에서 예외이다. 꽃이 핌과 함께 동시에 결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상징을 연꽃이라 하나 보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

 

흔히 도를 닦는다고 한다.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을 도사라고 한다. 하지만 심산유곡에서 10년, 20년, 30년, 심지어 평생 동안 도를 닦아도 결실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다. 마치 꽃이 피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겉 모습만 화려환 꽃들은 열매가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보기는 좋지만 실익이 없다. 마찬가지로 듯이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은둔생활 하며 평생 도만 닦는다면 본인에게 신선놀음일지 모르지만 산 아래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되지 않는다.

 

도를 닦으면 결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연꽃이 꽃과 동시에 열매를 맺듯이 도를 닦아 과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사향사과라 한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수행을 하면 수행의 결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구체적으로 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어떤 것일까?

 

디가니까야에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이 있다. 부처님이 마가다의 국왕 아자따삿뚜의 질문에 응해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마치 연꽃이 꽃과 열매가 동시에 발생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반드시 현세에 결실을 맺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뿌라나 깟사빠의 동문서답

 

하지만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가르침은 현세에 결실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경에서 아자따삿뚜의 육사외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마치 화려한 꽃이 열매가 별 볼일 없듯이 아자따삿뚜가 육사외도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아자따삿뚜왕이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뿌라나 깟사빠를 만났다. 그리고 뿌라나 깟사빠에게 현세에서 눈에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자따삿뚜는 뿌라나 깟사빠에게 들은 이야기를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자따삿뚜]

“세존이시여, 이처럼 말하자 뿌라나 깟사빠는 저에게 이와 같이

 

‘대왕이여, 업을 짓거나 업을 짓게 만들어도, 도륙하거나 도륙하게 만들어도, 학대하거나 학대하게 만들어도, 슬픔을 주거나 슬픔을 주게 만들어도, 억압하거나 억압하도록 해도, 협박하거나 협박하도록 해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남의 집에 침입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강도질하고, 노상에서 강도질하고, 타인의 아내를 농락하고, 거짓말을 해도 악을 짖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땅의 생명체들을 면도날 테로 만든 수레바퀴로 조각내어 부수고, 한 덩어리로 만든다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악은 없으며,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습니다.

 

비록 갠지스 강의 남쪽에 가서 살해하거나 살해 하게 만들고, 도륙하거나 도륙하게 만들고, 학대하거나 학대하도록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 나는 악은 없고,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습니다.

 

비록 갠지스 강의 북쪽 언덕에 가서 보시하거나 보시하도록 해도, 제사하거나 제사하도록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공덕이 없고, 공덕의 과보도 없습니다. 베풀고, 수양하고, 자제하고, 진실을 말해도, 생겨나는 공덕이 없으며, 공덕의 과보도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Sāmaññaphalasutta-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뿌라나 깟사빠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왕이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결실을 보여 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엉뚱하게 ‘도덕부정론’을 말한것이다.

 

열매가 없는 꽃과 같은 육사외도사상

 

도덕부정론에 따르면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기 때문에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여도 전혀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또 보시에 대한 과보가  없어서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과를 부정한 것이다. 이런 뿌라나 깟사빠의 말에 왕은 만족할 수 없었다.

 

경에 따르면 막칼리 고쌀라의 윤회청정론(숙명론),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허무주의론(유물론), 빠꾸다 깟짜야나의 칠요소설, 니간타 나타뿟따의 금계제어론, 산자야 벨랏띠뿟따의 회의론 등 육사외도의 가르침은 모두 현세에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결실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단지 겉보기에 화려할 뿐 열매가 없는 꽃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일반적인 수행자의 결실

 

아자따 삿뚜왕은 육사외도의 동문서답에 실망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현세에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하여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현세에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이야기 해 주었다.

 

먼저 일반적인 수행자의 결실이 있다. 누구나 수행자가 되어 청정범행을 닦으면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왕의 하인을 예로 들었다.

 

왕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인이 생각 하기를 왕이나 나가 같은 인간이다. 그런데 왕은 어떤 큰 공덕을 지엇길레 현세에서 엄청난 복을 누릴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도 왕과 같은 복을 누릴 수는 없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인 주제에 왕이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방법은 있었다. 출가하여 도를 닦아 과를 이루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인은 출가하여 청정범행을 닦았다. 그래서 소욕지족의 삶을 살며 멀리 여읨(paviveke)’을 즐겼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된 왕은 더 이상 예전의 하인으로 여기기 않았다. 번뇌를 다한 출가수행자로서 존중해 주었다. 그래서 왕은 그에게 인사하고 일어나 자리를 권하고 환영하였다. 그리고 네 가지 필수품을 보시하였다.

 

하인은 더 이상 왕과 하인의 관계가 아니다. 왕 보다 더 수승한 복전이 된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예를 들어 수행자의 일반적인 삶의 결실이라 하였다.

 

보다 높은 탁월한 수행자의 삶의 결실

 

그런데 부처님은 보다 높은 탁월한 수행자의 삶의 결실이 있다고 하였다. 이를 아자따삿뚜왕에게 들려 주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떻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여 청정한 믿음의 수행자가 되는가를 설명한다.

2) 어떻게 그가 짧은 크기의 계행과 중간 크기의 계행과 긴 크기의 계행을 확립하는가를 설명한다.

3) 어떻게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해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는 가를 설명한다.

4) 어떻게 새김을 확립하고 알아차림을 갖추는가를 설명한다.

5) 어떻게 만족하는가를 설명한다.

6) 어떻게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네 가지 선정을 차례로 얻을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7) 어떻게 여덟 가지의 보다 높고 탁월한 앎 즉, 통찰에 대한 앎,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에 대한 앎, 다양한 신통에 대한 앎, 하늘 귀에 대한 앎, 타자의 마음에 대한 앎, 전생의 삶의 기억에 대한 앎, 하늘 눈에 대한 앎. 번뇌의 부숨에 대한 궁극의 앎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수행자가 되어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더 탁월한 결실은 위에 언급된 일곱가지이다. 이는 수행자의 열매와 같다. 그래서 연꽃이 꽃과 동시에 열매가 맺듯이 ‘도(, magga)’를 이루어 ‘과(, phala)’를 맺는 것과 같다. 이처럼 도와 과는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수행자의 궁극적 결실은?

 

그렇다면 탁월한 수행자의 궁극적 결실은 무엇일까? 경에 말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대왕이여, 예를 들어, 산꼭대기에 맑고 고요하고 청정한 호수가 있는데, 그 곳에 눈 있는 자가 언덕에 서서 조개류나 모래와 자갈이나 물고기의 무리가 움직이거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호수는 맑고 고요하고 청정하다. 이곳에 조개류나 모래와 자갈이나 물고기의 무리가 움직이거나 서 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마음이 삼매에 들거나 청정해지고 고결해지고 티끌없이 오염을 여의어 유연해지고 적응성이 뛰어나 부동에 도달하여, 마음의 번뇌를 부숨에 대한 궁극의 앎으로 마음을 지향하게 하고 기울이게 하여,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았을 때, 그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무명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궁극의 앎이 일어나며,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압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또 다른, 현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입니다.

 

대왕이여, 이것과는 다른,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은 없습니다.”

 

(Sāmaññaphalasutta-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수행자의 결실은 윤회의 종식이다. 청정범행을 닦아 더 이상 태어남을 가져오는 업을 짓지 않았을 때 수행자의 삶에 대한 결실은 완성되는 것이라 하였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의 극복

 

부처님 당시에는 사상의 혼란 시기 이었다. 그래서 원래 있는 것이라든가 원래 없는 것이라든가 히는 갖가지 사상이 난무 하였다.

 

원래 있는 것이라는 절대유(絶對有)’에 대한 견해는 영원주의를 말한다.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실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궁극적 실재를 찾는 수행을 한다. 나를 찾아 떠나는 수행을 말한다. 그래서 진짜 나와 합일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개아인 아뜨만과의 합일이 대표적이다.  

 

다음으로 원래 없는 것이라는 절대무(絶對無)’에 대한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허무주의에 해당된다. 육사외도의 견해중 대부분이  그렇다. 따라서  원래 없는 것이기에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한다. 뿌라나 깟사빠의 도덕부정론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 사상의 사조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견해가 지배하였다. 이런 극단이 진실이 아님을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증명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하였다. 그런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라 바른 길이다. 왼쪽 길이 아니라 오른 쪽 길이라는 뜻에서 바른 길을 말한다. 그 바른 길은 다름 아닌 팔정도이다.

 

이것 만큼 강력한 메시지는 없다

 

법구경에서 길 가운데 팔정도가 최상이고, 진리 가운데 사성제가 최상이다.(Dhp 273)”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팔정도와 사성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성제와 팔정도와 서로 맞물려 있다.

 

흔히 선사들은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을 알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다지 잘 먹혀 들어 가지 않는다. 그 대신 이것이 괴로움이다.(Ida dukkhanti)”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현실의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였을 때 이것 만큼 강력한 메시지는 없다. 그런 진리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Ida dukkhanti)”라는 진리와 함께,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Aya dukkhasamudayo)”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Aya dukkhanirodho)”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Aya dukkhanirodhagāminīpaipadā)”라고 하는 세 가지를 더 설하였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는 네 가지이다. 이것 외에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없다.

 

 

2013-07-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