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빠알리니까야는 요의경(了義經), 대승경전은 불요의경(不了義經)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24. 15:15

 

빠알리니까야는 요의경(了義經), 대승경전은 불요의경(了義經) 

 

 

쑥대밭이 되어

 

서부영화는 무법지대를 배경으로 한다. 법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운 힘의 논리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힘이 곧 정의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황량한 사막지대나 드 넓은 평원지대를 배경으로 한 서부영화에서 종종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도 보여 준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농부의 삶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경우 가장이 있고 부인이 있고 자녀가 있어서 드라마 초원의 집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데 불청객이 찾아 온다. 지나가던 과객이 하루밤 자고 가도 좋은지 물어 본다. 마음씨 좋은 부부는 기꺼이 허락하고 찬거리는 물론 잠자리까지 제공한다. 그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불청객은 부인을 비롯하여 딸들을 범하고 가장을 살해 한다. 평화롭던 가정이 한 순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쑥대밭 이야기는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안데스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몇 년전 다큐프로가 있었는데 안데스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16세기에 일어 났던 피사로의 안데스정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1532 180명으로 중무장한 피사로 군대가 잉카제국에 도착한다. 황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잉카제국의 왕은 피사로 군대를 환대한다. 잉카의 전설에 따르면 하얀 백인과 같은 신이 찾아와서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사로군대는 환대를 원수로 갚는다. 그래서 본래 목적인 금을 갖기 위하여 잉카의 왕을 포로로 잡는다. 그러자 잉카의 신민들은 왕을 구하고자 무려 11톤이나 되는 금을 바쳤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잉카왕은 살해 되고 잉카제국은 멸망한다. 불과 180명으로 중무장한 낯선 불청객들에 의하여 평화롭던 천년제국이 하루 아침에 쑥대밭이 되어 버린 것이다.

 

블로그 난동

 

인터넷에 글쓰기를 한지 오래 되었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하였으니 7년 되었다. 그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갔다. 그리고 수 많은 글을 남겼다. 대부분 격려의 글이지만 일부의 글을 보면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글도 볼 수 있다.

 

최근 신대승운동을 한다는 불자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수 주에 걸쳐 수 많은 댓글을 올렸는데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글이었다. 요지는 문자에 너무 천착한다거나  경전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도 없고, 육체도 없고, 윤회도 없고 사성제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선사들이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글쓰는 행위에 대하여 초기불교에 천착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봐도 생뚱맞은 짓에 불과합니다. 그건 차원이 낮은 불교예요.”라고 말한다. 더 이상 글쓰는 업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글을 접하고 더 이상 인내 하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쓰잘데기없는 짓이라 하고, 더구나 차원이 낮은 불교라고 폄하 하였를 때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에 대한 모독으로 보였다. 외도라면 모를까 불자라면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파렴치한 내용이다. 블로그 난동을 부린 것이다.

 

일방적으로 전송하는 방송

 

우리나라 불자들은 단계적으로 불교를 접한다. 처음에 접한 불교는 대승불교일 것이다. 그러다 점차로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인터넷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인터넷의 속성상 국경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롭게 사이트를 넘나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라인에서는 불교를 접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없지만 오프라인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방송은 대표적 오프라인 매체이다. 일방적으로 전송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방송의 경우 불자들이 가장 많이 청취하고 있는데 거의 대부분 대승경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대승경전 위주로 방송되는 불교방송에 불교강좌와 경전공부 프로가 있다. 아침 6시를 전후하여 약 20분간 방송 되는 프로인데 법화경, 화엄경 같은 대승경전 위주이다. 그런 방송을 2004년 이후 계속 듣고 있다.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차이점은?

 

대승경전 강의는 거의 100% 스님들이 진행한다. 그런 강의 중에 유마경이 있었다. 그런데 유마경 강의를 듣다 매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사들의 법문을 들으면 소승이라는 말을 입게 달고 다니듯이 자주 말하는데, 유마경 강의를 들으니 그 도가 지나침을 알 수 있었다.

 

유마경은 초기대승경전 중에서도 그 성립이 오래 된 것이라 한다. 대승의 공사상과 보살사상을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편집된 경전으로서, 재가자인 유마거사를 내세워 소승의 교리와 성문승을 비판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유마경을 강의한 강사스님은 방송에서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차이점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를 녹취한 것을 블로그에 미국의 고등학생도 아는 팔정도, 우리나라 불자들이 모르는 이유는(2011-04-04))’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강의에서 스님이 말한 대승경전이 소승경전과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둘째,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는다.

셋째,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넷째,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는다.

 

(불교방송 경전공부 유마경, 만권스님 강의)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네 번째 항목이라 한다. 대승경전을 요의경(了義經)’이라 하였고, 소승경전을 불요의경(了義經)’이라 하였기 때문이디. 그렇다면 요의경은 무엇이고 불요의경은 무엇인가?

 

요의경(了義經) 불요의경(了義經)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요의경은 대승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한다.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원각경 등과 같은 대승경전이다. 요의경이라는 뜻은 진실하고 극진한 뜻을 분명하게 말한 경전이기 때문에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깨달은 바른 가르침, 즉 진리가 남김 없이 설해진 경전이라는 뜻이다.

 

요의경이 진리의 경전이라면 불요의경은 그 반대가 된다. 불요의경은 진리가 아닌 경이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강사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소승경전이라 불리우는 불요의경은 방편의 가르침이라 한다.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고 난 다음 중생의 근기에 맞게 설한 것이 불요의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요의경에 의지해서는 진실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요의경’이라는 것은 처님의 최상의 뜻을 다 설하지 못하여여서 끝 마치지 못하였다하여 소승경전을 말하고, ‘요의경’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최상의 뜻을 전부 알수 있도록 요달했다라 하여 대승경전을 말한다.

 

이러한 강의를 듣고 깜짝 놀랐다. 요의와 불요의, 요의경과 불요의경이라는 말도 생소하지만 무엇보다 대승경전속에서 차별하고 있음에 놀랐다.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여 대승경전에서 노골적으로 소승이라 폄하하고 있고, 그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뜻의 불요의경이라 한 것은 부처님을 폄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 설한 초기경전은 근기가 낮은 중생들을 위한 것이고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이 놀라웠다.

 

그런데 유마경 뿐만 아니라 대부분 대승경전들이 초기경전을 불요의경으로 간주하여 노골적으로 소승이라 폄하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은 근기가 낮은 중생들을 위한 것이고, 방편에 지나지 않고,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은 것일까?

 

보석을 발견한 듯

 

최근 스승의 빈주먹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대할 만 한 것이어서 와서 보라고 한 것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비밀리에 전수하는 스승과 제자사이의 가르침은 사권이라 하여 와서 보라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스승이 주먹을 꽉 쥐고 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권의 근거가 되는 경인 질병의 경(S47:9)’을 인용하였다. 그랫더니 어니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셨다.

 

 

()병경(Gilaanasutta),그리고 싱사빠숲경(Simsapaavanasutta-S56:31))에 나오는 두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다르지만 잘 살펴보면 연결고리를 삼을 수도 있어보입니다.

 

(O법우님)

 

 

 

Diamond

 

 

 

 

법우님은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수 천개에 달하는 빠알리 니까야에서 마치 보석을 발견한 듯 반갑다. 법우님이 알려 준 싱사빠숲경(S56:31)’이 그것이다.

 

요의경과 불요의경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싱사빠숲경을 찾아 보았다. 상윳따니까야 끝자락에 있다. 가장 마지막 상윳따인 ‘진리의 모음(Sacca Sayutta, S56)’에 실려 있다. 요의경과 불요의경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과 저 위의 씽싸빠 숲에 있는 나뭇잎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욱 많겠는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보다 저위의 씽싸빠 숲에 있는 나뭇잎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알고 나서 그대들에게 설한 것이 매우 적고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바른 이치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에 도움이 되지 않고, 사라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소멸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적멸에 도움이 되지 않고, 곧 바른 앎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올바른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설하지 않았다.”

 

(Sisapāsutta-씽싸빠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31, 전재성님역)

 

 

참으로 놀라운 부처님 말씀이다.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고 한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은 것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제까지 대승경전과 선사들이 말한 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말이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

 

선종에서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불립문자라 한다. 언어나 문자로 깨달음을 표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교외별전을 주장한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문자와 언어가 아닌 뜻과 마음으로 만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와 문자로 이루어진 초기경전을 불요의경라 폄하하고 부처님의 진실한 뜻과 마음이 담겨 있는 대승경전을 요의경이라 하여 숭배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초기불교경전은 방편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가르침도 아닐 뿐더러 불완전한 가르침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씽싸빠경에 따르면 선사들이 말한 것과 180도 다르다. 부처님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예견 하였음인지 분명하게 설한 것과 설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 설한 것은 모두 요의경이다. 8만 4천 법문이 모두 진실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은 모두 불요의경이다. 모두 진실한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말씀과 대승경전의 말은 180도 다르다.

 

대승에서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는 이유

 

이처럼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내용이 180도 다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와 열반 또한 대승에서는 180도 다르게 해석한다. 그런 예를 유마경 강의에서 들었다. 스님이 강의한 것을 녹취하였는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대승에서는 평등을 보기 때문에

따로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별하는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방송 경전공부 유마경, 만권스님 강의)

 

 

스님은 대승불교에서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대승에서는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이 사성제가 중요한 진리이긴 하지만 참으로 깨달아서 알고 보면 사성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사실상 사성제를 부정하는 말과 같다. 반야심경에서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고집멸도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성제 부정은  강의 하는 스님 만이 아니라 대승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공통된 말을 있다는 사실이다.

 

열반업()’을 짓지 말자고

 

이처럼 대승불교와 선종에서는 사성제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열반 또한 자연스럽게 부정된다. 유마경을 강의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열반을 구함이 없는 마음으로,

번뇌와 열반을 다 여의는 것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불교방송 경전공부 유마경, 만권스님 강의)

 

 

이와 같은 내용은 스님이 한 말이 아니라 대승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본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구하거나 성취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에서는 왜 열반을 추구 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래 자성청정하기 때문에 생사도 번뇌도 알고 보면 진여의 마음을 아주 여의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의 분별심 그 자체도 본래 맑고 깨끗한 그 마음 즉, 열반을 떠나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 바탕이 그대로 열반이기 때문에 다시 얻어야 할 열반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방송 경전공부 유마경, 만권스님 강의)

 

 

본래 없음을 강조한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에 대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없는 열반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분별심을 내지 않고 깨끗한 마음이 되었을 때, 진여 불성을 깨달았을 때 추구해야 할 열반은 본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따로 열반이라는 업을 지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부처님이 강조한 열반에 대하여 열반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업을 짓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강의 내용은 모두 대승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강사스님이 만들어낸 말은 아니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이와 180도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

 

부처님은 설한 것은 매우 적고 설하지 않은 것은 매우 많다고 하였다. 여기서 설한 것이란 부처님의 84천 법문을 말한다. 빠알리니까야에 고스란히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설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고 하였다.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치에 맞지도 않고, 청정한 삶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설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고 하였다. 하지만 대승에서는 이를 반대로 해석하여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진실한 가르침이라 하였다. 그래서 언어와 문자가 아닌 뜻과 마음으로 스승과 제사사이에서 진실한 가르침이 전승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삼처전심일 것이다.

 

삼처전심이란 불교의 조사선(祖師禪)이 교외별전(敎外別傳)되었다는 근거가 되는 설()을 말한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이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특히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는 염화미소로 잘 알려져 있는데, 바로 이것이 언설 없이도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 법이 전승되었다는 사사상승의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비밀스런 가르침이 따로 없다

 

언어와 문자를 부정하고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주장하는 선종에서는 진리란 오로지 스승과 제자사이에 전승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부처님부터 시작하여 깟싸빠, 아난에 이어 역대조사를 거쳐 지금까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승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문자로 표현된 초기경전을 불요의경이라 하여 진실한 가르침이 못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 180도 다르다. 오히려 부처님이 말씀 하시지 않은 것을 부처님의 마음이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행위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씽싸빠경(S56:31)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하빠리닙바나경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그런데 아난다여,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

 

(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모두 설하였다고 하였다. 더 이상 남겨진 비밀스런 가르침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라고 하였다.

 

스승의 구린 주먹

 

스승이 무언가 비밀스런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것을 사권(師拳)이라 한다. 스승이 주먹을 쥐고 열어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8 4천 가르침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의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말로는 표현 못하는 가르침을 말한다. 꿀을 먹었을 때 꿀을 먹어 본 자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듯이 진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진리는 아무리 말과 문자로 표현해 보았자 한계가 있지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와서 보라고 하였다. 와서 보라고 한 것은 초대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승은 주먹을 꽉 움켜 쥐고 왜 절대 펴지 않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 주먹 안에 금화나 황금이 들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 까지도 주먹을 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주먹 안에 똥이라도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똥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주먹을 결코 펴지 않을 것이다.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풀이나 나뭇잎으로 자꾸 주먹을 가리려 할 것이다. 왜 그럴까? 주먹속에 든 것은 더럽기 때문이다. 스승의 구린 주먹이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설하지 않은 많은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을까? 씽싸빠의 경(S56:31)에 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2)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1)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2)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그것을 설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바른 이치에 맞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고, 싫어하여 떠남에 도움이 되고, 사라짐에 도움이 되고, 소멸에 도움이 되고, 적멸에 도움이 되고, 곧 바른 앎에 도움이 되고, 올바른 깨달음에 도움이 되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설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 라고 명상해야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명상해야 한다,”

 

(Sisapāsutta-씽싸빠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3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였다. 그것은 네 가지 진리이다. 그래서 사성제라 한다. 부처님이 설한 것은 네 가지 진리인 것이다. 이것 외 다른 것을 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고 현실적인 삶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별도의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별도로 전승된 가르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그런 비밀스런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열반하기 전까지 온전치도 못한 깨달음을 갖고

 

부처님이 비밀스런 가르침이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서는 마치 무언가 있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래서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하여 깊은 산중에 은둔하며 10, 20, 30, 심지어 평생을 보낸다그러나 그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지만 결코 찾아 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자들은 선지식을 찾아 깊은 산중에 찾아 가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는다. 50년 가까이 수도를 하였다는 어느 수좌스님의 말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은 “완전히 적멸한 상태의 무여열반을 추구한다는 이들은 이 세계가 그대로 열반이 완성될 수 있고, 중생이 그대로 해탈할 수 있다는 대승교리를 비판한다”며 “무여열반 주장대로라면 부처님은 열반하기 전까지 온전치도 못한 깨달음을 갖고 49년을 설법을 했다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OO 스님, 중노릇 때려 뻔한 사연 밝히며, 불교닷컴 2013-07-20)

 

 

50년 동안 산중에서만 산 스님이 한 말이다. 무여열반, 즉 부처님이 말씀 하신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부처님의 딜레마라는 말로 표현 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하기 전까지 온전치도 못한 깨달음을 갖고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시적인 것이고, 덜 완성된 것이고,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승교법 보다 더 뛰어난 것이 대승이고, 이 보다 더 뛰어난 것이 선종의 최상승법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하기 전까지 온전치도 못한 깨달음을 갖고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불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다면 선사들은 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가? 그것은 대승불교 경전의 탓에도 있다고 본다.

 

저주를 설하는 대승경전

 

대승불교 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승이라 하여 폄하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어는 대승경전이든지 소승이라는 말이 들어 가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인데, 유마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 당신에게 복덕이 되기는 커녕 지옥, 아귀, 축생의 경계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에게 보시하는 것은 복전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그대에게 공양을 올리는 사람 역시 3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불교방송 경전공부 유마경, 만권스님 강의)

 

 

유마경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하나인 수보리 존자에게 유마거사가 한 말이다. 수보리존자가 유마거사의 말을 듣고 이를 알아 들을 수 없어서 무어라고 대답할지 모르고 망연자실한채 바루마저 그냥 두고 유마거사의 집을 나서려 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을 보면 부처님 제자들을 성문승이라 하여 맹구로 묘사하거나 쪼다 또는 등신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경전 속에 그대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런데 경을 보면 단순한 충고가 아니다. 유마거사의 말을 보면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 소승법을 믿는 자는 3악도에 떨어지고, 그런 자에게 보시하는 이 역시 3악도에 떨어질 것이라 한다. 이것이 대승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소승폄하내용이다.

 

대승경전은 소승에 대한 단순한 폄하가 아니다. 소승이라 하여 저주를 하고 있다. 이런 저주는 다름 아닌 부처님에 대한 폄하이고  모독이다. 그럼에도 이런 경전이 수 천년 동안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또 이런 경전에 근거하여 스님들은 법문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빠알리니까야는 요의경이고 대승경전은 불요의경

 

자칭 신대승불교를 한다는 어느 네티즌이 초기불교에 천착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봐도 생뚱맞은 짓에 불과합니다. 그건 차원이 낮은 불교예요.”라고 난동을 부렸다. 또 어느 스님은 산속에서 50년을 살며 설법을 들으로 온 대중들에 한 다는 말이 부처님은 열반하기 전까지 온전치도 못한 깨달음을 갖고라는 부처님을 능멸하였다. 이처럼 난동을 부리고 경멸하는 것이 대승의 태도이다. 이 모두가 대승불교 경전의 탓이라 본다. 소승법을 따르면 3악도에 떨어진다고 저주의 말을 퍼부은 대승경전이 있었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닐까?

 

대승의 재가불자나 스님의 입에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불자들을 능멸하는 발언이 예사로 나온다. 이 모두가 빠알리니까야를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진실한 가르침은 마음에서 마음에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빠알리니까야에 있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한 것은 요의경이고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은 불요의경이다. 그렇게 본다면 빠알리니까야는 요의경이고 대승경전은 불요의경이다.

 

하지만 대승경전에서는 거꾸로 부처님이 설한 것을 불요의경이라 하고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을 요의경이라 한다. 더구나 선종에서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 비밀스런 가르침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비밀스런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만약 그런 가르침이 있다면 구린 것임에 틀림 없다. 구리기 때문에 비밀스런 가르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2013-07-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