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승의 빈주먹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19. 11:02

 

스승의 빈주먹

 

 

 

초기불교 법회 모임에서 천수경을

 

끼리끼리 논다라는 말이 있다. 생각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을 말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라 본다. 여러 가지 불교가 있지만 자신의 취향에 맞는 불교를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아닌 통불교가 있다면 그런 불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느 법우님은 초기불교 모임에 참여 하였다고 한다.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고 나온 시점에서 이루어진 모임이었는데 깜짝 놀랐다고 하였다. 초기불교 법회 모임에서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독송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경악한이유는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바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 하였다.

 

신해행증(信解行證)에서 믿음이란?

 

선종에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선종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에 따른 신해행증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진리의 을 믿고[],

이어서 그 의 의미를 잘 요해하며[],

그에 따른 실천 수행을 철저히 닦아 [],

마침내 궁극의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이다.

 

( 信解行證(신해행증), 금강신문 2010-01-15)

 

 

먼저 믿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굳은 신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을 말할까? 믿음에 대하여 풀이해 놓은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이란 신심(信心)입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보살의 계위(位次)에 초신(初信)에서 십신(十信)까지 있는데, 신()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여래의 묘법은 일언반구도 모두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언어로서 아주 확실한 것이며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수행인은 오직 마음에서 찾아야 하며, 마음 밖에서 허겁지겁 구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고, 성인이 가르치신 말씀을 믿어 망령되게 바꾸지 않아야 합니다.

(신해행증, 부다피아)

 

 

부다피아에 실린 신해행증 풀이에 따르면, 믿음이란 본래불을 믿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믿는 것이다.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이미 깨달은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 풀이가 크게 어긋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신해행증에서 ‘신’자는 다름 아닌 “내가 본래 부처다”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신심을 강조 한다. 그것도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심을 말한다. 만일 이런 신심이 없다면 그 다음 단계는 진행될 수가 없다.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작업

 

이렇게 내가 부처다라는 것을 믿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그것이 수행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간화선 수행이다.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이는 간화선 3요체로서 설명된다. 즉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 을 말한다.

 

간화선에서 대신근이라는 것은 커다란 믿음의 뿌리를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이었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부터 출발한다. 이런 사실을 믿는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내가 부처인 것을 확인 하는 작업 밖에 없다. 그 방법이 간화선에서 말하는 대분지와 대의정이다.

 

대분지는 열정적인 의도를 말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만났을 때 단칼에 베어 버릴 듯한 분노로 표현된다. 이런 열정적인 의도가 있기에 선방에서 용맹정진하고 철야정진한다. 그래서 선방에서 10, 20, 30, 평생을 보내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대의정은 커다 의문의 덩어리를 말한다. 이뭐꼬, 판치생모와 같은 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의 감정덩어리를 말한다. 그래서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은 무엇인고?”하며 알 수 없는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심이 뭉치고 뭉쳐서 의단을 이루었을 때 화두가 제대로 들어 진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독을 독으로써 제독 하는 동종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화두에서 의심이라는 작은 번뇌를 이용하여 보다 큰 번뇌를 해결하는 방법을 말한다. 화두를 이용하여 사량분별과 개념화를 방지하여 선불교식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숭산선사 비문에

 

이와 같이 간화선 3요체는 대신근, 대분지, 대의정이다. 대신근은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을 믿는 것을 말하고, 대분지와 대의정은 간화선 수행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화계사 숭산선사 비문에 적혀 있는 문구를 보면 대분지와 대의정에 핵심을 가로 질러 매우 짤막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대분지(大憤志) :“오직 할 뿐!(Only doing it)

대의정(大疑情)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이것이 간화선 수행이다. 내가 부처임을 확인 하는 과정에서 열정적인 의도는 “오직 할 뿐!(Only doing it)”이고, 알 수 없는 의심을 내는 것은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이라는 것이다.

 

신해행증 네 가지 단계

 

선종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신해행증 네 가지 단계를 제시 하였다.

 

1) ()은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2) ()는 그런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데 정견(正見)이라 한다.  초기불교에서 정견이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대승불교에서 정견은 자신이 본래 부처이었다는 것을 이해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신과 해에서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는 결과도 다르게 나올 것이다.

 

3) ()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 하는 과정이다. 이를 수행이라 한다. “오직 할 뿐!(Only doing it)”이라 하여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단칼에 베어 버릴 듯한 대분심을 말한다. 그리고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이라 하여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말한다.

 

4) ()은 이와 같은 수행 과정을 거쳐서 내가 본래 불이었다는 것을 확인 하는 것을 한다.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단계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신()이다. 믿음이다. 그것도 커다란 믿음이다. 흔들림 없는 확고한 믿음이다. 어찌 보면 맹목적인 믿음에 가깝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믿음을 강조한다.

 

선종에서는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 하여 믿음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믿음을 깨달음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성계에서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하였다. 처음 발심 하는 그 순간 이미 깨달음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본래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믿는 그 순간 이미 깨달음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부처라는 시실을 확인하는 과정만 남은 것이다. 그것이 수행이다.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이라는 알 수 없는 의심과 “오직 할 뿐!(Only doing it)”이라는 대열정으로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다름 아닌 선종불교에서의 수행이다. 이런 수행은 초기불교의 37조도품, 특히 팔정도 수행과 다른 것이다.

 

와서 보라!(ehipassika)”

 

선종에서는 믿음을 강조한다. 그것도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내가 본래 부처다라는 믿음을 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종교이다. 그러나 초기불교는 이와 다르다. 부처님은 맹목적으로 믿음을 내라고 하지 않았다. “와서 보라!(ehipassika)”고 하였다. 그래서 빠알리 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볼 수 있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ti.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현실적인 가르침이라 한다. 그래서 ‘현세의 삶에 유익한 (sandiṭṭhika)’가르침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간을 초월한 것(akālika)’이라 하였다. 이는 성스런 삶의 길을 실천하는 결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즉시 효과가 있고 또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와서 보라(ehipassika)’라는 말은 명백하게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숨길 만한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opanayika)’이라 한다.  이는 목표인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경전적 도그마에 빠졌다고?

 

부처님이 와서 보라고 한 것은 초대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하다 보면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이 있다.

 

 

연꽃님 글을 애독하고 있지만 가끔은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있는 것같기도 합니다. 경전은 100% 옳지는 않습니다.
.

.

 

따라서 불교의 어떤 사정(사상의 변화나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 첨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없습니다..

.

.

 

성경도 똑같습니다.   어떤 경전이든 비슷합니다. 녹음기로 녹음해서 녹취하는 방식이 아닌 이상 사실 마태복음 요한복음이든 뭐든 다 제자들 기억속에서 다시 재구성한 대화내용이지, 예수가   실존인물이든 아니든은 둘째 문제고 실제 100% 육성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

.

경전의 도그마에 빠지면     "성경의 일점 일획이라도 혹시 의심하면 불신자" 라는 소위 개독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불러일으키는 똑같은 사회적 반발심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H법우님)

 

 

지난 1월에 올려진 댓글이다. 이 글을 접하고 경전적 도그마에 빠졌다고? 빠알리 니까야를 의심하는 자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이처럼 글을 쓰다 보면 종종 태클을 거는 자들이 있다. 경전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경전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경전의 문구에 집착하지 말고 그 뜻을 보라고 충고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자들이 믿을 것은 전승되어 온 경전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라고 하였다. 마치 경전을 의심하는 자들을 예견해서 한 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불교적 믿음이란?

 

부처님은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또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그대신 “와서 보라(ehipassika)”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믿음을 강요하지 않아도 직접 와서 보고 들으면 확신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불교적 믿음이다.

 

불교에서 믿음은 ‘확신에 찬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삿다(Saddhā)’라 한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확신에 찬 믿음을 말한다. 따라서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는 글자 하나, 자구 하나, 문장 하나에 대하여 원문에 집착하는 것은 확신에 찬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도그마에 가득 차서 경전 그자체를 믿는 맹신과 다른 것이다.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오늘날 빠알리 니까야가 번역되어 많이 읽혀지고 있는 시대에 니까야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별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전승과정에서 다른 사상이 혼입 되었다든가, 편집자의 생각이 실렸다든가 하여 100% 부처님의 원음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자신의 여섯 가지 감각능력(깜냥)으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내용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것 저것 다 빼고 나면 수행과 관련된 몇 개의 경만 남는다. 그래서 하는 말이 “부처님은 현세의 가르침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였지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윤회와 업에 대하여 서슴 없이 부정하는 발언을 쏟아 내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물론적 단멸론자들이다.

 

이런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경전을 신뢰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적 근거 없이 남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 모두가 빠알리 니까야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 견해(邪見)에 지나지 않는다.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이 없다.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대할만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르침이 빠알리니까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은 무언가 있는 듯이 보인다. 이를 경전에서는 스승의 주먹이라 하였다. 한자어로 사권(師拳)’을 말한다.

 

사권은 무언가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주먹을 꽉 움켜 쥐고서 그 안에 무언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죽을 때 까지 주먹을 결코 펴지 않는 사권에 대한 근거의 경을 발견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그런데 아난다여,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여,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

 

(Gilanasutta-질병의 경, 상윳따니까야 S47:9, 전재성님역)

 

 

경에서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nantara abāhira katvā : Srp. II, 203에 따르면, “나는 사실(:객관)이나 사람(:주관)과 관련해서 양자를 구별하여 나는 이러한 사실을 남에게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사실을 내면화한다든가 나는 이와 같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사실을 외면화한다든가 아니면 나는 이와 같은 자에게 가르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그는 사람을 내면화(인정)한다거나 나는 이와 같은 자에게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그는 사람을 외면화(축출)하거나 [스승께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가르쳤다.”는 뜻이다.

 

( ‘anantara abāhira katvā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각주, 전재성박사)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없다. 누구나 와서 보라는 것이지 비밀스런 가르침이나 전승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선종에서 말하는 스승과 제자의 법의 전승, 즉 사자상승에 대한 거부를 말한다.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는 법이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 tathāgatassa dhammesu ācariyamuṭṭhi)라고 선언 하신 것이다.

 

스승의 빈주먹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에 대하여 단지 문자와 언어로 이루진 것이라 하여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로지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된 것이라 믿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비밀스런 가르침은 스승의 주먹 (ācariyamuṭṭhi, 師拳)’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스승은 주먹을 쥐고만 있을 뿐 펴지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욱 더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런 스승의 주먹은 빈주먹이기 쉽다.

 

 

 

2013-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