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본래 없다’와 ‘본래 있다’, 허무주의와 영원주의 양극단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19. 22:57

 

 

본래 없다 본래 있다’, 허무주의와 영원주의 양극단

 

 

 

본래 없다는데

 

걸림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 모든 면에서 있어서 걸림이 없다. 말을 해도 걸림이 없고 행동을 해도 걸림이 없다. 좋은 의미로 무애자재라 하고 나쁜 의미로 막행막식이라 한다. 무애자재와 막행막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걸림 없이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본래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생겨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본래 없다고 한다. 청정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본래 없다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표시 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이 된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래서 걸림없이 사는 사람들은 이 문구를 자주 인용한다.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를 뜻한다. 본래 없다는 것은 ‘본래무’이다. 이를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절대무’이다.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절대로 없다는 것을 무엇을 뜻할까? 다름 아닌 단견이다. 단멸론에 속한다. 또 다른 말로 허무주의이다.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를 영어로 니힐리즘(Nihilism)’이라 한다. 니힐리즘은 라틴어 ‘니힐(nihil)’에서 유래 하였는데, 이 때 니힐(Nihil)은 ‘무()’를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니힐리즘(Nihilism)  무주의, 허무주의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부정하면 무엇이 남을까? 이것도 본래 없는 것이고 저것도 본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 남을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남는 것이 없다고 하여 라 하였을 것이다. 그런 무는 절대무에 속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모든 현상을 부정하여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면, 반대로 저 세상은 어떤 것일까? 저 세상은 모든 것으로 꽉 찬 세상일까?

 

반야심경에서는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모든 것이 본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공중무색이라 하였고, 무수상행식이라 하였다. 무안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심지어 사성제와 십이연기 본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주문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 하였다. 저 언덕에 가면 허망한 이 세상과 달리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곳은 상락아정의 세계이고, 극락이고, 참나, 진여의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기독교의 천국 또는 하느님의 나라와 같은 개념이다.

 

 

동국대 김종욱 교수에 따르면 이 세상을 부정하고 저 세상을 바라는 종교는 모두 니힐리즘이라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기독교도 니힐리즘이다. 이 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기 때문이다.

 

궁극실재에 대한 체험

 

기독교에서는 천국에 태어나 행복하게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 그런 천국과 하나님은 절대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절대유라 한다.

 

절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보는데 있어서 대승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선사들에 따르면 아무게야하면 라고 대답하는 그 놈, 그 놈이 있기에 궁극적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재를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나 대승불교나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불교TV에서 오강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교적 특징은 그 어느 것 보다, 어느 체험보다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전율적이고 심오한 체험입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 다른 체험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집니다. 

 

우리 주위에서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을 보면 그 체험이 가장 중요한 체험이에요, 그걸 잊지 못해가지고 종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수행에 들어 가는 사람도 있고, 또 스님이 된 사람, 혹은 목사가 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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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종교적 체험은 그저 일상적인 체험, 목이 마르면 물 마시고 하는 그런 체험이 아니라 궁극실재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반응, 인간의 전존재로 하는 것, 또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전율적인 그리고 심오한 체험이라는 것, 그러면서 행동을 수반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BTN특강 동양종교 둘러보기, 오강남 교수 불교tv 2013-07-08 제1회 왜 이웃 종교를 알아보려는가?)

 

 

 

 

 

Enlightenment

 

 

 

오강남 교수는 기독교 신학자이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자이다. 그래서 열린 기독교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TV에서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오강남 교수에 따르면 기독교나 불교(대승, 선종)의 종교체험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을 궁극실재라 하였다.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절대유이다. 기독교의 하느님이나 하나님, 이슬람의 알라, 브라만교의 브리만, 힌두교의 시바와 비시누, 불교의 비로자나나 참나 또는 진여 불성 같은 것이다.

 

열반은 궁극실재가 아니다

 

궁극실재에 열반은 제외이다. 이런 분류법은 기독교 신학자이자 종교다원주의자인 길희성 교수도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열반은 왜 들어 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궁극적 실재를 부정한다. 만일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는 불교가 있다면 그런 불교는 불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허무주의와 영원주의 를 동시에 갖는 한국불교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불교는 한편으로는 절대무이고 또 한편으로느 절대유이다. 이 세상을 바라 보면서 본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무로서 이 세상을 부정하기 때문에 허무주의이다. 반대로 저 언덕, 저 세상, 상락아정의 세계를 동경한다면 이는 절대유로서 저 세상을 인장하기 때문에 영원주의이다. 이렇게 한국불교는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를 동시에 갖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불교는 한편으로 허무주의이고 또 한편으로 영원주의이다. ‘본래 없다하여 걸림없이 살며 막행막식을 일삼으면 허무주의라 본다. 반대로 본래 있다하여 궁극적 실재를 찾는 수행을 한다면 영원주의라 본다. 이렇게 한국 불교는 허무주의와 영원주의가 혼재 되어 있다.

 

깟짜야나곳따경(S12:15)에서

 

허무주의는 절대로 없다고 본다. 그래서절대무를 주장한다. 영원주의는 절대로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절대유를 주장한다. 이는 양극단이다. 부처님은 이런 양극단을 배격하였다. 그리고 양극단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Dvayanissito kho'ya kaccāna loko

yebhuyyena atthitañceva natthitañca.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

 

 

Lokasamudayañc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Lokanirodh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atthitā, sā na hoti.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곳따경-Kaccāya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15(2-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 세상에 양극단이 있다고 하였다. ‘비존재()’ 존재()’ 에 대한 극단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나티따(natthita)’아티따(atthita)’라 한다. 이를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절대무(natthita, 비존재)’절대유(atthita, 존재)’로 표시할 수 있다. 유무 양극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허무주의영원주의이다.

 

양극단 본래 없다본래 있다

 

허무주의는 이 세상에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적 견해를 말한다. 그래서 도덕적 삶을 살 필요도 없고 공덕을 쌓지도 않는다. 인생을 원타임(one time)으로 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욕락을 추구하게 된다. 또 이 세상을 본래 없는 것이라 하여 부정하기 때문에 걸림없이 살아 가며 막행막식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절대무(natthita)’이다.

 

영원주의는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상락아정의 저 세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부정하고 저 세상을 동경하면 영원주의자가 된다. 또 영원주의는 이 세상의 원인이 되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주의는 절대유(atthita)’이다. 

 

발생의 순관과 역관

 

그런데 부처님은 절대무와 절대유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절대로 없다절대무가 왜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명쾌한 말이다. 이 한 마디 말로 인하여 허무주의가 논파된 것이다. 그리고 절대무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왜 그럴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현상들은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소멸한다. 그렇다고 하여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발생의 순관에 따르면 현상은 무명과 갈애 때문에 끊임 없이 생겨난다.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로 통찰하면 현세의 존재에게 내세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견해(단멸론)은 사라지고 만다. 죽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은 거짓이 되고 만다. 죽음 이후에도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발생의 역관에 따르면 형성되어진 존재들은 끊임 없이 무상하게 소멸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는 사라진다. 죽어서 상락아정의 세상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죽음 이후에도 조건에 따라 법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두 문장으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가 논파 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본래 없다거나 저 세상은 본래 있다거나 하는 절대무와 절대무는 성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연기법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이 모두가 연기법에 따른다. 있는 그대로 현상을 관찰하였을 때 조건에 따라 끊임 없이 생겨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하였다. 경에서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얽매여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접근하고 취착하고 마음으로 욕구하여 유입되고 잠재되는 것에 다다르지 않고 붙잡지 않고 주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면 일어난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의심하지 않고 혼란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게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이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깟짜야나곳따경-Kaccāya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유무 양극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왜 십이연기 정형구를 설하셨을까? 그것은 연기법적 사유에 대한 요구로 본다. 연기법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유무 양극단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기법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허무주의자나 영원주의자가 되기 쉽다. ‘본래 없다라고 말하면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본래 있다라고 말하면 영원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15)”라 하였다.

 

열반은 어떤 것일까?

 

깟짜야나곳따경(S12:15)은 유무중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유무중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타중도, 일이중도, 거래중도, 생멸중도, 고락중도도 있기 때문이다. 이중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고락중도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볼 수 있다. 극단적인 쾌락과 극단적 고행의 무익함에 대한 것이다.

 

이런 다양한 중도사상은 양극단을 떠나 모두 연기의 가르침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하게 되어 있다. 그런 열반은 어떤 것일까? 생멸중도의 열반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trāpāha bhikkhave neva āgati

 vadāmi, na gati,

na hiti, na cuti, na upapatti.

Appatiṭṭha appavatta

anārammaam-eveta,

esevanto dukkhassā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Pahamanibbānasutta-열반의 경 1, 우다나 Ud80, 전재성님역)

 

 

 

2013-07-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