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마부 찬나(Channa)의 깨달음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1. 17:50

 

 

마부 찬나(Channa)의 깨달음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사찰에 가면 탱화를 볼 수 있다. 특히 대웅전 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부처님의 일대기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이 있다. 부처님이 카필라성을 빠져 나와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이다. 이때 말을 타도록 도와 준 사람이 찬나(Channa)’이다.

 

 

 

 

조계사 대웅전의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아상이 하늘을 찌를 듯한 찬나

 

찬나는 부처님과 한 날 한시에 태어났고 부처님의 위대한 유성출가의 날에 함께 한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찬나도 출가를 하였는데 그는 대중들에게 매우 거만했다고 한다. 그것은 내가 누군데!”하는 자만심이었다. 그래서 대단히 무례하고 악의적이었다. 심지어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목갈라나와 사리뿟따에게도 ‘우리야말로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다.’ 라고 뽐내며 뜰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꼴이라니라며 속으로 무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청정한 수행승들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그들과 충돌하기 일쑤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부처님의 마부로서 성을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에 대한 자부심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상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이었다.

 

하느님의 처벌(brahmadaṇḍo, 梵罰)

 

찬나의 자부심과 자만심이 출가한지 40년이 넘도록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 찬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처할 것을 말하였다.

 

 

 [세존]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수행승 찬나에게 하느님의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하느님의 처벌이 무엇입니까?”

 

[세존]

“아난다여, 수행승 찬나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수행승들은 그에게 이야기 하거나 충고하거나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된다.”

 

(Mahāparinibbāna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무례하고 방자하고 거만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있는 찬나에게 부처님이 하느님의 처벌을 주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처벌(brahmadaṇḍo, 梵罰)’이란  다름아닌 ‘묵빈대처’를 뜻한다. 일종의 ‘왕따’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에 대하여 가장 심한 벌은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것이다.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찬나 자신이 부처님의 마부이었다는 사실 하나로 나의 부처님, 나의 부처님” 하며 말하고 다녔고,   “내가 누군데”라는 아상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출가한지 40년이 넘었지만

 

아상이 높은 찬나는 출가한지 40년이 넘었지만 성자의 흐름에도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찬나가 어느 날 장로들에게 말을 건다.

 

 

[찬나]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훈계를 베풀어 주십시요. .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교시를 베풀어 주십시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설법을 해 주십시오.”

 

(Channa sutta-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0, 전재성님역)

 

 

아상이 높은 부처님의 마부 출신 찬나가 장로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다. 부처님 열반이후의 상황이라 보여진다. 아직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한 찬나가 장로들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들이 가르치기를

 

부처님의 유훈대로라면 장로들은 묵빈대처 해야 한다. 하지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

 

 

[장로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합니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

 

(Channa sutta-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0, 전재성님역)

 

 

장로들은 찬나에게 무상과 실체없음(무아)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아상이 강한 찬나에게 오온이 무상한 것이고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삼특상 중의 하나인 괴로움에 대한 것이 빠져 있다.

 

찬나가 생각하기를

 

이런 장로들의 설법을 듣고 찬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찬나]

“나도 역시 이처럼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하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무상하다’ 고 생각한다.

 

 (Channa sutta-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0, 전재성님역)

 

 

 

장로들이 가르쳐 준 것처럼 찬나 역시 무상과 실체없음(무아)에 대하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무상하다. (sabbe sa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나는 성자의 반열에도 들어 가지 못하였다. 아상을 가지고 있는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일체개고를 알려 주지 않았을까?

 

경에서 장로들은 찬나에게 무상과 실체없음(무아)의 특징에 대해서만 알려 주었다. 세 가지 특징중의 하나인 괴로움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abbe sa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 : Srp.II.318에서 붓다고싸는 ‘모든 수행승들이 그를 가르치면서 왜 무상의 특징과 무아의 특징만을 말하고 괴로움의 특징은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묻고는 ‘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 되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도 괴롭고 경지(果位)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sabbe sa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 각주, 전재성박사)

 

 

장로들이 찬나에게 삼특징에 대하여 모두 설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것이다. 아상이 하늘을 찌를 듯한 찬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아상을 무너뜨리기 위한 무상과 실체없음(무아)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찬나에게 괴로움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을 때 모든 것을 괴로운 것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 .(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고 가르침을 주었을 때 도를 닦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도를 닦에 수다원 등 과위를 성취하는 것도 괴로움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을 가졌을 때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책상도 괴로움을 느낄까?

 

책상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상도 괴로움을 느끼고 있을까?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 .(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고 하였으므로 이런 논리에 따른다면 책상도 당연히 고통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책상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이 일체(Sabbe) 라고 한 것은 오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일체를 말한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그럼에도 일체가 괴롭다라고 하였을 때 찬나는 틀림 없이 전우주적 괴로움으로 확대하여 바위도 괴로움을 느끼고, 책상도 괴로움을 느낄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임에 틀림 없다.

 

세 가지의 괴로움이 있는데

 

그렇다면 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삽베 상카라 둑카 (Sabbe sakhārā dukkhā)”라 하여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말씀 하셨을까? 일체 형성된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초기불교에서 일체라는 말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오온을 떠나서 그 어떤 다른 세상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접촉에 따른 세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 세계는 철저하게 연기적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분류 하였다.

 

 

Tisso imā bhikkhave, dukkhatā. Katamā tisso: dukkhadukkhatā sakhāradukkhatā vipariāmadukkhatā. Imā kho bhikkhave, tisso dukkhatā. Imāsa kho bhikkhave tissanna dukkhatāna abhiññāya ariyo aṭṭhagiko maggo bhāvetabbo.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괴로움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의 괴로움, 형성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것이 세 가지 괴로움이다.

 

(Dukkhasutta-괴로움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165,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세 가지 괴로움이 있다. 고통의 괴로움(dukkhadukkhatā), 형성의 괴로움(sakhāradukkhatā), 변화의 괴로움(vipariāmadukkhatā)이다. 이를 각각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행고성(行苦性, sakhāra-dukkhatā)이라 한다. 이와 같은 괴로움의 특징은 무엇일까?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첫 번째로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고통 그 자체를 말한다. 신체적 고통을 포함하여 정신적 고통까지 모두 해당된다. 따라서 삶 그 자체가 고통이다.

 

초전법륜경의 고성제에서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hipi dukkho maraampi dukkha, s56:11)” 라고 말한 대목고고성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말로 고통이라 볼 수 있다.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두 번째로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이 있다. 이는 변화함에 따라 발생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에 바탕하여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괴로움을 말한다.

 

초전법륜경의 고성제를 예로 든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s56:11)”이 해당될 것이다. 우리말로 불만족이라 볼 수 있다.

 

행고성(行苦性, sakhāra-dukkhatā)

 

세 번쨰로 행고성(行苦性, sakhāra-dukkhatā)이 있다, 이것은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대하여 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괴로움을 말한다.

 

초전법륜경의 고성제를 예로 든다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s56:11)”가 될 것이다. 이는 조건지어진 것, 형성지어진 것에 대한 괴로움을 말한다. 그래서 존재일반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래서 책상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고성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덤덤한 느낌이라 볼 수 있다. 우리말로 무덤덤하다고 표현 할 수 있다.

 

행고성과 우뻭카웨다나(upekkhā-vedanā)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 이렇게 세 가지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행고성이다. 고통 그 자체를 뜻하는 고고성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또 변화에 따른 괴로움인 괴고성 역시 이해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상카라둑카타(sakhāra-dukkhatā)’라 불리우는 행고성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행고성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행고성(sakhāra-dukkhata)은 행()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이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이름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형성되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생겨남, 늙음, 변함에 의해서 짓눌렸기 때문에 행고성이라고 한다.

 

(맛지마니까야 주석 DA.III992,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행고성은 모든 지어지는 것, 연기되는 것 말하자면 어떤 상관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뜻으로 행고성이라 한다. 특히 마하시사야도는 행고성에 대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중립적인 느낌을 우뻭카웨다나(upekkhā-vedanā)라 한다.

 

책상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고고성은 고통을 수반하여 고통그 자체를 느끼고, 괴고성은 변화로 인한 불만족을 느낀다. 모두 괴로움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행고성은 괴롭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중립적은 느낌이라 한다. 그래서 행고성에 대하여 무덤덤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논리라면 형성된 모든 것들, 조건에 따라 지어진 모든 것들, 연기에 발생한 모든 것들, 예를 든다면 바위나 책상 같은 무정물들은 괴로운 느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 .(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 하였을 때, 이는 행고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조건지어져 형성된 바위나 책상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행고성은 누가 느끼는가?

 

행고성은 “일체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괴롭다.(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을까? 전부 조건지어져 있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도 조건 지어져 있고, 객관적 대상도 조건 지어져 있다. 공기, 바람, 물, 바위, 책상등 심지어 우주도 조건지여져 있다. 그래서 모두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Sabbe sakhārā aniccā, Dhp277)”라 하였다. 무상하니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 (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 하였고,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 Sabbe dhammā anattā, Dhp279)”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건지어져 발생하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일체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괴롭다.(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고 하였을 때 오온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괴롭다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하여 고고성과 괴고성 처럼 고통과 불만족을 내가 직접 느끼는 것이 아니다. 행고성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고성은 누가 느끼는 것일까?

 

전재성박사의 강연(정각원 법회 정각원 토요법회 2012년 3월 24)에 따르면 일체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괴롭다.(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뼈에 사무칠 정도로 느꼈을 때 아라한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어야 행고성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고성은 동물적 차원의 괴로움이고, 괴고성은 인간들 차원의 괴로움이고, 행고성은 아라한 차원의 괴로움이라 한다.

 

표로 정리해 보면

 

이와 같은 세 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여 보았다.

 

 

구 분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행고성(行苦性) sakhāra-dukkhatā

 

본질

고통 그 자체로 인한 괴로움

변화에 따른 괴로움

조건지어진 모든 것의 괴로움

느낌

고통

불만족

무덤덤함

고성제

생노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오취온

대상

동물적 차원

인간적 차원

아라한 차원

 

 

 

고고성은 고통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다. 괴고성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좋아 하지 않은 것과 만나는 괴로움이 변화로 인한 괴로움이기 때문에 범부들 느끼는 괴로움이다.

 

그러나 번뇌 다한 아라한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으로 인한 업을 짓지 않는다. 단지 조건 지어진 모든 것들은 변하고 실체가 없고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라한이 되어야만 행고성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골칫거리 찬나

 

찬나경에서 장로들은 찬나에게 괴로움의 특징에 대해서는 말하여 주지 않았다. 찬나의 설법요청에 따라 단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라고 무상과 실체없음(무아) 두 가지만 알려 준 것이다.

 

아상이 강하여 아직 흐름에도 들어 가지 못한 찬나에게 일체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괴롭다.(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는 가르침을 폈을 때 틀림 없이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도 괴롭고 경지(果位)도 괴롭다고 오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찬나는 승단에서 골치 아픈 존재이었던 것 같다.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와 준 장본인으로서 사리뿟따나 목갈라나와 같은 부처님의 상수 제자 마저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찬나의 행위를 잘 알기에 부처님은 열반시 찬나에 대하여 묵빈대처할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이렇게 왕따 당한 찬나에게 장로들은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일체개고 같은 가르침이다. 그래서 무상과 실체없음에 대해서만 알려 준 것이다. 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알려 주어보았자 오해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퇴전만 거듭하는 찬나

 

이렇게 아상이 높은 찬나의 고민을 엿볼 수 이는 대목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찬나]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파괴, 사라짐, 소멸, 열반에 뛰어 들지 못하고, 대신에 동요와 집착이 생겨나 나의 마음은 퇴전하여 ‘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를 보는 자에게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누가 내게 가르침을 베풀 것인가?”

 

(Channa sutta-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0, 전재성님역)

 

 

찬나도 수행을 하였다. 그러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찬나는 수행을 해 보지만 퇴전만 거듭할 뿐이었다.

 

찬나의 허약한 통찰

 

퇴전만 거듭하던 찬나는 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 atha kho carahi me attā)”라고 고민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atha kho carahi me attā :  Srp.II. 181에 따르면, 장로는 조건들을 성찰하지 않고 통찰에 대한 명상을  시작했다. 그의 허약한 통찰이 자아에 대한 집착을 제거 할 수 없었다. 형성들이 그에게 공()으로 드러나자 ‘나는 단멸하고 파괴될 것이다.’라는 허무주의자의 혼란이 일어 났다.

 

(atha kho carahi me attā-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 각주, 전재성박사)

 

 

주석에 따르면 찬나는 허약한 통찰을 하였다고 하였다. 조건 지어져 발생하는 연기에 따른 통찰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허약한 통찰을 하였을 때 모든 것이 공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번뇌가 생겨났다고 한다. 아상이 하늘을 찌를 듯 찬나에게 있어서 나() 가 공한 것으로 드러나 사라지자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한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나를 찾는 수행

 

경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그것은 조건 발생에 따른 연기적 통찰 없이 단지 공한 것으로 통찰하였을 때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라 본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실종된 한국불교에서 본래 없는 것이라 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는 모습을 종종본다. 이는 아마도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과 같은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 것이다.

 

이처럼 본래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이 공하다고 여기다 보니 악취공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막행막식을 알삼는 모습을 또한 보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 승려도박과 같은 커다란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본다. 이는 찬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허약한 통찰로 때문이라 본다. 그에 따라 허무주의적 견해가 발생하여 막행막식을 하였을 것이라 본다.

 

또 한편으로 한국불교가 나는 누구인가하며 나를 찾는 수행으로 인하여 영원주의가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참나를 찾기 위하여 심산유곡에서 10, 20, 30, 평생을 보내고 있다고 본다. 이처럼 한국불교는 허무주의와 영원주의가 혼재 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아난다를 찾아간 찬나

 

허무주의적 생각에 빠진 찬나는 아난다를 찾아 간다. 아난다를 찾아간 찬나는 존자 아난다여, 제게 교시를 베풀어 주십시요. 존자 아난다여, 제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설법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S22:90)”라고 간청한다.

 

이와 같은 간청에 아난다는 부처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 준다. 부처님이 깟짜야나에게 들려 주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준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깟짠야나곳따경(S12:15)의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

 

아난다가 들려준 것은 연기법이다. 연기적 사유로 통찰하면 존재와 비존재라는 양극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공하다는 허무주의적 관점이 극복 되고,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 수행을 함에 따라 발생되는 영원주의적 관점이 극복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깟짜야나곳따경(S12:15)의 설법을 듣고

 

찬나는 아난다의 깟짜야나곳따경(S12:15)의 설법을 듣고 저는 존자 아난다의 설법을 듣고 진리를 꿰뚫었습니다.(S22:90))”라고 하였다. 마침내 찬나가 흐름에 든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연기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렇다면 찬나를 흐름에 들게 한 내용은 어떤 것일까?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집착, 주착을 통해 구속되어 있지만, 그는 접근, 집착, 그리고 마음의 독단, 주착, 경향에 접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는 독단을 취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는다.

 

(Channa sutta-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0, 전재성님역)

 

 

아난다는 존재와 비존재, 즉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연기법으로 논파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 주었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을 보면 허무주의가 사라지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것을 보면 영원주의가 사라진다는 연기의 가르침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찬나

 

이러한 연기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의 자아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나라는 실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 하였다. 장로들이 가르쳐 주지 않았던 일체개고에 대한 이야기를 아난다가 가르쳐 준 것이다. 이를 장로들이 말한 것과 붙여서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다.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난다의 설법 이전에 장로들이 찬나에게 들려 준 것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다.”로서 괴로움에 대한 것이 빠져 있다. 그런데 아난다는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 하여 괴로움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래서 찬나는 세 가지 특성에 대하여 모두 알아 흐름에 들게 된 것이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이유

 

초기불교에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삼특상은 항상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무상이 앞에 나온다. 그 다음에 고이고, 그 다음이 무아이다. 그렇다면 삼특상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 모두 다 중요하지만 부처님이 특히 강조한 것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1) 무상한 것

Rūpa bhikkhave, anicca, yadanicca ta dukkha, ya dukkha tadanantā, yadanattā ta neta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ti evamet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로 관찰해야 한다. (무상한 것의 경, S22:15)

 

 

2) 괴로운 것

Rūpa bhikkhave, dukkha, ya dukkha tadanantā, yadanattā ta Neta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ti evamet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로 관찰해야 한다. (괴로운 것의 경, S22:16)

 

 

3) 실체가 없는 것

Rūpa bhikkhave, anantā, yadantatā ta Neta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ti evamet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로 관찰해야 한다. (실체가 없는 것의 경, S22:17)

 

 

세 가지 정형구를 보면 세 가지 특징에 대하여 전부 표현된 것은 첫 번째인 무상한 것의 경(S22:15)  하나 뿐이다.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S22:15)”라고 하여 무상(anicca)과 괴로움(dukkha)과 실체없음(anantā , 무아) 이렇게 세 가지가 모두 포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로운 것의 경(S22:16)에서는 무상이 빠져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의 경(S22:17)에서는  무상과 괴로움이 모두 빠져 있다. 세 경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간 것은 실체없음(무아) 하나 뿐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불교는 실체없음(anantā), 즉 무아를 특징으로 하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것이 바로 실체없음, 즉 무아이다. 그렇다면 왜 무아가 중요한가?

 

누구나 무상함을 느끼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인생무상, 자연무상이 대표적이다. 나이가 들어 늙어 감에 따라 인생이 무상함을 알게 되고, 계절이 바뀜에 따라 자연 또한 무상함을 알게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확고한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인생무상을 느껴도 내가 느끼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영원주의 또는 허무주의에 쉽게 빠지게 된다.

 

나의 자아가 영원하기를 바라면 죽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이나 극락을 바라면 영원주의자가 된다. 반면 나의 자아가 죽음과 함께 더 이상 남는 것이 단멸하는 것으로 보면 허무주의가 된다. 이와 같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hā)’ 비존재에 갈애(vibhavatahā)’ 가 일어난다.

 

일반사람들은 자아를 기반으로 인생무상과 자연무상을 느낀다. 그래서 무상함만 느낄 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무아를 기반으로 해야

 

불교적 깨달음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자아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무아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그런 무아는 문자적으로 만 해석하여 단순하게 내가 없다(無我)”가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파악해야 한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 오온이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통찰해야 함을 말한다. 

 

무아를 기반으로 하여 인생이나 자연을 관찰하였을 때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질 수가 없다. 그래서 조건지어진 현상에 대하여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라는  통찰이 일어났을 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적 깨달음이다.

 

깨달았는지 알려면

 

도를 많이 닦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이 연기법적으로 이야기하는지에 대하여 알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적으로 이야기하면 깨달은 사람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에 대하여 알려면 그 사람이 연기적으로 이야기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2013-08-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