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지금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어도, 업장소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15. 16:40

 

 

지금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어도, 업장소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불자들이 그렇듯이 대승불교부터 접하였다. 불자가 되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을 수 있지만 불교교양대학을 통하여 정식으로 불교와 접하였다. 그래서 대승의 경전이라 불리우는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을 접하고 이를 모두 외웠다.

 

그러나 교리는 알 수 없었다. 대승경전에서는 교리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초기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는 필연적인 과정이라 보여진다.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인터넷시대에 초기불교를 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다.

 

팔정도에서 정견이란?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니 교리를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행과 교리를 함께 지도하는 위빠사나 센터에 다니게 되었다. 그때 배운 교재가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paticcasamuppada)’이다. 이 때 들은 말이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다. 업자성정견이란 무엇일까?

 

팔정도에 정견(正見)’이리는 말이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몰랐다. 대승불교를 접하였지만 교리에 대하여 말하지 않기 때문에 팔정도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대승불교를 믿는 불자 중에 팔정도의 정견에 대하여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정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Ya kho bhikkhave, dukkhe ñāa dukkhasamudaye ñāa dukkhanirodhe ñāa dukkhanirodhagāminiyā paipadāya ñāa, aya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세존]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eightfold-path

 

 

 

정견을 우리말로 올바른 견해라 한다. 빠알리어로 삼마딧티(sammādiṭṭhi)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성제를 아는 것에 대하여 정견이라 하였다.

 

세간적 정견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경의 주석에 따르면 사성제를 아는 것에 대하여 출세간적 올바른 견해라 하였다. 그리고 “세간적 정견은 우리 자신이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도 출세간적 정견이 있고 세간적 정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세간적 정견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서는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업자성정견은 무엇을 말할까?

 

업자성정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업이 자신이 것이라는 바른 견해’로 번역한 깜마사까따-삼마디띠(kammassakata-sammādiṭṭhi)는 ‘kamma()+sakata(자기, 자신)+sammā(바른)+diṭṭhi(견해)’로 분해가 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라는 의미이다. 이를 설명하는 표준적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은 업의 주인이자 자기 업의 상속자이다. 그들 각자는 자기 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며 자기 업에 매여 있고 자기 업으로 지탱된다. 선악 간에 어떤 업을 짓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A10:205)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은 맛지마 니까야,「대사십경(大四十經, Mahacattarisaka-sutta)」(M117)에 나온다. 예컨대, 남에게 무엇을 주거나 보시를 하는 등의 덕스러운 행위는 도덕적 중요성을 안다는 것, 선행과 악행은 그에 상응하는 과보로 수반한다는 것, 누구나 그 어머니와 아버지를 섬길 의무가 있다는 것, 재생이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선 세계가 있다는 것, 또 스스로 체득한 높은 깨달음에 기초해서 법을 설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업이 자신이 것이라는 바른 견해이다.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 주해서, 김한상(수마나)님 역)

 

 

법문집의 주석에 따르면 업자성정견은 빠알리어 깜마사까따-삼마딧티(kammassakata-sammādiṭṭhi)’의 번역이다. 이는 ‘kamma()+sakata(자기, 자신)+sammā(바른)+diṭṭhi(견해)’의 번역어이다. 그래서 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말한다. 이에 대한 정형구를 소개 하였는데 앙굿따라니까야의 경(A10:206)을 예로 들었다.

 

근거가 되는 경

 

주석에서 소개한 A10:205는 초기불전연구원의 앙굿따라니까야의 비뚤어짐 경에 대한 분류 방법이다. 그러나 빠알리성전협회의 앙굿따라니까에서는 A10:216  뱀처럼 기어다님에 대한 법문의 경의 분류로 되어 있다. 이렇게 번역자 마다 경을 매기는 순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Sasappaniya pariyāya sutt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비뚤어짐 경이라 하였고, 성전협회에서는 뱀처럼 기어다님에 대한 법문의 경이라 하여 경의 이름도 다름을 알 수 있다.

 

업자성정견에 대한 근거의 경은 많이 보인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뱀처럼 기어다님에 대한 법문의 경(A10:216)

2) 열가지 원리의 경(A10:48)

3) 사실의 경(A5:57)

4)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

5) 법구경 Dhp219~220

 

 

정형구를 보면

 

세간적 정견에서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가지고 있다.

 

 

Kammassakomhi

kammadāyādo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isarao

ya kamma karissāmi kalyāa

vā pāpaka vā tassa dāyādo bhavissāmīti”

pabbajitena abhiha paccavekkhitabba.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고,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내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업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것이 업자성정견이다. 이런 업자성정견은 반드시 세간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출가자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는 출가자는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A10:48)”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업자성정견은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세간적 바른 견해를 말한다.

 

정견은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고, 세간적 정견은 자신이 업의 소유자인 것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올바른 견해와 잘못된 견해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M117)’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먼저 올바른 견해와 잘못된 견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거기에 올바른 견해가 선행한다. 수행승들이여, 왜 정견이 선행하는가? 잘못된 견해를 잘못된 견해라고 알고 올바른 견해를 올바른 견해라고 아는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견해란 어떠한 것인가?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 제사의 공덕도 없다. 공양의 공덕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존재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곧바로 알아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치는 착하고 덕 있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세상에 없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견해이다.

 

(Mahācattārīsaka sutta-커다란 마흔의 경, 맛지마니까야 M117, 전재성님역)

 

 

바른 견해가 있다면 바르지 않은 견해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올바른 견해는 잘못된 견해를 잘못된 견해라고 알고 올바른 견해를 올바른 견해라고 아는 그것이 올바른 견해라 하였다. 그리고 잘못된 견해에 대하여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등의 업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는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잘못된 견해, 즉 ‘삿된 견해(邪見)’는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에 대한 것이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적 견해를 잘못된 견해라 하였다.

 

두 가지 정견이 있는데

 

경에 따르면 올바른 견해는 두 가지가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는 어떤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

 

(Mahācattārīsaka sutta-커다란 마흔의 경, 맛지마니까야 M11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두 가지의 정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는 세간적 정견이고 또 하나는 출세간적 정견이다. 그런데 세간적 정견은 번뇌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반면 출세간적 정견은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번뇌의 영향을 받는 세간적 정견

 

먼저 번뇌의 영향을 받는 세간적 정견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지만,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는 어떠한 것인가? ‘보시에는 공덕이 있다. 제사의 공덕도 있다. 공양의 공덕도 있다. 선악의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삶도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곧바로 알아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치는 착하고 덕 있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세상에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

 

(Mahācattārīsaka sutta-커다란 마흔의 경, 맛지마니까야 M117, 전재성님역)

 

 

이 것이 세간적 정견이다. 보시공덕, 제사공덕, 공양 공덕을 쌓는 것도 집착이라는 번뇌의 결과로 본다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세간적 정견은 보다 나은 윤회의 삶으로 이끄는 공덕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조건 지어진 삶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이는 행위에 따른 과보를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고,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내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업을 상속받을 것이다.”라고 관조하는 것이 세간적 정견, 즉 업자성정견이라는 것이다.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출세간적 정견

 

다음으로 출세간적 정견이 있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마음,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 거룩한 길을 성취한 자에게 거룩한 길을 닦은 결과로서 지혜, 지혜의 능력, 지혜의 힘, 탐구의 깨달음 고리, 올바른 견해가 있는 고귀한 길의 요소가 생겨나는데, 이것들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이다.

 

(Mahācattārīsaka sutta-커다란 마흔의 경, 맛지마니까야 M117, 전재성님역)

 

 

이것이 출세간적 정견이다. 세간적 정견과 다른 것은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실천 방법으로는 팔정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정의는 깨달음에 필요한 지혜로서 정의되는 출세간적 올바른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올바른 견해의 대상적 내용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식의 작용으로 설명되고 있다.

 

Pps.IV.132에서는 길에 대한 올바른 견해, 즉 출세간적 올바른 견해는 곧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 MN141 과 주석을 보라)에 대한 앎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해서도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에 해당한다. 열반의 성취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 진리를 꿰뚫어 아는 것이 출세간적인 올바른 견해이다.

 

(출세간적 올바른 견해 주석, 전재성박사)

 

 

주석에 따르면 출세간적 정견은 열반의 성취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여 단지 머리로 이해 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세속적 정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정견이 바로 서야

 

팔정도에서 정견은 첫 번째로 나온다. 정견이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수행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정견이 바로 서야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수행의 방향이 잘못 되어 엉뚱한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예를 들면 나를 찾는 수행 같은 것이다. 존재의 근원이라 여겨 지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고 그 실재를 참나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

 

참나는 여려 이름으로 불리운데 선종에서는 본래불이라 한다. 그래서 자신이 본래불이라고 굳게 믿는 것을 정견이라 한다. 내가 본래불이고 내가 이미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본래불이고 깨달은 자임을 증명하기만 한다. 그래서 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 이렇게 정견이 다르면 수행의 결과도 달라짐을 알 수 있다.

 

팔정도에서 정견이 가정 먼저 나오는 것은 수행의 방향을 정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사성제를 아는 것은 열반의 체험과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사성제를 알면 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다. 그러나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번뇌를 소멸하는 단계가 진정한 수행이라 볼 수 있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한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아라한이 된다. 이는 수행의 완성이다. 그래서 팔정도는 혜온-계온-정온-혜온의 순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앞정견은 사성제의 이해차원이고, 뒷정견은 지혜의 완성차원으로 본다. 그래서 팔정도 수행은계온-정온-혜온순서라기 보다혜온-계온-정온-혜온이렇게 네 가지 단계로 본다.

 

왜 사람의 모습과 성향은 모두 다를까?

 

이와 같이 정견에는 세간적 정견과 출세간적 정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삶의 살아 가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현실적으로 체험 할 수 있는 것은 세간적 정견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라는 세간적인 정견은 다름 아닌 선인선과 악인악과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경에서도 그렇게 묘사 되어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세간적 정견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mmasakkā mā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isaraā. Kamma satte vibhajati yadida hīnappaītatāyāti.

 

[세존]

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쭐라깜마위방가경-Cūakammavibhaga sutta-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전재성님역)

 

 

사람들의 생긴모습을 보면 매우 다양하다. 누구 하나 똑 같이 생긴 사람이 없다. 쌍둥이도 자세히 보면 다르다. 성향 또한 모두 다르다. 그래서 이세상에서 나와 똑 같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신체조건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고 사회적 지위도 다르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고 하였다.

 

과보가 뭇삶(중생)들을 차별한다

 

자신이 과거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가 뭇삶(중생)들을 차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간적 올바른 정견, 즉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쭐라깜마위방가경(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M135)에서는 뭇삶들의 차별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용모가 추한 자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받는 과보라 한다. 또 목숨이 짧은 자는 살륙에 전념하고 자비심이 없는 자가 받는 과보라 한다. 이 모두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세간적 정견, 즉 업자성정견은 어떤 내용일까?

 

1) 업을 소유하는 자(Kammasakkā)

 

첫째로 업을 소유하는 자(Kammasakkā)’에 대한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업을 소유하는 자에 대하여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경향성의 업은 정신적 지속 속에서 적절한 다른 조건들이 생겨나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MN141 주석)”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행위를 말한다. 또 다른 말로 의도적인 형성이라 한다. 이는 십이연기에 있어서 형성(상카라)이 이에 해당된다. 의도적 형성은 업(kamma)과 동의어이다. 따라서 행위, 의도적 형성, 업은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업이 행위와 형성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으로도 확인 할 수 있다.

 

 

Katame ca bhikkhave sakhārā? Tayome bhikkhave, sakhārā: kāyasakhāro vacīsakhāro cittasakhāro. Ime vuccanti bhikkhave, sakhārā.

 

[세존]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형성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형성, 즉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형성이라고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 전재성님역)

 

 

형성은 빠알리어 상카라의 번역어이다. 상카라에 대하여 부처님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로 형성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신구의 삼업에 대하여 업을 소유하는 자(Kammasakkā)’가 된다.

 

2) 업을 상속하는 자(kammadāyādā)

 

삶을 살아 가면서 수 많은 행위를 한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짓는 행위를 말한다. 이를 신구의 삼업이라 한다. 이렇게 지은 삼업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행위를 하고 나면 그만일까? 내가 상대방에게 화를 내었는데 상대방이 가만 있을까? 무언가 반응이 있을 것이다. 내가 화를 내면 상대방도 화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결과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을 상속하는 자(kammadāyādā)’라 하였다.

 

업의 상속자, 행위의 상속자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거나, 잔혹하고 손에 피를 묻히고 살륙에 전념하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이 없다. 그는 신체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 다니고, 언어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 다니고, 정신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 다닌다.

 

그의 신체적 행위도 굽어 있고, 그의 언어적 행위도 굽어 있고, 그의 정신적 행위도 굽어 있고, 그의 운명도 굽어 있고, 그의 다시 태어남도 굽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의 운명이 굽어 있고 다시 태어남이 굽어 있는 자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어느 하나의 운명, 즉 오로지 괴로움 뿐인 지옥이나 몰래 기어다니는 종류의 축생으로 태어 나는 것이 자명하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몰래 기어 다니는 종류의 축생이라 어떤 것인가? 뱀, 전갈, 지네, 몽구스, 고양이, 쥐, 올빼미를 비롯해서 인간이 보면 몰래 기어다니는 어떠한 종류이든지 그 모든 축생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존재는 존재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그는 행위한 것에 따라 다시 태어나게 되고, 그가 다시 태어나면, 접촉이 이루어진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뭇삶은 행위의 상속자라고 나는 말한다.

 

(Sasappaniya pariyāya sutta-뱀처럼 기어다님에 대한 법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0:216, 전재성님역)

 

 

자연다큐프로를 보면 동물의 세계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약한 것은 강한 것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약한 자가 먹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늘 두리번 거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몰래 행동해야 한다. 몰래 행동하는 것은 강자도 마찬가지이다. 치타가 가젤양을 잡을 때 몰래 엿 보다가 혼신을 다해 잡듯이 강한 것이나 약한 것이나 생존을 위하여 늘 두리번 거린다. 이렇게 두리번 거리고 몰래 하는 것이 축생세계의 특징이다.

 

경에서는 살생 하면 지옥 같은 괴로운 곳이나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에서 이후 전개 되는 경의 내용을 보면 살생을 포함하여 열 가지 악행에 대하여 설명 되어 있다. ,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주지 않는 것을 빼았는 것,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 거짓말을 하는 것, 이간질 하는 것 , 욕지거리 하는 것,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 탐착하는 것, 악의를 품는 것,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  이렇게 열 가지를 말한다. 이를 십악행이라 한다.

 

십악행의 특징은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인간이 해서는 안될 짓이라 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축생들이나 하는 것이 십악행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십악행을 하면 축생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십악행을 하면 축생의 과보를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경에서는 십악행을 하기 때문에 “존재는 존재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A10:216)”라고 하였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로 인하여 윤회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뭇삶은 행위의 상속자(sattā kammadāyādā)”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업의 소유자는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되는 상속자이다. 동시에 새로운 현재의 업에 의해 새롭게 바뀌는 상속자이다. 만일 모든 존재가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하여 결정된다면 이는 숙작인론(숙명론)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숙명론을 부정하였다. 현재 짓는 업에 따라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3) 업을 모태로 하는 자(kammayoni)

 

세 번째로 업을 모태로 하는 자(kammayoni)’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업이라는 하는 것은 조건으로서 마치 씨앗이 적절한 흙과 습기를 만나서 발아해서 싹이 트는 것과 같다.(M135 주석)”라고 하였다. 그리고 SN.III.54를 근거로 들었다.

 

SN.III.54을 찾아 보았다. PTS본에서 상윳따니까야(SN)의 3권(III) 54페이지에 있다는 뜻이다. 찾아 보니 ‘종자의 경(S22:54)’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흙은 의식이 머무는 네 가지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물은 환락과 탐욕으로 볼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다섯 가지 종자들은 의식과 그 자양분으로 볼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이 물질에 접근하면 거기에 머물면서 유지되고 물질을 대상으로 물질을 바탕으로 향락에 의존해서 자라고 성장하고 증대된다.

 

(Bijasutta-종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54,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다섯 가지 종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뿌리, 줄기, 가지, 마디, 싸앗에서 생겨난 종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 종자가 자라기 위해서는  흙과 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종자는 적절한 흙과 습기를 만나야 발아해서 싹이 튼다.

 

경에서는 종자와 의식을 같은 것이라 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은 “물질을 바탕으로 향락에 의존해서 자라고 성장한다”라고 하였다. 또 의식은 물질 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에 접근하여 자라고 성장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업을 모태로 하는 자(kammayoni)’에 대한 주석을 보면 마치 씨앗이 적절한 흙과 습기를 만나서 발아해서 싹이 트는 것과 같다.(M135 주석)”라 하였다. 이는 업은 땅이고 의식은 씨앗이고 갈애는 물기라 설명된다. 업이라는 땅에 의식의 씨앗이 뿌려지면 갈애라는 물기로 새로운 태어남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업을 모태로 하는 자(kammayoni)’라 하였다.

 

4) 업을 친지로 하는 자(kammabandhu)

 

네 번째로 업을 친지로 하는 자(kammabandhu)’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로 생겨난 업은 인과적 생성원리에 따라 윤회하는 동안 수반된다.(M135 주석)”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형제, 친척, 친지들은 모였다가 흩어지지만 업은 기나긴 생사여로의 윤회를 함께 하는 진정한 동반자로서 친지이므로 선업을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법구경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

 

 

사람이 오랫동안 없다가

먼 곳에서 안전하게 돌아 오면,

친족들과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가 돌아오는 것을 반긴다.(Dhp 219)

 

이와 같이, 공덕을 닦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면,

친지들이 돌아온 벗을 맞이하듯,

공덕들이 바로 그를 맞이 한다. (Dhp 220)

 

 

명절이 되면 친지들과 만난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을 보면 반갑다. 그리고 반갑게 맞이 해 준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동창회를 하였을 때 모두 반갑게 맞이해 준다. 업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선업공덕을 쌓으면 죽었을 때 노자돈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에 갔을 때 마치 친족들이 반갑게 맞이 해 주듯이 공덕이 그를 맞이 할 것이라 한다. 이것이 업을 친지로 하는 자(kammabandhu)’에 대한 설명이다.

 

5)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kammapaisaraā)

 

마지막으로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kammapaisaraā)’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육체적으로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의지처로 삼듯, 선한 업을 쌓지 못해 저열한 세계에 태어 났을 때 고통은 심각하므로 진정한 질병의 치료는 자신의 치유력이듯 우리의 진정한 귀의처는 선업에 관해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는다. 그래서 아픈 자에게는 병원이 의지처이다. 마찬가지로 업도 의지처가 될 수 있다. , 선업을 쌓았을 때이다. 악업을 많이 쌓았다면 아무 것에도 의지할 것이 없을 것이다. 물에 빠졌을 때 구해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선업을 많이 쌓아 놓으면 몸이 아플 때 병원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의지처는 자기자신이다. 이는 마치 자연치유력이 있는 것과 같다. 스스로 병이 나아 버리면 병원에 갈 필요도 없다. 선업을 많이 쌓으면 자연치유력이 있어서 스스로 낫듯이 의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kammapaisaraā)’라 하였다.

 

십악행의 열 번째 항

 

부처님은 세간적 정견에 대하여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고,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라 하였다. 출세간적 정견인 사성제가 있음에도 왜 세간적 정견을 강조하였을까? 그것은 십악행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뱀처럼 기어다님에 대한 법문의 경 (A10:216)’에 따르면 부처님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 주지 않는 것을 빼았는 것,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 등 열 가지 악행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십악행은 축생이나 할 짓으로서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선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십악행에서 열 번째에 해당되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이 있다.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갖고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 제사의 공덕도 없다. 공양의 공덕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존재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며 스스로 깨달아 가르치는 올바로 성취한 수행자나 성직자는 세상에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는다.

 

(Sasappaniya pariyāya sutta-뱀처럼 기어다님에 대한 법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0:216, 전재성님역)

 

 

천수경에 십악참회가 있다. 열 가지 참회내용을 보면 아홉 번째 까지는 빠알리니까야와 일치한다. 그러나 열 번째 치암중죄금일참회 (痴暗重罪今日懺悔)’는 초기경전과 다르다. 해석을 보면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은 무거운 죄를 내가 오늘 참회합니다.”로 되어 있다.

 

이런 내용은 빠알리니까야와 다른 것이다. 빠알리니까야에는 열 번째가 잘못된 견해’라고 되어 있으나, 천수경에서는 단지 어리석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자들은 법회나 독송할 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치암중죄금일참회 (痴暗重罪今日懺悔)’라 한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열 번째 항이 잘못된 견해라고 되어 있다.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이 매우 큰 죄라는 것이다.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는 등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는 큰 죄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 당시 유물론자이자 단멸론자이자 허무주의자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모든 것이 없다’라고 부정해 버리는 단멸론자에 있어서 아무리 보시를 해도 공덕이 되지 않고 아무리 선행을 쌓아도 공덕이 되지 않는다. 그 결과 도덕부정론자가 되어 막행막식하게 될 것이다.

 

두리번 거리며 몰래 하는

 

십악행은 신구의 삼업에 대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지은 업에 해당되는 것으로 1)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2)주지 않는 것을 빼았는 것, 3)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언어적으로 지은 업에 해당되는 것이 4) 거짓말을 하는 것, 5)이간질 하는 것 , 6)욕지거리 하는 것, 7)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 이렇게 네가지이다. 또 정신적으로 지은 업에 해당되는 것이 8)탐착하는 것, 9)악의를 품는 것, 10)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 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악행은 경에 따르면 축생들이나 하는 것이라 하였다. 마치 쥐새끼처럼 몰래 두리번 거리면서 하는 행위를 말한다. 만약 인간이 쥐새끼처럼 십악행을 한다면 반드시 지옥이나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반대로 십선행은 축생들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십선행을 하면 인간이나 천상에 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이 정견이라 하였다. 이를 세간적 정견, 또는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지금 비록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어도

 

업자성정견에 따르면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 하였다. 지금의 나의 신체적 조건과 성향은 모두 과거생에 지은 업의 결과라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이렇게 믿으면 숙명론자가 되기 쉽다. 우리의 인생은 미리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라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괴로움에 대해서만 말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회의론자로 몰려 오늘날까지 법이 전승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이 괴로움에 대해서 말한 것은 소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래서 네 가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설하였다. 그래서 담마의 바퀴가 오늘날 까지 굴러 온 것이다.

 

만일 부처님이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끝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부처님은 틀림 없이 숙명론자로 몰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이 오늘날 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업으로 인한 차별도 이야기 하였지만  업에 의하여 새롭게 바뀌어 갈 수 있음을 설하였다. 그것이 바로 십악행과 십선행이다. 따라서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열 가지 행위의 과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지은 업에 의해 결정된 상속자임과 동시에 현재 짓고 있는 업에 의해 새롭게 바뀌어 가는 상속자가 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비록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업을 짓는다면 충분히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업장소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업장소멸이라는 말이 있다. 업으로 인한 장애를 소멸을 말한다. 그렇다면 과거에 지은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은 없을까?

 

업장소멸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또 어떤 이는 조상천도재를 지내 주어 업장을 소멸하고자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업장소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Katamo ca bhikkhave kammanirodho:

yo kho bhikkhave kāyakammavacīkammamanokammassa

nirodhā vimutti phusati.

Aya vuccati bhikkhave, kammanirodho.

 

수행승들이여. 업의 소멸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신체의 행위나 언어의 행위나 정신의 행위가 소멸하여 해탈을 경험하면, 수행승들이여,

그것을 업의 소멸이라 한다.

 

(Kammasutta-업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4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업장소멸(kammanirodha)’에 대하여 해탈(vimutti)을 경험하는 것이라 하였다.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였을 때 가능한 것이라 한다. 업장소멸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업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업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한다.

 

(Kammasutta-업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46, 전재성님역)

 

 

 

이는 다름 아닌 팔정도의 실천이다. 업장소멸은 오로지 팔정도 수행만으로 가능함을 말한다. 

 

 

 

2013-08-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