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시대의 사명을 다한 반야심경, 사성제의 초전법륜경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19. 11:29

 

 

시대의 사명을 다한 반야심경, 사성제의 초전법륜경으로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언젠가 반야심경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재가법사로부터 반야심경 강의를 들었는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제목을 해제(解題)하다 시간을 다 보냈다. 왜냐하면 제목에 경의 대강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면 주문이자 후렴구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낭송할 때쯤 되면 감격이 벅차 오를 것이라 하였다.

 

대승불교의 공사상에 바탕을 둔 반야심경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부정과 없음을 뜻하는 불()와 무()자의 행진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이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어떤 진리도 공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공법유(我空法有)와 아공법공(我空法空)

 

반야심경은 부파불교시대의 산물이다. 부파불교시대 당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법유(法有)사상을 부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기본법이 ‘75이 있다고 하였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82법과 유사한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일체법이 유()하다” 고 보는 부파이다. 특히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하는 75법은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게하는 필름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75법은 고유자성이 있고 고립된 실체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에 실체가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아공법유(我空法有)’가 된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어긋난다. 부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아공법유의 설일체유부사상은 대승불교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부파불교당시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였던 설일체유부의 아공법유 사상에 대하여 이제 도약하려는 대승불교에서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설일체유부의 75법에 대하여 “고립된 실체성은 없다(무자성)”주장하고, 이를 ‘연기=관계성=무자성=공’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아공법공(我空法空)사상이다. 아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는 것이다. 아가 공하다는 것은 조견오온개공으로 설명될 수 있고, 법이 공하다는 것은 무고집멸도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모두 공의 입장에서 부정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부파불교시대가 요청한 산물

 

반야심경이 출현한 것은 시대가 요청한 것이다. 일체법에 실체가 있다는 설일체유부의 아공법유사상을 깨기 위하여 아공법공이라는 공사상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부처님의 사정제, 십이연기,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 근본가르침이 모두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공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공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금강경에서 말하는 뗏목의 여벌유자법상응사하황비법(如筏喩者法尙應捨何況非法)”에서 와 같이 법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하였는데 진리 그 자체를 버릴 수도 있다.  

 

만일 뗏목의 비유를 들어 법도 공한 것이라 하여 일체법이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면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도인이라 무애행을 하고 막행막식으로 빠질 수 있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등 대승경전은 부파불교시대의 산물이다. 부파불교시대 불교가 왜곡되었을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공의 입장에서 일체법에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공법공사상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 십이연기 등의 근본 가르침은 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설한 진리는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 하기 전에 근본법칙으로 있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야부 경전의 공사상은 부파불교시대가 요청한 그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반야심경을 대체할 수 있는 경전은?

 

한국불교에서 반야심경의 위치는 확고부동하다. 대승경전의 정수라 하여 각종 법회시 독송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부파불교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에서 조석으로 독송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공의 입장에서 모조리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대의 역할을 다한 반야심경을 지금까지 독송하고 있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렇다면 반야심경을 대체할 수 있는 경전은 무엇일까? 불자들이 아침 저녁 예불시간에 독송하고 각종 법회시간에 독송하고, 또 성지순례에 갔었을 때 독송할 만한 경은 없을까?

 

지금은 재가불자시대

 

지금은 초기불교시대이다.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로 초기불교가 대세를 형성해 갈 것이다. 이는 한국적 현실에서 부처님의 원음을 갈망하는 불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기복만 남아 있는 한국불교에서 뜻있는 불자들은 설자리가 없다. 건강, 학업, 사업, 치유 등 소원성취만을 바라는 기복신앙만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워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불자들은 갈수록 고학력이 되고 또 갈수록 깨어 가는데 “열심히 기도 하세요”라고 말하는 스님들의 주문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시대가 도래함과 함께 빠일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것도 재가불자가 번역한 것이다.

 

재가불자가 빠알리니까야를 최초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한국불교에서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제까지 불교역사에 있어서 재가불자가 주도적으로 끌어 간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가불자가 주도한 것은 번역 뿐만 아니다. 90년대부터 수 많은 재가불자들이 남방 테라와다 불교권에 가서 수행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귀국하여 수행지도를 하고 있다. 이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법문을 하는 것도 수행지도를 하는 것도 스님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수행지도는 상당수 재가법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스님들이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승가

 

한국의 승가교육에 대하여 서당식교육이라 한다. 한문을 익혀가며 한문으로 된 대승경전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법문에서도 볼 수 있다. 스님들이 법문할 때 한문을 읽어 가며 뜻풀이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방법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님들은 깊은 산속 선방에서 일년에 두 차례식 안거를 한다. 이때 수행하는 방법이 간화선이다.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除毒)하듯이, 의심이라는 작은 번뇌로 더 큰 번뇌를 제거 하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수행방법에 대하여 보통불자들이 접근하기 힘들다. 오로지 출가한 수행자들만 가능한 출가수행자 전용 수행방법이라고 인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재가불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108배나 신묘장구대다라니108독 철야정진 기도회 같은 것이다. 가장 수승하고 업장소멸의 지름길이라는 참선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절인연이 되어서 일까 이제 보통불자들도 수행을 하게 되었다. 그런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간화선이 아니라 부처님당시의 수행법이라 일컫는 위빠사나이다. 이는 90년대부터 재가불자들이 미얀마 등지에서 배워온 수행법이다.

 

재가불자들의 수준은 자꾸 높아지는데

 

요즘은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이다. 그리고 교통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경전과 부처님의 수행법이 도입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런 흐름이다. 더구나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들이 주도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출가자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재가자에 의하여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고 재가법사에 의하여 수행지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한문경전에 의존하고 중국에서 발생된 수행법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재가불자들의 수준은 자꾸 높아지는데 서당식 한문 뜻풀이나 한문게송을 읊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또 본래부처라 하여 자신이 본래불이라는 것을 알자고 하는 것, 그리고 본래불을 아는 과정이 수행이라고 하는 것 역시 받아 들이기 힘들다. 이 모두가 초기불교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소프트웨어의 비유로도 설명될 수 있다.

 

소프트웨어의 특징은?

 

요즘 누구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전문가에서부터 일반 네티즌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그런데 소프트웨어는 특징이 있다. 버전이 매번 바뀌는 것이다. 도스 시절에는 버전 1.0 등으로 일련번호를 매겨 출시되었으나 요즘의 경우 다르다. 연도로 표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5버전이니 2007버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소프트웨어는 해마다 업그레이드 된다. 그런데 새로운 버전이 출시되면 이전 버전은 더 이상 찾지 않게 된다. 도스에서 윈도우로 바뀌었을 때 더 이상 도스 버전을 찾지 않는 원리와 같다. 불교도 마찬가지라 본다.

 

대승불교가 출현하였을 때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온 것과 같았다. 설일체유부의 아는 공하지만 일체법은 항상 있다아공법유에 대항하여, 대승불교에서는 아도 공하고 일체법도 공하다아공법공을 내 놓았기 때문이다. 설일체유부가 구 버전이라면 대승은 신버전과도 같다. 그러나 오리지널만 못할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 초전법륜경인가

 

부처님이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다음 처음 설법한 것이 초전법륜경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이 경에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설명된다. 사성제를 각각 세 번씩 굴려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띠빠리왓땅 드와다사까랑(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이라 한다. 한자어로 표시하면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 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사성제를 설하였을 때 가장 먼저 이해한 사람이 꼰단냐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이해한 꼰단냐에 대하여 경에서는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삽반땅 니로다담만띠(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 하였다. 이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번역된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dhammacakkhu, 法眼)이 생긴 꼰단냐에게 순간적으로 떠 오른 생각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수다원의 오도송’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기 때문이다.

 

꼰단냐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라 볼 수 있다.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에서 조건 발생으로 생겨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성제 역시 2지 연기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연기법을 설명한 것이다. 2지 연기가 좀더 확대 된 것이 8지, 9지, 10지, 12지 연기로 설명된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그대로 깨달은 꼰단냐의 외침에서 일체법에 실체가 있다거나 일체법이 공하다는 말은 찾아 볼 수 없다. 꼰단냐가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기 때문에 ‘일체법은 조건발생하여 조건소멸하는 것이다’으로 설명될 뿐이다. 그 어디에도 ‘일체법이 본래 있는 것이 있다라든가 ‘일체법이 본래 없는 것이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오로지 연기법이기 때문에 ‘법유’이니 ‘법공’이니 하는 후대의 사상은 들어 맞지 않는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터넷시대와 함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가 등장하였다. 내용을 보니 대승의 사상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야말로 깜짝놀랄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내용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라고 하지만 빠알리니까야에 실린 부처님의 말씀은 이를 초월한다. 앞으로 더욱더 과학이 발달하여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S12:20)”라 하였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부처의 출현과 관계 없이 원리로서 확립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더라도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은 항상 새롭다는 것을 말한다. 정법이 존재하는 한 어느 누가 보아도 감탄을 하게끔 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런 진리를 접하였을 때 마치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가진 것 같다.

 

초전법륜경의 클라이막스

 

새로운 버전이 나오면 이전 버전은 잊혀지게 된다. 윈도우프로그램이 깔리면 아무도 도스버전 프로그램을 찾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초기불교가 윈도우버전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매년 새로운 버전의 불교가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무상정득정각이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설한 법사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부분에 감격한다고 하였다. 반야심경의 공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였을 때 감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의 초전법륜경에도 감격할 수 있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였을 때이다.

 

 

akuppā me                  아꿉빠 메

cetovimutti,               쩨또위뭇띠

ayamantimā jāti            아야만띠마 자띠

natthidāni punabbhavoti    낫티다니 뿌납바워띠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Buddha

 

 

 

이를 ‘아라한 선언’이라 한다. 수행을 완성하여 더 이상 번뇌가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 윤회 하지 않게 되었음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선언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아라한 선언은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보다 더 감격적이다. 이 주문은 번역자마다 뜻이 다르다. 반야심경의 주문에 대하여 어떤 이는 가신 분이여(gate), 가신 분이여(gate), 피안에 가신 분이여(pāragate),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여(pārasagate), 깨달음이여(bodhi), 행운이 있으라(svāhā)라고 번역한다. 또 어떤 이는 “건너세! 건너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 저 언덕으로 온전히 건너가세! 깨달음을 이루세”라고 번역한다.

 

반야심경의 주문을 보면 공통적으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에서는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라고 선언하였다. 바로 이점이 반야심경과 다른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고득락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초기불교에서는 윤회의 종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한결 같이 이와 같은 윤회의 종식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이는 아라한송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라한송에 대한 감동은 시공을 초월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 후대일지라도 어느 누가 보아도 감동할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내려 놓을 때

 

초전법륜경을 매일 암송하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시간이 날 때 마음으로 암송한다. 그럴 때마 늘 감동을 받는다. 그런 감동은 반야심경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제 반야심경을 내려 놓아야 한다. 부파불교시대에 시대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반야심경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공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반야심경을 조석으로 독송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이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독송용으로 가장 바람직한 경이 초전법륜경이라 본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성제에 대하여 정의 하고 있다. 따라서 불자라면 당연히 외우고 독송해야 한다. 과연 반야심경 대신에 초전법륜경을 독송하는 시대는 올 것인가?

 

 

 

 

2013-08-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