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어떻게 실체성이 부여 되는가? 왜곡된 사유 만냐띠 6단계
유위법과 무위법
금강경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게송이 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다. 이때 유위법(有爲法)이라는 말이 나온다. 유위법 이란 무엇일까?
유위법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어진 것 등으로 설명된다. 대승에서는 이를 좀 더 확장하여 ‘현상의 세계’ 또는 ‘현상계’라 한다.
유위법이 있다면 ‘무위법’도 있을 것이다. 무위법은 유위법과는 반대로 ‘조작 되지 않은 세계’, ‘인연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이 또한 대승의 이분법적 구분 방법이다.
대승논자들은 유위법과 무위법을 말하면서 ‘현상계’와 ‘절대계’를 설명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현상계이고 현상계 넘어 절대의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상카따(saṅkhata)와 아상카따(asaṅkhata)
부처님의 가르침에 ‘유위’와 ‘무위’라는 말은 있어도 유위법과 무위법이라는 이분법적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형성되어진 것이라는 의미의 ‘상카따 (saṅkhata)’ 와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의 ‘아상카따(asaṅkhata) ‘이렇게 두 가지 용어는 사용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조건과 관련이 있다.
일체법은 스스로 생겨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여 창조주가 창조한 것도 아니다. 조건 발생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담마이다. 따라서 조건 발생되어진 것이 상카따(유위)이고, 조건지어지 않은 것을 아상카따(무위)라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열반을 ‘무위’라 한다. 열반은 조건지어진 모든 것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명쾌한 초기불교의 가르침
부처님은 무위로 이끄는 길을 설하였다. 무위로 이끄는 길은 빠알리 니까야에 수 없이 제시 되어 있다. 아상카따상윳따(S43)에 따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형구가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yo bhikkhave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idaṃ vuccati bhikkhave asaṅkhataṃ.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고 한다.
(Kāyagatāsatisutta-신체에 대한 새김의 경, 상윳따니까야 S43: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라가(rāga, 탐), 도사(dosa, 진), 모하(moha, 치)가 소멸하면 바로 그 때가 ‘무위(asaṅkhata)’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그리고 수행의 완성이다. 또 깨달음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명쾌하다.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한 이유
부처님의 가르침에 유위와 무위는 있어도 현상계와 절대계와 같은 이분법적인 가르침은 없다. 따라서 현상을 떠나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이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 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부처님이 답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이 시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케마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케마]
대왕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물질로 여래를 시설하여 나타내더라도, 여래의 그 물질은 이미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 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치 여래는 큰 바다와 같아 물질로 측량할 수가 없이 깊고, 한량없어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 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든가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Khemāsutta-케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44:1, 전재성님역)
케마는 부처님의 여제자 가운데 이라한의 지위에 오른 수행녀이다. 케마는 원래 빔비사라왕의 애첩이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비구니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지혜를 지닌 자 가운데 제일’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케마는 부처님의 사후에 대하여 물질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깊고 깊은 큰바다와 같아서 물질로서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주석에 따르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 미래에 물질이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미세한 물질이나 비물질의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는 이와 같이 물질일 것이다.’라고 말하더라도 지멸되었으므로 물질의 시설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물질 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정신 등 오온이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종려나무의 그루터기가 뽑히면 더 이상 존재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열반이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뿌리가 뽑히고 이미 불이 꺼진 상태로 묘사 되는 열반에 대하여 여래가 사후에 존재하느니 존재하지 않느니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희론’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법화경부처님의 놀라운 선언
그럼에도 대승에서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하여 놀라운 선언을 한다. 법화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희들은 여래의 비밀과 신통력에 대하여 자세히 들으라. 일체 세간의 하늘과 인간 그리고 아수라들은 모두 석가모니불은 석씨 왕성을 나와 가야성 가까운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선남자들아, 내가 성불한 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 만억 나유타 겁이니라 ……(중략)……
그로부터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설법하여 교화했고, 또 다른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국토에서 중생을 인도하여 이익되게 하느니라……(중략)……
이와 같이 내가 성불한 지는 참으로 오랜 옛날부터였으며 수명이 한량없는 아승지겁이므로 이 세상에 항상 머물러 멸하는 법이 없느니라……(중략)…… 나는 그대들에게 내가 곧 멸도(滅度)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참 멸도가 아니며, 여래는 이런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법화경, 제16 여래수량품, 빠알리어 경전과 대승경전의 사상적 차이 / 박경준 불교평론 )
이는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말한 것이다. 이름 하여 ‘법화경부처님’이라 부른다.
이글은 불교평론에 기고된 동국대 박경준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 것이다. 논문에서 박경준 교수는 “법화경에서는 이러한 인간 붓다의 정체성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폭로된다”라고 하였다. 그 비밀은 무엇일까?
법화경부처님은 보드가야에서 처음 붓다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겁전에 깨달음을 성취한 본래부처(본래불)이라 하였다. 다만 중생들에게 불지견을 개(開)·시(示)·오(悟)·입(入)하기 위하여 태자의 몸으로 화현 하였고, 열반에 들지도 않았지만 일부러 열반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여래의 수명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화경에서 볼 수 있는 법화경부처님의 놀라운 선언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영원히 사는 것으로 묘사 되고 있다. 이는 빠알리니까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말씀과 다른 것이다. 케마경에서 종려나무 그루터기의 예를 들어 가며 물질, 느낌 등 오온이 소멸한 부처님의 사후에 대하여 설명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지만, 법화경에서는 정 반대로 부처님의 수명은 영원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법화경에서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유위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법화경에서는 이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다. 소위 현상계와 절대계(이법계)이다. 그래서 현상계 너머에 있는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상계 너머에 무위의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희론이다. 그렇다면 희론의 바탕이 되는 유위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서 업의 경(Kammasutta, S35:146)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Cakkhuṃ bhikkhave
purāṇaṃ kamm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vedanīyaṃ daṭṭhabbaṃ
[세존]
수행승들이여, 지나간 업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유위적으로 형성되고 유위적으로 의도 된 것으로
과거의 업이라고 알아야 하고 또한 보아야 한다.
(Kammasutta-업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46,전재성님역)
각주에 따르면, “유위적 조작은 사실을 괴롭히고 허구를 통제하는 유위법적인 형성을 통해서 밝혀 지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를 시각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는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이 일상에서 모두 활용된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보았을 때 단지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봄으로 인하여 유위적 조작이 형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유위적으로 형성되고 유위적으로 의도 된 것”이라 하였다. 바로 이런 것을 업(業)이라 한다.
업이 발생하면 그 업의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이를 업보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세생생 윤회하게 된다. 따라서 잘 보고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붓다고사에 따르면 시각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업’이라 하였다. 이런 업의 또 다른 이름은 ‘형성’이다. 이를 빠알리로 ‘상카라(saṅkhara)’라 한다.
상카라에 대하여 유위라고 번역 된다. 그래서 업, 행위, 유위, 형성 이라는 말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모두 유위적 조작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성(saṅkhara)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생각한다(maññati)”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유위적 조작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왜 ‘만냐띠(생각한다)’가 문제가 되는가? 이에 대하여 ‘업의 경(35:146)’ 각주에서는 맛지마니까야의 ‘근본 법문의 경(M1)’을 예로 들어 생각함으로 인하여 어떻게 자아가 형성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근본 법문의 경(M1)에서 땅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paṭhaviṃ paṭhavito5 sañjānāti.
Paṭhaviṃ paṭhavito saññatvā paṭhaviṃ maññati paṭhaviyā maññati paṭhavito maññati paṭhaviṃ me'ti maññati. Paṭhaviṃ abhinandati. Taṃ kissa hetu? Apariññātaṃ tassā'ti vadām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의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인정하지 않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고, 참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
(Mūlapariyāyasutta-근본법문의 경, 맛지마니까야 M1, 전재성님역)
근본법문의 경은 부처님이 자발적으로 설한 것이라 한다. 특수한 사건의 발생 하였을 때 자발적 설법이 이루어졌는데, 각주에 따르면 학인들이 배우는 과정에서 자만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왜곡된 사유, 만냐띠(maññati)
경에서 부처님은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라 하였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생각을 하며 산다. 그래서 늘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또 다른 생각이 발생된다. 그래서 경에서 “~고 생각하며 (maññati)”라 하였다.
생각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만냐띠(maññati)’이다. 만냐띠에 대한 각주를 보면 ‘왜곡된 사유’라 설명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허황된 생각(공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발전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생각의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 것이다. 오로지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구조물이다. 이를 ‘망상’이라고 하고, ‘희론’이라고도 한다. 모두 유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의 조작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맛지마니까의 ‘근본법문의 경(M1)’이다. 경에서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라고 부처님의 법문이 시작 되고 있다.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
‘업의 경(35:146)’각주에는‘근본법문의 경(M1)’에서 “땅에서 땅으로..”로 시작 되는 절에 대한 각주가 있다. 어떻게 생각이 유위적으로 조작되는지에 대한 과정이다.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도 유사한 설명이 되어 있지만 ‘업의 경(35:146)’에 실려 있는 각주를 참고 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
단계 |
구 분 |
설 명 |
격 |
비 고 |
1 |
땅을 땅으로 여기고 |
일반사람은 X를 X로 지각한다. |
대격 |
있는 그대로 지각 |
2 |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
그는 X를 X로 지각하면서 X를 생각한다. |
|
지각의 사유화 |
3 |
땅 가운데 생각하고 |
그는 X가운데 생각한다. |
처격 |
‘나’처럼 여김 |
4 |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
그는 X로부터 생각한다. |
탈격 |
‘나’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 |
5 |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
그는 ‘X는 나의 것(또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소유격 |
‘나의 소유’란 자아관념의 기초가 형성 |
6 |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 |
그는 X를 즐거워 한다. |
|
‘나의 소유’를 향수함 |
이것이 일반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각하는 단계이다. 보고, 듣는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라 생각이 일어나면서 생각이 왜곡되는 과정이다.
각 단계별 설명을 보면
여섯 단계를 보면 제대로 보지 못하였을 때, 제대로 듣지 못하였을 때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왜곡된 사유의 종착지는 다름 아닌 ‘망상’이고 ‘희론’이다. 각 단계별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에서는 단순히 즉각적인 체험으로써의 지각에 대한 알아챔을 지시한다. 지각은 다른 것이 아닌 X에 대한 지각으로만 인식된다. 이 때 사물은 있는 그대로 지각된다. 문제는 2단계 부터이다.
2단계에서 6단계 까지는 지각이 주관속에 존재하게 되는 지각의 사유화 현상의 기본 구조를 보여 준다.
2단계는 즉각적인 체험속에 열려져 있는 대상을 주관속으로 가져 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때 ‘생각한다(maññati)’는 말은 X를 지각하면서 주관으로써의 아만(mana)과 그 아만을 관련된 대상을 개념적으로 사유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3단계에서는 X가 아만을 부여 받았으며 이러한 부여로 아만은 단순히 개념으로써가 아니라, 구체적인 X와 관련된 포괄적인 주체로써의 ‘나’처럼 여긴다.
4단계에서는 이 ‘나’가 X로부터 분리된다. 이 단계에서는 ‘나’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 되는 것을 의미한다.
5단계에서는 주객의 분리가 명백해졌으며, 분리된 ‘나’와 X사이의 명백한 관계는 ‘X는 나의 것(또는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소유’란 자아관념의 기초가 형성된다.
6단계에서는 ‘나의 소유’인 X를 향수하는 단계로, 이것을 토대로 더욱 존속하려는 ‘존재에의 갈애(유애)’가 성립하면서 ‘나의 존재’가 성립하고 ‘나의 존재’를 토대로 모든 체험에서 분리된 영원한 ‘나의 자아’란 관념이 형성된다.
자아가 있다면 본질적으로 불변의 실체라는 속성을 갖고 있으므로 ‘나의 소유’란 사물의 실체성의 근거가 되며, ‘나의 존재’란 그러한 나의 소유를 토대로 성립하는 것으로 행위의 주체가 되며, ‘나의 자아’란 그러한 나의 존재를 토대로 성립하는 것으로 인식주체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해서 유위적 세계가 성립한다.
(업의 경(35:146) 각주, 전재성박사)
망상에 대한 단계적 설명을 보면 필연적으로 ‘존재론’으로 귀결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유행자 왓차곳따의 여래 사후 존재 여부 네 가지와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네 가지를 포함하여 여덟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나의 몸, 나의 자아, 나의 것’이라고 존재론적 기반을 가진 질문자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보았자 받아 들여 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왓차곳따의 여덟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무아를 설하신다. “시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기고(S44:7)” 라는 말씀을 하신다. 존재론적 사고를 가진 자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여덟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무아’를 설명해 주는 것이 급선무임을 알 수 있다.
자아감각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만냐띠
만냐띠는 왜곡된 사유이다. 대상자체에서 유래하지 않는 그 대상에 대한 특징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를 말한다. 이런 인식론적인 왜곡은 순간적인 지각의 경험가운데에서도 자아 중심적인 관점이 침투 함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갈애, 자만, 견해에 지배당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각주에 따르면, 갈애는 이를 테면, 내적인 땅의 요소인 머리카락 등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고, 자만은 그 욕망과 탐욕의 성취함과 성취하지 못함에 따라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하다.’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견해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범부)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를 만냐띠라 한다.
만냐띠가 실체화 되는 경우
만냐띠 6단계를 보면 지각된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관계아래서 상상된 자아감각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생각에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 예가 ‘근본법문의 경(M1)’에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땅 뿐만 아니라 물, 불, 바람, 존재, 신들 등 수 많은 대상이 등장한다. 그 중에 창조주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그는 창조주를 창조주으로 여기고 창조주를 창조주으로 여기고 나서, 창조주를 생각하고 창조주 가운데 생각하고 창조주로부터 생각하며 ‘창조주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창조주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
(Mūlapariyāyasutta-근본법문의 경, 맛지마니까야 M1, 전재성님역)
정형구에서 땅 대신 창조주를 대입한 것이다. 6단계의 법칙을 적용하면 창조주는 존재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향수하기 때문이다.
이를 참나에 대입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그는 참나를 참나로 여기고
참나를 참나로 여기고 나서, 참나를 생각하고
참나 가운데 생각하고
참나로부터 생각하며
‘참나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참나에 대해 즐거워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본래 우리가 부처라 한다. 그래서 모두 불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본래 나가 부처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굳게 믿고(大信心),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증명하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데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大疑心)” 하며 의정을 키워나가고, 행주좌와어묵동정 “오직 할 뿐(Only doing it, 大憤心)”하며 용맹정진하다 보면 본래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대승에서 말하는 본래불은 진여, 주인공, 본마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운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참나’라는 말을 쓴다. 그런 참나는 나를 찾는 수행의 종착지이다. 그런데 선사들은 참나를 찾는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참나에 실체성을 부여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참나는 만냐띠의 과정에서 나타난 마음의 실체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잘 배운 부처님의 제자는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범부)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봄으로 인하여 왜곡된 사유가 발생된다. 그 결과 왜곡된 사유에 대하여 자기 것이라 여기고 여기에 실체성을 부여 한다. 그렇다면 잘 배운 고귀한 부처님의 제자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거룩한 님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곧바로 알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곧바로 알고 나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하느님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느님에 대해 즐기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벗어 났기 때문이다.
(Mūlapariyāyasutta-근본법문의 경, 맛지마니까야 M1, 전재성님역)
여기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말한다.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를 발한다. 고대 인도에서 브라흐마는 창조주이자 절대신이다. 오늘날의 유일신교의 유일신과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번역자는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번뇌 다한 아라한은 업을 짓지 않는다. 보아도 그저 볼 뿐이고, 들어도 그저 들을 뿐 더 이상 갈애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은 대상을 곧바로 알 뿐만 아니라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 하였으므로 하느님에 대하여 영원한 실체라 생각하지 않는다. 또 그것에 환락을 즐기지도 않는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고귀한 제자들이 대상을 보는 태도이다.
영원주의를 표방하는 법화경
이처럼 부처님의 제자들은 존재론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망상하거나 희론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승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반대로 해석하였다. 부처님이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세상은 영원한가?”등의 여덟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무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승론자들은 형이상학적 개념에 대하여 실체성을 부여 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법화경을 들 수 있다.
법화경부처님은 열반에 들지도 않았지만 일부로 열반에 든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하였다. 그런 법화경부처님의 수명은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히 법계에 살아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법화경부처님의 말씀은 영원주의자의 견해라 볼 수 있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고 보면 영원주의자이고,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보면 허무주의자(단멸론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법화경은 영원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잘못된 견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영원주의와 육사외도의 허무주의적 견해를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대승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경책하는 듯한 문구
대승불교의 열반경에서 따르면 열반에 대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해석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이다. 무상, 고, 무아를 180도 거꾸로 해석하여 상, 락, 아로 보는 것과 같다.
열반에 대하여 상락아정으로 보는 것은 열반에 대하여 실체성을 부여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그토록 우려 하던 영원주의적 견해, 즉 상견이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의 출현 이전에 부처님은 ‘근본 법문의 경(M1)’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대승의 상락아정을 예측하며 경책하는 듯한 문구를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여래는 열반을 열반으로 곧바로 알고 열반을 열반으로 곧바로 알고 나서, 열반을 생각하지 않고 열반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열반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에 대해 즐기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즐김은 괴로움의 뿌리이다.’라고 곧바로 알고 ‘존재에서 태어남이 생겨나고 뭇 삶의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알아서, 마침내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여래는 모든 갈애를 부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버려버리고 보내버림으로써,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
(Mūlapariyāyasutta-근본법문의 경, 맛지마니까야 M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열반을 열반으로 곧바로 알면 열반에 대하여 즐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왜곡된 사유가 발생할 수 없고 망상이나 희론이 생길 수 없음을 말한다.
열반에 대하여 상락아정으로 본다면 ‘희론’이다. 왜곡된 사유에 실체성을 부여 하였기 때문에 열반에 대하여 항상 있는 것이고, 즐거운 것이고, 참나이고, 깨끗한 것이라는 전도된 인식이 생겨남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如實智見)
초전법륜경에 “야타부땅 냐냐닷사낭(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이라는 말이 있다. 야따부따(yathābhūta)는 ‘있는 그대로’의 뜻이고, 냐나는 ‘앎’으로 닷사나(dassana)는 ‘봄’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야타부땅 냐냐닷사낭 은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으로 번역된다. 이를 한자어로 ‘여실지견(如實智見)’이라 한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에 표현 되어 있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이다. 땅을 땅으로 보면 되는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가 되면 생각이 왜곡 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왜곡이 여섯 단계로 설명되어 있다.
사유의 왜곡에 대한 종착지는 생각에 대하여 실체성을 부여 하는 것이다. 토끼의 뿔, 거북의 털, 개의 뿔 같은 것이다. 그래서 “땅을 땅으로 여기고”에서 그쳐야 한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如實智見) ’이다.
2013-08-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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