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범부의 죽음과 아라한의 죽음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25. 16:02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범부의 죽음과 아라한의 죽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한 말이다. 이 말에 대한 고주(古註)의 해석에 따르면  “아침에 온 세상에 도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의 극심한 혼란상에 대한 것이다. 인륜이 무너진 시대에 인간의 올바른 도가 확립되기를 바래서 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후대 남송의 주희는 신주(新註)에서 아침에 도(사물의 당연한 이치)를 들으면 이로서 수양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므로, 그 날 저녁에는 죽어도 가()하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개인의 도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되는 순간 죽어도 좋다라고 설명될 수 있다.

 

항상 죽을까 봐 겁내며

 

누구나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바란다. 동시에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오래 살면서도 동시에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바램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과 몇 십년 전의 회갑잔치의 사진을 보면()’()’이라는 문구가 유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수와 복이 보장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지은 업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업이 있기 때문에 그 업의 과보로 인하여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숫따니빠따에서도 “인간은 죽을까봐 항상 겁낸다 (Sn.576) ” 라고 하였다 .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오늘 멀쩡할지라도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M131)”라 하였다.  인간의 앞날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일이 올 것이라고 믿지만 오늘밤을 자고 나면 진짜 내일이 올지 아니면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 다는 것이다.

 

죽음이 어서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모두 느끼는 공포이다. 그래서 아이들도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죽음이 어서 오기를 바라는 듯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일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Nābhinandāmi maraa

 nābhinandāmi jīvita,
Kāla
ca paikakhāmi

nibbisa bhatako yathā.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Thag.606)

 

(아라한의 인생관,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patticca-samuppada에서)

 

 

테라가타에 있는 게송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patticca-samuppada)에서는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번뇌다한 아라한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이라 큰 의미가 없다. 또 삶 또한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삶도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단지 죽을 때가 되면 죽음을 받아 들이겠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시간을 기다릴 뿐이네

 

이 게송에 대한 타닛사로빅쿠(Thanissaro Bhikkhu)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I don't delight in death,

don't delight in living.

I await my time

             like a worker his wage.

 

(Thag.606, Thanissaro Bhikkhu)

 

 

이를 우리말로 옮겨 번역해 보았다.

 

 

나는 죽음도 즐거워 하지 않고

삶도 즐거워 하지 않네.

노동자가 월금을 기다리듯이

나는 나의 시간을 기다릴 뿐이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과 차이가 나는 것은 마지막 문구이다. 마하시사야도는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라고 하여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묘사 되어 있으나, 타닛사로 빅쿠는 I await my time”이라 하여 나는 나의 시간을 기다릴 뿐이네.”라고 하였다. 그 나의 시간이 죽는 순간을 말한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Kāla ca paikakhāmi’이다.

 

잘 훈련된 자(sudanta)’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의 ‘Kāla ca paikakhāmi’가 들어간 게송을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쑤시마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존]

Paṇḍitoti samaññāto

sāriputto akodhano,
Appiccho sorato danto

kāla kakhati sudanto.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잘 훈련된 자처럼 때를 기다리는 님,

싸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

 

(수시마경-Susīmasutta, 상윳따니까야 S2:29, 전재성님역)

 

 

‘kāla kakhati’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때를 기다리는으로 번역하였다. ‘kāla kakhati sudanto’에 대한 각주를 보면 번뇌를 끊은 자(kaāsava)는 여러 시간에 열반에 들게 되므로, 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기다리듯이 열반의 때를 기다린다.(Srp.I.126)”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번뇌 다한 아라한은 아무 때나 열반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또 항상 깨어 있음을 말한다. 이는 잘 훈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도 잘 훈련된 자(sudanta)’라 하였다. 사리뿟따는 잘 훈련된 자이므로 항상 사띠와 알아차림을 유지 하고 있고 원하기만 하면 아무 때나 열반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평소처럼 사띠와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열반에 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이 이어지는 게송에 보인다.

 

테라가타 게송 606에 이어 게송607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타닛사로빅쿠의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Nābhinandāmi maraa

nābhinandāmi jīnita,
Kāla
ca paikakhāmi

sampajāno patissato

 

I don't delight in death,

don't delight in living.

I await my time

             mindful, alert.

 

(Thag.606, Thanissaro Bhikkhu)

 

 

이를 번역해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다.

 

 

나는 죽음도 즐거워 하지 않고

삶도 즐거워 하지 않네.

주의 깊고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나의 시간을 기다리네.

 

 

테라가타 게송606에서는 월급생활자가 월급을 기다리는 것처럼 죽음을 비유하였으나, 게송607에서는 죽음을 맞이 하는 태도에 대하여 노래 하였다. 그것은 사띠와 알아차림(sampajāno patissato)’을 유지하며 죽음을 맞는 것이다. 일상에서 늘 사띠와 알아차림을 유지하듯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깊고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sampajāno patissato)”으로 죽음을 맞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알아차리며 죽어야 할까?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140)’에서

 

맛지마니까야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140)’에 따르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그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거기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그는 괴로운 느낌을 느껴도, 거기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껴도, 거기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나는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나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나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몸이 파괴되어 생명이 다한 뒤에 바로 여기서 모든 것은 더 이상 즐겁게 느껴지지 않고 식어버릴 것이다.’고 분명히 안다.

 

이를테면 수행승이여, 기름을 조건으로 심지를 조건으로 등불이 타오르고 기름이나 심지가 닳아 없어지면, 더 이상의 공급이 없으므로 자양분이 없어 꺼지는 것과 같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나는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나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몸이 파괴되어 생명이 다한 뒤에 바로 여기서 모든 것은 더 이상 즐겁게 느껴지지 않고 식어 버릴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Dhātuvibhaga sutta-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0,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뿌꾸사띠에게 법문한 내용이다. 뿌꾸사띠가 부처님을 만나기 위하여 찾아 가던 중에 움막에서 만나 법문을 들은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뿌꾸사띠는 딱까실라의 왕이었는데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과 친교를 맺었다. 왕과 왕사이의 친교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후원자이기도 한 마가다의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뿌꾸사띠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자 뿌꾸사띠는 환희하며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을 만나 뵙기 위하여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길을 떠난 것이다. 

 

이를 천안통으로 알게 된 부처님은 뿌꾸사띠가 길()과 경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를 만나기 위해 사왓티에서 1000키로미터 떨어진 라가가하로 길을 떠났다.

 

마침내 라자가하 근교의 옹기장이의 움막에서 유행자의 모습을 한 부처님이 역시 유행자의 모습을 한 뿌꾸사띠를 만났다. 하지만 서로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뿌꾸사띠는 부처님을 보고서 벗이여(āvuso)”라고 불렀다. 32상의 신체적 특징을 감추었기 때문에 부처님인줄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 모른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법문이 시작 되었다. 그런 내용 중의 하나가 위에 언급된 죽음을 대하는 태도이다.

 

대부분 혼수상태에서 죽음을

 

수 많은 죽음이 있다. 자연사도 있고, 사고사도 있고 갖가지 모습으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이 어떻게 죽은지도 모른 채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혼수상태에서 죽음을 맞기도 한다. 또 사고사 등으로 죽는 경우 너무 급작스럽게 죽어서 자신이 죽었는지 조차 모를 수 있다. 사고사에 따른 급작스런 죽음은 영화의 소재로도 활용된다. 영화 식스센스가 대표적 예일 것이다. 이와 같이 대부분 자신이 어떻게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죽는 순간에도 항상 사띠와 알아차림을 유지하라고 하였다. 경에서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 ‘나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라 하였다. 이렇게 죽는 순간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더 이상 새로운 태어남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위 문구는 단멸론자에게 악용될 수 있다.

 

단멸론자가 댓글을 남겼는데

 

최근 올린 글에 대하여 어떤 이가 댓글을 남겼다. “21세기에 구닥다리 윤회 전생론으로 공상소설이나 쓰는 불교는 초기든 대승이든 희망이 없다.”라는 짤막한 댓글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대체로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은 단멸론자들이다. 윤회를 인정하면 단멸론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고 또 다른 댓글을 남겼는데 바른 법을 깨친 이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수명을 이미 마친 뒤에는 그가 깨달은 모든 것들도 멸하고 쉬고 그쳐 차갑게 되는 줄을 알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앞서 윤회를 부정한 글과 관련지어 보면 전형적인 단멸론적 견해이다. 몸이 무너지고 나면 정신도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이다.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 문구1

 

단멸론자들이 활용하는 경전은 주로 아함경이다. 한역으로 되어 있는 문구를 거두절미하여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언급된 문구 역시 한역 아함경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역아함경과 빠알리니까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문제가 되는 문구를 비교해 보았다. 먼저 아함경이다.

 

 

 

그는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으면 곧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 알 것이요,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 알 것이다.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수명을 이미 마친 뒤에는 그가 깨달은 모든 것들도 멸하고 쉬고 그쳐 차갑게 되는 줄을 알 것이다.

 

(중아함경 제42)

 

 

단멸론자들이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 문구이다. 문구를 보면 깨달음이 강조 되어 있다. 그러나 거두절미된 이 문구를 본다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똑 같은 내용이 빠알리니까야에도 있다. 위에 언급된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140)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나는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나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나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몸이 파괴되어 생명이 다한 뒤에 바로 여기서 모든 것은 더 이상 즐겁게 느껴지지 않고 식어버릴 것이다.’고 분명히 안다.

 

(Dhātuvibhaga sutta-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0, 전재성님역)

 

 

문장의 형식은 비슷하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한역아함경에서는 깨달음을 강조하였고,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느낌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깨달음과 느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하는 말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하는 말이 있다. 경행과 좌선이 모두 끝난 다음 법사의 인터뷰 시간에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시간이다. 이 때 누군가 진여, 불성, 참나, 깨달음 등과 같은 말을 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그럴 때 법사는 개념을 이야기 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 하세요라고 말한다.

 

아함경에 언급된 깨달음은 막연한 것이다. 그저 깨달음이라 하였을 때 어떤 것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설령 어떤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해도 그것은 관념이나 개념이 되기 쉽다. 토끼뿔이나 거북의 털, 개뿔과 같은 개념이다. 그런 개념은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로지 생각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느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 느낌은 항상 알아차릴 대상이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갈애가 생겨나면 업을 짓기 때문에 태어남의 조건이 된다. 태어남의 연료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갈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한다.

 

막연함과 애매모호함

 

경에서도 나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라고 느낌을 알아차릴 것을 강조 하고 있다. 느낌단계에서 멈추면 더 이상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이 없게 된다. 따라서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느낌단계에서 그칠 뿐 절대로 느낌이 갈애로 발전하지 않는다.

 

아함경에서는 깨달음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이야기 하였다. 그런 막연함과 애매모호함 때문에 단멸론자들의 온상이 되고 있다. 막연한 개념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누구든지 몸이 무너지면 정신 또한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은 자는 경에서의 깨달음을 말한다. 그런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매우 막연하다. 그래서 단멸론자들이 아함경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 문구2

 

또 하나 차이가 있다. 그것은 비유에 대한 것이다. 먼저 한역아함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여, 비유컨대 타오르는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의지하나니, 만일 기름을 계속해서 더해 주지 않고, 심지를 이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먼저 것은 이미 다 타고, 뒤의 것은 계속 이어지지 않아 다시 받을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중아함경 제42)

 

 

이것이 단멸론자들이 단멸론의 근거로 삼고 있는 내용중의 하나이다. 기름과 심지가 다하면 누군가 다시 해 주기 전에는 더 이상 불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번 불이 꺼지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무너져 정신또한 소멸될 때 마치 꺼진 등불처럼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 단멸론자들의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등불의 비유는 어떻게 다른가?

 

유사한 비유가 빠알리니까야에도 있다. 위 아함경과 어떻게 다를까?

 

 

[세존]

이를테면 수행승이여, 기름을 조건으로 심지를 조건으로 등불이 타오르고 기름이나 심지가 닳아 없어지면, 더 이상의 공급이 없으므로 자양분이 없어 꺼지는 것과 같다. 

 

(Dhātuvibhaga sutta-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0, 전재성님역)

 

 

흔히 열반에 대하여 설명할 때 등불이나 종려나무그루터기 비유를 든다. 등불은 꺼진 불로, 종려나무그루터기는 뿌리가 뽑힌 것으로 설명된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설명되는 것이 등불이다.

 

아함경과 니까에서 등불의 비유는 유사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등불이 계속 타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아함경에서는 등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려면 심지를 이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모순이다. 나 아닌 또 다른 존재가 불을 붙여 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불이 꺼졌는데 누군가 불을 붙여 주어서 다시 불꽃이 타 올랐다면 이전의 붙여준 사람과 새로 붙여준 사람중 어느 것이 나일까? 그래서 단멸론자들은 불이 한 번 꺼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한다. 육체가 멸하여 정신도 멸하게 되면,  한 번 꺼진 불처럼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함경의 등불론은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된다.

 

등불론에 대한 빠알리니까야의 비유는 아함경과 다르다. 니까야에서는 외부에서 불을 붙여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 붙은 불은 기름을 조건으로 심지를 조건으로타오르는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양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양분은 다름 아닌 땔감이다. 그렇다면 땔감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탐진치라는 땔감으로

 

불은 땔감이 있어야 한다. 그 땔감이 나무 일수도 있고, 석탄일 수도 있고, 기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윤회를 하게 하는 땔감은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누군가 외부에서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다.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8)’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Ādittapariyayaysutta-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8, 전재성님역)

 

 

연소경에 따르면 땔감은 우리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그 땔감은 다른 아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땔감이다. 그래서 탐욕의 불이 일어나는 것은 탐욕이라는 땔감을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성냄의 불이 일어나는 것은 분노의 업을 지었기 때문이고, 어리석음의 불이 일어난 것은 어리석은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 성냄, 어릭석음을 내는 한 불이 계속 타오르기 위한 땔감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탐진치가 윤회의 동력이 된다. 탐진치가 남아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이 근거로 삼는 경

 

지금은 인터넷시대이다. 그래서 블로그나 카페, 토론 사이트에서 자신의 견해를 누구나 밝힐 수 있다. 그런데 인용하는 경전을 보면 한역아함경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 되어 나온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함경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빠알리니까야를 부처님원음이라 본다. 그래서 아함경은 빠알리니까야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도 몇 번의 번역과정을 거친 것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고, 이를 한역하고, 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 현재 볼 수 있는 아함경이다. 이렇게 여러 번 중역되다 보니 변질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비교해 보면 너무나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애매모호한 내용이 많다. 그러다 보니 단멸론자들이 근거로 삼는 경이 되어 버렸다.

 

인터넷시대 불교의 당나귀들

 

인터넷시대에 단멸론자들은 불교의 당나귀들이라 볼 수 있다. 마치 소의 무리를 뒤따라 가는 당나귀와 같다. 그런데 단멸론자의 주장을 들어 보면 매우 그럴 듯 하다. 그래서 불교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초심자들이 단멸카페를 기웃거리다 보면 혼란에 빠지기 쉽다.

 

단멸론을 접하다 보면 단멸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댓글에 “21세기에 구닥다리 윤회 전생론으로 공상소설이나 쓰는 불교는 초기든 대승이든 희망이 없다.”라 하여 윤회를 부정하는 말을 거친없이 한다.  바른 법을 깨친 이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수명을 이미 마친 뒤에는 그가 깨달은 모든 것들도 멸하고 쉬고 그쳐 차갑게 되는 줄을 알 것이다.”라는 아함경의 문구를 이용하여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을 주장한다.

 

왜 느낌이 중요한가?

 

육체가 멸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단멸론적 견해이다. 그러나 심지에 기름이 남아 있는 한, 땔감이 남아 있는 한 불은 계속 타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땔감은 뭇삶들에게 있어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번뇌가 남아 있는 한 번뇌를 연료로 하여 계속 불꽃이 타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진치라는 윤회의 동력이 되는 땔감을 없애기 위해서는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하였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갈애가 일어나면 집착으로 발전하여 업을 짓는다. 따라서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도 “ ‘나는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다. 그것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은 알아차리기 힘들다. 토끼뿔, 거북털, 개뿔처럼 오로지 생각 속에서만 있기 때문에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경에서는 죽는 순간까지도 느낌을 알아 차리라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수행처에서는 와선수행이라는 것이 있다.

 

와선수행을 잘하면

 

와선수행은 누워서 하는 수행을 말한다. 편안한 자세로 곧바로 누운 다음 배의 호흡을 관찰한다. 누우면 가장 편한 자세가 되기 때문에 가장 강한 대상은 배에서 일어나는 호흡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가장 강한 대상에 집중한다. 누웠을 때 가장 강한 대상은 배에서 일어나는 호흡이다. 그래서 와선수행을 하면 배의 호흡을 관찰한다. 그런데 배의 호흡을 관찰하면 졸립다.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잠이 오면 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을 알앝차리라고 한다. 와선 수행의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잠이 드는 순간에도 호흡의 느낌을 관찰하라고 말한다.

 

와선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잠이 들고, 잠이 깰 때 역시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잠을 깨라고 말한다. 우스개 소리로 와선수행을 잘하면 죽을 때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에 들것이라 한다.

 

황소에 받쳐 죽은 뿌꾸사띠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140)에서 뿌꾸사띠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인줄 알았다. 비록 32가지 신체적 특징은 감추었지만 설법이 진행 될수록 부처님인 것을 확신 하였기 때문이다.

 

설법을 듣고 크게 깨달은 뿌꾸사띠는 부처님에게 큰 절을 하였다. 경에서는 그는 자리에 일어나 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라는 하였다. 이루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두발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최상의 존경을 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뿌꾸사띠에게 구족계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발우와 법복이 없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뿌꾸사띠는 발우와 법복을 구하과자 옹기장이 집을 나갔다. 그런데 뿌꾸사띠가 발우와 법복을 구하러 돌아 다니는 동안 돌아다니던 황소에 받쳐서 죽고 말았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동안 큰 깨달음을 얻었던 뿌꾸사띠는 당일 죽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뿌꾸사띠는 불행한 것일까?

 

뿌꾸사띠는 죽어서 어떻게 되었을까? 경에서는 되돌아 오지 않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불환자(아나함)를 말한다. 불환자가 되면 색계 4선천인 정거천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 정거천은 가장 수승한 천상이다. 불환자들만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명대로 살다 죽으면 완전한 열반에 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뿌꾸사띠는 옹기장이집에서 부처님과 하루 밤을 머물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돌아 다니는 황소에 치여 받혀 곧바로 죽었다. 그럼에도 도를 이루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말한 것에 해당 될 것이다. 법구경에도 이와 비슷한 게송이 있다.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 114)

 

 

진리를 본 자는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하루를 살더라도 억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백년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동자가 월금을 기다리듯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아라한은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런 죽음조차 아라한에게 있어서는 알아차릴 대상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미란 무엇일까?

 

범부의 죽음과 아라한의 죽음

 

범부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늘 죽을까봐 겁내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라한은 오히려 죽음을 기다린다. 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탐진치로 가득찬 범부와 번뇌다한 아라한의 죽음에 대한 차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실재하는 사건의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남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사유할 뿐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죽음은 죽음, 또는 죽음에 접근에 대한 사유에 대한 체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위법적 사유의 근본구조 속에서 죽음을 사유하면서 그것을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동일시 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해서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되는 존재의 다발은 죽음과 동일시 된다.

 

모든 사물의 변화는 유위법적이며 그 속성을 주이성(住異性)에 두는 무상으로 나타나는 만큼. 괴로움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 marana)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라한의 체험 속에는 변화와 소멸은 자각 되지만 늙고 죽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에게서의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놓음(jīvita pariyādāna)’이라고 불린다. 아라한의 체험에는 구조적으로 불사(不死: amata)가 수반된다.

 

(Dhp114 주석, 전재성박사)

 

 

법구경 114번 게송에 실려 있는 각주에 대한 내용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 marana)

불사(不死: amata)

오온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동일시 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여김.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라한의 체험.

오온의 파괴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되는 존재의 다발(오온)은 죽음과 동일시함.

존재의 다발(오온)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놓음

(jīvita pariyādāna)으로 봄

죽음

괴로움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존재의 다발(오온)의 파괴는 죽음(: marana)으로 이해함.

아라한의 체험에는 구조적으로 불사(不死: amata)가 수반됨.

의 미

범부의 죽음

아라한의 죽음

 

 

범부의 죽음은 말 그대로 죽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범부의 죽음을 죽음(: marana)’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라한의 죽음은 죽는 것이 아니다. 자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아라한의 죽음이다. 그래서 불사(不死: amata)’라 하였다. 그래서 범부의 죽음은 죽음이고 아라한의 죽음은 불사이다.

 

등불이 꺼졌을 때

 

범부는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 마치 등불이 심지에 기름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 탐진치라는 땔감이 있어서 계속 등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범부는 죽게 되어도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은 탐진치라는 땔감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연료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등불은 꺼질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모든 생각을 극복하면, 적정의 성자라고 불리운다. 적정의 성자는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동요가 없고 갈망이 없다. 그에게는 태어 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늙겠는가? 늙지 않는데 어떻게 죽겠는가? 죽지 않은데 어떻게 동요하겠는가? 동요하지 않는데 어떻게 갈망하겠는가?

 

(Dhātuvibhaga sutta-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0, 전재성님역)

 

 

 

2013-08-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