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팔경법(八敬法)이 성립한 이유는? 고따미의 경(A8.51)과 대애도비구니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3. 9. 28. 16:02

 

팔경법(八敬法)이 성립한 이유는? 고따미의 경(A8.51)과 대애도비구니경

 

 

경전을 열어 보았더니

 

경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첫 페이지서부터 차례대로 읽어야 할까? 방대한 경전을 소설 읽듯이 읽는다면 넌센스이다. 경전 구성자체가 소설처럼 기승전결식으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는 법이 없다. 아무 곳이나 열어 보아도 되는 것이 초기경전이다. 이는 경전이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거나 여러 경들이 집합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대하여 읽는다라는 말보다 차라리 열어본다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앙굿따라니까야를 열어 보았다.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경전을 처음부터 읽는 다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넌센스에 가깝기 때문에 아무 곳이나 열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열어 본 니까야에서 고따미의 경(A8.51)’을 발견하였다. 여덟 번째 법수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책의 51번째에 해당되는 경이다. 그런데 경을 읽다 보니 바로 이 경이 한문경전 대애도비구니경의 모태가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팔경법(八敬法)’에 대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팔경법란 무엇일까?

 

팔경법(八敬法)이 있는데

 

팔경법은 요즘말로 표현 하면 악법(惡法)’에 가깝다. 비구니를 차별하는 계율이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남녀 평등의 시대에 이런 법이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한문경전 대애도비구니경에 표현 되어 있는 팔경법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계를 지니는 비구를 여인 비구니는 마땅히 따라서 바른 법을 받아야 하느니라.

 

둘째, 대계를 지니는 비구가 비구계를 받은지 보름 이상만 되더라도 비구니는 당연히 모시고 예배하여야 하느니라.

 

셋째, 비구와 비구니가 서로 나란히 살거나 함께 머물지 말라.

 

넷째, 하안거 하는 삼개월간은 한 곳에 머물러서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살피되, 듣거나 본 것을 스스로 잘 살펴야 하느니라.

 

다섯째, 비구니는 비구에게 듣거나 본 것으로 다투거나 시비하지 말라.

 

여섯째, 비구니는 거의 도법(道法)에 가깝게 되었을지라도 비구에게 경이나 율의 일을 물어야 하느니라.

 

일곱째, 비구니가 스스로 도를 얻지 못하고 만약 법률의 계를 범하였으면 마땅히 보름마다 대중 가운데 나아가서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하여 교만한 태도를 버려야 하느니라.

 

여덟째, 비구니는 비록 백 세 동안 대계를 지녔더라도 이제 대계를 받은 비구보다 아랫 자리에 앉아서 당연히 겸손하고 공경스럽게 예를 지어야 하느니라.

 

(한역 대애도비구니경)

 

 

대애도비구니경-한역.docx

 

 

 

 

이것이 한문경전 대애도비구니경(大愛道比丘尼經)에 실려 있는 팔경법의 골자이다. 팔경법에서 남녀차별 요소가 매우 강한 항목은 첫번째 항목과 두번째 항목과 여덟번째 항목이다. 공통적으로 비구니는 비구를 공경하여여 한다는 내용이다. 심지에 비구니계를 받은지 100년이 된 비구니라 할지라도 이제 갓 비구가 된 새내기 비구승에게도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비구니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한역 대애도비구니경(大愛道比丘尼經)은 중국 북량시대 (A.D. 401439) 의 번역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번역자는 알려져 있다. 여기서 애도(愛道)’라는 말은 고따미의 의역이다. 고따미는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마하빠자빠띠고따미를 말한다. 이를 한역에서는 대애도(大愛道)라 한다.

 

대애도비구니경(大愛道比丘尼經)은 비구니 교단이 성립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마하빠자빠띠고따미가 출가하여 비구니계를 받는 과정이 비구니교단의 성립과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는 비구니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법이 표현 되어 있다. 이것이 비구니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팔경법이다.

 

팔경법의 원형 고따미의 경(A8.51)’

 

작자미상의 대애도비구니경과 유사한 경이 앙굿따라니까에 있다. 대애도비구니경의 모태가 되는 경이 바로 고따미경의 경(Gotamī sutta, A8.51)’이다. 그런데 고따미의 경에도 팔경계와 유사한 것이 있다. 팔경법의 모태이자 원형으로 보이는 내용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Sace ānanda, mahāpajāpatī gotamī aṭṭhagarudhamme patigahāti, sāvassā hotu upasampadā.

 

“아난다여, 만약에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이와 같은 여덟 가지 공경의 원리를 받아 들인다면, 그녀에게 이것이 구족계가 될 것이다.

 

 

1)

"Vassasatūpasampannāya bhikkhuniyā tadahupasampannassa bhikkhuno abhivādanapaccuṭṭhānaañjalikamma sāmīcikamma kattabba. Ayampi dhammo sakkatvā garukatvā1 mānetvā pūjetvā yāvajīva anatikkamanīyo.

 

수행녀는 구족계를 받은 지 백년이 되어도 방금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응대해야 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

 

 

2)

 Na bhikkhuniyā abhikkhuke āvāse vassa upagantabba, ayampi dhammo sakkatvā garukatvā mānetvā pūjetvā yāvajīva anatikkamanīyo.

 

수행녀는 수행승이 없는 곳에서 안거해서는 안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

 

 

3)

Anvaddhamāsa bhikkhuniyā bhikkhusaghato dvedhammo paccāsisitabbā: uposathapucchakañca ovadūpasakamanañca. Ayampi dhammo sakkatvā garukatvā mānetvā pūjetvā yāvajīva anatikkamanīyo.

 

수행녀는 보름마다 수행승의 참모임에 두 가지 원리, 즉 포살에 대한 질문과 훈계하는 자의 방문을 간청해야 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

 

 

4)

Vassa vutthāya bhikkhuniyā ubhato saghe tīhi hānehi pavāretabbā: diṭṭhena sutena parisakāya. Ayampi dhammo sakkatvā garukatvā mānetvā pūjetvā yāvajīva anatikkamanīyo.

 

수행녀는 안거를 마치면 수행승과 수행녀의 참모임에서 보고, 듣고, 추측한 세 가지 잘못에 관해서 자자를 행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

 

 

5)

Garudhamma ajjhāpannāya bhikkhuniyā ubhato saghe pakkhamānatta caritabba. Ayampi dhammo sakkatvā garukatvā mānetvā pūjetvā yāvajīva anatikkamanīyo.

 

수행녀가 공경의 원리를 어기면 수행승과 수행녀의 참모임에서 십사일간의 속죄를 행해야 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

 

 

6)

Dve vassāni chasu dhammesu sikkhitasikkhāya sikkhamānāya ubhato saghe upasampadā pariyesitabbā. Ayampi dhammo sakkatvā garukatvā mānetvā pūjetvā yāvajīva anatikkamanīyo.

 

정학녀는 이년 동안 여섯 가지 원리에 대하여 학습한 뒤에 수행승과 수행녀의 모임에서 구족계를 신청해야 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

 

7)

Na kenaci pariyāyena bhikkhuniyā bhikkhū akkositabbo paribhāsitabbo. Ayampi dhammo sakkatvā garukatvā mānetvā pūjetvā yāvajīva anatikkamanīyo.

 

수행녀들은 어떤 이유로도 수행승들을 비웃거나 비난해서는 안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

 

 

8)

Ajjatagge ānanda, ovao bhikkhunīna bhikkhūsu vacanapatho, anovao bhikkhūna bhikkhunīsu vacanapatho. Ayampi dhammo sakkatvā garukatvā mānetvā pūjetvā yāvajīva anatikkamanīyo. "

 

오늘 이후 수행녀들의 수행승들에 대한 충고의 길은 막히나, 수행승들의 수행녀들에 대한 충고의 길은 막히지 않는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

 

 

Sace ānanda, mahāpajāpatī gotamī ime aṭṭhagarudhamme patigahāti, sāvassā hotu upasampadāti

 

아난다여, 만약에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이와 같은 여덟 가지 공경의 원리를 받아 들인다면, 그녀에게 이것이 구족계가 될 것이다.

 

(Gotamī sutta-고따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51, 전재성님역)

 

 

이것이 빠알리니까야에 표현 되어 있는 팔경법(八敬法)이다.

 

여덟 가지 공경의 원리여덟 가지 무거운 법[八敬法]’

 

팔경법을 빠알리어로 ‘aṭṭhagarudhamme’라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여덟 가지 공경의 원리라 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여덟 가지 무거운 법[八敬法]’라고 번역하였다. 왜 무거운 법이라 하였을까? 이는 garu에 대한 빠알리가 영어로 ‘: [adj.] heavy; serious; grave; venerable; honoured. (m.), a teacher; instructor.라는 뜻이 있는데 첫 번째 등장하는 ‘heavy’를 적용해서 무거운 법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garu는 무거운 뜻 외에도 venerable, honoured 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공경하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공경의 원리라고 번역한 성전협의 번역어가 더 타당할 듯 하다. 중국에서도 팔경법(八敬法)이라 하여 공경할 ()자를 쓰지 않았던가.

 

초불연에서는 한문경전의 용어를 답습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경우는 피해가는 것 같다. 그것도 여덟 가지 무거운 법이라고 하고 더구나 대괄호치기로 ‘[八敬法]’라 보충번역을 하였는데, ‘여덟 가지 무거운 법八敬法이 매칭 되지 않는다. 더구나 여덟 가지 무거운 법이라 하였는데 무엇이 무겁다는 말인가? 비구니가 비구를 공경하는 것이 무거운 법이라는 뜻일까? aṭṭhagarudhamme에 대하여 여덟 가지 무거운 법[八敬法]’이라고 번역한 초불연의 번역어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경솔한 글쓰기

 

빠알리니까야에 표현 되어 있는 팔경법을 보고 놀랐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평등을 주장하셨기 때문에 비구나 비구니 모두 평등하게 대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구니를 차별하는 구절을 보자 당황하였다.

 

그동안 작성한 글에서 대애도비구니경에 따르면 ‘팔경계’라 하여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을 두고 있다. 이는 모든 것이 민주화된 시대에 있어서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이다.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열 비구니의 승리게송(빅쿠니상윳따S5.1), 2012.02.22)"라고 글을 쓴 바 있기 때문이다.

 

또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인천 Y선원 S선사의 비구니 수계에 대한 법문을 듣고 이런 남녀차별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수행녀 고따미의 인연담, 2012.12.08)”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특히 여성비하와 남녀차별의 교과서와 같은 대애도비구니경의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으로 초기불교경전에서 그와 같은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오성계급과 대애도비구니경(大愛道比丘尼經), 2011.12.08)”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이런 단언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고따미의 경(A8.51)에서는 분명히 남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경솔한 글쓰기가 되었다. 그래서 반드시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해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깜냥으로 추론하여 언급한 것은 모두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고따미의 경대애도비구니경은 어떻게 다른가?

 

고따미의 경의 팔경법을 보면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이 엄연히 존재한다. 특히 첫번째 항에서 수행녀는 구족계를 받은 지 백년이 되어도 방금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응대해야 한다.”라는 대목이다. 이는 한역 대애도비구니경 팔경법에서 여덟번째 항인 비구니는 비록 백 세 동안 대계를 지녔더라도 이제 대계를 받은 비구보다 아랫 자리에 앉아서 당연히 겸손하고 공경스럽게 예를 지어야 하느니라.”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머지는 비슷한 것도 있지만 정반대의 것도 있다.

 

정반대의 것은 어떤 것일까? 고따미의 경에서는 두번째 항 수행녀는 수행승이 없는 곳에서 안거해서는 안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대애도비구니경을 보면 세번째항에서 비구와 비구니가 서로 나란히 살거나 함께 머물지 말라.”라고 하여 정반대로 표현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경에서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렇게 차별하는 법문을 하였을까?

 

비구니교단의 탄생으로 인하여

 

앙굿따라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고따미의 경에 대하여 비구니교단의 탄생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 되어 있다. 그런데 경에서는 비구니 교단의 허락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녀는 구족계를 받은 지 백년이 되어도 지금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응대하여야 한다는 등의 여덟 가지 공경의 원리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팔경법은 비구니가 되기 위한 비구니구족계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비구니교단의 성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Sace ānanda, nālabhissa3 mātugāmo tathāgatappavedite dhammavinaye agārasmā anagāriya pabbajja, ciraṭṭhitika ānanda, brahmacariya abhavissa, vassasahassameva saddhammo patiṭṭhaheyya, yato ca kho ānanda, mātugāmo tathāgatappavedite dhammavinaye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o, nadāni ānanda, brahmacariya ciraṭṭhitika bhavissati, pañcevadāni ānanda, vassasatāni saddhammo hassati.

 

[세존]

만약에 아난다여, 여인이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아난다여, 청정한 삶은 오랫동안 지속하여 천 년 동안 정법이 존속할 것인데, 그러나 아난다여, 여인이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아난다여, 이제 청정한 삶은 오래 있지 못할 것이며, 아난다여, 단지 오백 년만 정법이 지속될 것이다.

 

(Gotamī sutta-고따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51, 전재성님역)

 

 

이 부분 역시 놀라운 내용이다. 마치 대승경전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금강경 정신희유분에서 如來滅後(여래멸후) 後五百歲(후오백세) 有持戒修福者(유지계수복자)’라는 문구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후오백세는 말법시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말법시대는 무엇을 말할까?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

 

대승에서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 이렇게 세 개의 시대로 구분한다. 정법시대는 부처님 멸도 후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잘 수행하여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시기이며,  상법시대는  그 다음의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수행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시기이고,  말법시대는  그 이후의 500년 간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으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 불법이 쇠하는 시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경에서는 정법이 천년(vassasahassameva) ‘동안 지속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비구니 교단의 성립으로 인하여 절반으로 단축된 오백년동안만 지속될 것이라 하였다. 이런 구절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정법은 기원전 1세기에 끝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는 대승불교가 일어난 시기에 해당된다. 그러고 보면 정법이 쇠퇴하는 시기와 대승불교가 일어나는 시기가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회의론자들은

 

경에서 언급된 정법천년이니 정법오백년이니 하는 말에 대하여 회의론자들은 후대에 편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부처님이 그런 말을 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성제와 같이 오로지 현세의 괴로움과 소멸에 대해서만 설하였지 내세나 윤회, 신통 등과 같이 지금 여기에서 확인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편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고따미의 경에 언급된 정법론은 회의론자에 있어서 시비거리가 될 수 있다.

 

왜 정법이 오백년으로 줄었다고 하였을까?

 

하지만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eyyathāpi ānanda, yāni kānici kulāni bahukitthikāni1 appurisakāni, tāni suppadhasiyāni honti corehi kumbhatthenakehi. Evameva kho ānanda, yasmi dhammavinaye labhati mātugāmo agārasmā anagāriya pabbajja, na ta brahmacariya viraṭṭhitika hoti.

 

[세존]

예를 들면, 아난다여, 어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게 사는 집이 있다면 그 집을 도둑이 도둑질하러 침입하기 쉽듯이, 아난다여, 이와 같이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여인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면, 그 청정한 삶은 오래 가지 못한다.

 

(Gotamī sutta-고따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51, 전재성님역)

 

 

비구니교단의 성립으로 인하여 왜 정법이 오백년으로 줄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여인들만 살 경우 도둑의 침입을 받기 쉽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도둑이란 남자를 의미할 수 있다.

 

여자들만 산다고 무시하는 겁니까?”

 

여자들만 사는 집이 있다. 드라마를 보면 삼대에 걸쳐 과부만 사는 집도 있고, 어머니와 딸들만 사는 집이 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하는 말은 여자들만 산다고 무시하는 겁니까?”라고 한다. 남자 없이 여자들만 사는 집을 남자들이 만만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만 사는 집만 골라 도둑질하는 도둑놈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들만 살면 도둑의 타겟이 되기 쉽다. 그런데 집없는 여인이 숲에서 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가사를 벗어 던지고  ! 어서 꽃이 만발한 이 숲에서 즐깁니다

 

부처님 당시 비구니들 역시 비구들처럼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숲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비구와 똑 같이 마을로 탁발을 나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숲에서 살며 탁발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수바비구니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지와까의 망고 숲을 비구니 수바가 걸어가고 있는데 한 남자가 길을 가로 막았다. 수바 비구니가 말하였다.

 

[수바 비구니]

“그대는 왜 길을 막고 있습니까? 내가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출가 비구니에게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의 스승께서는 계율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하고 따릅니다. 나는 티 없는 청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대는 왜 길을 막고 있습니까? 그대는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고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평온합니다. 그대는 왜 길을 막고 있습니까?

 

[남자]

“당신은 젊고 아름답습니다. 청정한 삶에서 무엇을 구합니까? 가사를 벗어 던지고  ! 어서 꽃이 만발한 이 숲에서 즐깁시다. 숲에 혼자 들어가서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맹수들이 출몰하는 인적이 드문 두려운 숲에 당신은 동행 없이 혼자 들어가려는 것입니까? 금빛 인형처럼, 천상 정원의 여신 처럼 당신은 걷고 있습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까시산의 옻을 입으면 당신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대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소.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궁전에 삽시다. 온갖 금은 보화로 당신을 입혀드리겠소.

 

[수바 비구니]

“결국은 부서질 이 육신은 시체로 가득찬  무덤의 묘지리만 하나 더 늘려 주겠지요그런데 그대는 이런 육신에게 무슨 가치를 보았기에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 것입니까? 그대는 정신이 돌았습니다.

 

[남자]

“그대의 눈은 어린 사슴과 같고, 산 속의 요정과 같소. 당신의 눈을 보면 나의 감각적 쾌락은 더욱 더 솟아납니다. 티 없는 금빛 얼굴위에 당신의 눈은 연꽃 봉우리 같이 청초하고 빛납니다. 그대가 설령 멀리 있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긴 눈섭, 청순한 눈빛, 그대의 눈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바 비구니]

“그대는 길이 없는 곳을 걸으려 하오. 달을 잡으려 하고, 수메르산 뛰어 넘으려 하고 있소. 그대는 부처님의 자녀를 쫒고 있습니다. 천상에서도 이 지구상에서도  나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여 욕망은 뿌리째 뽑혔습니다. 마치 그릇 속의 독이 증발하듯이.

 

이런 것을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유혹 하시지요. 그러나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을 유혹한다면 그대는 괴롭기 만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은 괴로움이나 즐거움, 칭찬이나 비방에도 흔들림 없이 굳건히 마음챙김에 머뭅니다. ‘인연따라 생긴 것을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훌륭한 팔정도를 타고 갑니다. 번뇌의 화살은 뽑혔습니다.

 

나는 막대기와 줄로 만든 화려하게 색칠한 춤추는 꼭두각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만일 이 꼭두각시의 막대기나 줄들을 떼어내고 던져 버리면 흩어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꼭두각시의 형체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까요?(어느 것을 꼭두각시라 하겠습니까?)

 

나의 몸도 이와 같습니다. 육신의 특성(현상)을 떠나서 육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특성들을 제거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까요? (어느 것을 육신이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이여,  그대는 사라진 신기루 같은 꿈속의 황금나무 같은, 군중속에서 보여주는 마술 같은 있지도 않은 것을 맹목적으로 쫒고 있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찬탄나는)눈은 구멍 속의 작은 구()로서 중앙에 거품이 있고 눈물도 나고 눈꼽도 낍니다. 다양한 양상들이 눈의 모양에서 만들어 집니다.

 

그때 그토록 아름다운 눈을 수바 비구니는 아무런 애착도 없이 뽑았다. 그리고 말하였다.

 

“여기 이 눈을 가져가시오.

 

그리고 그것을 그 남자에게 주었다. 그 남자의 욕정은 즉시 사라졌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다.

 

“그대의 눈은 원래대로 복구되기를 빕니다. 청정한 삶의 여인이여.

이런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그대와 같은 사람을 해치려는 것은

마치 불길을 끌어 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마치 독사를 움켜쥔 것 같습니다.

그대의 눈이 원래대로 복구되기를 빕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수바 비구니는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 온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 나아갔다.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은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테리가타 366-399 수바비구니,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

 

 

숲에 살며 탁발에 의존하는 수바비구니를 남자가 유혹하려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여자라고 하여 만만히 본 것이다. 여자에 대하여 단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런 자에게 있어서 비구니라 하여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당신은 젊고 아름답습니다. 청정한 삶에서 무엇을 구합니까? 가사를 벗어 던지고  ! 어서 꽃이 만발한 이 숲에서 즐깁시다.”라고 말한다.

 

비구니에게 허용되지 않은 두타행은?

 

여자가 집을 떠나 집없는 곳에서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비구니에게는 숲에서 머무는 두타행이 허용되지 않았다. 참고로 비구와 비구니의 두타행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두타행의 내용과 대상

No

수행

구분

의식주

비구

비구니

사미

식차마나/

사미니

청신사/

청신녀

1

분소의를 입는

단독

수행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2

삼의만 수용하는

단독

수행

수용

수용

X

X

X

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음식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4

차례대로 탁발하는

주수행

음식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주수행

음식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음식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음식

수용

X

수용

X

X

8

숲에 머무는

단독

수행

숙소

수용

X

수용

X

X

9

나무 아래 머무는

숙소

수용

X

수용

X

X

10

노천에 머무는

주수행

숙소

수용

X

수용

X

X

11

공동묘지에 머무는

단독

수행

숙소

수용

X

수용

X

X

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숙소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13

눕지 않는

단독

수행

정진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출처; 청정도론, 진흙속의연꽃 편집

 

 

 

표를 보면 13가지 두타행 중에 비구와 비구니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비구니에게는 숲이나 나무나 노천이나 공동묘지에 머무는 두타행이 허용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남녀 차별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여자가 혼자 머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도둑의 타겟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성적 욕망을 자극하며

 

여자가 홀로 숲에 머물며 탁발을 한다는 것은 도둑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런 예를 또 하나 볼 수 있다. 빅쿠니상윳따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게송이 있다.

 

 

Kinnu tva hataputtāva

ekamāsi1 rudammukhī,
Vanamajjhagat
ā ekā

purisa nu gavesasīti.

 

[빠삐만]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Accanta mataputtā'mhi purisā etadantikā,

Na socāmi na rodāmi na ta bhāyāmi āvuso.

 

[고따미]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네.

 

(고따미경-Gotamīsutta-고따미의 경, 상윳따니까야 S5:3,전재성님역)

 

 

여기서 고따미는 부처님의 양어머니가 아니다. 아들이 죽자 비구니가 된 수행녀 고따미를 말한다. 수행녀 고따미의 이야기는 법구경 게송 114번 인연담에서도 볼 수 있다.

 

자식을 잃은 고따미는 수행녀가 되었다. 그래서 숲에서 살고 있는데 악마가 접근하며 남자(purisa)를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 본다. 이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왕이라고 볼 수 있는 악마가 성적인 유혹을 하는 장면이다. 악마는 고따미에게 접근하여 어린 아이를 잃었다는 것을 상기시기면서 어린 아이를 낳으라는 모성적 본능을 일깨운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유혹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어린 아이에 대한 여성적 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수행녀 고따미는 인간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이 덧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이나 남자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또한 남자 역시 지나간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행녀 고따미는 모성을 자극하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

 

수행녀는 수행승이 없는 곳에서 안거해서는 안된다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여자들 여러 명이 모여 살아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도둑이나 남자가 항상 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구니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고따미의 경의 팔경법 두번째 항에서 수행녀는 수행승이 없는 곳에서 안거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비구니들은 비구들 가까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비구들이 보호해야한다는 말과 같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비구니에게 있어서 의지의 대상은 비구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수행녀는 구족계를 받은 지 백년이 되어도 방금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에게 인사를 하고~”로 시작되는  팔경법이 나왔는지 모른다.

 

 

 

Bhikkhunis

 

 

비구와 비구니가 서로 나란히 살거나 함께 머물지 말라

 

하지만 대승의 대애도비구니경은 180도 다르다. “비구와 비구니가 서로 나란히 살거나 함께 머물지 말라.”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가령 서로 함께 살거나 같이 머물게 되면 청정치 못하게 되고 욕망에 얽힘이 되어 죄의 뿌리가 됨을 면하지 못하느니라. 굳건히 자신을 제어하여 욕정을 분명히 끊고 고요히 자신을 지킬지니라.”라 하였다. 비구니가 비구와 함께 있으면 비구를 타락시키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비구니는 비록 백 세 동안 대계를 지녔더라도 이제 대계를 받은 비구보다 아랫 자리에 앉아서 당연히 겸손하고 공경스럽게 예를 지어야 하느니라.”라 하였다. 이는 모순이다. 비구와 가까이 살지도 않으면서 비구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여성비하 내용으로 가득한 대애도비구니경

 

이와 같이 대애도비구니경을  보면 여성비하 내용으로 가득하다. 스스로의 자태를 뉘우쳐 살펴보니 나쁜 점이 여든 네 가지나 있어서, 장부를 미혹하고 어지럽게 하여 도덕을 잃게 하는 것이라든가 비구니에 대하여 나의 법이 무너지고 패하여 청정 범행이 애욕 중에 떨어지게 하는 죄의 근원이 될 뿐이니라.”라고 하여 마치 비구니가 비구타락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비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인 비하는 경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빠알리니까에서는 여성비하에 대한 내용을 전혀 볼 수 없다. 없는 내용이다.

 

여인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고따미의 경

 

빠알리니까야의 고따미의 경과 한역 대애도비구니경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비슷한 것은 팔경법이지만 깨달음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빠알리니까에 따르면 여자도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여성도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고따미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여인들이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흐름에 든 경지나, 한번 돌아오는 경지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나,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세존]

아난다여, 여인들이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흐름에 든 경지나, 한번 돌아오는 경지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나,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따미경-Gotamīsutta-고따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51,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여인도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경에서 거룩한 경지가 아라한을 말한다. 이와 같이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처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가르침에 남녀 차별이 없는 것이다. 다만 여성이라는 성의 차이로 인하여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팔경법이 나온 것으로 본다.

 

여인성불 불가의 대애도비구니경

 

하지만 한역 대애도비구니경을 보면 팔경법에 따른 남녀 차별도 존재하지만 깨달음에서도 역시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여인들로 하여금 사문을 만들지 않았다면 부처님 정법이 마땅히 천세를 머물러 크게 일어나 널리 퍼져서 모두가 귀의하여 모두 제도함을 입을 것이니라. 이제 여인들이 나의 법 중에 있어 사문이 된 까닭으로 마땅히 오백세를 제감(除減)하여 법이 감소되고 쇠잔해 질 것이니라.

 

왜그런가 하면 아난아, 여인은 다섯 곳에서 사문이 될 수 없느니라. 무엇을 다섯 곳이라 하는가?

 

첫째, 여인은 여래지진등정각이 되지 못하며,

둘째, 여인은 전륜성왕이 되지 못하며,

셋째, 여인은 제칠(第七) 범천왕이 되지 못하며,

넷째, 여인은 제석천왕[飛行皇帝]이 되지 못하며,

다섯째, 여인은 마천왕(魔天王)이 되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은 오처(五處)는 모두 마땅히 장부라야 지존이 될 수 있나니, 장부라야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전륜성왕이 될 수 있으며, 제석천왕이 될 수 있으며, 마천왕이 될 수 있으며, 범천왕이 될 수 있으며, 인중왕(人中王)이 될 수 있느니라.

 

아난이여, 모든 여인은 비유컨대 독사와 같으니라. 사람이 비록 잡아 죽여 몸을 자르고 그 뇌를 끄집어 내어 이 독사는 비록 죽은 것이지만, 사람이 이것을 보면 마음 속으로 놀라고 두려워 하나니, 여인도 비록 사문이 되었으나 악로(惡露)가 짐짓 있어 일체 남자가 휘둘리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얻지 못하게 하나니라.

 

(한역 대애도비구니경)

 

 

한역 대애도비구니경에 따르면 백년된 비구니가 새내기 비구에게 공경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여인은 부처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륜성왕 등이 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이유는 빠알리니까야의 고따미의 경과 대조적이다.

 

대애도비구니경에서는 여인은 부처가 되지도 못할 뿐 더러 비구들로 하여금 도를 이루는데 방해 되는 요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여인에 대하여 독사와 같은 존재라 하였다. 이처럼 백년된 비구니가 새내기 비구에게 공경해야 하는 이유가 다르다.

 

비구니 승단이 유지되기 어려운 이유

 

고따미경에서는 여인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면, 그 청정한 삶은 오래 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백년된 비구니가 새내기 비구에게 공경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그런데 경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난다여, 마치 잘 익은 논에 있는 벼에 흰곰팡이라 불리우는 병이 걸리면 그 논에 있는 벼는 오래 가지 못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여인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면, 그 청정한 삶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고따미경-Gotamīsutta-고따미의 경, 상윳따니까야 S5:3,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벼에 핀 흰곰팡이를 비유하여 비구니 승단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여기서 벼는 비구승단을 말하고, 흰곰팡이는 비구니 승단을 말한다. 흰곰팡이와 같은 비구니 승단이 되지 않으려면 팔경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비구니 승단이 유지되기 어려움을 말한다.

 

비구니 승단이 사라진 이유는?

 

현재 테라와다전통에서는 공식적으로 비구니 승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무소유와 청정을 근본으로 하는 테라와다 교단에서 비구니승단이 존재하기 힘든 것임을 말한다.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탁발에 의존해야만 하는 승단에서 만약 사원에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으로 변질 된다면 이는 승단의 타락이다.

 

더구나 여인이 탁발에 의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탁발과정에 있어서 온갖 유혹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언급된 테리가타에서 수바비구니와 상윳따니까야에서 고따미비구니의  예로 알 수 있다. 이처럼 탁발하기가 어려운 것이 비구니이다. 또 여성이라는 조건 때문에 제약을 받는 것이 비구니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 비구니교단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

 

세상은 근본적으로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고따미의 경과 대애도비구니경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남녀차별에 해당되는 문구를 보면 비슷하다. 이를 두고 회의론자는 니까야가 후대에 편집되거나 조작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괴로움이다로 시작되는 사성제를 진리로 받아 들인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세상은 근본적으로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도 평등이 아닌 차별로 볼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비구와 비구니 역시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새내기 비구에게 공경하라고 한 것은 아닐까?

 

딸들만 있는 집에 가장이 있다면 도둑이 함부로 넘볼 수 없을 것이다. 가장은 없지만 든든한 남동생이 있는 집에서도 역시 도둑이 넘보지 못할 것이다. 도둑은 여자들만 사는 곳을 넘보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든든한 것이다.  비구와 비구니의 관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금 비구니만 있는 사찰이 있다면 도둑이 넘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인근에 비구가 사는 사찰이 있다면 든든할 것이다. 그래서 도둑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도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숲에서 살며 탁발에 의존하는 비구니들 근처 새내기 비구 하나만 있어도 도둑들이 넘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백년된 비구니에게 새내기 비구를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대애도비구니에 따르면 여인은 성불할 수 없기 때문에 사미는 대계를 구족하면 또한 아라한을 얻나니라 하여 새내기 비구에게 공경하라는 의미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술 더 떠 비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방해요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인은 앉아 있음에 교만하여 음침하고 부정하며, 남자를 업신여기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도를 얻지 못하나니라라 하여 비구니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 시대적 배경에 따른 차이

 

지난번 글쓰기에서 대애도비구니경에서 팔경법을 접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으로 초기불교경전에서 그와 같은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라고 단언하였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초기경전에 팔경법에 해당되는 원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경솔한 글쓰기가 되었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에 있는 고따미의 경을 읽고 팔경법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당황하였다. 부처님은 평등의 가르침을 펼치셨기 때문에 팔경법은 대승불교 경전에는 있는 것이지 빠알리니까야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에서도 팔경법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접하였을 때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의 말대로 니까야가 후대에 편집된 것인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경을 다시 읽고 숙고해 보니 차별의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다르듯이 비구와 비구니도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인 구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처님 당시 시대적 배경에 따른 요인이 가장 큰 것이라 보여 진다.  

 

 

 

2013-09-28

진흙속의연꽃

대애도비구니경-한역.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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