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여덟 가지 목소리와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 사자후(獅子吼)

담마다사 이병욱 2013. 9. 30. 12:24

여덟 가지 목소리와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 사자후(獅子吼)

 

 

회의론자들은

 

불자라면 누구나 윤회를 믿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회에 대하여 믿지 않거나 유보하는 불자들도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넷상의 토론사이트나 어느 스님의 법문에서 확인한 사항에 지나지 않지만 불자임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은 옛날부터 있어왔고 다른 불교국가에서도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이러한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마하시 사야도가 1960년대 초반에 법문한 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  미얀마에서 법문한 것인데, 법문집을 보면 그 때 당시에도 불교도이지만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의론자들은 한결같이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요즘 인터넷 토론사이트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칭 정법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조건발생적 연기와 윤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하다. 부처님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근본 가르침 뿐만 아니라 계율에 대한 가르침, 자비실천의 가르침, 수행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현실직시의 가르침 등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부간의 가르침이나 우정의 가르침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부처님의 사상이 방대한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를 중요시 한다. 바로 이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 연기법이다. 그런데 윤회는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회를 부정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다름아닌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연기법과 윤회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불교에서 연기법을 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로 표현되는 상호의존적 연기가 아니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로 표현되는 상호의존적연기와 조건발생적연기를 모두 만족시키는 연기를 말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따로 떼어 내어 법계연기 개념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연기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발생적연기가 실종된 것이다. 그 결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 중의 하나인 윤회사상이 그다지 강조 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우리말 중에 사람이 죽으면 '돌아 가셨다'라고 하는데 그런 말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닐까? 

 

윤회는 조건발생적연기로 설명가능한 것이다. 그런 조건발생적 연기는 십이연기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로 설명된다. 반드시 조건(paccaya)’라는 말이 들어 간다. 그래서 조건이 빠지면 조건발생적연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 상호의존적 연기는 어떤 경우에 사용될까?

 

상호의존적 연기와 재생연결식

 

십이연기에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에서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보았을 때 십이연기는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된다. 이때 식과 명색의 관계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라고 상호의존적 연기로 설명된다. 이런 관계를 설명해 주는 경이 있다. 디가니까야 인연의 큰 경(D15)’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 nidāna esa samudayo esa paccayo viññāassa yadida nāmarūpa. "

 

[세존]

아난다여, 참으로 명색이 의식과 함께 서로 조건이 되는 경우, 이와 같이 해서 태어나서, 늙거나, 죽거나, 사멸하거나 다시 태어난다.

 

(Mahānidānasutta- 인연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5,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식과 명색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명색이 의식과 함께 서로 조건이 되는 경우 (paccayo viññāassa yadida nāmarūpa)”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로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재생과 윤회에 대한 설명

 

재생연결식으로서 식과 명색의 관계는 도시의 경(S21.65)’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세존]

그때 수행승들이여, 내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전재성님역)

 

 

경에서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nāmaråpapaccayā viññāa, viññāapaccayā nāmaråpa)”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한문식으로 표현하면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식(名色緣識)이 된다. 바로 이 이구절이 식이 재생연결식으로사의 식을 말한다. 그래서 재생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이 명백히 재생과 윤회에 대하여 설명하였음에도 회의론자들은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감각적인지주의와 과학적실증주의

 

불자라면 부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런 부처님의 말씀은 빠알리니까야에 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불자라면 의심없이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깜냥에 비추어 이해가 되지 않았을 때 의심하게 된다. 윤회, 재생, 신통, 하늘나라 등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사성제나 팔정도, 사념처 등 수행과 관련된 가르침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넌센스이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된 것만 믿는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가장 먼저 찾아 오는 것이 노안이다. 작은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젊어서는 깨알 같은 글씨를 읽을 수 있었으나 어느 시점부터 돋보기 없이는 읽을 수 없다. 만일 돋보기 없이 깨알 같은 글씨를 읽을 수 없을 때 그런 글씨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을 경우 어떻게 될까? 시력이 상실 되었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 있던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을 과학의 시대라 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미신과 구별한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믿고 진리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만 같았던 이론도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폐기된다. 양자론의 등장으로 데카르트의 결정론이 폐기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래서 물리학에서는 이를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에서도 끈이론등과 이론이 끊임없이 새로롭게 발표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증명된 과학이론이 후대에 가서도 유지되리라고 볼 수 있을까?

 

자칭 불자라고 하면서 그것도 초기불교를 신봉한다고 하면서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말하는 회으론자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된 주장을 들어보면 지금 여기에서행복하기만을 바라는 현법열반론자들과 같다. 그래서 철저하게 현세주의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고,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태도이다. 이는 단멸론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모두 철저하게 감각적인지주의과학적실증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윤회, 신통 등이 나오는 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침이 틀림 없는 줄 알면

 

종교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없음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 사성제가 좋은 예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생노병사우비고뇌에 대하여 말씀 하셨을 때, 이를 자신의 삶과 틀림 없음을 확인하면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 이것이 불교적 믿음인 삿다(saddha, )’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가르침이 틀림 없는 줄 알면 나머지 부처님 말씀도 저항 없이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윤회, 신통에 대한 이야기일지라도 받아 들인다. 윤회, 신통에 대하여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을 유보는 할지언정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의 태도일 것이다.

 

초기경전에는 윤회, 신통 등 범부들의 깜냥으로 알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만약 그런 이야기가 모두 자신의 감각으로 인지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라 폐기한다고 하면 수용할 수 있는 경은 몇 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침이 진리인 것을 받아 들이는 불자라면 설령 자신의 감각적인지를 넘어선 것일지라도 과학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받아 들이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비록 윤회, 신통, 천신, 하늘나라에 대한 말이 있긴 하지만 그런 말을 매개로 하여 경전에서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마치 마라를 등장하여 부처님의 말씀과 반대의 견해를 펼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더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이 출현할 때

 

디가니까야에 자나바싸바의 경, D18)’이 있다. 하늘나라의 천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천신들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읽지 않는다면 자신만 손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부처님이 말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내용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을 읽으면 인식의 지평선을 넓혀 준다.

 

 

자나바싸바의 경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Obhaso pātubhavati, brahmā pātubhavissati, brahmuno heta pubbanimitta pātubhāvāya yadida āloko sañjāyati obhāso pātubhavatī ti.

"Yathā nimittā dissanti brahmā pātubhavissati,
Brahmuno heta
nimitta obhāso vipulo mahā ti.

 

[제석천]

벗들이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징조들이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Janavasabhasutta-자나바싸바의 경, 디가니까야 D18,전재성님역)

 

 

자나바싸바의 경은 부처님이 냐띠까 마을에 계실 때 설법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까씨, 꼬살라 등 여러 나라에서 신도들이 목숨이 다하여 죽어서 다시 태어난 사실에 대하여 설명한 경이다.

 

경에서는 신들의 집회가 열린 장면이 묘사 되어 있다. 그래서 사대왕천, 삼십삼천 등 욕계천상의 신들이 삼십삼천의 쑤담마 강당에 모였는데, 이때 신들의 제왕인 제석천이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ā) 이다. 경에서는 싸낭꾸마라 브라흐마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브라흐마는 욕계천상의 신들 보다 더 수승하다. 그리고 욕계천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하느님(브라흐마)가 나타날 때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전조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조 현상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태양이 떠 오를 때 일출이 먼저 성립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큰 사람이 등장할 때 그림자가 먼저 드리우듯이 신들을 지배하는 하느님이 등장할 때 빛을 먼저 보인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용모는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모습으로 출현할까? 경에 따르면 하느님의 본래의 모습은 서른 셋 하늘나라의 신들의 시야에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D18)”라 하였다. 같은 하늘나라의 천신들이지만 다른 세계에 사는 브라흐마(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하느님 싸낭꾸마라가 서른셋 하늘나라의 신들에게 출현할 때에는 거친몸으로 화현하여 출현합니다.(D18)” 라고 하였다. 이는 마치 대승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이 출현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대승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 인간의 몸으로 화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마도 이 부분을 모티브로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하느님이 출현할 때 먼저 빛을 내는 것 뿐만 아니라 거친몸으로 나툰다고 하였다. 욕계신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자신의 몸을 드러낸 하느님은 어떤 모양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야차]

세존이시여, 하느님 싸낭꾸마가 서른셋 하늘나라에 출현할 때에 그 용모와 명성은 다른 신들을 훨씬 능가하여 빛납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황금으로 만든 형상이 인간의 형상을 훨씬 능가하여 빛나듯, 세존이시여, 하느님 싸낭꾸마가 서른셋 하늘나라에 나타날 때에 그 용모와 명성은 다른 신들을 훨씬 능가하여 빛납니다.

 

(Janavasabhasutta-자나바싸바의 경, 디가니까야 D18,전재성님역)

 

 

여기서 야차는 경에 따르면 인간이었을 때 마가다국의 국왕 빔비사라왕을 말한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흐름에 든자가 되었는데 죽어서 야차가 된 것이다. 그런 야차가 부처님에게 하늘나라의 하느님의 용모에 대하여 설명한다.

 

경에서는 거친 몸으로 나툰 하느님의 용모에 대하여 황금의 비유를 들었다. 인간의 용모가 아름다울 때 빛난다고 말하는데, 그 빛남이 황금으로 된 용모와 비할 수 없음을 말한다. 마치 법구경 게송 13번과 14번 인연담에 나오는 난다이야기와 같다. 난다의 전처 자나빠다깔리야니가 삼십삼천의 천녀인 구족천녀와 비교 하였을 때 마치 암원숭이처럼 보였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인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일지라도 천상의 여인의 아름다움과 비교하면 원숭이와 같은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신들이 세계에서 조차 그런 차별이 있어서 하느님(브르흐마)의 용모를 황금빛으로 비유하여 매우 탁월한 용모를 가졌음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는?

 

천상에 사는 존재의 용모는 인간과 비교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용모를 인간 이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브라흐마)가 사는 천상의 용모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천상은 어떤 천상을 말할까? 아마도 천상에서 가장 수승하다고 여겨지는 정거천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거천은 불환자가 가는 곳으로서 그곳에 태어나 완전한 열반에 드는 천상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색계천상은 욕계천상과 달리 성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중성이다. 만일 관세음보살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자태를 드러냈다면 천상의 하느님 모습과 같은 것이라 본다. 중성의 이미지로서 인간의 용모를 능가하는 황금빛 나는 자태를 말한다.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를 보면 자태가 인간의 모습의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긴 하였으나 천인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고 목에는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된 영락을 걸치고,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은 비칠락 말락한 천의를 입고 있다. 더구나 얼굴을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 얼굴인데 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성의 이미지이다.

 

 

 

수월관음도

 

고려시대불화, 일본경신사 소장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빛나게 묘사 되어 있는 데 이런 이미지를 누군가 한 번 본다면 어떻게 될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정해질 것이다. 그래서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아 마음의 해탈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천인의 이미지로 묘사한 것이 아닐까?

 

여덟 가지 목소리

 

경에서 싸낭꾸마라 브라흐마(하느님)에 대한 설명을 보면 관세음보살 이미지가 생겨난 시초로 보여진다. 그런데 싸낭꾸마라 브라흐마는 용모 못지 않게 목소리도 다르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Sanakumārassa bhāsato aṭṭhagasamannāgato saro hoti: vissaṭṭho ca viññeyyo ca mañju ca savanīyo ca bindu ca avisārī ca gambhīro ca ninnādī ca.

 

[야차]

세존이시여, 하느님 싸낭꾸마라는 이러한 의취를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하느님 싸낭꾸마라가 이러한 의취로 말할 때 그 목소리는 여덟 가지 특징 곧,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갖추었습니다.

 

(Janavasabhasutta-자나바싸바의 경, 디가니까야 D18,전재성님역)

 

 

야차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비교할 수 없는 용모를 가진 하느님에 대하여 목소리 또한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여덟 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다.

 

심오하고 공명이 나는 목소리

 

법을 설하는 자라면 누구나 여덟 가지 목소리를 가지고 싶어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목소리 특징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Smv.640 에 따르면, ‘유창하고는 잘 통해서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하고, ‘지적이고는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고, ‘달콤하고는 감미롭고 부드럽다는 뜻이고, ‘또렷하고'는 듣기에 알맞고 귀에 즐겁다는 뜻이고, ‘낭랑하고는 일체가 되어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고, ‘분명하고는 명료하여 혼란이 없다는 뜻이고, ‘심오하고는 단전으로부터 깊이 일으킨다는 뜻으로 혀-이빨-입술-윗턱을 단지 움직이여서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감미롭지도 않고 멀리서 들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명하고는은 큰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린다는 뜻이다.

 

(여덟 가지 목소리 각주, 전재성님)

 

 

여덟 가지 목소리는 매혹적이다. 누구나 이런 목소리를 들으면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심오하고(gambhīro)’에 대하여 혀-이빨-입술-윗턱을 단지 움직이여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라 한다. 이처럼 배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마치 큰 북소리처럼 공명하는(ninnādī)’ 목소리가 될 것이다.

 

왜 학생은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지요?”

 

부처님의 형상에 대하여 32 82종호로 설명한다. 부처님이나 전륜성왕만이 갖출 수 있는 신체적인 특징을 말한다. 이렇게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신체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목소리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러나 자나바싸바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목소리가 어떠한지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다. 아마도 부처님의 목소리는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갖추었음에 틀림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육신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결코 여래는 볼 수 없으리라.

 

(金剛經, 26 法身非相分-법신비상분, 무비스님역)

 

 

금강경에서는 신체적 조건으로 또 음성으로 부처님을 찾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자는 결코 부처님을 볼 수 없으리라 한다. 하지만 금겅경에서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어지는 설명이 없다. 이는 구마라즙이 번역할 때 한 구절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후대 다른 금강경 번역을 보면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라는 문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뜻일까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문구의 원형이 빠알리니까야에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la vakkali. Ki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 dhamma hi vakkali, passanto ma passati. Ma passanto dhamma passati.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박깔리의 경-Vakkali sutta, 상윳따니까야 S22:87,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제자 박깔리는 부처님의 용모와 목소리에 반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법문할 때 법문을 듣는 것이 아니라 줄곧 부처님의 아름다움 용모만 쳐다 보는 것이었다.

 

만일 학교에서 학생이 선생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아름다운 얼굴만 쳐다 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선생님은 왜 학생은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지요?”라고 주의를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부처님의 얼굴과 목소리에 반하여 얼굴만 쳐다 보고 있는 왁까리에게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S22:87)”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금강경에 빠져 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지 못한다. 한줄이 빠짐으로 인하여 경이 심오해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디가니까야 자나바싸바의 경(D18)’은 범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육감으로 감각으로 인지도 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세계가 실재 하는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는 것이라고 말할 근거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믿을 수 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깜냥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경이 쓰여 있으면 믿는 것이다. 정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부정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유보 할 수는 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하는 것과 유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자가 많이 나온 이유는?

 

경에서 천신들의 용모와 목소리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특히 하느님(브라흐마)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범천계의 브라흐마는 욕계, 색계, 천상계를 대표하는 신이다. 그런 하느님이 나타날 때는 마치 해가 뜨기 전에 일출현상을 볼 수 있듯이 빛이 먼저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용모는 황금빛으로 비유하였다. 또 목소리는 유창하고, 지적이고,…’ 등의 여덟 가지 특징을 갖는 다고 하였다.

 

아마도 부처님이 이런 목소리를 가졌다고 본다. 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역시 이런 자태와 목소리를 가졌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자태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화를 주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도인이 나타나면 세상이 향기로워 진다고 하였을 것이다. 도인이 나타난 그 사실 자체가 세상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한 사람의 사기꾼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세상이 혼탁해질 것이다. 사기꾼이 출현한 그 자체만으로 세상이 오염되는 것이다.

 

그런데 32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진 부처님이 출현하였을 때 출현한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은 향기로워 지는 것이다. 더구나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가진 목소리로 사자후를 토하였을 때 어떠하였을까? 아마도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화 받아 청정하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초기경전에서 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흐름의 경지에 들었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라 본다.

 

누가 훌륭한 법사인가

 

오늘날 부처님의 형상을 볼 수 없다. 그리고 목소리도 들을 수도 없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은 경전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경전을 열어 보면 마치 마치 현전(現前)’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라는 법수념의 정형구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부처님이 계시지는 않지만 말씀만은 남아 있다. 그런 가르침을 전하는 자를 법사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법사라는 타이틀에 대하여 반드시 스님인 것을 지칭하지만 법을 여법하게 설하는 자는 모두 법사로 볼 수 있다. 반드시 머리를 깍고 가사와 장삼을 걸쳐야만 법사라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도 법을 전하는 것이고, 대중 앞에서 강연을 하는 것도 법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을 바르게 전하는 자는 모두 법사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훌륭한 법사의 조건은 무엇일까?

 

인터넷시대에 인터넷을 통하여 자주 법문을 접한다.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서 스님들이 주로 법문한 것들이디. 그런데 법문을 들어보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과 같은 대승경전이 주류를 이룬다. 그 중에 금강경이 가장 많다. 그래서 스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금강경 법문을 하였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가 번역 되어 나온지 10년이 넘었고, 또 위빠사나 수행이 시작된지 역시 10년이 넘었지만 초기불교에 대한 법문을 들어 보기 힘들다. 간혹 초기불교에 대한 법문이 있긴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 지나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행과 교학이 뒷받침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어진 한시간 채우기도 버거운 것이다.

 

교학만 많이 안다고 해서 훌륭한 법사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수행만 하였다고 하여 좋은 법사가 될 수 있을까? 교학과 수행을 겸비한 법사가 가장 이상적이다. 여기에다 목소리까지 갖추었다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묘원법사의 법문을 듣고

 

수행과 겸비한 법사가 있다. 더구나 목소리까지 겸비한 법사가 있다. 묘원법사이다. 최근 묘원법사의 법문을 인터넷으로 들었다. 원광보건대에서 강의한 법문이다. 이미 2009 50회 가량 직접 법문을 들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매우 목소리는 매우 익숙하다. 그런데 이번 원광대법문을 들으니 여덟 가지 목소리가 갖추어져 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묘원법사의 목소리 특징은 분명하고 또렷하고 공명이 있다. 어떻게 그런 목소리를 갖게 되었을까? 아마도 국문과 출신으로서 학창시절에 연극을 한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연극배우가 연극을 할 때 표준어를 사용하여 큰 목소리로 분명하고 또렷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런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 본다. 더구나 수행과 교학을 곁들여 전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법사로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본다. 그래서 묘원법사의 목소리를 들으면 경전에 표현 되어있는 것처럼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묘원법사 본인은 한사코 나는 법사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한국적 현실에서 스님이 아닌 자는 법사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법사라 부른다. 그런 묘원법사의 법문을 인터넷으로 들었다. 불자들이 궁금해 하는 사항은 모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상학 2; 의심에서 해방되는 연기(음성법문)

(원광대학교 강의 모음, 묘원법사)

출처 :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Mwqa/7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 사자후(獅子吼)

 

청법가에 덕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감로법을 주소서.” 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법은 청해야 설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도 세 번 청해야 법을 설할 수 있다. 만약 청하지도 않았는데 법을 설한다면 어떻게 될까? 듣는 이로 하여금 피곤하게 할 것이다. 마치 길거리에서 예천불지를 외치는 자들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청원경에서 사함빠띠가 세존이시여, 세상의 존귀한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요. 올바로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요.(S6.1)”라고 거듭 청원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청원하고 청법하여 법상에 올라간 법사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법상에 올라간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매우 다양하다. 마치 속삭이듯이 우물우물 말하는 스님이 있는 가 하면 마치 호통치듯이 ‘호통법문’하는 스님도 있다. 또 ‘겁나게’ 라든가 ‘억수로’로 같은 사투리를 쓰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는 사투리가 너무 심해 거의 알아 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스님은 주어진 시간을 다 채우느라 쩔쩔 매는 스님도 있고, 또 어떤 스님은 법문시간 내내 자신의 신변이야기로 때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일까 청중들을 보면 현저하게 주의력이 떨어진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던가 눈을 감고 있다든가 하여 현저하게 주의력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법상에 올라갔으면 사자후를 토해야 한다. 그런 사자후는 어떤 것일까? 사자후는 당당하고 의미있는 선언을 말한다. 그것은 최상의 지혜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런 목소리는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갖는 것이 아닐까? 심오한 공명소리는 최상의 지혜를 갖추었을 때 당당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2013-09-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