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세간의 법과 여덟 가지 출세간의 법
일요일 이른 오후 산행을 하였다. 목표는 관악산에 있는 ‘국기봉’이다. 관악산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검색을 하여 보니 높이가 525미터이다. 관악산 최고봉의 높이가 632미터이니 약 100미터 이상 차이가 난다.
국기봉을 향하여
국기봉에는 항상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그런 연유로 하여 국기봉이라 하였을까? 국기봉으로 향하는 길은 늘 다니던 등산로이다. 지난 십수년가 수 없이 다니던 길이다. 최근에는 뜸 하였지만 다리에 힘도 기를 겸 오랜만에 등산을 하기로 하였다.
등산로 입구에 들어 서자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송신탑이 보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지만 남쪽에서 바라보니 국기봉이 더 높아 보인다.
열매가 다발을
관악산 가는 길에 가을이 시작 되려 하고 있다. 아직 단풍이 들진 않았지만 나무에는 열매가 맺어져 있다. 등산로 바로 입구 절 옆에는 이름 모를 나무의 열매가 다발을 이루고 있다. 이 열매나무 이름은 무엇일까?
도시가 한눈에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 되었다. 오랜만에 등산해서 일까 다리도 아프고 숨도 차서 몹시 힘들다. 언제 저 높은 곳까지 올라 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나 한발 한발 발을 들여 놓고 천천히 가파른 길을 올라 서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남쪽을 바라 보니 도시가 한눈에 들어 온다.
이곳에서 부터는 능선길이다. 국기봉까지 죽 능선길이 이어진다. 이런 능선길은 관악산 남사면 등산로의 최대 장점이다. 다른 등산로의 경우 계곡길이어서 지루하지만 바위를 타는 능선길은 등산하는 맛을 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고
마침내 해발 525미터의 국기봉에 도착하였다. 국기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태극기가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고 있다.
송도신도시의 고층빌딩이
국기봉에서 사방을 둘러 보았다. 맑게 개인 날씨이어서일까 시야가 매우 좋다. 서쪽을 보니 서해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지도상 수십키로 미터 떨어져 있지만 송도신도시의 고층빌딩이 눈에 들어 오고 그 너머에 햇볕에 반사되어 빛나는 바다가 보인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수리산 자락에 안양시와 군포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거대하게 펼쳐져 있다.
서울대공원과 경마장이 눈에
동쪽에는 과천시가 보인다. 서울대공원과 경마장이 눈에 들어 온다.
어마어마한 인공구조물의 연속
과천을 지나 저 너머에 동쪽 서울이 보인다. 흔히 강남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아스라이 보이지만 어마어마한 인공구조물의 연속이다. 이를 줌인하여 보았다.
저 산너머에도
서울은 크고도 넓다. 동쪽 서울에만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북쪽에는 거대한 구조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산머너 있는 서울의 강서에 해당한다.
국기봉에서 사방 팔방을 둘러 보았다. 보이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인공구조물들이다. 어디를 보나 백색의 고층아파트와 고층빌딩이 눈에 띈다. 이 와중에 너무 작은 주택은 존재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 같다.
아파트 한채를 위하여
높은 곳에 서니 하늘에는 구름이고 땅에는 아파트가 보인다. 흘러가는 구름과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아파트단지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구름이 무상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아파트 단지는 영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산처럼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그런 곳에서 뭇삶들은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살고 있고 내일도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아파트 한채를 소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목숨을 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올인한다. 심지어 빚을 내서라도 장만하고자 한다. 아파트 한채 소유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파트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별이 생긴다. 가진 자는 마치 든 자처럼 우쭐하고 자만심을 갖지만 못 가진 자는 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늘 패배자처럼 살아 간다. 그래서 아파트 한 채를 가지기 위하여 옆도 보지 않고 뒤돌아 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며 모든 노력을 쏟아 붓는다.
그 밥에 그 나물이고 ‘도친개친’인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니 세상이 발아래에 있다. 저 멀리 백색의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은 너무 작아 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모두 다 똑같아 보인다.
30평짜리나 50평짜리나 높은 곳에서 보면 구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30평을 성취하였다면 이번에는 50평을 목표로 한다. 그 과정에서 탈법과 불법이 난무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낮은 지위에서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고자 한다. 높은 지위로 올라갈수록 명예와 권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흑색선전, 권모술수가 난무하기도 한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보았을 때 그 밥에 그 나물이고 속된말로 ‘도친개친’이다.
계급장 떼고 붙어 보자는 말이 있는데, 소유자의 재산과 지위를 모두 떼어 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아마도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법과 탈법, 그리고 불로소득이라는 행위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높은 지위로 올라 가는 과정에서 남을 짓밟고 간 행위만 남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좋은 의지처인가?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일구어낸 재산은 죽어서 가져 가지 못한다. 마치 내것처럼 세상을 호령하지만 죽었을 때 그 지위를 결코 가져 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가져 가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지은 행위이다. 삶의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를 가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 그런 업보가 현생이 될 수도 있고 내생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하늘사람]
“무엇이 늙을 때까지 좋고,
무엇이 좋은 의지처이며
무엇이 인간의 보물이고
무엇이 도둑이 빼앗기 어려운 것인가?”
[세존]
“계율이 늙을 때까지 좋은 것이고
믿음이 좋은 의지처이며,
지혜가 인간의 보물이고
공덕이 도둑이 빼앗기 어려운 것이네.”
(늙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 전재성님역)
욕망의 바벨탑
산높은 곳에서 발아래 세상을 보면 장관이다. 하늘과 산과 어울린 백색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보면 인간이 이룩해 놓은 결과에 대하여 감탄한다. 작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들이 어떻게 저런 거대한 인공구조물을 만들어 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그래서 기적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의 바벨탑’과도 같은 것이 도시이다. 그러너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이 도시 내부를 줌인하여 보면 그곳에는 인간의 악취나는 욕망의 배설물로 가득하다. 그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간의 법’이라 한다.
불교에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있다. 세간법은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법을 말한다. 그러나 출세간법은 세간의 흐름과 반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세간법과 출세간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팔풍(八風)이 있는데
묘원법사의 원광대 강연 ‘관념과 실재’ 를 듣다가 여덟 가지 세간의 법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세간에는 여덟 가지 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팔풍(八風)’이라 한다. 왜 팔풍인가?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이란 무엇일까?
묘원법사는 여덟 가지 세간의 법에 대하여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라 하였다. 네 가지 쌍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세간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한다.
이익에는 손실이 따른다. 장사나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항상 이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손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예를 추구하지만 과도하게 집착하다 보면 불명예로 바뀔 수 있다. 황우석박사가 좋은 예일 것이다. 그리고 칭찬들었다고 우쭐하지 말라고 한다. 마치 인기연예인의 ‘광팬’이 하루아침에 ‘스토커’로 돌변하듯이 칭찬이 언제 비난으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도 항상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것은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 행복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불행으로 변한다.
그래서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렇게 여덟 가지가 마치 바람타듯이 흔들린다 하여 ‘팔풍’이라 하였다. 이것이 세간에서 보는 일상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망갈라경(길상경, Sn2.4)에서
여덟 가지 세간의 법에 대해서 숫따니빠따에서 보았다. 각주에 언급된 것을 본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 수 있다.
Phuṭṭhassa lokadhammehi 풋탓사 로까담메히
cittaṃ yassa na kampati, 찟땅 얏사 나 깜빠띠
Asokaṃ virajaṃ khemaṃ 아소깡 위라장 케망
etaṃ maṅgalamuttamaṃ. 에땅 망갈라뭇따망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Maṃgalasuttaṃ-위대한 축복의 경, 숫타니파타Sn 2.4, 전재성님역)
초기불교를 접한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길상경’이다. 초불연에서는 ‘큰 행복 경’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미산스님은 ‘최상의 행복경’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런 제목은 잘못된 것이다. 빠알리어 망갈라(Maṃgala)는 행복이라는 뜻 보다 ‘행운, 축복, 길상, 상서로운 조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길상으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위대한 축복의 경’이라 번역하였다.
길상경에서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쳐도(Phuṭṭhassa lokadhammehi)”구절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묵스님은 ‘세상사에 부딪쳐’라 하였고, 미산스님은 ‘세상의 온갖 일에’라 하였다. 하지만 각묵스님이나 미산스님 모두 세상사와 세상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또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아도 ‘세상사’에 대하여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망갈라경에서 ‘세상살이’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 ‘얻음, 잃음 등의 여덟 가지 세속적인 것을 말한다.(Prj.I.1530)”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AN.IV.156-160에 따르면, 그 여덟 가지 세속적인 것이란 ‘얻음, 잃음, 명예, 치욕, 비난. 칭찬, 행복, 불행을 말한다.”라고 각주 하여 놓았다. 앞서 묘원법사가 언급한 팔풍, 즉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과 일치한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팔풍’이라 불리우는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이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묘원법사는 경전적 근거 없이 팔풍에 대하여 설명하였지만 경의 각주에 따르면 AN.IV.156-160라고 되어 있다.
여덟 가지 세간의 법
‘AN.IV.156-160’의 뜻은 PTS본 기준으로 앙굿따라니까야 4권 156페이지에서 160페이지에 있다는 뜻이다. 검색하여 마침내 경전적 근거를 찾아 내었다.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은 앙굿따라니까야 8권에 있었다. ‘세상의 원리의 경1(Paṭhamalokadhamma suttaṃ, A8.5)’과 ‘세상의 원리의 경2(Dutiyalokadhamma suttaṃ, A8.6) 이렇게 두 개의 경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세간의 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ṭṭhime bhikkhave, loka dhammā lokaṃ anuparivattanti, loko ca aṭṭhalokadhamme anuparivattati. Katame aṭṭha:
Lābho ca alābho ca ayaso ca yaso ca nindā ca pasaṃsā ca sukhaṃ ca dukkhaṃ ca, ime kho bhikkhave aṭṭhalokadhammā lokaṃ anuparivattanti, loko ca ime aṭṭhalokadhamme anuparivattatīti.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세상은 다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을 돌아가게 한다. 무엇이 여덟인가?”
“그것은 이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세상은 다시 이러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을 돌아가게 한다.”
(세상의 법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초불연 대림스님역)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은 lābha(gain)와 alābha(loss), ayasa(ill repute)와 yasa(fame), nindā (blame)와 pasaṃsā (praise), sukha(pleasant, happy)와 dukkha (pain)이다. 이중 ‘sukha와 dukkh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번역하였고, 성전협에서는 ‘행복과 불행’이라 하였다.
문장을 보면 초불연에서는 “세상은 다시 이러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을 돌아가게 한다.”라 하였다. 번역이 어색해 보인다. ‘세상이 세상을 돌아 가게 한다’라고 능동으로 번역하였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에서는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라 하여 수동으로 번역하였다.
범부와 현자의 차이는?
경에 따르면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잘 배운 고귀한 제자에게도 역시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이 생겨 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에게 이득이 생겨나면, 그는 ‘이러한 이득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불이익이 상겨나면 ‘이러한 불이익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Dutiyalokadhamma suttaṃ-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배우지 못한 범부와 잘 배운 고귀한 제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범부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득이나 명예, 칭찬, 행복이 발생하면 그것이 영원히 계속 될 줄 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는 여덟 가지 세간의 원리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이득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다.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경에서는 산문과 게송이 섞여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대승경전 법화경에서는 “그 때 세존께서는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을 말씀하셨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는 그런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곧바로 게송이 이어진다. 이는 게송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로까담마경(Dutiyalokadhamma suttaṃ, A8.6)에서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1. Lābho alābho ayaso yaso ca
Nindā pasaṃsā ca sukhañca3 dukkhaṃ,
Ete aniccā manujesu dhammā
Asassatā viparīnāmadhammā.
2. Ete ca ñatvā satimā sumedho
Avekkhati viparīnāmadhamme
Iṭṭhassa dhammā na mathenti cittaṃ
Aniṭṭhato no paṭighātameti.
3. Tassānurodhā athavā virodhā
Vidhūpitā atthagatā na santi,
Padañca ñatvā virajaṃ asokaṃ
Sammappajānāti bhavassapāragūti.
“이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
인간들과 함께 하는 이러한 법들은 무상하며
영원하지 않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
이를 알고 마음챙기는 영민한 자는
변하기 마련인 법들을 비추어 보아서
원하는 것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에서 반감이 생기지도 않나니.
그에게는 순응함과 적대감이
흩어지고 사라져 존재하지 않으리.
티끌 없고 슬픔 없는 [열반의] 경지를 알고
존재의 저 언덕에 도달하여
이를 바르게 꿰뚫어 아노라.”
(세상의 법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초불연 대림스님역)
[세존]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이러한 인간의 원리들은
항상하지 않고 변화하고야 마는 것이네.
이러한 것들을 알고 새김있고 현명한 님은
변화하고야 마는 것들을 관찰한다.
원하는 것이라도 그의 마음을 교란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도 혐오를 일으키지 못하네.
그것에 대하여 매혹이나 혐오는
파괴되고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으니
경지를 알고 티끌의 여읨과 슬픔의 여읨을 올바로 알아
님은 존재의 피안에 이르네.
(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은 변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한 사실을 알았을 때 마치 바람과 같은 여덟 가지 팔풍에 끄달리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여덟 가지 출세간의 법은 무엇인가?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이 있으면 반대로 여덟 가지 출세간의 법도 있어야 할 것이다. 여덟 가지 출세간의 법은 무엇일까? 묘원법사의 설명에 따르면 여덟 가지 출세간의 법은 ‘팔정도’라 하였다. 그래서 세간법은 ‘관념의 세계’이고 출세간법은 ‘실재의 세계’라 하였다.
세간에는 세간의 법이 있다. 세간법은 인간이 살아가는 하나의 질서가 있는 세계이다. 그런 세계는 다름 아닌 ‘윤회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라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반면 출세간에는 출세간의 법이 있다. 출세간법은 인간이 윤회하는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질서 있는 법을 말한다. 그것이 팔정도이다. 그래서 팔정도에 의해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 팔정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된다.
katamo ca bhikkhave,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īdaṃ: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Vibhaṅ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팔정도는 여덟 가지이다. ‘바르다’는 의미로 모두 ‘삼마(sammā)’가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여덟 가지 원리에 대하여 ‘ariyo aṭṭhaṅgiko maggo’라 하였다. 고귀하고 성스런 여덟 가지 원리인 것이다. ‘고귀하고 성스럽다’는 뜻의 ‘아리야(ariya)’가 들어 있어서 문자적으로 보아도 팔정도가 출세간의 법임에 틀림 없다.
과연 저렇게 해도 되는지
국기봉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장관이다. 인간의 욕망이 이루어낸 거대한 인공구조물을 보면 ‘과연 저렇게 해도 되는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관악산에서 사방 팔방을 보아도 온통 콘크리트 구조물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악산 주변에 보는 인공구조물에 사는 사람들 숫자는 천만이 넘을 것이다. 서울이 천만이고 경기도가 천만이 넘으니 관악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약 천오백만만명이라 보여진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 것일까? 전기와 수도는 어떻게 공급될까? 또 쓰레기는 얼마나 많이 나올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실로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수도와 공급이 끊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가 공급되지 않아 교통대란이 일어나면 도시는 어떻게 될까?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개미집만 같고 구더기 같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이라는 여덟 가지 세간의 법으로 살아 간다. 그래서일까 서산대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萬國都城如蟻垤 만국도성여의질
千家豪傑若醯鷄 천가호걸약혜계
一窓明月淸虛枕 일창명월청허침
無限松風韻不齊 무한송풍운부제
만국 도성은 개미집 같고
온 세상의 영웅호걸은 구더기 같도다.
창밖의 밝은 달을 베게삼고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 소리 곡조도 다양하다.
(서산대사)
서산대사(1520-1604)의 ‘등향로봉(登香爐峯)’이란 게송이다. 서산대사가 묘향산의 향로봉에 올라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그 감회를 적은 것이라 한다.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인간 세상의 모습들을 보니, 만국의 도성은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개미집만 같고 거기서 살던 이름 있던 영웅호걸들도 한낱 구더기처럼만 생각된다는 것이다.
국기봉에서 본 사방팔방의 거대한 인공구조물도 마치 거대한 개미집처럼 보인다. 더구나 그 속에서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라는 세간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똥구덩이속의 구더기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
사람들은 주말에 산을 찾는다. 일요일 오전 잘 차려 입고 교회로 향하는 사람도 많지만 등산복 차림으로 산에 오르는 사람도 매우 많다. 왜 산을 찾는 것일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일 것이다.
비록 세간에 살며 이득과 불익,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에 시달리지만 일단 산에 들어 가면 잊어 버린다. 더구나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면 세상이 발 아래 있다. 마치 개미집 같고 똥 구덩이 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이다. 바로 이 맛에 산에 가는 것은 아닐까?
Selo yathā ekaghano 셀로 야타 에까가노
vātena na samīrati 와떼나 나 사미라띠
evaṃ nindāpasaṃsāsu 에왕 닌다빠상사수
na samiñjanti paṇḍitā 나 사민잔띠 빤디따.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
(법구경 Dhp81, 전재성님역)
2013-10-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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