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 논란의 고양이의 경(S20.10)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19. 10:52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 논란의 고양이의 경(S20.10)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넷상에서 논쟁이 뜨겁다. 몇 일전 올린 글이 있다. 고양이와 쥐에 대한 것이다. 비유품으로 볼 수 있는 오빵마상윳따(S20)에 고양이와 쥐의 비유를 들어 여인과 수행자의 이야기를 올렸는데 일부 네티즌들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는 초불연 번역과 성전협 번역이 정반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제기된 문제라 본다. 그렇다면 문제된 내용은 무엇일까?

 

글을 올리면 댓글을 받는다. 그런데 댓글 유형을 보면 두 가지중의 하나이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댓글을 보면 본문에 대하여 긍정적 아니면 부정적이다. 반론을 제기한 법우님들의 글은 부정적인 글이다. 그 중 두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승복의 권위

 

한국불교에 승복의 권위가 있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은 스님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똑 같은 조건이라면 스님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다. 번역도 마찬가지라 보여 진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초불연(초기불전연구원)과 성전협(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번역서이다.  초불연의 번역물은 출가 스님이 번역한 것이고, 성전협의 번역물은 재가의 학자가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번역서를 대했을 경우 불자들은 대체로 스님편을 들어 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스님들이 수행을 많이 하였고 불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서의 스님은 인천의 스승이라 하여 천인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로 유발의 속복을 입은 재가불자 보다 삭발의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을 더 인정해 주는 것 같다. 이것이 승복의 권위이다.

 

승복의 권위를 인정하는 듯한 글을 주신 법우님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보디스님과 초불연 두곳에서 동일한 번역이고 한분이 다른 번역이면, 당연히 그 한분이 "왜 정반대의 번역을 하였지?"라고 해야 올바른 접근이 아닐까요?

 

(S법우님)

 

 

S법우님에 따르면 내용이 동일한 번역물이 많은 것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초불연과 빅쿠보디의 CDB의 내용이 같기 때문에 초불연의 손을 들어 주고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승복의 권위가 작용하였을 것이라 본다.

 

번역자의 역량에 따라

 

초불연의 번역자와 빅쿠 보디는 승려이다. 승려이긴 하지만 번역을 주로 하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자면 번역승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승려로서 수행도 하고 번역을 하기 때문에 번역을 더 잘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법구경에서 '머리가 희다고 해서 모두 장로가 아니듯이 (Dhp260)'라는 말이 있듯이 승려가 번역한 것이라고 해서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번역자의 역량에 따라 좋은 번역도 될 수 있지만 역량이 되지 않으면 그저 그렇고 그런 번역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번역이라는 것이 수행의 힘이나 신심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이나 신심이 필요조건이 될지 모르나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가 번역을 하여야 할까? 수행과 신심의 바탕을 기본으로 하여 인문학적 언어학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문학, 철학 등 인문학적 지식과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영어는 물론 독일어, 일본어, 티벳어 등 언어적 소양이 겸비 되어야 한다고 본다.

 

빠알리니까야의 경우 언어적 소양뿐만아니라 문학적 상상력도 필요로 한다. 특히 게송의 경우 뜻이 고도로 압축되어 있고 상징적으로 표현 되어 있기 때문에 전후 문맥을 파악하지 않으면 정확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렇게 번역자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매우 많다. 단지 스님이 번역한 것이라 하여 맹목적으로 믿는다면 이는 깔라마경에서 보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깔라마의 경(A3.65)에서

 

깔라마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당연히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러울 것이다. 미덥지 못한 곳에 의심이 일어난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깔라마경, 앙굿따라니까야 A3:65, 대림스님역)

 

 

[세존]

“깔라마들이여, 당신들이 미심쩍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의심스러운 것은 미심쩍은 일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깔라마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악하고 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식자에게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여 받아 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깔라마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5, 전재성박사역)

 

 

깔라마경을 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이 아니다라든가 유명하다고 해서 모두 다 훌륭한 것은 아니다”와 같은 말이다. 스승의 말이라 하여 무조건 믿지 말라는 것이다. 스승의 말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버릴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A3:65)”라고 하였다.

 

 깔라마경에서는 권위에 의존하지 말라고 하였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기 때문에 빅쿠가 말한 것이 틀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스승이 한 말이라도 그 말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맞지 않다면 따르지 않아도 됨을 말한다.

 

번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스님들이 번역하였다 하여 재가의 학자가 번역한 것 보다 더 낫다고 보는 것은 바르지 않다. 더구나 정반대의 번역에 있어서 스님이 번역한 것이 외국의 비구가 번역한 것과 같은 내용이라 하여, 또 같은 내용의 번역이 많다고 하여 숫자를 들어 판단하려 한다면 깔라마경의 가르침에 위배 된다.

 

고양이를 탁발수행자로 비유한 경우

 

고양이의 경(S20:10)은 두 종류의 번역서에서 정반대로 표현 되어 있다. 그 시발점이 되는 것은 고양이와 쥐의 관계이다. 초불연에서는 고양이가 쥐로 인하여 고통받는 것으로 되어 있고, 성전협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쥐가 고양이로 인하여 고통받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빠알리어 문구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에 따른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초불연)”라 번역하였고, 성전협에서는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성전협)”라 하였다.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반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정반대의 번역에 대하여 의견을 주신 법우님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 비유를 받아들인다면 고양이가 수행승이고,     쥐가 여자를 보고 생긴 탐심이라고 봐야겠지요.     고양이가 쥐를 보자 통채로 삼키듯,     수행자가 여자를 보고 탐심이 생겼다고 그대로 꿀꺽 받아들인다면 고통받을 거라는 이야기지요. 

 

(G법우님)

 

 

G법우님은 고양이를 수행승으로, 그리고 쥐를 여자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수행자가 여자를 보고 탐심이 생겨서 고통이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초불연의 번역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왜 이와 같은 입장이 되었을까? 이는 "고양이가 쥐를 씹지도 않고 삼켰다" 라는 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빠알리 원문에 “Tamena biālo gahetvā asakhāditvā ajjhohari.” 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고양이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 (초불연 각묵스님역)”라고 언급된 것에 기인한다. 고양이가 쥐를 통째로 삼켜 버리자, 고양이 뱃속에 들어간 쥐가 고양이의 창자를 물어 뜯어 고양이가 죽음 또는 죽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는 초불연 해석에 대한 것이다.

 

수행처에서 늘 알아차림을 강조하는 이유

 

G법우님이 반론을 제기한 글을 보면 탐심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그래서 고양이가 쥐를 보고 잡아 먹아야 겠다는 탐심이 일듯, 탁발수행자가 가벼운 옷차림을 한 여인을 보고 욕정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법은 문제가 있다.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탐심이나 욕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강조 되고 있는 사띠(새김, 마음챙김, 알아차림)’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압축하면 37조도품이 되고, 38조도품을 압축하면 팔정도가 되고,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정혜 삼학은 사띠로 귀결된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에 대하여 대승에서는 마음 심()’자 하나로 귀결 된다라고 하였지만, 초기불교 교학과 수행처에서는 방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단어로 표현 하면 사띠라 하였다. 이렇게 사띠는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에 있어서 절대적이다. 그래서 수행처에는 늘 알아차림을 강조한다.

 

탐심이나 욕정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다만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이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서 욕정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욕정이 일어 났네하며 알아차리면 그뿐이라고 수행처에서는 말한다. 탐욕이나 욕정에 끄달려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탁발비구가 사띠를 확립 하지 않았을 때

 

 고양이의 경(S20.1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구가 탁발을 나갔을 때 사띠를 확립하지 않으면 재난을 겪을 수 있다. 그 재난 이라는 것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한 것이다. 눈이나 귀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수호하지 못하였을 때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따른 재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탁발비구의 탐욕이 아니라 사띠를 확립 하지 않았을 때 겪는 재난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와 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Tamena biālo gahetvā asakhāditvā ajjhohari.”라는 표현이 문제가 된다. 번역하면 고양이(biālo)가 씹지도 않고(asakhāditvā) 통째로(ajjhohari) 먹었다(gahetvā)”라는 내용이다. 통째로 먹었기 때문에 고양이 뱃속에 들어간 쥐가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어서 고양이가 죽을 고통을 당하였다고 해석한 것이 초불연과 CDB의 번역이다. 이런 구도로 번역이 되다 보니 G법우님의 지적대로 수행자가 여자를 보고 탐심이 생겨라고 하여 탐심에 포커스를 둔 것이다.

 

그러나 사띠에 포커스를 두면 180도 달라진다. 쥐구멍을 노려 보고 있는 고양이가 가해자가 되고,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먹이를 찾으려고 쥐구멍을 나오는 생쥐는 피해자가 된다. 이를 수행자와 여인으로 대비시켜 놓고 설명할 수 있다.

 

상반된 두 번역을 비교해 보면

 

탁발수행자가 사띠를 확립하지 않고 거리에 나왔을 때 가벼운 옷차림을 한 여인에게 욕정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욕정이 일어난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자라면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념처에서 32가지 신체부위를  관찰하는 수행이나 10가지 부정관 수행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탁발중에 사띠를 확립하였다면 욕정에 따른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불연 번역

가해자

경전적 근거

피해자

경전적 근거

생쥐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

(초불연, S20.10)

고양이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

(초불연, S20.10)

여인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여인을 본다 (S20.10)

수행승

여인을 보고서 애욕이 그의 마음을 물들게 한다. 그는 마음이 애욕에 물들어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된다.

(S20.10)

 

 

 

성전협 번역

가해자

경전적 근거

피해자

경전적 근거

고양이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S20.10)

생쥐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S20.10)

여인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한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S20.10)

수행승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S20.10)

 

 

위 두 표는 정반대의 번역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비교표 이전에 고양이와 쥐의 관계설정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지난 번 글쓰기에서는 표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고양이와 쥐, 여인과 수행자의 관계에 대하여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모두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한 고양이가 어린 쥐 한마리를 쫓아 하수도의 쓰레기 더미 위에 서서 '이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오면 그때 내가 그를 잡아먹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Cat & Mouse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이나 거리로 들어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주의 깊음에 머물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고양이의 경, S20.10, 전재성님역)

 

 

경에서 고양이는 쥐가 나오는 쥐구멍을 지켜 보고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오면 그때 내가 그를 잡아먹어야지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는 초불연의 번역에서도 그 고양이느 뒷골목과 하수구외 쓰레기통에서 만일 생쥐가 이곳에 나타나면 나는 그놈을 먹어버리라.’라고 생각하면서 생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라고 표현 되어 있어서 성전협 번역과 같은 내용이다.

 

이렇게 고양이는 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쥐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먹이를 찾으러 쥐 굴 밖으로 나온다. 그래서 경의 문맥을 파악하면 사띠가 확립되지 않은 탁발수행자를 생쥐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의 내용을 다 파악하지 않고 일부 구절로만 판단한다면 고양이를 탁발수행자로 착각 할 수 있다. 그래서 문맥으로 파악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맥으로 파악하였을 때 쥐구멍을 지켜 보는 고양이는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으로 비유 된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먹이를 구하러 쥐구멍을 나온 생쥐는 사띠가 확립 되지 않은 탁발수행자로 비유된다.

 

성자를 유혹하는 아낙네

 

초기경 도처에는 수행자를 유혹하는 여인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도고마성이라고 특히 수행의 정도가 높을수록 여인의 유혹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Uccāvacā ticcharanti dāye aggisikhupamā,
N
āriyo muni palohenti tā su ta mā palobhayu.

 

 

(703) 가령 동산의 숲속에 있더라도 불꽃처럼 여러 가지가 나타난다. 아낙네는 성자를 유혹한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말라.

 

(법정스님역)

 

 

[세존]

가령 숲 속에 있더라도

불의 화염 같은 높고 낮은 것들이 나타나고,

아낙네는 해탈 자를 유혹합니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요.  

 

(날라까의 경, 숫따니빠따 Sn3.11,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수행자는 숲속에 살았다. 그리고 탁발에 의존하였다. 그렇게 하여 성자가 되었지만 항상 유혹의 위험에 노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아낙네는 해탈 자를 유혹합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아낙네라 함은 숲속으로 놀러 오거나 땔감을 구하러 온 여인을 말한다. 특히 도덕적 관념이 희박한 여인은 성자를 유혹하려 할 것이다. 도를 많이 닦아 도력이 높은 성자를 유혹하여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이는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행실이 나쁜 여인들은 성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치 예쁜꽃을 보면 꺽고 싶듯이, 홀로 있는 수행자를 꺽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요.”라고 하였다.

 

땅하(taha)와 아라띠(arati)와 라가(raga)

 

수행자를 유혹하는 이야기가 또 있다. 부처님이 성도 직전에 겪은 이야기이다.

 

 

Disvāna taha arati ragañcā-
N
āhosi chando api methunasmi,
Kimevida
muttakarisapuaa
P
ādāpi na samaphusitu na icchi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예전에 도를 닦을 때에 애착과 혐오와 탐욕이라는 세 마녀(魔女)를 보고도 그녀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욕망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줌 똥으로 가득 찬 그 여자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그녀들에게 발을 대기조차 싫었다."

 

(법정스님역)

 

 

1. [세존]

 땅하와 아라띠와 라가를 보고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두 발조차 그것을 건드리길 원하지 않습니다.

 

(Māgandiyā sutt-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 숫따니빠따 Sn4.9, 전재성님역)

 

 

경에서 땅하(taha)와 아라띠(arati)와 라가(raga)는 악마의 딸의 이름이다. 각각 갈애(taha)와 혐오(arati)와 탐욕(raga)이라 번역할 수 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악마(마라)는 세 명의 딸을 부처님에게 보내 유혹하려 한다. 성도를 방해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경의 설명에 따르면 이와 다르다.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사왓티에 계실 때였다. 꾸루국의 바라문인 마간디야는 마간디야라는 황금색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는 딸을 황금색 피부를 가진 배우자와 혼인시키려 하였다. 많은 귀족들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바라문은 탐탁치 않게 여겼다.

 

어느 날 부처님은 사왓티에서 나와 깜마사담마라는 총림에 앉아 금색의 광명을 비추었다. 바라문은 그 빛을 보고는 ‘그것이 무엇일까’ 라고 생각했는데 부처님인 것을 알고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동일한 피부를 가진 부처님께 자신의 딸을 주려고 생각했다.

 

그는 급히 집으로 가서 아내에게 말했다. ‘딸과 동일한 피부를 가진 남자를 발견했으니 딸을 치장시켜 그에게 줍시다. 그래서 바라문의 처는 딸을 향수로 목욕시키고 의복 꽃 장식으로 치장했는데 그때 세존께서 탁발하는 시간이 되었다.

세존께서는 깜마사담마로 탁발을 나갔다. 그들이 딸을 데리고 부처님이 앉아 있던 곳으로 왔으나 세존께서 사라진 것을 알았다. 마간디야의 아내는 그 앉아있던 자리의 풀로 만들어진 자리를 보고는 앉아계시던 분은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라문 마간디야는 ‘축복의 순간에 불길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나서 바라문의 처가 여기저기 걷다가 부처님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마간디야의 아내는 그 발자국을 보고도 그 발자국의 주인은 욕망에 묶여있지 않은 분이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욕망에 물든 자의 발자국은 굽어있고, 분노한 자의 발자국은 끌려 있고, 어리석은 자의 발자국은 급히 눌려 있으나, 번뇌를 걷어낸 자의 발자국은 이와 같다’고 말했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식사를 끝내고 총림으로 돌아왔다. 바라문의 아내는 상서로운 광명으로 가득 찬 세존을 보고는 ‘이런 분을 보고 욕망을 즐기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바라문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세존은 풀로 만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바라문은 왼쪽 손으로 딸을 잡고 오른 손에 물병을 잡고는 다가가서 ‘수행자여, 그대가 금색이고 나의 딸도 마찬가지니 잘 어울릴 것입니다. 아내로서 맞아 주십시오. 때가 없는 청정한 딸을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바라문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처럼 이 경을 설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청정은 내적인 평화에서 오는 것임을 설했다.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 해제, 전재성님)

 

 

경의 해제글에 따르면 바라문이 자신의 딸을 부처님과 결혼 시키고자 함을 알 수 있다. 단지 피부가 황금색으로 같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번뇌가 다한 부처님에게서 성자를 유혹하는 세 딸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 딸에 대하여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는 경에서 그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띠가 확립 되어 있는 부처님에게 성자를 유혹하는 여인은 32가지 신체 기관과 10가지 부정관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띠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지금 여기에서 무상, , 무아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왜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사띠는 단지 대상에 대하여 마음챙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음을 말한다. 배운것을 끊임 없이 기억해 내고 되새기고 사유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사념처에 실려 있는 내용을 외울 필요가 있다. 외우고 되새긴다는 것은 경계에 부딪쳤을 때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경에서와 같이 옷을 가볍게 걸친 여인을 보았더라도 여인으로 보지 않고 오온으로 본다든가 하는 것 등이다.

 

청정도론에 마하띳사(Maha-Tissa)장로 이야기가 있다. 집나간 여인이 장로를 꼬시기 위하여 씨익하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을 때, 10가지 부정상 수행을 한 장로의 눈에는 여인이 해골바가지로 보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현상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려야 된다는 것이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함부로 글을 쓰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온다.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검색창에 필명의 두 세글자만 입력해도 빨간 글씨로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필명이 다 뜨는 것을 보았다. 불교신문을 입력하였을 때 불교관련 매체 사이트 뿐만 아니라 필명과 구블로그 이름까지 뜨는 것을 보았다. 마치 오마이뉴스를 입력하면 프레시안,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 관련 사이트가 자동으로 뜨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다보니 글쓰기도 신중해졌다. 그래서 함부로 글을 쓰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몇 일 숙고 한 다음 확신이 섰을 때글을 쓴다. 고양이의 경도 마찬가지이다. 정반대의 번역이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있어서 여러 날 숙고 한 끝에 글을 쓴 것이다.

 

그럼에도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이는 정반대의 번역이기 때문에 충분히 반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글의 내용을 보면 그다지 숙고하지 않는 듯하다. 대부분의 댓글이 그렇듯이 즉흥적인 글쓰기가 대부분인 것 같다. 경이 있다면 경 전체를 읽어 보고 글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본문에 인용된 일부 문구로 판단하여 글을 쓴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럴 경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보통불자의 일상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하루가 시작 되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 글이 누군가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종 감사의 댓글을 받는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이야기만 듣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반론도 받기 때문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글을 올린다. 그럼에도 본문을 왜곡하는 댓글을 많이 본다. 또 가급적이면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기 보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를 함에도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해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받아 들이는 사람의 한계라 본다

 

 

 

2013-10-19

진흙속의연꽃